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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마 - 남겨진 삶에 치열했던 사람 /요20:24-29
    2016-05-24 21:31:36   read : 134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내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
    외롭고도 쓸쓸한 모습
    말없이 홀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을 다 버린 나그네
    정녕 그 분이 내 형제 구원했나
    나의 영혼도 구원하려나
    의심 많은 도마처럼 물었네
    내가 주를 처음 만난 날

    위의 찬양은 오늘 도마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며 머릿속에 떠오른 찬양입니다. ‘도마’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의심 많은’이라는 말이죠. 오늘 본문 역시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난 이후에 신앙을 확실하게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도마를 생각할 때, 그의 신앙고백보다는 그의 의심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질책처럼 들리는 주님의 말씀(29절)에 의미를 많이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도마의 신앙과 고백을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하여 의심했던 것은 어떤 철학적, 신학적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가장 선명한 갈보리 ‘십자가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흔적을 만진 후 그가 한 신앙고백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도마를 ‘디두모’라 하는 도마로 불렀는데, 그 뜻은 ‘쌍둥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그가 제자가 된 배경은 나오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데 극적인 체험이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더 많습니다. 어떻게 주님을 믿게 되었는지, 혹은 어떻게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주님의 곁에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공관복음서에는 그의 이름만 명시되지만, 요한복음에는 그에 대한 에피소드가 세 번이나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1~16절에 나오는 도마의 이야기를 어떤 목사님은 ‘용감한 비관주의’라고 표현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전갈을 받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만류합니다.

    얼마 전에 그곳에서 있었던 일, 즉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베다니로 돌아가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도마가 요한복음 11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아마도 도마는 진짜 그곳에 가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도마의 성격을 보건대, 그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먼저 보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 ‘의심’이 많았다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실 나사로의 죽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기회로 보셨지만, 도마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죠. 그러므로 그가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한 말이 얼마나 심각하게 결단하고 한 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베다니에서 주님이 죽임을 당하셨다면 기꺼이 그곳에서 도마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나옵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의 고별설교(요한복음 13~16장) 일부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14장은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라고 시작하는데, 의심이 많고 우울의 기질을 가졌던 도마는 근심하며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천국에 가신다고 말씀하시는데, 도마의 귀에는 ‘천국’보다는 ‘떠난다’는 말이 크게 들렸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아마도 이러한 연유로 도마에게는 ‘의심 많은’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른 제자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사실은 의심이 많았던 도마 때문에 제자들은 아주 중요한 주님의 답변을 듣게 됩니다. 바로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이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지금 예수님의 제자 모두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요?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그 길이 정말 맞는데 확신이 서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의심이 많다기보다는 ‘솔직한’ 도마 때문에 모든 제자가 속 시원하게 답을 듣게 됩니다.

    “내가 곧 길이다!”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을 확신 있게 가지 못하는 이유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거나 너무 어렵기 때문은 아닐까요?

    누군가 우리에게 길을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우리 집으로 가는 길이 어디냐고?
    한번 여러분의 입술로 그 길을 설명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설명을 듣고 올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가장 확실한 대답이 무엇인가요?
    “조금 있다가 제가 집으로 갑니다. 저와 함께 가시면 됩니다!”

    십자가의 흔적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세 번째 에피소드가 오늘의 본문입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십자가의 흔적이 평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강이란 ‘문제없음’이 아니라, 문제로 요동치 않을 평강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서워 피신해 있던 제자들, 미래가 불투명하여 떨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20절에 보면,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흔적인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을 보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흔적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을 보세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런데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쩌면 앞에 있었던 사건들로 미루어 보아,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죽지 못한 자신에 대하여 한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어쨌거나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현장에 없었다는 것이 그에게는 ‘의심’의 자리가 되었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확신’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글을 썼더군요.
    “저는 지금까지 학교를 25년간 다녔습니다만 결석이나 지각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나 없을 때 중요한 걸 할까 봐’입니다. 가보면 별로 중요한 게 없는 날도 많았지만 말입니다.
    어떤 분의 간증을 들어보니까 예수 믿은 후 교회 예배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분 역시 ‘나 없을 때 은혜가 내려서 나만 못 받으면 어떡하나’하고 말입니다.”

    도마는 그 자리에 없어서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성령님의 위로와 평안을 받지 못했고, 다른 사람이 누리는 평강과 기쁨의 기회도 놓치고 말았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당시 워싱턴의 한 교회에 전화가 왔습니다. 이번 주일에 대통령이 예배를 드리러 오느냐는 문의였다고 합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이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대통령이 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꼭 오십니다.”

    우리가 오늘 도마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신앙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립’은 우리 신앙생활에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마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보니, 그의 기질에 대하여 ‘우울질’이었을 것으로 말합니다. 그에게는 조금 비관적인 모습도 있고, 극단적인 모습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혼자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님을 사랑했던 것만큼이나, 그리고 베다니에 나사로를 만나러 갈 때,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갈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상심이 무척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침울하게 우울한 상태에서 슬픔의 한 주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혼자 고립된 상태에서 말이죠. 그런 그의 우울함 가운데 제자들이 찾아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지만, 그 소식을 거부했습니다.

