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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강해설교 작성법/ 전달
    2002-07-20 08:54:39   read : 4531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0- 강해설교 작성법/ 전달

    장두만 강서침례교회 담임목사,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교수


    우리는 지금까지 설교를 작성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논의해 왔다. 본문 선택과 중심 내용의 파악, 본문의 연구, 청중의 필요와 설교의 목적, 본론 전개 방식 결정과 아웃라인 작성, 적용, 보조 자료, 서론과 결론 등을 논의하느라고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내용> (설교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설교집을 발행한다든지 잡지나 신문에 문자화된 설교를 발표할 경우에는 좋은 설교 내용만으로 족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만드는 주된 이유는 강단에서 구두로 전파하기 위해서이다. <내용>은 <전달>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에 있어서 그 내용이 어떠하냐 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느냐 하는 것은 똑같이 중요하다.

    희랍의 유명한 웅변가였던 데모스데네스(Demosthenes; 384-322 B.C.)가 "웅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전달, 전달, 전달"이라고 답변했다. 설교에 있어서도 유사한 말을 할 수 있다. 해던 라빈슨(Haddon Robinson)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설교가 효과적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설교의 내용)와 함께 "어떻게 말할 것인가?"(=설교의 전달) 하는 문제가 바로 되어야만 한다.1) 설교자의 과제는 단지 진리를 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학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라면 참고서적을 조금만 뒤지면 그리 어렵지 않게 진리를 찾아 낼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진리를 전하되 "어떻게 전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들을 만한 내용이 없는 설교도 청중을 참기 어렵게 만들지만, 힘없는 전달은 더 참기 어렵게 만든다. 그런 설교는 청중에게 수면제 역할밖에는 못할 것이다. 전달이 시원치 않으면 청중은 내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전에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향이 있다. <내용>과 <전달>은 자전거의 두 바퀴와 같다. 어느 하나도 없거나 고장이 났을 경우 자전거는 자전거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그래서 먼로우(Alan Monroe)와 에닝거(Douglas Ehninger)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연설이 얼마나 효과적이냐 하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말하느냐 하는 것과 그것을 어떻게 말하느냐에 달려 있다. 좋은 내용이 없이는 전달할 만한 가치가 없을 것이요, 효과적인 전달이 없이는 당신의 생각을 분명하고 생생하게 남에게 전할 수 없다. 투수가 그 볼을 어떻게 던지느냐에 따라 볼의 방향과 속도가 정해지듯이 연설가는 그의 전달 방식에 따라 그의 연설의 힘과 활력이 정해진다.2)



    훌륭한 내용을 가진 설교도 전달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효과는 상당한 정도로 감소된다. 이와 반대로 내용은 그리 훌륭하지 못해도 효과적으로 잘 전달하면 기대 이상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설교는 훌륭한 내용과 함께 효과적인 전달, 이 두 가지를 다 갖춘 설교일 것이다. 머크라스키(James C. McCroskey)는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연설에서 좋은 증거를 사용하는 것이 설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한 논문에서("A Summary of Experimental Research on the Effects of Evidence in Persuasive Communication") 이렇게 결론 짓고 있다: "만일 메시지가 형편없이 전달된다면 좋은 증거를 포함하고 있더라도 청중의 태도 변화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3)

    설교에 있어서 전달이 그처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교자들은 이 분야를 너무나 경시하고 있다. 전달 능력은 마치 생득적(生得的) 능력이나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 설교자가 대부분인 것 같이 보인다. 설교의 내용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면서도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서는 전혀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전달과 내용은 상호 보완적이란 의미에서 함께 일한다" 4)는 것을 기억한다면 하나는 준비하고 다른 하나는 준비하지 않음으로 설교를 절름발이로 만드는 우(愚)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I. 전달에 있어서의 실패 이유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설교에 있어서 전달의 중요성은 설교의 내용에 못지 않은데 왜 그처럼 많은 설교자가 이 면에서 실패하고 있는가?

    로이드 페리(Lloyd M. Perry)가 지적하고 있는 여덟 가지 이유는 모든 설교자가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5)

    첫째 이유는 에세이(essay)와 연설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세이와 연설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면 양자는 다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에세이는 문자로 표현된 것이고 청중이 눈앞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 그 순간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연설에 있어서는 청중이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연설의 경우에는 비록 그 내용이 에세이와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청중이 관심을 갖고 경청하도록 하지 못한다면 실패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미리 작성해 온 설교문을 읽는 것이 곧 설교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차이에 대한 몰이해(沒理解)는 설교자에게 있어서 치명적이다.

    연설이나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실패하는 둘째 이유는 명백한 것만 주로 취급하려 하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셋째, 청중을 무시하려는 경향 때문이다. 청중과 함께 호흡을 같이 하면서 무엇인가를 나누려 하기보다는 청중이 듣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말해 버리려는 경향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전달에 있어서 실패하는 넷째 이유는 성취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 또는 목표가 설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 이유는 청중으로부터 너무 조급하게 많은 반응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기대하는 궁극적인 반응은 청중이 어떤 행동을 취하도록 하는 것인데, 이 반응을 얻는데 필요한 다른 요인은 무시하거나 경시한 채 최종 결과만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여섯째 이유는 설교자나 연설자가 자기 자신을 청중에게 주지 않기 때문이다. 메시지는 단순히 설교의 원고만을 읽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설교자의 열성, 신실함, 진지함 등이 함께 가야 하는데, 이런 면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원고 내용만을 청중에게 전해 주려 할 때 실패하게 된다.

    일곱째, 청중의 청취 능력이 설교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때 실패한다.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원리들을 기계적으로 인간 세계에 그대로 이식(移植)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실패한다. 청중은 기계가 아니라 인격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람을 감동시킨다는 것은 복합적인 요인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최선을 다해서 이런 요인들을 발견해 설교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이러한 실패의 원인을 잘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면 이전보다 훨씬 더 향상된 상태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청중을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II. 전달 훈련의 필요성



    어느 누구도 나면서부터 저절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본구적(本具的)으로 있지만, 그 능력을 계발 (啓發)하지 않으면 언어 습득 능력은 사장(死藏)되어 버리고 만다.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은 그 언어를 잘 구사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선천적 재능의 다소와는 관계없이 후천적인 훈련을 통해서 상당한 수준의 전달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설교자로서의 불후(不朽)의 명성을 남긴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의 경우를 보자. 그의 사역의 초기에 영국 런던에서 설교한 적이 있었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온 후 소문이 들려오기를 예배당에서 너댓줄 이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전혀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때부터 부적합한 음성에 의해서 설교가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속 전달 연습을 했고, 그것이 결국은 그를 교회사에 큰 족적(足跡)을 남길 정도의 대설교가로 만들어 주었다. 6)

    조지 트루엣(George W. Truett) 목사의 일화도 유명하다. 그는 어떤 공식적인 스피치 훈련 같은 것은 받은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음은 분명했고, 그의 전달은 효과적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처한 특수한 환경에 기인한다. 대평원에서 카우보이들에게 설교함으로 그는 음성을 개발했다. 또한 농아인 그의 동생과 대화하기 위해 입모양이나 발음을 분명히 해야 했기 때문에 좋은 스피치 훈련을 받은 셈이 되었던 것이다. 7)

    크롤(Woodrow M. Kroll)이 제시하고 있는 스피치 훈련의 세 가지 이유는 아무런 가감 없이 전달 훈련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8)

    첫째, 그것은 논리적 사고를 증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둘째, 그것은 복음 증거에 장애가 될 수도 있는 요인들을 제거할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효과적인 전달 방법을 공부하고 그것을 실제로 응용할 때 평범한 설교자가 탁월한 설교자로 바뀔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기본 원리를 습득하는 것은 교화적(敎化的)인 설교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요소라고 하겠다.



