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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욕을 버리자/요1:1-5
    2001-10-22 10:28:58   read : 111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크리스마스와 새해에 하나님의 한없는 복이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서니까, 제가 55년 전 이 교회가 시작되던 해 크리스마스에 어린아이들과 젊은 학생 몇 사람을 데리고 아침에 남산에 올라가 나무를 주워다가 난로에다 불을 때고, 그리고 예배드리던 생각이 나서 아, 나도 참 오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교회의 창립 55주년이 되는 이 크리스마스에 박종화 목사님께서 또다시 강단에서 설교하도록 해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우리는 늘 공관복음 곧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나오는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됩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크리스마스 찬송을 조사해 보니까 그 가사 내용이 전부 공관복음의 이야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공관복음서의 이야기는 감동적입니다. 더구나 어린이들에게는 이런 동화식의 이야기가 훨씬 잘 맞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이 너희가 아기 때에 젖을 먹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른이 되면 딱딱한 음식도 먹을 줄 알아야지, 왜 밤낮 젖 먹던 때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른이 된 교인들로서 이 크리스마스 날 오늘 어린이들의 동화 이야기에서 벗어나서 신약성서의 요한복음과 사도서신에서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이야기했나를 중심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우리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참 좋습니다만, 이것이 많은 혼란을 가지고 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가 어렸을 적에 그 부모님이 성서를 가르쳐 주셨는데,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에 알버트 슈바이처가 “동방박사들이 황금, 유향, 몰약 그 비싼 보물을 아기 예수에게 드렸는데, 아기 예수가 그것을 어디다 썼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서방교회 전통에서는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지킵니다만, 12월 25일 오늘이 크리스마스가 될 확률은 365분의 1밖에 안 됩니다. 사실상 탄생일이 어느 날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12월 25일이 크리스마스란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경우가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좀더 성숙한 경지에서 이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우선 오늘의 구약의 본문은 성서일과에서 고정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이 본문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느 해에나 있는 본문입니다. 그것은 구약에 나오는 예수의 탄생,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많은 예언 가운데 대표적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본문은 반가워라, 기뻐하라, 그런 말로 시작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왕권을 잡고 오시니 우리 모두 환성을 올리자꾸나.”하고 외칩니다. 바로 이 예언은 유대인들이 포로생활, 노예생활을 하던 때의 예언입니다. 그 비참한 노예생활 속에서 그들에게는 희망이 딱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오셔서 이 세상을 통치하게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니까 그들을 중심으로 전세계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비전입니다.

    그런데 기다리던 메시아가 세상에 오셨습니다만, 요한복음에 보면 바로 그분이 세상에 오셨는데, 다시 말해 말씀이 육신으로 태어났는데, 이 세상에는 그분이 메시아인 줄을, 하나님의 아들인 줄을 알아보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를 맞아 주지 않았다는 것이 요한복음 1장 10절의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그처럼 많은 예언을 통하여 메시아의 탄생을 고대했는데 왜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왜 그를 맞이하지 않았을까요? 왜 그를 구박하고, 그를 배척했을까요? 그리고 끝내 그를 십자가에 죽였을까요? 저는 이것은 유대인들 속에 있는 집단적인 탐욕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의 집단적인 탐욕을 충족시킬 수 있는 그런 왕을 기다렸습니다만, 예수는 정반대, 180도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으니까, 알아볼 수도 없고 맞이할 수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랬는데 과연 우리는 어떤가! 저는 이 점에 대해서도 오늘 아침에 교황이 직접 나와서 교황청에서 집전한 크리스마스 행사와 모든 나라의 행사를 보면서 “우리와 유대인들이 같지 않은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고 노래부르는 우리의 머리 속에 태어난 예수에 대한 이미지가 과연 유대인들과 다른 건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성가대에서 한 노래를 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만, 헨델의 메시아는 기가 막히게 좋은 노래이긴 하지만, 거기에 나오는 가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 중의 왕이여!” “왕 가운데 왕이여!”하고 부릅니다. 오늘 아침에 크리스마스에 부르는 찬송가를 죽 훑어보니까, 누가복음의 이야기를 가사로 만든 것인데, 역시 여기서는 왕의 이야기, 다스리는 자의 이야기가 주로 나옵니다. 그런데 실제로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에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특히 마가복음 10장 41~45절에서 그분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왕은 무엇이냐? 