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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으로 뜨거워진 심령
    2002-10-16 11:53:34   read : 2745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누가복음 24:28-32 // 2002. 9. 29

    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하는 것같이 하시니 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워너브라더스사가 만든 '오 하나님'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오늘 본문괌 많은 연관성을 가지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가게에서 일하는 청년에게 나타나 자신의 대언자가 되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자기가 얼마나 바쁘고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더욱이 교회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임을 내세우며 자신은 적임자 아님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도 "나도 교회에 가 본적은 없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솔직한 말에 끌린 그 청년은 하나님의 대언자 노릇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탁대로 다음 주일에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설교하는 예배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리고 설교 도중에 일어나 목사가 거짓말만 하고 있다고 크게 소리지릅니다. 이로 인해 그는 고소를 당하고 모욕죄로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처음부터 믿고 체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청년은 심부름꾼의 모습으로, 거리 청소부의 모습으로 혹은 노인의 모습으로 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웃었습니다. 그러면 증인으로 데려오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이 청년은 그것은 무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소리 없이 법정의 문이 열리면서 하나님이 노인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면서 그 청년을 변호할 것을 약속하고 증언대에 서게 됩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차분하게 설명합니다. "모두 모여서 이 청년을 괴롭히고 있는데 사람을 재판하는 것은 나의 일 때문이 아니었던가요? 여러분들 하나 하나의 교만이 싸움과 증오의 세상을 만들고 있어요. 모두 이 청년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세상은 나빠지기만 합니다." 이러한 증언을 마치자 그 청년과 방청객들은 감동이 되었고 그 순간 노인 하나님은 법정에서 순식간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만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발소리와 문을 여닫는 소리만 남기고 법정을 떠났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고 청년의 말이 진실임이 밝혀졌습니다. 당연히 재판장은 그 청년에게 무죄를 선고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멧세지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 있을 만한 장소를 설정해 놓고 싶어합니다. 그리고는 그럴 만한 곳에 하나님을 억지로 밀어 넣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 좋아하는 때에, 좋아하는 방법으로 접촉하시는 분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계십니다. 사람이 그 분인 줄 알지 못하는 그 장소에 나타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잘못된 모습을 깨닫게 하며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그 영화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모습이 오늘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엠마오를 향하여 가는 두 제자들의 길동무로 나타나십니다. 십자가 처형으로 인해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하고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눈앞이 캄캄하여 막막한 마음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길동무로 예수님이 함께 하셨건만 그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분은 성경의 말씀들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깨닫질 못하였습니다. 오늘 말씀 32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분명 뜨거워졌는데도 그 당시에는 그것이 왜 그런지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24:16에 의하면,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인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미 우리 곁에 함께 계시는 데도 알지 못하고 살아가지는 않는가 말입니다. 아니면 영화에 등장한 목사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전혀 함께 하시지 않는데 하나님의 말씀인양 착각하고 자기의 소리를 외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엠마오의 제자처럼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대로 예수님이 모습을 만들고 그 속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날이 저물고 헤어질만한 때가 되자 그 제자들은 길동무를 그냥 보내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길동무가 되어 심심치 않게 여행을 할 수 있었던 일에 대한 보답일까요? 그래서 그와 함께 그들의 집에서 함께 지내자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순수한 인간적인 정으로 그러한 초청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이라도 없었다면, 그들은 그 다음에 올 은혜를 체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인격적인 초청을 하였기에 예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는 결과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함께’라는 단어가 세 번에 걸쳐 나타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도 누가복음의 저자는 이 단어를 통해 그 무엇인가를 전하려 하고 있습니다.