    III. 전달에 있어서 언어적 측면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전달에 있어서 실패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연설과 에세이의 구별의 실패, 즉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구별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설교는 설교자가 말하고 싶은 것을 다 기록해 놓은 원고도 아니고, 아웃라인도 아니다. 이런 것과는 달리 설교는 음성이나 표정이나 제스쳐(gestures) 등의 연속이다. 거기에는 단절이 있을 수 없다. 문자로 기록해 놓은 것은 다시 읽을 수도 있고, 중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교에선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설교자의 입에서 말이 나오는 그 순간 이해하지 못하면 끝나버리고 만다. 설교자는 자기 설교의 전체를 다 알고 있지만 청중은 한 부분밖에는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확한 전달을 위해서는 언어적 측면과 비언어적 측면이 있는데, 먼저 언어적 측면부터 고찰하도록 하겠다.



    A. 단어 선택의 문제(또는 표현 문제)



    설교는 문자 언어가 아니고 음성 언어이기 때문에 설교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에세이(essay)에서 사용하는 단어와 달라야 한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는 설교자는 좋은 설교자가 되기 위한 중요한 자격을 결(缺)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설교에서는 어떤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첫째, 평이한 단어를 사용하라.

    설교자는 설교시 지나치게 난삽(難澁)하고 현학적(衒學的)인 단어 사용은 피해야 한다. <-적 (的)>을 남발한다든지, 신학적-철학적 전문 용어를 연발한다든지, 고사성어(古事成語)를 계속 사용한다든지,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나 알아들을 만한 난해한 어휘를 상용(常用)한다든지 하는 것은 설교자의 어휘력 과시는 될지언정 청중의 설교 이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서고금의 철학과 사상에 통효(通曉)하여 고담준론(高談峻論)이나 명론탁설(名論卓說)을 강(講)해도 청중이 이해하지 못하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명한 침례교 설교자였던 스펄전(C.H.Spurgeon)이 말한 바와 같이, 시장(市場)의 사람들은 학문적 언어를 배울 수 없기 때문에 학문하는 사람들이 시장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어려운 단어를 쉽게 번역하는 것은 목사가 해야 할 숙제이지 성도들의 숙제는 아닌 것이다. 9) 웨슬리(John Wesley)는 가끔 자신의 설교를 무식한 하녀에게 읽어주면서,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나 구(句)를 내가 쓰거든 나를 중단시켜라"고 하면서 쉬운 용어를 사용하려고 애를 썼다.

    설교자는 평이한 단어를 쓰면서도 고상하고 세련된 표현을 하도록 열심히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세련되고 고상한 표현은 저절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에 되는 것도 아니다.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할 때 비로소 그것은 가능해지는 것이다.

    난삽한 단어를 의도적으로 남용하는 설교자들은 대개 자기의 어떤 부족한 면을 가리기 위해서, 말하자면, 심리적 <보상 행위>(compensation)의 일종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결격 사유가 있을 때 이를 은폐하여 유식하게 보이기 위해서 어려운 단어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설교자라고 해서 조잡(粗雜)한 표현만 써야 한다는 이유는 없다. 교육의 다소와는 상관없이 모든 설교자는 세련된 표현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어떤 부족한 면을 은폐하기 위해 어려운 단어를 남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둘째, 명쾌한 표현을 사용하라.

    독일의 무신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이체(Friedrich Nietzsche)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심오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명쾌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대중에게 심오하게 보이게 하고 싶은 사람은 애매모호하려고 노력한다." 해던 라빈슨(Haddon Robinson)이 자주 말하듯이, "강단에서 아지랑이가 끼면 회중석에서는 안개가 낀다"는 말을 모든 설교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10) 설교자는 자신을 심오하게 보이기 위해 설교하는 사람도 아니고, 진리를 숨기기 위해 설교하는 사람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이해해서 그들이 변화되게 하기 위해서 설교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해야 한다는 것은 설교자의 절대적인 의무이다.

    필자는 얼마전 어느 교회에서 주관하는 선교집회(mission conference)에 강사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주강사는 선교사로서의 경험도 풍부하고 학문적 수련도 제대로 된 훌륭한 분이었다. 그의 메시지는 상당히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그 강사가 선교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 학교를 다닐 때 어느 교수가 한 말을 설교의 서론으로 인용함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그것은, "당신은 우주적 중요성이 있느냐?" (Do you have universal significance?)는 질문이었다. 영어를 아는 분들은 공감하겠지만 "universal significance"라는 표현은 아주 애매하고 번역하기도 굉장히 까다로운 표현이다. 이 표현은 "우주적 중요성" "우주적 의의" "보편적 중요성 "보편적 의의"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는 게 한 가지 문제이고, 또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 어느 번역도 이 표현의 의미를 명쾌하게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설교 내내 필자는 그 표현을 뭐라고 하면 의미를 명쾌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후에 그 강사와 대화하면서 "당신이 사용하던 '우주적 중요성'이란 표현은 애매해서 의미 전달이 제대로 안되니 '범세계적인 영향력'(world-wide impact)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더니, 그 강사는 "그 표현이 훨씬 명쾌하다"고 한 적이 있었다.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이해되지 않는 애매한 표현은 설교 용어로서는 마땅히 지양(止揚)되어야 한다.

    전(前) 미국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의 체험을 통해서 명쾌한 단어의 사용이 설교자나 연설가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 수 있다.



    나의 아버지는 지적인 활력이 넘치는 분이셨다. 나의 최상의 훈련은 나의 아버지로부터 왔다. 그는 애매한 표현을 전혀 용납하지 않으셨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1903년 아버지가 타계(他界)하실 때까지--그 때 그는 81세의 고령이셨다--나는 내가 쓴 모든 것을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내가 일일이 그것을 큰 소리로 읽도록 하셨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항상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수시로 나를 중단시키시면서,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셨다. "그러면 왜 그렇게 표현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시곤 했다. "참새 한 마리를 쏠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라 전체를 쏘지 말아라. 내가 말해야 할 그것을 향해 정확하게 겨냥하라." 11)



    셋째, 문장의 길이를 가능하면 짧게 하라.

