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종려)주일설교 / 빌라도의 오판 /마27:19-26 2011-04-14 23:44:56 read : 655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11 고난(종려)주일을 앞두고…설교 몇 편
장운철 kofkings@amennews.com
① 제목: 빌라도의 오판
본문: 마태복음 27:19~26
역사상 옳고 그릇됨을 판결하는 재판은 많이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뜻을 지닌 그런 유명한 재판들도 많이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빌라도의 예수에 대한 재판보다 더 유명한 재판은 일찍이 없을 것입니다. 이 재판이 역사적으로 그렇게 유명한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을 재판하였다는 것 때문입니다. 아마 이 같은 재판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단 한 번밖에 없을 재판일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야가 세상으로부터 재판을 받습니다. 이 같은 기현상은 이 땅에 또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재판은 유명한 재판입니다.
또 하나는 이 재판이 역사상 가장 큰 오판을 한 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여기서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인 오판을 하고 말았습니다. 실수도 보통 실수가 어닙니다. 빌라도의 단 한 번의 실수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인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습니다.
그래서 2천년 가까이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곳에서는 으레 빌라도의 오판을 고발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 얼마나 엄청난 불명예입니까? 두고두고 고발되고, 우리들 자손 대대로 영원히, 빌라도는 그렇게 고발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지도가자 되고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그만큼 책임이 큰 것입니다. 지도자는 일신의 안일보다는 후대의 평가를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후대의 평가를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식이고 종말 의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라도가 마땅히 들었어야 할 소리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1. 하나는 군중의 소리입니다.
빌라도라고 양심이 없었을 리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양심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양심이 제 기능을 발휘하면 피차에 유익이 됩니다. 그리고 조화와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 양심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 불행하게도 자신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에게도 불행을 끼치게 됩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날에는 너희가 나를 잡아 박해하고 죽이며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이 말씀은 양심의 타락 시대가 올 것임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때가 온 것입니다. 바로 며칠 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성대하게, 이스라엘의 왕으로,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호산나 노래를 부르며 옷을 벗어 땅에 깔고 그 위로 오시라고 환영을 했습니다. 여기서 군중들이 “호산나”하며 노래를 부른 것은 큰 뜻이 있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아람어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고 히브리어로는 “주여 청컨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였다는 말이고,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왕으로, 구세주로 영접을 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을 예사롭게 그냥 넘겨 버릴 수가 없는 중요한 부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랬던 그들이 불과 2, 3일 후에는 그 입으로 이번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여기서 두 음성을 동시에 듣습니다. 먼저는 성난 군중의 소리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의 성난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 같은 군중의 소리를 터무니없는 주장이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군중의 도움이 없이 정권의 유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남의 땅에 와서, 남의 백성을 치리해야 하는 정치인입니다. 그들의 소리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허점이고 맹점입니다. 이 세상에서 민주주의처럼 좋은 정치 제도도 없습니다. 최고의 이상을 지닌 정치 체제가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도 맹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중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목소리가 큰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정치체제입니다. 마땅히 소수의 의견보다는 다수의 의견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수의 의견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이 제도가 옳게만 이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밖에 모여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군중의 소리는 살인자 바라바는 석방하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는 소리입니다. 이것이 대다수 군중의 요구입니다. 이것이 지금 빌라도가 듣고 있는 소리입니다. 지금 군중이 요구하고 있는 소리를 따르면 그 대신 죄 없는 예수가 억울하게 죽게 됩니다.
2. 동시에 빌라도는 ‘양심의 소리’도 듣게 됩니다.
군중의 요구는 있을 수 없는 요구임을 그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살인자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이것은 가당치도 않은 요구입니다. 양심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소리입니다. 발라도는 지금 양심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고민합니다. 양심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아니면 군중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양심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정권을 지킬 것인가. 이것은 현실적인 고민입니다. 장래와 직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이상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따를 것인가, 우리는 흔히 보아 왔듯이 세상의 정치인들은 극히 현실주의자들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빌라도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는 고민하다가 결국 양심의 소리를 버리고 군중의 소리에 굴복하고 맙니다. 그리고 예수를 군중의 손에 넘겨주고는 대야에 물을 떠서 손을 씻으면서 하는 말이 “나는 책임이 없다”하고 책임을 회피합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오판을 하게 된 순간입니다.
