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받는 신앙이 됩시다. 2002-05-21 10:44:12 read : 305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고전 9 : 24-27 // 2002년 4월 28일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으로라
오늘은 저희 교회가 인근의 교회들과 연합해서 체육대회를 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교회가 하나되고 연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성부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한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아버지여 제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제안에 있어 하나가 된 것같이 교회가 하나가 되어 이 세상이 나를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믿게 하옵소서." 사람들이 예수님이 훌륭한 분임을 압니다. 성인중의 한 사람정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일본 같은 나라는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만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이 좋은 분으로 알고 있는 분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구주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확신한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면, 성도가 하나되면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전도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모든 장벽을 허물고, 교파의 벽을 허물고, 이해관계의 벽을 허물고 교회가 성령 안에서 하나의 비전,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비전을 소유하고 그것을 위해서 모두가 하나가 되어 힘써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이 교회 안에 구름 떼처럼 벌떼처럼 몰려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 하나됨의 환상을 그려보면서 오늘은 전 성도님들이 기쁨으로, 축제로 체육대회에 참가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 격려하고, 축복하고, 다른 교회가 잘할 때 더 크게 박수를 쳐주고, 그들을 더 잘 섬기고, 이웃교회의 목사님, 장로님, 그리고 성도들을 만나면 먼저 인사하고, 먼저 악수하고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 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시편 133편에 보면 우리에게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하나님이 가장 아름답게 보실 때가 어느 때입니까? 형제가 연합할 때입니다. 형제가 하나된 모습일 때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복을 명하시는데 바로 영생의 복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영생은 나 개인이 예수 믿고 구원받고 천국 가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생의 의미를 너무 축소시킨 것입니다. 영생은 시간이 영원하다고 하는 시간적 의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연합하고 하나되고, 한 몸 됨으로 모든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관계가 회복되어지고 상처가 치유되어 우리의 삶이 차고 넘치는 풍성한 삶, 생명력 있는 삶을 말합니다. 이 영생의 복을 하나님이 언제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형제가 연합할 때입니다.
우리 덕일 교회는 세 개 교회 중에 숫자로 보나, 여러 가지 교회규모로 보나 가장 미약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섬김에 있어서, 질서에 있어서, 하나됨에 있어서, 믿음에 있어서, 비전에 있어서, 열정에 있어서, 사랑에 있어서 가장 앞서가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체육관에서 여러 가지 경기를 합니다. 배구, 농구, 족구, 줄넘기, 줄다리기, 고리던지기 등, 여러 가지 경기를 할 텐데, 경기할 때는 열심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월드컵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항상 월드컵 경기 때는 이변이 있습니다. 왜 이변이 있습니까? 너무 잘하는 팀은 잘 한다는 자만심에 빠지는 사이에 좀 부족하다고 느끼는 팀들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력을 다해서 120%, 150%의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종종 이변이 생깁니다. 이번 체육대회도 그런 이변이 생길 것입니다. 지난번에 교육대학교에서 했을 때 어떻게 우리가 배구를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부족한 줄 알고 전 성도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응원하고 선수들이 이를 악물고 뛰었기 때문입니다.
서울대학교 교수인 손봉호 교수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화란에서 공부를 할 때 한번도 장학금을 받지 안았다고 합니다. 충분히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것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 가지로 평가를 합니다. 그가 너무 잘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가 너무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손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이 너무 못살았기 때문에 장학금을 받지 않고도 내가 공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못사는 민족에 대한 열등의식 때문에 장학금을 받지 않고도 공부를 잘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열등의식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는 열등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120%의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응원하는 사람, 나가서 뛰는 사람이 하나가 되어 자리를 이탈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을 얻는 이변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상 받는 신앙
경기에서 그렇게 열정을 가지고, 하나의 팀웍을 이루어서 하다보면 반드시 상을 받게 됩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도 상 받는 신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 할 지라도 상을 얻는 자는 하나 뿐"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상을 얻도록 달음질하라"고 말씀합니다. "상을 얻도록 달음질하라" 우리의 믿음을 하나의 경주로 race로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상을 얻도록 달음질하라"는 말은 무슨 말씀입니까? 그 말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생활을 하라 그 말입니다.