    설교는 음성언어이기 때문에 듣는 순간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긴 문장,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문장은 피하고 가능하면 간결한 문장을 사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추상적이고 애매한 말은 긴 문장으로 표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가능하면 짧은 문장을 통해서 청중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 문장에서 사용된 단어의 수와 문장의 난이도(難易度)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플레쉬(Rudolf Flesch)의 연구는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 크다고 하겠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도표화하고 있다. 12)



    8개 단어 이하 아주 쉽다

    11개 단어 쉽다

    14개 단어 비교적 쉽다

    17개 단어 표준

    21개 단어 비교적 어렵다

    25개 단어 어렵다

    29개 단어 이상 아주 어렵다



    이 도표에 의하면 한 문장에서 사용하는 단어의 수는 17개 단어 이내로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넷째, 구체적 표현을 사용하라.

    추상화(抽象化)라는 것은 자세한 부분들을 생략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지도는 어느 지역을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지도 제작 목적에 맞는 내용만 포함하고 나머지는 다 제외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된 몇 가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추상화(抽象化)의 과정이란 것도 우리에게 있어서 지도와 마찬가지다. 유용하기는 하지만 많은 제약이 있다. 그것은 마치 비누거품 같아서 우리 앞에서 조금 떠돌다가 손에 잡으려고 하면 터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13) 문장 표현에 있어서 사용되는 단어가 추상적이면 추상적일수록 그 표현은 오해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릿핀(Duane Litfin)은 추상적 단어와 연관하여 다음과 같은 원리를 제시한다: "단어가 추상적이면 추상적일수록 그 단어는 재미가 없고 기억하기도 어려워진다" 14)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가능하면 구체적인 표현을 사용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예를 들면, 부엌에 놓아두었던 고기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 코를 막아야 할 정도로 역겹다면 옆에서 궁금해하는 어린 아들에게 뭐라고 설명하겠는가? "새로운 화학적 물질을 형성하기 위해서 고기의 성분이 분해되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할 것인가? 이렇게 말하면 어린 아이가 알아듣겠는가? "고기가 썩었어!"라고 표현한다면 어느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근거해서 우리의 견해와 판단을 형성한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생각한다"라는 표현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 또 하나를 더 보자. "성서적, 신학적 지식의 결여는 신앙 성장 과정에 있어서 중대한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는 표현보다는 "성경을 잘 모르면 신앙이 자라기 어렵다"라고 하는 표현이 훨씬 이해하기 쉽고 구체적인 표현이다.

    다음의 두 가지 대비(對比)를 통해서 추상적인 표현과 구체적인 표현의 차이점을 좀더 자세히 보도록 하자.



    추상적 구체적



    더러운 동물 돼지

    위대한 영국 시인 밀턴(John Milton)

    몇몇 사람 다섯 명의 우주인

    오래 전에 1840년 5월 3일

    많은 외제차 72%에 달하는 벤츠와 렉서스와 BMW

    가까운 장래에 2주 후에

    약간의 채소 홍당무, 시금치 및 배추

    많은 꽃 200여 송이의 장미와 40여 송이의 튜울립





    다섯째,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하라.

    감각적인 단어는 우리의 오감(五感) 가운데 어느 하나에 어필(appeal) 하는 단어인데, 이런 단어는 그렇지 않은 단어에 비해서 훨씬 강하고 생생한 느낌을 준다. 감각적인 표현은 단어 그 자체를 통해서 나타낼 수도 있고, 의성어(擬聲語)나 의태어(擬態語)의 사용을 통해서 나타낼 수도 있고, 은유법이나 직유법 같은 수사법을 통해서 나타낼 수도 있다. 랠프 루이스(Ralph Lewis)의 연구에 의하면, 호세아서에서는 600여 개 이상의 감각적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각과 관련된 표현이 98개, 청각과 관련된 것이 46개, 미각과 관련된 것이 55개, 후각과 관련된 것이 6개, 촉각과 관련된 것이 34개, 근육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 129개, 내적 심상(心像, internal images)과 관련된 것이 234개에 달한다는 것이다. 15)

    감각적인 표현은 성경에서는 물론 위대한 문학 작품이나 일상적 언어 생활에서도 다반사(茶飯事)로 사용되고 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공든 탑이 무너지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같은 속담들이 모두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유치환의 「깃발」에서) 이라든지 "어느 먼---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눈이 나려 /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여 / 마음 허공에 등불을 키고 / 내 홀로 밤 깊이 뜰에 나리면 /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김광균의 「雪夜」에서) 같은 것도 모두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문장의 경우에도 감각적인 표현이 효과적이라는 데에는 재론(再論)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면, "그가 길을 가고 있었다"는 표현보다는 "그는 비틀비틀 거리면서 걷고 있었다" 라든지 "그는 어슬렁거리며 길을 가고 있었다"라든지 "그는 미친듯이 빠른 걸음으로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는 표현이 훨씬 더 감각적인 표현이다.

    직유법이나 다른 사물과 비교하는 표현도 좋은 감각적 표현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말씀과 기도에 게을러지면 우리의 심령은 건조해진다"는 표현보다는 "말씀과 기도에 게을러지면 우리 심령은 메마른 사막같이 생명 없는 불모지로 변한다"는 것이 더 낫다. 박목월(朴木月)의 시 「나그네」는 직유법과 감각적인 표현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고 있는 경우에 속한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효과적인 언어 사용은 생득적(生得的)인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 계발(啓發)될 수 있는 후천적인 능력이다. 철학적인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아 프리오리'(a priori)한 것이 아니라 '아 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한 것이다. 그러면 설교자로서 어떻게 하면 이 면에서 진보를 가져올 수 있을까? 다음의 몇 가지 제언(提言)은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1) 자신의 언어 사용 습관을 점검해 보라. 16)

    나 자신이 사용하는 문장은 짧은가, 긴가? 단문인가, 복문인가? 어휘는 대학의 국문과 출신이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인가, 아니면 초등학교 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평이한가? 문장의 표현 방식은 복잡한가, 단순한가?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 문체(style)에 대해서 이런 종류의 질문을 던지며 비판적으로 자신의 설교를 대한다면 분명한 향상이 있을 것이다.