이 세상에서 말하는 왕, 통치자들은 권세를 잡으며 사람들을 억압하고 사람들을 제 마음대로 부리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너희도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이 세상을 통치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내 목숨까지 버리면서 섬긴다. 그러므로 너희도 섬김을 받는 자가 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라.” 이 말씀과 관련해서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바르게 이해하고 있느냐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의문을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아마 제게서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볼지 모르겠습니다. 과거에 이야기한 일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특히 제가 생각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예수님은 우주 창조 이후에 생긴 분이 아닙니다. 천지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계신 로고스 혹은 빛 혹은 생명입니다. 그분은 천지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계셨고, 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그 창조한 천지만물이 타락하여서 구원하러 오셨다는데, 왜 구태여 그 무한대의 우주 가운데에서 이 지구에 태어나셨을까? 지금 천체물리학을 알게 되면 이 우주라고 하는 것은 한없이 한없이 크고, 이 지구하고 하는 별은 그 우주에 비하면 먼지 같은 작은 별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 별에 태어났을까? 이 별보다 수백만 배, 수억 배 큰 별도 있는데 왜 이 작은 별에 태어났을까? 둘째로 왜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물론 저는 그 동안의 설교에서 여러 번 말했습니다만, 제 생각은 간단했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 가운데서 사람이 살고 있는 별이 지구고, 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세상을 다스리는 지극히 높은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에”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이 우주에서 가치가 높고 지성을 가지고 영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분은 인간으로 온 것이다.”

    과연 그럴까요? 위대한 것을 말한다면 구태여 지구로 올 것 없고, 사람으로 올 것 없지 않습니까? 저는 결론적으로 그분이 인간으로 오신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한 세상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은 것은 창세기에서부터 등장하는 사탄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게 하는 데서부터 사탄이 나오는데, 그 사탄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그 사탄의 정체는 구체적으로 탐욕입니다. 바로 이러한 탐욕, 이 탐욕이 결국 우리 인간을 죄 짓게 만들고, 그 탐욕이 죽음을 가져오고, 그 탐욕이 모든 생명을 죽이고, 사람을 죽이는 근원적인 뿌리입니다. 사탄의 정체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탐욕입니다. 이것을 버리자는 것입니다. 성서의 말로 하면 회개하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산 것을 180도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탐욕을 버리라는 덕목은 모든 종교가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에, 지금도 있습니다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서 무얼 합니까? 결국에 자기 안에 있는 욕심, 탐욕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영적인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하는 것입니다. 불교가 결국에 구원을 얻는 길이 뭡니까?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무소유로 돌아가라는 것 아닙니까? 아무 소유가 없는 무소유의 세계가 열반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로나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이 되어 오신 목적은 인간의 탐욕을 버리게 하는 것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탐욕을 버린다는 것은 신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니까요. 요한일서에서 말한 사랑이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 되고 생명이 되고 빛이 되는데, 바로 그 사랑이 들어와서 이 탐욕을 내몰 것이라고 합니다. 빛이 어둠 가운데 들어오면 어둠은 물러가게 마련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왔다는 말은 바로 이 탐욕이 물러가고, 사탄이 지배하던, 탐욕에 의해 움직이던 이 생활이 사랑에 의해 움직이도록 바꿔진다는 말이고, 그것이 구원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바꿔지는 때에 이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진정한 에덴 동산으로 바꿔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탐욕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소극적인 이야기이고, 그 자리에 사랑이 들어와서 탐욕을 물러가게 만든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는 것은 수도원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서 명상을 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무소유가 되는 것, 산 속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다 버리는 그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바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우리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빛은 어둠 속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빛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에 사랑은 하나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완전히 적대적인 것처럼 보았는데, 율법이 뭡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인데, 그걸 아니라고 하면 그러면 뭐냐? “행동하는 사랑”을 내세우는데, 행동하는 사랑이란 것이 뭐냐? 