여러분! 축복이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마카리우스' 라고 하는데 이것은 '왕에게 인정받는 것' 이라는 뜻입니다. 왕이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것, 하나님 마음에 속 드는 신앙생활 이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목표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느 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3:7-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한다"는 말은 오직 주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을 그의 생의 목표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사람 앞에서가 아닙니다. 그 시대 앞에서가 아닙니다. 그 당시 환경앞에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주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입니다. 지미 카터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신실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최근에 역대 대통령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 앞에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님 앞에 상 받는 믿음,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2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사람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랬습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반드시 절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커튼 피시먼스' 라는 농구팀 코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조금 유명한 게 이유는 이 사람이 인도하는 농구팀이 항상 꼴등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구단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코치를 해직하지 아니 하고 그대로 썼다는 사실입니다. 거의 하위권에서 맴돌고 꼴등하는 것이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은 이 커튼 피시먼스라는 코치가 자기 팀도 전환이 필요하다, 새로운 출발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리적 전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심리적 설득을 자기 선수들을 데리고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팀이 게임에 나갈 때마다 항상 지는 팀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가지 마십시다. 이번 게임만은 여러분이 나가실 때 이런 생각을 하고 나가세요. 우리는 항상 이겨왔던 팀이다. 그래서 이긴척하고 나가십시오. 영어로 pretend라는 말이죠. Just pretend 그냥 한번 계속 이겨왔던 팀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나가십시오. 이긴척하고 나가십시오. 그리고 이번 게임이 평범한 게임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 이겨서 마지막 챔피언 결정전에 최후에 마지막 결정전 게임까지 올라왔다. 올라온 척 하고 그렇게 pretend하고 여러분 한번 나가십시오."
그렇게 해야 자신감 self confidence가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렇게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졌어요. 코치가 화가 났습니다. 막 화가 나서 "아니 여러분, 내 말을 뭐로 들으셨습니까? 내가 그렇게 호소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코치를 한 선수가 가만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하더래요.
"코치님, 그냥 우리가 이번 게임도 이긴 척 하세요. 그냥. 이긴 척"
이 에피소드의 교훈은 우리가 경기의 승리를 위해서는 심리적 전술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승리라는 것은 심리적 전술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실력이 있어야죠. 실력이 없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실력이라는 것은 훈련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훈련이라는 이 단어를 성경에서는 독특한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절제'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훈련이야말로 승리와 패배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 절제라는 말은 본래 희랍어의 '애크 크라테이아'라는 단어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크라토스' 라는 단어로부터 나온 말인데, 이는 우리가 가진 모든 종류의 욕망을 훈련을 목적으로 자제한다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뜻입니다. 영어로 이 단어를 번역할 때 self-control 이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우리나라 월드컵 대표들이 16강에 들어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훈련을 하고 있습니까? 훈련이 없이는 절대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도의 훈련, 말씀의 훈련, 묵상의 훈련, 경건의 훈련, 전도의 훈련, 섬김의 훈련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됩니다. 예수님도 그의 제자를 3년 반 동안 집중적으로 훈련시켰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무려 40년 동안 훈련 시켜서 그의 제자로 삼았습니다. 그 훈련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를 이어 그는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논산 훈련소에 가면 "훈련이 전투다" 는 말이 있습니다. 훈련은 고되지만 훈련받은 병사만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덕일의 모든 가족들은 영적 훈련병이 되어 언제 어디서 영적 전투가 벌어지든지 승리하는 믿음의 군사들이 되어 주님 앞에 인정받는, 상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상 받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목표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6절에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그랬습니다. 달음질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고 이것은 무슨 게임을 연상했을까요? '허공을 치지 않는다.' 아마도 복싱을 연상하지 않았을까, 권투경기를 연상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어 집니다. 자, 여러분 이런 광경을 연상해 보십시오. 육상게임이 시작됩니다. start line에 서서 출발신호와 함께 출발을 합니다. 그런데 한 선수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골 라인, 결승 라인은 저쪽에 있는데 결승라인과 정반대 방향으로 죽으라고 사력을 다해서 열심히 뛰어요. 무서운 속도로 스피드로 뛰었어요. 반대방향으로. 무슨 소용이 있어요. 사력을 다해도, 땀을 흘려도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죠.
이따금씩 사각의 링에 오른 복서가 열심히는 해요. 열심히 하면서 땀을 흘리면서 계속 주먹을 휘두르는데 그냥 허공을 향해서 휘둘러요. 그는 결코 승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종종 우리 가운데는 열심은 있는데 목표를 잃어버린 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표 없는 열심, 목표 없는 최선을 하고 있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그의 인생의 게임은 패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왜 우리가 제대로 자기 인생을 훈련하지 않습니까?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목표가 설정되어 있으면, 뚜렷한 목표가 있으면 그 목표에 준한 진정한 훈련이 이루어져 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목표가 분명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절제된 삶을, 훈련된 삶을 추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 되어 집니다.