    (2) 다른 사람의 문체를 주의해서 보라. 17)

    좋은 수필집, 문학 작품, 다른 설교자의 설교집 등을 읽을 때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표현에 유의를 하면서 읽고, 또 읽다가 효과적인 표현이 나오면 그것이 왜 효과적인지를 연구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표현들을 깊이 연구해서 그 이유를 발견하여, 동일한 원리를 사용하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표현 자체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3) 설교를 기록하라. 18)

    설교는 문자로 기록된 원고를 읽는 것이 아니다. 설교 전달 방식으로는 원고낭독형이나 다른 방식보다 아웃라인형이 가장 좋다. 그러나 단어 사용이나 문장의 표현에 문제가 있거나 자신이 없는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써 보는 것이 좋다. 이런 방법은 특별히 설교 경험이 없는 초보자에게 권장을 하고 싶다. 물론 이 방법을 통해서 언어 구사에 상당한 자신을 갖게 되면 설교문을 완전히 작성하는 대신 처음부터 아웃라인식으로 작성해 설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B. 음성 사용 문제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단어 선택 문제와 함께 선택된 단어와 문장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1) 고저(pitch)

    전달에 있어서 피해야 될 최대의 금기(禁忌)는 <단조로움> (monotony)이다. 낮은 음성으로만 계속 설교한다든지, 아니면 반대로 높은 음성으로만 계속 설교하는 것은 전달에 있어서의 최대의 적이다. 설교자는 청중이 설교 중에 졸지 않게 하려면 음성의 고저를 변화무쌍하게 사용해야 한다. 설교할 때마다 졸음과의 전쟁을 벌여야 하는 설교자라면 결코 효과적인 설교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속삭이듯이 낮게, 어떤 경우에는 맹수가 포효하듯이 사자후(獅子吼)를 토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자연스런 대화식으로 다양하게 해야 된다. 위대한 설교자치고 음성의 고저를 다양하게 사용하지 않는 설교자는 없다.

    낮은 음성만으로 설교한다든지 높은 음성만으로 설교한다든지 하는 것과 꼭 같은 정도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동일한 패턴(pattern)을 반복하는 것이다. 음성의 고저가 있기는 분명히 있는데 똑 같은 패턴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123454321-123454321같은 식이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면 리듬이 생기게 되고, 리듬이 생기게 되면 그것은 음악으로 변하고, 음악은 청중을 잠재우는 자장가가 된다.

    설교자는 그 음성이 고저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하게 사용해야 된다. 필요하다면 갑자기 높이고, 또 필요하면 갑자기 낮추어야지 그 변화에 일정한 패턴이 있어서는 안 된다.



    (2) 속도 (rate)

    음성의 고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은 음성의 속도이다. 말은 너무 빨리 해도 안 되고, 너무 느리게 해도 안 된다. 너무 빨리 말하면 청중이 제대로 따라오기 어렵고, 너무 느리게 말하면 박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말의 속도는 전달하려는 설교의 내용이나 설교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대부분의 청중은 1분에 약 500단어 정도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한 속도로 말을 들을 때에는 듣는 내용을 다 소화시킬 수가 없다. 설교나 연설에서 정상적인 속도는 1분에 120단어에서 170단어 정도의 속도로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설교 내내 고정불변이라는 뜻은 아니다. 설교의 내용이 고조되면 말의 속도도 빨라져야 한다. 또한 어떤 내용을 특별히 강조하고자 할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출 수도 있다. 설교자는 설교가 끝날 때까지 항상 동일한 속도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변화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청중은 전달시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전달은 그만큼 효과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음성의 속도를 변화시키면 여러 가지 유익이 있다.19)

    첫째, 설교자가 전하려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둘째, 그것은 독서시의 구둣점과 같은 역할을 해서 청중이 설교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그것은 한 가지 내용에서 다른 내용으로의 전이(轉移)를 용이하게 해 준다.

    넷째, 그것은 중요한 개념을 강조해 준다.

    다섯째, 그것은 청중의 관심을 끌게 해 준다.



    (3)강약(volume)

    설교자의 음성의 크기는 대개 세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20) 첫째는 음성을 내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힘을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설교자와 청중의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고, 셋째는 설교하는 환경이 어떠하냐, 즉 설교를 방해하는 요소(예: 잡음, 어린 아이의 울음 소리 등)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예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소리로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설교의 내용에 따라서 수시로 바뀌어야지 설교 내내 항상 불변한다면 청중은 쉽게 지치고 말 것이다.



    (4) 휴지(休止; pause)

    설교에 있어서 휴지라는 것은 '어' 또는 '에'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설교를 머뭇머뭇 거리면서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21) 설교에 있어서의 휴지는 말이 막혀서 쉬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잠깐 쉬는 것이다. 그것은 음성 변화와 마찬가지로 문장에서의 구둣점과 같은 역할을 한다. 먼로우(Alan H. Monroe)와 에닝거(Douglas Ehninger)는 휴지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휴지는 사고(思考)에 구둣점을 찍는다. 쉼표나 세미콜론이나 마침표가 문장의 단어들을 사고 단위로 분리시키듯이 상이한 길이의 휴지는 연설의 단어들을 의미 단위로 분리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연설을 할 때나 원고를 읽을 때 휴지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인쇄물에서 잘못된 구둣점을 사용함으로 독자들에게 가져다주는 혼란과 같은 혼란을 청중에게 가져다준다. 22)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가 휴지를 사용할 때에는 하나의 사고 단위가 끝난 다음에 해야 할 것이다. 문장의 중간에나 어떤 논리를 한창 전개해 나가는 도중에 그렇게 하면 그것은 혼란만 가중시키고 청중의 의혹만 받게 된다. 때아닌 휴지는 청중으로 하여금 설교자가 할 말을 잊어버리지나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할지언정 유익은 되지 않는다.

    휴지는 종종 강조를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 어떤 중요한 진리를 선포한 직후에 잠시 설교를 중지하고 쉬는 것은 "내가 방금 한 말을 잘 생각해 보시오"하는 의미가 될 것이다. 어떤 예화를 들려주기 직전에 잠깐 쉬는 것은 청중으로 하여금 예화에 더 큰 기대를 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설교를 잠깐 중단하고 쉬는 것은 어떤 강력한 언어보다도 설교자의 감정이나 의향을 더 잘 표현해 준다.

    설교자는 절대로 휴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잠깐 쉬면 다음에 할 말을 잊어 버릴까봐, 아니면 그 사이에 청중이 설교자에게 너무 시선을 집중할까봐 두려워서 쉬는 동안에도 '어' '음' '에' 같은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휴지의 목적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마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잠깐 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 또 쉴 때는 완전히 쉬어야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5) 기타

    언어적 측면과 관련되어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고저, 강약, 속도, 휴지의 어느 범주에도 포함시키기 어려운 면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설교자는 전달할 때 열정(enthusiasm)이 있어야 한다.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설교를 계속해서 고성으로만 하라는 말이 아니다. 설교자는 자기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확신이 있어야 되고, 그 확신이 음성으로 분명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열정이 없는 설교는 청중은커녕 설교자 자신도 감동시키지 못할 것이다. 설교자가 불타면 청중은 불 구경하러 모일 것이다.

    둘째, 설교자는 문장의 끝을 너무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어떤 설교자들은 습관적으로 각 문장의 끝을 너무 떨어뜨려서 아예 입 밖으로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삼켜 버리는 경우가 있다. 각 문장의 끝을 떨어뜨리지 않거나 높이는 것도 어색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떨어뜨려서 귀에 들리지도 않게 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각 단어를 정확하게 발음하고, 또 그 끝을 적당히 낮추어서 청중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셋째, 설교자는 비어(鄙語)를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강단에서 욕설이나 저속한 표현을 마구 남발하는 것은 청중에 대한 모독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교육을 어느 정도 받아서 교양이 있는 청중이라면 비어를 마구 쓰는 설교자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과 일본 사람을 아무리 증오하더라도 강단에서 이들을 지칭할 때 '왜놈'이라고 하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놈...' '...년' '...새끼' 같은 용어도 설교자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될 것이다.