    고립된 그의 시간이 기쁨을 경험한 제자들과의 시간도 거부하게 한 것이죠.
    물론 도마가 다시 주님을 만나 부활의 신앙을 확증하게 되었지만, 고립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신앙의 독이 되는지 모릅니다.

    사실 사단이 우리 속에 들어올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는 고립된 고독의 시간, 혼자 고민하며 우울한 시간을 지날 때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죠.

    성도 간의 교제가 중요한 것은 고독과 우울의 시간을 함께할 형제와 격려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죠.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권면한 이유가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참으로 힘든 것은 도마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성도의 교제가 더욱 필요한데, 자꾸 혼자 있으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의 신앙에서 참 중요한 것이 ‘공동체’성입니다. 함께하는 중에 힘이 생기고,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물론 고독의 시간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깊게 만들어 주지만, 그 신앙을 유지해 주는 것은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물론 도마는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통해 그의 신앙이 회복되었지만, 고립된 시간 동안 그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성도 간의 교제와 의도적인 공동체성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하이라이트는 예수님께서 고립되어 침울한 도마를 향해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보세요.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저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도마를 위한 예수님의 방문!”

    8일이 지났다는 것은 유대인의 시간 방식으로, 당일을 포함하고 있기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한 주간이 지난 주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추측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의 시작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모이기 시작했는데,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던 제자들이 다시 그날 모이게 되었던 것이죠. 그들이 주님을 만난 날 역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한 주일이 지난 ‘주의 날’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도 보면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날을 ‘주의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7일 전과 같게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도마가 있었던 그 자리에서 제자들은 더는 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홀로 슬픔 가운데 있던 도마를 위한 말씀이 바로 ‘평강’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방문하신 이유는 전적으로 도마를 위한 자리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인사를 건넨 후 바로 도마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27절을 보세요.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저는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에 ‘의심’을 가지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심한다는 것은 그만큼 삶과 신앙에 대하여 진지하다는 의미이고, 그 진지함에 대하여 답을 얻을 때 강력하고 치열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생각하고 가만히 역사를 들여다보면, 믿음의 방황을 심하게 겪었던 성 어거스틴, 그리고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던 마틴 루터, 목회자였지만 사역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가지고 고민하던 웨슬리도 의심의 나락에서 주님을 만나는 강력한 체험이 그들의 삶을 더욱 치열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슬픔의 심연 가운데서 낙심했던 사람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으실 수 있습니다. 어두웠던 시간만큼이나 열정을 향한 몸부림이 커진다는 사실입니다.

    남겨진 삶이 치열했던 사람
    본문 27~28절을 보겠습니다.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의 고백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정말 도마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 보았는지, 아니면 그 상처만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 상처를 보고 만졌을 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가 의심했던 만큼이나 더욱 죄송스럽고 송구하지 않았을까요?
    쉽게 주님을 믿었던 사람의 고백과 도마가 고백하는 ‘나의 주님이시요’라는 말이 같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은혜는 삶의 바닥에 있었던 사람에게 더 큰 것이 아니었을까요? 슬픔과 고독의 시간만큼이나 그 회복의 시간이 감격스럽지 않았을까요?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의심했던 순간 때문에 더욱 후회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살아갈 삶을 생각하며 더욱 치열한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후 도마의 행적이 놀랍습니다. 그는 페르시아를 지나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합니다. 그는 제자 중에 가장 먼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칼라미나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무덤은 ‘마드라스’에 있으며, 그를 기념한 교회에는 “나는 당신을 예배하나이다”라는 도마의 마지막 말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지금 성경에는 들어와 있지 않지만, 외경인 ‘도마행전’에는 도마에 관한 여러 가지 행적이 나와 있습니다. 그가 직접 목격했던 주님의 십자가의 흔적이 그가 그렇게 쉽게 인생을 살 수 없도록 한 것이죠.


    제가 오늘 말씀의 제목을 ‘남겨진 삶에 치열했던 사람’이라고 정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도마의 의심, 주님과의 만남, 그리고 그의 신앙고백이 남겨진 삶을 무척이나 치열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의 흔적을 보는 순간,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살아나신 증거를 보는 순간, 자신에게 남겨진 삶을 그렇게 허송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자신에게 나타나 십자가의 흔적을 보여주신 주님을 바라보며, 누군가에게 자신이 경험한 이 놀라운 일을 전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런 그의 열망이 그를 먼 나라 인도로 내몰지 않았을까요?

    그의 눈에 아직은 심판을 유보하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이 눈에 들어와, 늦기 전에 그 사랑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요?
    도마의 고백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주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한 자들의 삶은 놀랍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아시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장군출신으로 저술가였던 Lew Wallace는 세상을 놀라게 할 책을 쓰려고 했는데, 그는 기독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불합리성과 모순을 폭로하려고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놀라운 사실들과 부딪치기 시작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성경에 관한 많은 자료를 모으고 성경을 연구하면서 그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반대하는 책제목까지 구상하고 1장을 썼으나 2장을 쓰다가 자기의 붓을 꺾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에 빠졌습니다. 새롭게 발견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충격을 소화하기 위해서 다른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이 소설과 영화로 되어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던 "벤허"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삶에 기대가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을 고백하고 나면 그의 삶이 치열해지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그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유명한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이 주님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가 주님을 받아들였고, 그의 삶을 주님께 드리기로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 기사였습니다. 모든 매스컴이 그의 고백에 침묵했다고 말이죠. 만약에 그가 동성연애자였다고 coming out을 했더라면 온 지면을 장식했을 텐데, 그의 고백에 관심이 없었다고 말입니다.