그것은 결국 말하자면 욕구 같은 것, 의욕 같은 것, 그런 걸 다 버리고, 맹탕 같은 사람, 아무 의욕도 없고 아무 욕심도 없고 멍하게 하늘만 바라보는 그런 인간이 된다는 말이냐?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욕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욕구가 질적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과 우리 패거리를 위해 다른 데 것을 다 끌어모으는 그러한 욕구가, 다 내어주고 싶은 욕구,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주는 그런 것으로 바뀌어지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에 그리스도를 내 삶 속에 모셔들였다, 그분을 믿는다 하는 것은 성서대로 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내가,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의욕 같은 것, 이루고야 말겠다고 하는 성취욕 같은 것이 없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의욕이라는 것이 뭐냐에 있습니다. 목적이 사랑에 있고, 의욕, 욕구는 사랑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곧잘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이 목적이 되어 버리고,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 수단으로 떨어져 버리는데, 그것이 곧 죄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개인적 생활만 아니라 인간 생활의 모든 차원이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12월 첫 주에 설교하면서, “우리의 21세기에는 20세기보다 더 무서운 세계가 될 수 있다. 20세기에는 핵무기, 생태계의 파괴, 이런 것들이 우리를 무섭게 만들었지만, 21세기에는 유전공학, 로봇 공학, 이런 것들이 아마도 2030년대 들어가게 되면 우리의 생명을 완전히 파괴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제가 읽은 그 책의 주인공은 결론은 결국에 이러한 것은 다 포기해 버려야 한다. 과학이니 뭐니 하는 것 다 포기해 버려야 한다. 그걸 가지고 있는 한 인류는 망한다고 경고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결국 포기하지 못할 것이지만, 사실은 포기하고 못 하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그것을 움직여 가는 힘, 그걸 바꿔 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첨단 과학기술이 사람과 이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봉사하고 사랑하는 도구가 될 때, 그런 과학은 얼마든지 발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과학의 발전이라는 것이 죽이고 파괴하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사람이 과연 만물의 영장이냐고 묻는다면, 그래도 만물의 영장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왜입니까? 나 자신 속에 탐욕이라고 하는 것이 쫓겨 나가고 그러고 내 욕구라고 하는 것은 사랑을 향해 나를 몰아가게 될 때에 인간은 존엄한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설교하던 리빙스턴이라는 유명한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들에게 전도했습니다. 열심히 전도해서 이 식인종들과 말도 통하게 되었는데, 그 식인종들에게 사람을 잡아먹으면 안 된다는 말을 리빙스턴이 열심히 하니까 그들이 리빙스턴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배고프니까 먹기 위해서이지만, 당신들은 왜 먹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많이 죽이느냐. 아프리카에 와서 수만 명, 수십만 명을 막 죽이는데 먹지도 않으면서 죽이더라. 그건 왜 그러느냐?” 바로 이것입니다. 동물들도 약육강식을 하고, 이 대자연에는 폭풍도 있고, 태풍도 있고, 홍수도 있고, 그런 폭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의 근원적인 악은 인간에게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심으로 인해서 상대를 파괴합니다. 이 탐욕을 버리지 못할 때 이건 무엇과 마찬가지냐 하면, 목이 마른 사람이 목이 마르니까 물을 마시는데 그 물이 소금물이니까 마시면 마실수록 자꾸 목이 마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탐욕입니다.

    권력이라고 하는 것도, 국회의원이든 대통령이든 또 장관이든 그 자체로 나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권력이 인간을, 국민을 사랑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수단, 사랑을 위한 수단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권력 행사에 재미를 들여서, 목마른 사람이 소금물 먹듯이 권력을 가지면 더 큰 권력을 가지기 위해 불의를 서슴지 않게 됩니다. 기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필요한 만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 모으는 것 자체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허겁지겁 달려들어 긁어모으고, 남의 것을 다 빼앗고 독점하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결국에 하나의 독점적인 권력욕, 하나의 독점적인 소유욕이 이 생태계를 다 파멸시킵니다.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공기와 물과 흙을 다 병들게 만들고, 지구의 생명을 다 죽어가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현실이 어디서 나오느냐? 탐욕에 지배받는 기업에 의해서 나온다! 그렇다면 문제는 꼭 정치권력이나 기업만이 제공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교회란 뭐냐? 교회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그 교회는 섬기는 종으로서의 교회, 세상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시키는 교회, 정말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로서의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천 년 동안 교회가 어떻게 해 왔어요? 십자군전쟁? 그런 거 다 접어놓고 오늘은 어떻습니까?