    넷째, 가능하면 문법에 맞는 표현을 쓰도록 해야 한다.

    물론 원고 낭독형의 설교가 아닌 다음에야 문법적으로 완벽한 설교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문법적으로도 흠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은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평소에 문장 수련이 잘 되어 있으면 실제 설교할 때에도 임기응변하는 능력이 탁월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섯째, 원어의 사용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신학교에서 한두 학기 배운 원어 실력 가지고는 그리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원어를 제대로 모르면서 청중에게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꼭 필요한 경우라면 원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웬만한 경우라면 "이 단어는 원어에서 ....라는 의미입니다"라든지 "이 구절을 원문에 좀더 충실하게 번역한다면....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라는 식의 간접적 사용이 바람직할 것이다.

    여섯째, 사투리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서울, 경기도, 충정도, 강원도는 전반적으로 표준어권에 속하는 지역이다. 그러나 특히 영남 출신과 호남 출신은 사투리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 영남 사람들은 서부 경남 사람들 외에는 쌍시옷을 발음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필자도 포항과 부산에서 살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쌍시옷을 발음하지 못했다. 필자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쌍시옷을 발음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필자의 주위에는 쌍시옷을 발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고2 때 독일어를 배우면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라디오에 나오는 아나운서의 표준 발음을 따라서 수년간 연습을 했다. 끈질긴 연습의 결과 지금은 쌍시옷을 제대로 발음할 수 있다. 영남 사람은 <으>와 <어>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또 서부 경남 출신들은 중모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확신'을 '학신'으로 발음하고, '위대하다'를 '이대하다'로, '경쟁'을 '갱쟁'으로 발음한다. "강원도의 관광사업을 진작시킨다"는 말을 "강언도의 강강사업을 진작시킨다"는 식으로 발음하는 경향이 강하다.

    호남 출신은 <예>를 <에>로 발음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예배'를 '에배'로, '예산안'을 '에산안'으로 발음하기도 하고, 소유격 조사 <의>를 <으>로 발음하는 사람도 많다. 또 조사 <과>를 경음화해서 <꽈>로 발음하는 경향이 많다. 또 일부 호남 사람들은 격음화 현상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적합하다'는 격음화 현상에 따라 '저-캅-하-다'는 식으로 발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갑-하-다'와 같이 발음하기도 한다.

    표준어권에 속하는 사람도 가끔 사투리를 쓰는 경향이 있다. '겁이 많다'를 '겂이 많다'라고 하는 사람이 상당히 있다. '손을 씻는다'라고 말해야 할 경우에 '손을 닦는다'라고 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다. 손을 물에 씻고, 수건으로 닦아야지 물에 손을 닦는 것은 아니다.

    사투리는 아니지만 어법에 맞지 않는 발음을 하는 경향은 출신 지역과 상관없이 널리 퍼져 있다. <잊다>와 <잃다>를 구별하지 못하는 설교자,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너무 많다. <낫><낮><낯>이나 <빗><빚><빛>도 제대로 구별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빛이 있으니'는 '비시 이쓰니'로 발음해서는 안 된다. '비치 이쓰니'로 발음해야 연음법칙에 맞는 발음이 된다. '무릎을 꿇고'는 '무르블 꿀고'로 발음해서는 안되고 '무르플 꿀코'라고 발음해야 연음법칙과 격음화 현상을 제대로 따른 발음이 된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사'는 '흐그로 사라믈 비즈사'가 아니라 '흘그로 사라믈 비즈사'라고 해야 연음법칙에 맞다. 설교자는 국어 순화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영어나 외국어를 공부할 때에는 철자나 발음에 굉장히 신경을 쓰면서 왜 우리가 평생 사용하는 국어에는 무관심한가? 자기 나라말을 어법에 맞지도 않게 마구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효과적인 음성 사용에 관심이 있는 설교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목사의 사모가 좋은 비평자 역할을 할 수 있겠지만 누구나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설교를 녹음해서 직접 들어보는 것이다. 몇 개월 동안만 자신의 설교를 비판적으로 들어보고 개선하겠다고 결심하고 이를 실천하면 음성의 사용은 물론 설교 전체가 휠씬 개선될 것이다.



    Ⅱ. 전달에 있어서의 비언어적 측면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언어 외적(言語外的) 측면은 언어적 측면 못지 않게 중요하다. 설교자는 양자 모두를 통해서 그의 의사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홀(Edward Hall)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언어로 무엇인가를 말하는 이외에 소리 없는 언어, 즉 행동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부단히 우리의 진짜 감정을 전달한다" 23)

    설교자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강단에 올라설 때 그의 몸과 함께 서게 되고, 그 몸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큰 자산이 될 수도 있고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언어와 함께 설교자의 행동 하나 하나가 의미 전달에 매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달에 있어서 비언어적 측면의 중요성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다. 설교자의 얼굴 표정이 어떠한지, 설교자가 손이나 팔, 머리 같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청중은 그 속에 포함된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읽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면 설교는 가일충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언어 외적인 요소로서 설교의 전달과 관계 있는 것들로는 복장 및 외모, 몸과 손의 움직임, 눈의 사용 등이 있다.



    A. 복장 및 외모 (dress and appearance)



    밀즈(G. R. Mills)와 애런슨(Elliot Aronson)은 연설가의 복장 및 외모가 연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했다. 그들은 한 젊은 여인을 대학의 여러 클래스에 나타나게 해서 어떤 의견을 개진하도록 사전에 계획을 세웠다. 수업이 시작되면 강사는 학생들에게 교양 교육과 직업 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이 어떠한가를 조사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면서 설문서를 배부하고 여러 질문에 응답할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이 때 강사는, 학생들이 질문에 답변을 하기 전에 어떤 자원자가 나와서 이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응답한 후에 학생 각자가 자기의 설문서에 답변을 하면 좋겠다고 했다. 물론 자원자 가운데는 그 젊은 여인이 포함되어 있었고 강사는 그 여인을 지명해서 교양 교육과 직업 교육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라고 부탁했다. 똑같은 방식의 실험이 여러 클래스에서 전개되었다.

    그런데 몇몇 클래스에서는 그 젊은 여인이 아주 말쑥하고 매력적인 옷차림, 잘 어울리는 화장과 헤어스타일을 한 모습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게 했고, 다른 몇몇 클래스에서는 똑같은 내용의 의견을 개진하게 하되 옷은 초라하고, 화장은 도무지 잘 어울리지도 않고, 머리는 헝클어진 모습으로 하게 했다. 학생들이 받은 설문서는 어떤 클래스든 간에 다 동일했고, 또 그 여인이 개진한 의견도 동일했지만 매력적인 모습으로 의견을 개진한 경우 학생들은 연설가의 의견에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휠씬 더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24)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복장이나 외모를 단정하게 하고서 강단에 서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자가 최첨단 유행을 따라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25) 설교자가 너무 유행에 민감하면 경박하다는 인상을 주고, 너무 유행에 뒤지면 시대에 뒤져 있다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설교자는 중용을 취해야 할 것이다.