그러면 바울에게 있어서의 신앙의 목표는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복음을 위하여 사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 하고자 함이라" 복음 때문이었어요. 복음을 위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내가 전하기 위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내 사명 완수하기 위하여. 이 복음 전도의 위대한 소명을, Vision을 이루기 위하여 나는 내 자신을 절제하겠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중요한 것은 먼저 목표 설정을 하세요. 목표가 불분명하면 가다가 중단하기 쉽습니다. 조금만 힘들고, 조그만 시험이 들어도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목표를 가지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웬만해서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기도하면 기도 응답도 분명하게 옵니다. 우리의 분명한 목표,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삶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였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 귀히 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바울이 우리에게 존경받는 이유, 허드슨 테일러, 리빙스톤, 슈바이쳐, 언더우드, 윌리암 케리, 아펜젤러, 예수 병원을 설립했던 설대위원장, 이런 분들이 우리의 기억에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세상적 가치를 위해서 살았다면 우리는 그들을 기억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위해서 안락한 터전을 버리고 낮선 이국 땅에 와서 일생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 ! 저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제 일생을 통해서 만 명의 영혼에게 복음을 증거 하겠습니다. 천명의 영혼에게 복음을 증거 하겠습니다. 올 일년동안 100명의 영혼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그들을 양육하겠습니다.' 이런 분명한 목표가 있는 신앙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도를 해도 간절하고 확신 있는 기도를 합니다. 예배를 드려도 뜨거운 예배를 드립니다. 왜요?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적 목표가 없습니까? 오늘도 혹시 향방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목표를 세우십시오. 방향을 정하십시오. 훨씬 여러분의 신앙은 활력이 있고, 생명력이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하늘의 상 받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상급 받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당시 올림픽 게임이 주는 최대의 명예는 저 유명한 월계수 면류관이었습니다. 월계수는 나무죠. 최대의 명예를 상징하는 상임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오래가지 못해요. 가만두면 나중에 시들어 버리죠. 지금은 그런 것 안 주지만 옛날에는 월계수 면류관이었다고요. 시들어 버려요. 썩어버려요.
바울은 이런 걸 생각할 때 시들어 버리고 썩어버리는 월계수 면류관 하나 쓰자고 오래 간직하지도 못할 면류관을 위해서 사람들이 시간을 컨트롤하고, 땀을 흘리고 자신을 조절하고 욕망을 조절하면서 그렇게 애를 쓰는데 썩지 아니할 면류관,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노력하고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절제하며 인내하며 노력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25절에 말씀합니다. 25절 다같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 그것은 어떤 면류관일 까요? 썩지 아니할 면류관 어떤 이는 황금 면류관 그러더라구요. 금 면류관.
'천국에 가서 금으로 된 면류관 쓸 것을 기대한다고.' 뭐 그럴지도 모르죠. 저는 그 금이 상징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한 면류관은 물질적 면류관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 면류관에 대한 성경공부를 해보시면 이런 낱말들이 나옵니다. 어떤 면류관이 나오냐면, 영광의 면류관, 자랑의 면류관, 혹은 기쁨의 면류관, 혹은 소망의 면류관. 이런 것들이 물질적인 것들이 아니죠. 데살로니가 전서 2장에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요.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요. 전도하는 과정이 쉽지 않죠. 전도를 해 보면 한사람 예수 믿게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붙들어 놓으면 도망가고, 한 사람 예수 제대로 믿게 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믿은 사람을 신앙적으 로 잘 세워주는 일, 정말 어려운 일이예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설립하고 전도해서 그 사람들의 신앙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쓰면서 데살로니가 전서 2장 마지막부분에 이런 편지를 씁니다. "내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여러분은 저의 자랑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의 기쁨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의 희망의 면류관, 여러분은 저의 영광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면류관은 무엇을 얘기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천국 가서 내가 그렇게 전도하려고 애썼던 사람이 나 때문에 예수 믿고 천국 와서 영생을 함께 누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떨까요?
'야 그렇게 나를 속썩이더니 예수 믿고 여기 와서 영원을 같이 누린다.'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그 기쁨이 영원을 갈꺼예요. 영원한 기쁨. 그리고 내가 전도한 사람 자랑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저 사람 제가 전도했거든요. 저 사람 제가 전도했어요. 하는 이 끝없는 자랑. 이 자랑의 면류관, 기쁨의 면류관, 그 영원한 가치를 지닌 자랑. 여러분 주님 앞에, 서는 날, 그 놓칠 수 없는, 그 영원히 계속될 그 명예를 위하여 그 명예를 바라본다면 그것이 상급이에요. 우리의 상급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에게 무슨 상이 필요합니까? 우리가 유치했던 유치원 시절에는 상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상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노벨상이라면 정말 필요 없을까요? 받으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노벨상보다도 더 명예스러운 우리 주님 앞에 인정받아 영원을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그 면류관을, 그 상급을 얻기 위하여 그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요? 이웃들과 좋은 관계, 섬김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전도한 그 사람, 나의 사랑하는 순원 한 사람, 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고 기도하고 축복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운동경기를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운동경기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기 위해서 날마다 영적인 훈련을 하고 있는지, 분명한 신앙의 방향과 목표를 가지고 생활하고 있는지, 하늘의 상급을 얻기 위해서 오늘도 한 영혼에 대해서 사랑으로 다가가 그들을 섬기며 사랑의 수고를 하고 있는지를 점검함으로서 우리가 보다 더 성숙한 성도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아름답게 세우고 건축하며,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사도행전의 주인공처럼 쓰임 받는 덕일의 모든 가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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