    지난 주간엔가 신문을 보니까 기독교의 유명한 지도자들이 좌악 나오는데, 뭘 만들었냐 하면 ‘기독교언론대책위원회’라고 하는 걸 만들었어요. 언론대책위원회가 뭐냐 하고 보니까, MBC의 ‘PD 수첩’에서 순복음교회, 광림교회, 충현교회 이런 대형 교회의 비리를 고발한다 하니까 그걸 막겠다는 거예요. 교회의 지도자들이 나와서 그걸 막느라고, 방송하면 고발하겠다고 나오는데, 정말 저래야 하나 싶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MBC의 그 방송을 봤습니다. 보니까 주눅이 많이 들어 가지고 기가 팍 죽은 채로 그 복도를 하는데, 기가 한풀 꺾인 보도인데도 어마어마해요. 첫째로 대형 교회,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솔직히 말해서 세습제, 그것도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문제는 교인들에게 허겁지겁 천당행 티켓을 팔아 가지고 돈 긁어모아서 그걸 어디에 썼느냐 하는 것이에요. 그 돈을 사용한 데가 다 나오는데, 기가 막혀요. 이건 탐욕의 집단이지, 그것에다 어떻게 교회란 이름을 붙이겠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제가 MBC의 담당자를 만나고서도 참 불쾌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한국에 그런 교회들 있습니다. 그건 얼마든지 고발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종의 모습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정말 희생적으로 일하는 교회들도, 제가 알기에도 여럿 있어요. 그런 교회들이 많이 있는데 왜 그런 것도 같이 소개하지 않느냐, 이런 것도 있지만 저런 것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못된 짓 하는 것만 발표한다 그 말이에요. 그건 불공정한 거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겁니다. 이 탐욕적인 권력이 우리를 망치고, 탐욕적인 기업들이 우리 사회를 이렇게 부패하게 만들고, 이 탐욕적인 모든 인간들이 도덕도 없고 윤리도 없이 사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는데, 교회가 이러한 탐욕적인 역사 속에서, 다 파괴되어 가고 있는 역사 속에서,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성육신한 예수의 몸으로 일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크리스마스에 개인이나 교회가 이런 깊은 자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제 제 이야기를 마치기 전에 묻습니다. 그럼 정말 설교하고 있는 나는, 내 안에는 그런 탐욕이 다 없고, 사랑만 가득히 차 있는가? 또 제가 섬기는 경동교회는 그렇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여러분도, 저 자신도 그렇지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이건 제 생각이니까 다른 신학자들이 찬성하느냐 뭐 그런 것 상관없습니다만, 저라는 사람은 눈을 감고 죽는 순간까지 아마 내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받아들였다면 내가 살아가는 방향은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나는 이걸 위해 살겠다, 나는 이렇게 살겠다는 삶의 방향 전환이 없으면 안 됩니다. 믿으면 구원을 얻고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뜻을 거기에서 봅니다.

    결국 내가 왜 사느냐? 뭘 하려고 살고 있느냐?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느냐? 내가 왜 한 살이라도 더 오래 살려고 하느냐? 그것은 말하자면 사랑하는 것, 사랑하기 위한 것, 그것이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땅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내게서 떠나지 않는 이 탐욕이 계속해서 나를 흔들지만, 내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는 그 말은 바로 사랑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와 십자가를 졌던 그 예수님이 내 안에 와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항상 내 안에서 나를 타일러 주고, 나의 방향을 바꿔 주고, 내가 잘못된 길로 가면 바로잡아 주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모시고 사는 나는 이 방향을 향해서 가는 도중에 많이 실패하고, 많이 쓰러져 넘어지고 그렇더라도, 마르틴 루터가 말한 거지만, 일곱 번 넘어졌다가도 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보면 다시 일어나게 되는 것, 그것이 믿는 사람의 생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항상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 나는 이래야만 한다는 것이 명백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될 때에 우리는 소위 “나는 죄인이올시다.” 하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많다.”는 그 말씀이 현실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 불완전한 우리들을 계속해서 완전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창조한 이 우주 안에서 탐욕의 사탄이 자취를 완전히 감춰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만이 나타나는 그날을 저는 종말의 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날이라고 믿습니다. 그 완성의 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바울의 말처럼 그렇게 “이미 얻었다는 것도 아니요, 이미 이뤘다는 것도 아니요, 목표를 향해서 부단히 달음질하고 넘어지고 일어서고 일어섰다 또 넘어지고 그러면서도 그 목표를 놓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삶에, 그런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탄생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을 모시고 살아가는 신앙인의 생활이요, 그분의 몸인 교회의 참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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