    복장 및 외모에 관련해서 주의해야 될 것은 이것이 장소나 분위기와 잘 조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 예배 같은 경우에는 물론 정장을 해야 되겠지만 한 여름의 야외 캠프 같은 데서는 오히려 평상복 차림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머리나 구두는 제대로 손질이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B. 몸과 손의 움직임(body movement and gestures)



    설교자는 제스처를 통해서 여러 가지 언어외적 의미를 청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검지(檢指)는 무엇을 지적하거나 방향을 보여줄 때 사용하고, 손바닥을 위로 한 모습은 무엇을 받거나 줄 때, 손을 세워서 좌우로 흔드는 것은 거절할 때, 주먹을 쥐는 것은 무엇을 특히 강조할 때, 양손을 세워서 손등을 서로 엇갈리게 하는 것은 적대 관계에 있을 때, 그리고 세워서 마주 붙인 손등을 떼는 것을 헤어지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

    이 이외에도 무엇을 묘사할 때 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어떤 물건이 사각형이면 손이나 손가락 몇 개를 써서 사각형을 그리고, 삼각형이면 삼각형을 그려 보임으로 그 물건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밖에도 필요에 따라 설교자는 손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효과적인 제스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26)

    첫째 그것은 자연스럽다.

    인위적으로 계획을 세워서 나오는 제스처는 어색하다. 자연스럽게 몸에 밴 대로 제스처를 사용해야 한다.

    둘째, 그것은 다양하다.

    어느 한 종류의 제스처만 계속 사용하는 것은 보는 사람을 민망하게 한다. 설교 내용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제스처를 사용해야 한다.

    셋째, 그것은 시의(時宜)에 적절하다.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제스처를 사용해야지 시기를 놓치면 아무리 좋은 제스처도 무용지물이다.

    넷째, 그것은 청중의 규모와 조화를 이룬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소규모의 청중 앞에서는 제스처의 크기가 작다. 그러나 대규모의 청중 앞에서는 크게 해야 격에 맞을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많은 청중 앞에서 제스처를 아주 작게, 그리고 반대로 소규모의 청중 앞에서 제스처를 크게 하면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이다.

    다섯째, 좋은 제스처는 분명하다.

    제스처를 사용하는 것인지 아닌지 엉거주춤한 상태가 아니라 분명하다.

    손의 사용과 함께 몸의 움직임도 적절해야 한다. 동상이나 조작품같이 한 자리에 부동 자세로 뻣뻣하게 서 있는 것은 어색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강단이 좁다 하고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체신머리 없게 보인다. 필요한 때마다 적절하고도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야 한다.

    손이나 몸의 움직임 이외에 얼굴 표정도 중요하다. 설교자가 영화 배우나 연극 배우같이 될 필요는 없겠지만, 효과적인 설교의 전달을 위해서 배우의 표정을 어느 정도 빌어 오는 것은 크게 해로울 것이 없다. 슬플 때는 슬픈 표정을, 기쁠 때는 기쁜 표정을, 화났을 때에는 노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감정의 발로이다. 설교의 내용에 맞게 얼굴 표정도 변화되어야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면 너무 엄숙하고 무서운 표정보다는 온화하게 웃는 듯한 표정을 짓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계속 애쓰다 보면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C. 눈의 접촉(eye contact)



    우리의 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비언어적 전달(non-verbal communication)의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이다. 일찍이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Cicero)는 이렇게 말했다: "전달에 있어서 음성 다음으로 그 효과면에서 중요한 것은 얼굴 표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눈에 의해서 좌우된다." 남의 시선을 피한다든지, 계속 노려본다든지, 머뭇머뭇하면서 남을 쳐다본다든지 하는 것 모두가 다 무엇인가를 전달해 준다.

    심리학자 메라비안(Albert Mehrabian)은 설교의 총체적 효과는 7%의 단어와 38%의 음성과 55%의 얼굴로 되어 있다고 했다. 설교에서 청중과의 눈의 접촉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필자는 설교할 때 전체 시간의 90% 이상을 청중에게 향하고, 오직 10% 미만을 원고를 보는데 사용하라고 권하고 싶다.

    설교에 있어서 원고에 있는 대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보다 청중에게 시선이 향해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원고에 푹 파묻혀서 그것을 전달하는 데에만 급급하고 청중의 반응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설교자는 크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청중을 직시해야 한다. 어떤 설교자는 그 시선이 거의 원고에만 고정되어 있고, 어떤 설교자는 교회당 벽만 쳐다보기도 하고, 어떤 설교자는 교회당 천장만 바라보기도 하는데, 모두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청중을 직시해야 하지만 어느 한 곳만 계속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때로는 왼편으로, 때로는 중앙으로, 때로는 우편으로 시선을 골고루 주어야지, 그렇지 않고 어느 한 쪽만 바라보면 시선을 전혀 받지 못한 청중은 소외감을 느낄 것이다.

    설교할 때 설교자의 시선이 청중을 향해 있지 않으면 청중은 다음의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로 설교자를 송사할 것이다. 27)

    첫째, 청중은 설교자가 상당히 부정적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환언하면, 설교자는 청중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둘째, 설교자가 겁장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청중을 두려워하고, 설교에 자신이 없이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셋째, 설교자가 설교에 별관심이 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원고만 다 읽고 끝내는 데 관심이 있지 어떤 진리를 전달해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설교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청중이 가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청중과 눈 접촉을 많이 갖기 위해서 설교의 내용을 완전히 숙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Ⅲ. 전달의 방식 (methods of delivery)



    설교를 어떻게 청중에게 전달하느냐 하는 방식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설교자는 그 취향이나 역량에 따라 자기 스타일에 가장 적합한 방식을 사용해야 할 것이지만, 문제가 많은 방식을 사용하는 설교자는 그것을 개선하도록 노력을 많이 해야 될 것이다.



    A. 원고 낭독형 (reading method)



    이 방식은 서론에서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설교 내용 전체를 다 기록해서 이것을 설교 시간에 청중에게 읽어주는 방법이다.

    이 방식은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이 방식은 설교자에게 안도감을 준다. 28)

    해야 할 설교를 앞에 둔 설교자 치고 일말(一抹)의 불안감이 없는 설교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원고 낭독형의 설교를 하면 설교하기 전이나 하는 동안에 불안감은 거의 갖지 않게 된다. 아마 이런 유형의 전달 방식을 사용하는 설교자는 토요일 밤에 편안히 잠을 잘 수 있게 될 것이다.

    둘째, 이 방식은 설교자가 전하려는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게 해 준다. 29)

    설교 내용 전체를 문자로 다 기록하기 때문에 설교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하나도 틀림없이 다 전할 수 있고, 설교의 길이도 미리 다 정해 놓을 수가 있다.

