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지 복있는 자 / 마16:13-20 2002-04-18 18:25:10 read : 2264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붕 위에 바이올린" 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딸들에게 철저하게 신앙을 통한 가정 교육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공은 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믿음에서 떠나지 말라 식사기도 기도하는 일 하나라도 우습게 여기지 마라
너희가 하나님을 떠나 믿음이 없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것과 같이 불안하고 위험한 것이다."
바이올린은 섬세한 악기여서 든든한 반석 위에서 연주를 해야지
불안하게 지붕 위에서 연주한 다는 것은 실패하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먼저 반석같이 든든한 신앙을 발판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시고
또한 오병이어 사건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시는 놀라운 이적을 체험한 뒤라
모두 흥분 상태였을 것입니다.
모두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갑자기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면서 물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의 대답이
가로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제자들의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요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세례요한이"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동일한 천국메시지를 전파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했던 엘리야의 기적을 연상하게 했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들은 민족을 향해 탄식과 눈물로 호소했던 예레미야의 모습을 예수에게서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님이 정말 묻고 싶으셨던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너희들은 도대체 나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
남이 뭐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기를 좋아합니다.
"저 말씀은 김집사가 들어야 하는 것인데..."하면서 자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적용은 철저하게 나와 하나님의 1:1 개인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뜰을 때에 그 말씀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출 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물음에 대해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여러분도 진정으로 이렇게 고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평소에는 내 생각 내 고집으로 살다가 어려운 일 당할 때만 예수님을 찾는
마치 흥청망청 멋대로 살다가 돈 떨어지면 은행을 찾아가서 사정을 하는 사람처럼
필요할 때만 예수님을 찾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이며, 주님을 향한 내 신앙 고백은 무엇인가?"를 분명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지금 듣고 싶어하시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신앙고백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은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은 과연 살아 계십니다.
내 인생의 영원한 소망은 주님뿐이십니다.
내가 영원토록 사랑하고 섬겨야 할 분은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라고 진정으로 고백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때 주님은 바르게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첫번째 축복의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할 수 있는 분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없이 잘사는 것보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예수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은 물질의 소유와 환경적인 요소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물질의 소유가 많아도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그 사람의 삶 속에 예수가 없다면 그 인생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파랑새를 찾기 위하여 쫓아가는 어린 소년에 대한 얘기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산을 넘으면 찾을 것 같았던 파랑새는 결코 없었습니다.
온 산천을 찾아 다녔지만 행복이라는 파랑새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찾던 파랑새가 집에 와보니 있었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 세상을 찾아 다녀 보았지만 세상 어디에도 진정한 행복은 없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예수안에 있을 때가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르게 신앙고백하는 자에게 두번째 축복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18절에 "내가 이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올바른 신앙고백이 있는 인생은 마귀의 권세가 감히 어찌할 수 없습니다.
올바른 신앙고백이 있는 가정은 마귀의 권세가 감히 어찌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악한 사단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삶이 어려워지거나 반대로 형편이 좋아지면
마귀의 꼬임에 속거나 무기력하게 넘어지고 있습니다.
생활이 어려워지면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고 나에게 불이익이 찾아올 것 같으면 신앙을 멀리합니다.
그래서 주일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별로 없고
주님은 교회에서 만나기를 기다리시는데
주일을 안 지켜도 별로 안타까움이 없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나약해지고 나태해지는 이유는
분명한 신앙고백이 없기 대문입니다.
주님은 바르게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세번째 축복의 말슴을 하십니다.
19절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이 땅에서 메인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미움 원망 불평 질투 의심등 세속적인 삶에 모든 메인 모든 것을 풀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에서도 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평소 미워하던 남편 아내 가족 친척 친구 이웃 등 모든 미움의 관계를 풀어야
그래야 하늘에서도 메여있던 것이 풀리는 것입니다.
이 천국 열쇠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내 마음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지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 하신 말씀에 의지하여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은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하는 성도들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의 열쇠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삶에 메인 것을 세상적인 원리로는 풀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손해를 봐야하고 내가 피해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입니다.
원망 미움 혈기 의심 불평 모든 것을 말씀으로 풀기 바랍니다.
내 생각으로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고백 위에 선 가정은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올바른 신앙고백 위에 선 성도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나약해질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여러분 주님 앞에서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때가 있습니다.
앞장을 보면 주님은 그 동안 많은 사역을 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 보이시고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더구나 제자들은 주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이때야 말로 주께서 자신의 사역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실 때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아주 중요한 자신의 사역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21절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과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조금 전에 주님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던 때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제 주님을 위해 살아보겠노라고 다짐 한 상태인데
느닷없이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데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의 이기적인 신앙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2절에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는 말은 얼핏보면 매우 신앙적인 말인 듯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적인 말이 아니라 인간적인 욕심의 말이었습니다.