    세상은 좀 더 자극적이고, 좀 더 어두운 면이 드러나기를 원하고 그런 것이 뉴스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로 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치열하게 살아가며 세상을 바꿀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3장 1~9절에 보면 ‘회개와 심판’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시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치어 죽은 것을 말씀하며 이들이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열매를 구했으나 삼 년을 기다려도 열매가 없으므로 찍어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회개와 종말을 연관 지어, 회개하지 않으면 ‘벌 받는다.’ ‘죽는다.’ ‘지옥 간다.’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거북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교회에서는 이런 약한 교인들의 마음을 이용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증거로서 헌금을 요구하고 교회건물을 지어 왔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회개와 종말이라는 이름으로 ‘부자유’한 신앙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뭔가 교회 일을 하지 않거나 헌금을 하지 않거나 활동에 참여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 같은, ‘회개하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참된 의미를 왜곡했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5절의 말씀을 보세요.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며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들이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살아 있는 것도 죄가 없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근방에서 일어난 지진과 쓰나미로 주변 국가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 28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들이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휴양지에서 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 심판하셨다면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2011년 일본에서 발생한 동북 지방 쓰나미와 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2008년 중국 쓰촨 성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4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2014년 제주로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이 탄 세월호가 침몰해 수백 명이 죽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죄의 결과이거나 회개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회개한다고 이런 재앙으로부터 해방된다거나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을 면하거나, 죽음을 면하거나, 화를 면하기 위해 미리미리 회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죽어야 하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참으시며 우리에게 시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남겨진 시간이 각자 각자에게 다 다를 것입니다.
    그것이 하루가 되었던, 1년이 되었건, 10년 100년이 되어도, 분명한 것은 우리가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직 종말이 이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남겨진 삶에 만회할 시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4번째 도시인 첸나이에 가면 기독교적으로 볼 때 아주 의미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가 교회를 일곱 개나 세우고 순교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도마가 숨어서 기도하던 동굴과 순교한 언덕의 바위, 도마의 무덤 위에 세워진 ‘산토메 교회’가 있습니다.

    도마는 왜 그렇게 멀리 떨어진 인도까지 가서 말씀을 전하다 죽었을까요?
    도마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 어쩌면 가장 이해력이 떨어지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하여 많은 후회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일 의심이 많던 사람이 가장 먼 곳에 가서 말씀을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로마에서 순교한 일, 그리고 도마가 복음을 전하다 인도에서 순교한 일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삶에서 나타난 치열함은 과거의 삶에 대한 후회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들의 삶을 만회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몸부림쳤을까?

    우리가 오래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회개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 축복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산 세월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들로 인해 열매 맺지 못한 우리의 삶이 후회스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은, 그 수치스러움을 만회하기 위해, 열매를 맺기 위해 시간을 달라는 것입니다. 죽지 않기 위한 회개가 아니라, 남겨진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와 도끼의 비유는, 늦기 전에 회개해야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인생을 만회하도록 우리에게 주신 시간, 하나님이 참으심으로 우리에게 덤으로 주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물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도마의 삶을 묵상하며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 가졌던 절박함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살았던 그런 절박함입니다. 우리의 삶에 치열함과 절박함이 없다면 아직 우리에게 주님의 손과 발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만져보지 못함 때문은 아닐까요?

    의심과 절망의 순간이 우리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지 못한 우리의 삶이 우리를 절망스럽게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마지막 29절이 참 힘들게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무슨 의미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흔히 말하던 그런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믿음이 없이 의심했던 도마를 질책하며, 너희는 도마와 같이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냥 제 느낌을 적어보고 싶습니다.
    주님이 도마에게 하신 말은 ‘물음’이 아니라, “도마야 네가 나를 보고 믿는구나! 그래 네가 나를 보지 못해 믿지 못해서 참 힘들었지? 그런데 이제 네가 진정으로 나를 네 삶의 구주로 인정했구나! 그래 장하다~”

    저에게는 질책이 아닌 칭찬과 격려로 들립니다.
    제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말이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어쩌면 이 말씀이 주님을 보지 못하고 믿게 될 사람들에 대한 ‘영적 부담’ 혹은 ‘사명’을 도마에게 주신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을 보지 못하고 믿게 될, 주님을 믿지 못하므로 아직은 심판이 유보된 사람들에 대한 사명이자 안타까운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도마는 복음을 들을 수 없었던 땅, 인도까지 갈 수밖에 없었지 않을까요?
    아직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그러나 복된 사람이 될 그들을 위해 마지막 삶을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도마의 고백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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