    셋째, 이 방식은 설교자에게 좋은 훈련이 된다. 30)

    원고를 계속 쓰는 것은 설교자로 하여금 충분히 준비하게 하고, 또 글을 씀으로써 설교자 자신에게 큰 훈련이 된다.

    넷째, 이 방식은 설교 원고가 그대로 남아 있게 되므로 후일에 설교집을 출판할 때나 다른 데 설교를 기고할 때 특별히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잇점이 있다. 31)

    원고 낭독형의 설교는 위에서 열거한 장점에 비해 그 단점이 너무 크기 때문에 별로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첫째, 이 방식은 설교자로 하여금 원고에 집착하게 되므로 청중에게 시선을 주기도 어렵고, 청중의 반응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어렵다. 32) 이 방법에 매여 있는 설교자는 하우(Reuel Howe)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관계가 원고보다 더 중요하다. 왜냐 하면 복음 자체가 관계 문제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원고의 전달이 아니라 만남이다." 33)

    원고를 보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원고를 보고 읽어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원고 낭독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설교자의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원고 낭독형의 설교를 하는 설교자는 어쩌다가 한 번씩 원고에서 눈을 떼 청중을 바라볼 뿐 -- 더군다나 그것도 아무 촛점도 없이 -- 설교 시간의 대부분은 원고에 매여 거기서 꼼짝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되면 설교자와 청중은 거리감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설교가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어렵다.

    둘째, 이 방식은 청중에게 설교자에 대한 불신감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설교자가 원고에 얽매여서 꼼짝을 못하면, 설교자가 제대로 준비도 하지 않고서 남의 설교를 베껴서 하는구나, 설교를 제대로 소화시키지도 못한 채 하는구나 하는 불신감을 청중에게 심어줄 가능성이 많다.

    셋째, 이 방식은 전반적인 전달 효과에 있어서 다른 방식보다 덜 효과적이다.

    이 방식은 엄밀히 말하면 설교라기보다는 글을 읽는 것이기 때문에 낭독에 아무리 숙달되어 있다 해도 눈의 접촉 부재, 제스처 부재, 낭독으로 인해 오는 부자연스러움, 읽을 곳을 제대로 찾지 못함으로 인해 야기되는 설교의 중단 등의 문제점을 피할 길이 없다.

    넷째, 이 방식은 성령이 특별히 역사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

    설교자가 아무리 준비를 해도 실제로 설교를 하다 보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설교 준비시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게 하실 수 있다. 그런데 원고 낭독형은 이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방법은 별로 권장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꼭 이 방법을 사용하려거든 많은 연습을 통해 그 단점을 극복하고 난 다음에나 할 것이다.



    B. 암기형(memorization method)



    이 방법은 원고 낭독형보다는 진일보했다고 하겠다. 이 방법으로 설교하는 설교자는 먼저 원고를 완전히 준비한 다음에 그것을 암기해서 설교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첫째, 이 방법은, 원고 낭독형과 마찬가지로, 설교자가 전하려는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게 해 주고, 설교자에게 좋은 훈련이 되고, 원고를 후일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기에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 외에도 암기형은 원고 낭독형이 갖지 못하는 장점이 있다.

    둘째, 이 방식은 원고를 다 암기하기 때문에 원고에 얽매이지 않게 되고, 따라서 눈의 접촉이나 제스처 같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34)

    셋째, 이 방식은 청중에게 설교자의 표현이 아주 미려하고 세련되어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35)

    그러나 이 방식은 장점을 훨씬 능가하는 단점도 있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 이 방식은 설교자의 귀중한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아 간다. 36) 어느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설교자는 일주일에도 여러 번 설교를 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설교를 일일이 다 암기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불필요한데 허비하는 결과가 되겠는가!

    둘째, 이 방식은 암기한 것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염려 때문에 신경 과민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37)

    셋째, 이 방식은 자연스럽지 못한 가능성이 많다. 38) 그냥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에 비해서 암기한 것은 아무래도 인위적이고 암기해서 전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가능성이 많다.

    넷째, 이 방식은 원고 낭독형과 마찬가지로 설교하는 도중에 성령께서 특별히 역사하셔서 미리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경우 그것을 처리할 적절한 방법이 없다. 39)

    이러한 심각한 단점 때문에 암기형의 설교는 별로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설교 경험이 별로 없는 초보자들이 설교를 배우는 단계에서는 이 방법으로 시작해서 설교에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게 되면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바꾸는 것도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 처음에는 암기형의 설교 방식을 취했다. 우리말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로 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말로 하는 설교같이 표현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원고를 영어로 다 작성한 다음에 이것을 암기해서 여러 번 연습을 한 후 설교 시간에 그대로 했다. 이 방법이 그대로 주효(奏效)해서인지 교수와 학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결국은 학교내의 설교 대회에 출전해 입상했던 경험까지도 있다.

    그러나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는 암기하지 않고 설교 아웃라인만 가지고 하는 방식으로 바꾸었고, 지금은 영어 설교나 우리말 설교나 모두 아웃라인만 가지고 설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C. 즉석형(impromptu method)



    이 방식은 설교자가 사전에 특별한 준비도 없이 즉석해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설교하는 방식이다.

    설교자는 어떤 부득이한 경우에 사전에 준비하지도 못한 채 설교해야만 될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설교자가 평소에도 이런 방식으로 설교한다면 그는 일찌감치 설교를 그만두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나 성도들을 위해서 유익할 것이다. 이러한 설교를 계속해서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충(不忠)이요, 자신과 성도들에 대한 기만이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점점 성장해 감에 따라 열두 사도는 구제하는 일 때문에 사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주력을 못하게 되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행 6:2)라고 하면서 일곱 사람을 택해 그들에게 세상일을 맡기고 사도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 했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사도들도 세상일을 제쳐놓고 말씀 전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했다면 오늘날의 설교자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말씀 준비하는 일에 게을러서 준비 없이 설교하는 설교자는 설교자로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D. 아웃라인형(outline method, or extemporaneous method)



    이 방식은 원고 낭독형이나 암기형과 마찬가지로 사전에 충분히 준비를 하지만, 설교 내용을 완전히 다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하고자 하는 바를 아웃라인 형식으로 만들어서 실제 설교할 때에는 아웃라인만 가지고 설교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지금까지 논의한 어느 방식보다도 더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이 방식이 갖는 많은 훌륭한 장점 때문이다.

    첫째, 이 방식은 아웃라인만 가지고 설교하기 때문에 설교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거의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지엽적인 것들은 일부 빼먹을 수도 있겠지만 설교 전체의 내용이나 흐름에 지장이 없는 한 사소한 것을 빼먹는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이다.

    둘째, 이 방식은 전달이 아주 자연스럽다. 40) 원고에 완전히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 설교의 방향이 벗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웃라인을 쳐다보기 때문에 청중과의 눈의 접촉, 제스처 등을 아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셋째, 이 방식은 그 내용에 다소 융통성이 있을 수 있다. 41) 청중의 반응이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때 그때 일부 내용을 빼어버릴 수도 있고 설교 준비할 때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것을 추가해서 말할 수도 있다.