앞으로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장관자리 하나쯤 하려고 생각했는데
모든게 물거품이 되니 도저히 받아 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머리에는 영광의 주님만 있었고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의 승리가 있으려면 수고와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봉주 선수가 보스턴 마라톤대회에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우승하기 위하여 가 있습니다 그는 이제 갖다와서 잠실 운동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어느 여성과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지금쯤 결혼준비를 위하여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승의 영광을 위하여 충청도 지방의 한적한 곳에서 피눈물나는 훈련에만 열중을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광의 뒤에는 눈물과 고난의 수고의 대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그는 십자가의 고난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실수이며 무지함에 소치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시험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큰 이유를 꼽는다면
신앙 생활에는 영광과 축복만 있고 고난과 수고의 대가는 치르지 않으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귀여운 아기를 얻기 위해서는 해산의 고통이 있어야 하듯이
우리들의 신앙에도 해산하는 고난을 거쳐야 진정한 신앙고백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만이 인생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만이 성공을 기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 믿기 때문에 고난 당하게 되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예수 믿으면 구원받아 항상 행복만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길에는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이 왔다고 믿음을 방심하면 마귀로 부터 이용당할 소지가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의 생각도 알고 보면 마귀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23절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사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베드로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주의 일을 그르치려고 하는 사탄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생각하면 베드로의 말은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라나 주님은 베드로를 이용해서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려고 하는 사탄을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되도록 사람들이 주님과 멀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악한 마귀는 우리를 유혹하고 악한 생각을 주려고 접근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이 집사야 너무 열심하면 광신도라고 사람들이 놀려 그러니까 적당히 해 그리고 봉사도 적당히 해 왜 사서 고생을 하려는거야"
이렇게 속삭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고난보다는 영광을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계속 속삭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나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사실 사탄은 오래 전에 40일 금식하실 때에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여러 차례 예수님을 시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보여라, 높은데서 뛰어내려 봐라"라는등 시험을 하였으나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동안 신앙 생활을 편해지고 싶고
공연히 교회가 하나님이 멀어지고 다른 곳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말씀과 기도로 물리쳐야 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말고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도록 합니다.
잘못 마귀의 손을 잡는 경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손은 오직 예수님의 손입니다.
물에 빠져들었던 베드로가 잡았던 주님의 손을 처럼
세상 풍파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손은 오직 예수님의 손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세상의 명예와 부귀 영화가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물거품과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이 주는 열락은 아침에 생겼다가 햇빛이 나면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 복권 열풍이 불어서 복권 판매가 너무 잘된다고 합니다.
참으로 잘못된 사행심입니다.
세상은 정직합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말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정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 말씀이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27절에 주님은 '각 사람의 행 한대로 갚으신다'고 하였습니다.
민수기 14장 28절에도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마지막 24절에 결론에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주님은 누구보다 그렇게 말했던 베드로와 제자들의 마음을 잘 아십니다.
비록 꾸짖기는 하셨지만 이어서 친절하게 바른 신앙의 길을 일러주십니다.
주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아직 그들이 버리지 않은 것이 많았습니다.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과거의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과거의 '나'는 누구입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던 자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벗어버리고 새사람으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한 성도들은
이제 옛 사람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옛사람의 습관과 고정 관념의 생각을 벗어버리고
내 안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사는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다가 얼마가지 못해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안에 지난날의 내가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심과 고집과 허영과 자랑이 형기와 이기심이 포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신앙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입니다.
제자의 길은 영광 뿐아니라 고난도 능히 달게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쉽게 신앙고백을 하지만
다음에 내가 받아야 할 훈련과 고난에 대한 각오와 준비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쫓아 세속적인 것에 취하여 살면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가치관이 달라야 합니다.
인생의 목표도 달라야 합니다.
27절에 행한 대로 갚으리라는 말씀은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벌어서 뭐합니까?
나를 위해서 나의 육신의 소욕을 쫓아서 썩을 것을 위하여 투자하면 결국 썩을 것 외에 거두어들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선을 심어야 합니다.
나의 유익만을 위해 살면 영원한 나라에서의 축복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내가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수고와 선행과 희생을 심으면 하나님은 그 열매를 남겨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 욕심과 육신을 위해 투자하면 결과는 멸망입니다.
베드로처럼 영광만 생각하거나 고난에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참된 제자는 옛 사람의 나를 부인하고 수고와 희생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위해서 라면 능히 목숨도 버리고자 하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천국은 그것을 위하여 지킬 때에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을 세 등급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일 낮은 3등급은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입니다.
과거에 매이는 것은 인생을 형벌의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조상의 죄로 인한 형벌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 등급 인생이 있는데 이것은 미래에 매여 사는 사람입니다.
미래에 매인 사람들을 보면 현재가 없습니다.
온천이나 탄광을 개발하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래를 믿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재가 없는 미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비전과 소망을 가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현재가 없는 미래는 허망한 것입니다.
일등급 인생이 있습니다.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현재를 만족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에게 불행한 일이든 행복한 여건이든 받아들이는 수용의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나 다음에 주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를 주님 앞에 내놓고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움직여야 하나님도 움직이십니다 앞으로 걷는 자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확신있게 신앙 고백하시고 닥친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심는 대로 축복의 열매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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