    먼저, 날이 어두워지자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은 길동무를 향하여 자신들과 함께 이 밤을 그들의 집에서 지내자고 하였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아주 강하게 초청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초청하였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만 해도 제자들은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두 번째 ‘함께’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초청을 받은 길동무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밤을 지내기 위하여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함께’라는 단어는 예수님과 두 제자가 함께 한 행동이었고 예수님은 수용적인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공동의 노력이 여기에 담겨져 있음에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로 ‘함께’라는 단어가 24:30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저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떡을 떼시고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실 때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식탁의 현장을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원래 함께 하기를 바랬던 주체는 두 제자요 그 대상은 예수님이었는데, 마지막에 결과를 보니 예수님이 오히려 함께 하시는 주체가 되고 두 제자는 대상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는 모든 것의 주도권이 우리 주님 예수님에게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는 임마누엘의 신앙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청하고 만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실제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 우리를 만나십니다. 여러분은 이와 연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어느 날 밤 한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었고 어두운 하늘을 가로질러 그의 삶의 장면들이 밝게 비쳐져 왔습니다. 그는 각 장면마다 모래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그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그가 살아온 삶의 마지막 장면이 그 앞에 펼쳐졌을 때 모래 위에 새겨진 발자국은 한 사람의 것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그의 삶 중에서 가장 힘들고 슬픈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실로 인해 그는 늘 가슴 아파했고, 그래서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면 주님은 항상 저와 함께하며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때는 왜 한 사람의 발자국만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어찌하여 주님은 저를 떠나 계셨습니까?" 그러자 주님은 속삭이셨습니다. "나의 귀한 자여, 나는 너를 사랑하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않을 거란다. 네가 가장 큰 시련과 어려움을 당한 그 때에도 결단코 떠나지 않았단다. 네가 한 사람의 발자국만 본 것은 내가 너를 안고 갔기 때문이란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주로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이 주도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힘들 때는 우리를 안고 걸어가고 계시는 데도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주님께 원망하고 살곤 합니다.
    지금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자신의 생활에 있어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는가 하는 점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 교우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주도권에 대한 최종적인 포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많이 확인합니다. 다 이론적으로는 머리로는 주님께 주도권을 드려야 함을 아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알면서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는 정말로 더욱 안타깝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행하는 모습은 또 다시 계속됩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끼친 영향에서 바로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축사하시고 떼어 주신 떡을 받아먹으니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앞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밝아졌다는 단어는 수동태로서 dienoixthesan 입니다. 그들의 눈이 바로 예수님의 허락으로 인해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영적인 눈이 열려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게 되는 것도 예수님의 도우심과 주도권이 없으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철저하게 예수님의 은혜에 의해 우리의 신앙의 눈도 떠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영적인 눈이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옳고 바르게 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낮에 예수님과 길동무를 하며 걸어갈 때도 알아보지 못하였던 그들이었습니다. 하물며 날이 어두워졌을 때 예수님을 더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제자들의 눈이 예수님이 주신 떡을 먹자마자 밝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소경되었던 자가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의 주도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도권을 가질 때 또 다른 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주님이 과거에 우리에게 말해 주신 교훈을 더욱 뼈저리게 알게 되고 우리 마음 속에 살아나게 됩니다. 이러한 해석은 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 32절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였느냐고 서로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 그들의 마음은 감동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말씀을 전하시는 분이 예수님임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모습입니까?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마틴 루터도 그가 영적인 눈을 새롭게 뜨게 됨을 체험한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중세 교회가 제시한 고행을 통한 구원방법과 고해성사와 신비주의적 구원방법을 거부하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절망적으로 구원을 구하던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자비로운 하나님이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임을 이해했습니다. 루터는 그 순간의 감동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즉시 다시 태어나서 열린 눈들을 통해 낙원 바로 그 자체에 들어온 느낌을 스스로 가졌다.” 얼마나 그 순간이 감동적이었으면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낙원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했으나 만족감이나 확실감이 없으신 분들이 있습니까? 아직 주님이 우리의 영안이 뜰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말씀으로 인한 감동을 심령 가운데 가지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까? 나의 이성과 판단으로 예수님을 믿으려는 자세 혹은 나의 생각에 따라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봅시다. 이러한 영적인 눈과 마음의 감동이 없을 때 우리는 마음에 미움으로 가득차고, 질투로 들끓게 되며, 오히려 증오로 뜨거워지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3:20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미 주님은 우리의 문 앞에 와 계십니다. 이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문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을 초청해 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행동이 약간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기로 결정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분은 우리와 함께 먹을 떡을 준비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들에게 그 떡을 준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미 말씀의 은혜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왜 우리가 맞이하지 않으려 합니까? 하늘의 잔치상을 준비하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분에게 주도권을 내어 드리는 삶을 산다면 그분은 진정 우리를 풍성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집시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우리 가운데 항상 함께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말씀으로 마음이 뜨겁게 하며 풍성한 은혜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삶을 궁극적으로 풍성하게 하십니다. 바로 오늘 여기에 앉아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요청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기도: 우리는 내일부터 시작되는 사경회를 통해 말씀의 잔치상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다음 주일에 있을 성찬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시며 말씀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 분이 온전히 우리와 함께 하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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