    어떤 학자들은 아웃라인조차도 없이 하는 소위 <자유 전달형>(free delivery method)을 지지하는 경우도 있다. 42) 그러나 이 방법은 할 말을 잊어버릴 경우 엄청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설교 준비를 철저히 하고 설교 내용에 익숙해 있다 하더라도 잊어버릴 가능성은 항상 있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자유 전달형은 암기형이 갖는 단점을 모조리 다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아웃라인형 전달에 대한 반론도 몇 가지 있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아웃라인형의 설교는 준비를 대충해서 설교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43) 그러나 이 반대는 별로 설득력이 없다. 설교 준비를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전달 방법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설교 철학과 관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웃라인형의 설교는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웃라인만 가지고 하면 설교가 횡설수설(橫說竪說)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한다. 44) 이것도 전달의 형태와 관계 있는 문제는 아니다. 설교의 조직 능력이 없는 설교자는 어느 방법을 써도 횡설수설할 것이다. 필자는 지금도 아웃라인형의 전달 방식을 즐겨 쓰지만 설교가 왔다 갔다 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 방식은 아웃라인을 늘 쳐다보기 때문에 설교의 맥이 끊기고 또 눈의 접촉이 좋지 못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한다. 45) 이 반대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아웃라인형의 설교에 익숙하지 못한 설교자는 앞을 보기보다는 아래를 볼 때가 더 많다.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설교를 숙지해서 아웃라인이 없더라도 거의 원안대로 전달할 수 있도록 해야 될 것이다. 원고에 얽매이지 않을 정도로 설교 내용을 숙지하고 있다면, 청중이 볼 때에는 설교자가 원고를 보는지 안 보는지도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 있다.

    어느 방법도 전혀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웃라인형의 전달 방식이 가장 문제가 적고 그리고 그 문제는 조금만 노력하면 극복될 수 있으며, 또 이 방법은 많은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장 바람직한 형태라고 하겠다.





    주(註)

    1) Haddon Robinson, Biblical Preaching, p.191.

    2) A.H.Monroe and Douglas Ehninger, Principles and Types of Speech, p.48.

    3) Charles Gruner, C. M. Logue, D. L. Freshley and R. C. Huseman, Speech Communication in Society, p.138.

    4) Ibid.

    5) Lloyd M. Perry, Biblical Preaching for Today's World, pp.174-76.

    6) Ibid., p.172.

    7) Ibid., pp.172-73.

    8) Woodrow M. Kroll, Prescription for Preaching, pp.26-30.

    9) Haddon Robinson, "Blending Bible Content and Life Application," in Mastering Contemporary Preaching. Edited by Bill Hybels, Stuart Briscoe, and Haddon Robinson, p.58.

    10) Reg Grant and John Reed, Power Sermon, p.131.

    11) Kroll, pp.58-59.

    12) Rudolf Flesch, The Art of Plain Talk, p.38.

    13) Grant and Reed, p.136.

    14) A. Duane Litfin, Public Speaking, p.293.

    15) Ralph L. Lewis, Persusive Preaching Today, pp.216-17.

    16) Robinson, Biblical Preaching, p.175; Litfin, pp.296-97.

    17) Robinson, Biblical Preaching, p.175; Litfin, p.297.

    18) Grant and Reed, pp.130-40; Litfin, pp.297-301.

    19) Lewis, p.71.

    20) Litfin, p.327.

    21) 밀러(Gerald R. Miller)와 휴길(Murray A. Hewgill)은 그들의 연구 논문에서 "어”나 "에”같은 말을 많이 쓰면 쓸수록 연설의 효과가 감소함을 보여 주고 있다(Donald R. Sunukjian, “The Credibility of the Preacher,”Bibliotheca Sacra 139 [July-September 1982] : 258-59)

    22) Monroe and Ehninger, p.91.

    23) Edward T. Hall, The Silent Language, p.10.

    24) Sunukjian, pp.257-58.

    25) Ken Davis, Secrets of Dynamic Communication, pp.131-33.

    26) H.C.Brown, H.G.Clinard and J.J.Northcutt, Steps to the Sermon, p.183 ; J. Daniel Baumann, An Introduction to Contemporary Preaching, pp.189-90 ; Kroll, pp.86-88 ; Monroe and Ehninger, pp.58-59 ; Robinson, pp.200-201;

    27) Kroll, p.85.

    28) John A. Broadus, On the Preparation and Delivery of Sermons, p.265.

    29) George W. Fluharty and Harold R. Ross, Public Speaking, p.144 ; Brown, Clinard and Northcutt, p.186 ; Kroll, p.116 ; Lewis, p.248.

    30) Brown, Clinard and Northcutt, p.186.

    31) Kroll, p.116.

    32) Craig Skinner, The Teaching Ministry of the Pulpit, p. 193; Broadus, p.266; Lewis, p.248.

    33) Reuel Howe, "The Responsibility of the Preaching Task," Preaching 4 (November-December 1969): 17

    34) Kroll, p.117

    35) Ibid.

    36) Lewis, p.250

    37) Brown, Clinard and Northcutt, pp.187-88; Fluharty and Ross, p.147.

    38) Broadus, pp.268-69.

    39) Kroll, pp. 117-18

    40) Brown, Clinard and Northcutt, p.189.

    41) Ibid.; Kroll, p.119; Broadus, p.270.

    42) cf. Broadus, pp.273-79; Brown, Clinard and Northcutt, pp.191-93.

    43) Broadus, p.271.

    44) Kroll, p.119

    45) Brown, Clinard and Northcutt, p.190.











    맺는말





    설교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것도 동일한 청중을 대상으로 수 년간, 또는 수십 년간 설교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드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설교자는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를 아무리 오랫동안 해 온 설교자라도 모두 설교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잔 맥아더(John MacArthur) 같은 유명한 설교자도 어쩌다가 외부 강사가 와서 주일 설교를 쉬게 되면 뛸듯이 기쁘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맥아더 뿐만 아니라 모든 설교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그렇게 힘든 설교를 효과적으로 잘한다는 것은 더 힘든 일이다. 더더구나 강해 설교를 자신 있게 한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이다. 그것은 생득적(生得的)인 것도 아니고 저절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많은 연구와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나오는 결과요, 부단한 노력의 결정체이다.

    필자는 필자의 졸저를 완전히 터득하면 그 순간부터 강해 설교의 대가가 된다는 식의 참람한 말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실은 필자도 아직 그렇게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서의 내용을 완전히 터득하여 이 방식대로 일주일에 설교 하나씩 1년 동안만 끈기있게 설교하면-- 특별히 어느 한 책을 택해서 시리즈로 설교한다면-- 강해 설교에 상당히 자신감을 가지고 설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주저함이 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영어의 격언을 명심하기를 바란다: Practice makes perfect (연습하면 안될 일이 없다!).

    월간 교회와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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