그렇게 해서 빌라도는 몇 년 더 권세를 누리기는 했지만, 후대의 많은 사람들과 사가들은 그를 죄인으로, 오판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양심을 버리고 오늘만을 위하여 입신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사람의 표본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상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후대의 역사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마지막에 있을 심판 따위는 염두에도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현실만이 있을 뿐입니다. 양심이 밥을 먹여줍니까? 세상이 양심 가지고 살아지는 곳입니까? 빌라도는 양심과 현실과의 싸움에서 지혜롭게도 현실을 택한 사람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그의 손에 의해서 고난을 당하게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입니다.
3. 또 하나는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빌라도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어야 하고, 또 하나님의 소리도 들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양심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결정적인 실수의 요인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하게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빌라도에게 권고를 하셨습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에게 암시를 주셨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영감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를 죽이지 말라”, “그를 해롭게 하지 말라” 하고 분명하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19절에 보면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부인이 빌라도를 찾아옵니다. 와서 하는 말이 “예수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당부를 합니다. 간밤의 꿈에 그로 인하여 애를 많이 먹었노라고 남편에게 신신당부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부인을 통해서 그에게 엄중한 암시를 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우둔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직접 환상과 계시와 꿈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눈앞의 이이만을 중시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환상을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불행입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나 이익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그래서 환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부인에게 대신 꿈을 통하여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꿈속에서 예수님의 고난 받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같은 꿈을 꾼 부인이 와서 신신당부를 합니다. “그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기서 빌라도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마땅히 들었어야 합니다. 빌라도가 그날 아내를 통해서 주었던 당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더라면 그는 위대한 정치가로 길이 남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후대에 두고두고 위인으로 칭송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군중의 소리를 들을 줄은 알았고 양심의 소리도 들을 줄은 알았는데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줄을 몰랐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오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별의 별 소리를 다 듣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들을 소리, 듣지 말아야 할 소리, 모두를 다 듣고 삽니다. 때로는 들어서는 안 되는 소리에 솔깃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들어야 할 소리에는 둔감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무지이고, 비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라도가 그런 귀를 가졌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 이정익, 교회력에 맞춘 절기설교, 생명의말씀사, 1994, pp.120~125
▲ 엘 그레코 <겟세마네 언덕의 고뇌> 부분도
② 제목: 환호 중에 눈물
성구: 누가복음 19:28~44
오늘부터 성주(聖週)가 시작됩니다. 최초의 성주는 매우 기쁘게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환호를 받으시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신학자는 종려주일이 예수님의 생애 중에 가장 행복하셨던 한 날이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예수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마 21:10)했다고 했고, 예수님의 원수들인 바리새인들은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요 12:19)라고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큰 승리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그리고 그 성의 불행한 장래를 말씀하셨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종려주일에 관하여 성경의 기록을 다시 보고 이 날을 바르게 맞아야 하겠습니다.
1. 나귀의 새끼를 타신 이유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고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30) 예수님은 왜 나귀의 새끼를 원하셨습니까? 마태복음에는 나귀의 어미도 그 옆에 있었다고 쓰여 있습니다(21:2).
1)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2) 메시야이심을 확증하기 위해서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임하나니”(슥 9:9)
2. 호산나 찬양을 호락하신 이유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39~40)
예수님은 고난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영광 받기를 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 5:41),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요 8:50),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 10:45). 그러하신 예수님이 이날 만큼은 왜 찬양을 받으셨습니까?
1)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슥 9:9), 예수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이르고 계셨습니다. 자신에 관한 다른 모든 예언을 이루심과 같이 말입니다(마 1:23, 2:6, 15, 18, 23, 4:15, 8:17, 12:18, 13:35, 눅 4:21, 요19:24, 28).
2) 메시야이심을 확증하기 위해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38). 이 찬양은 메시야께만 드리는 찬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찬양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들이 이 찬양을 안 했더라면 이미 예언된 이 찬양은 돌들에 의해서라도 불려졌을 것입니다(40).
3.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 이유
1)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42절),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요 12:37~38)
예수님은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 1;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요 8:48)고 말했습니다.
2) 예루살렘의 파멸을 내다보셨으므로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43~44) 복음전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 도성의 불행한 미래를 보고 계시므로 주님은 우셨습니다.
종려주일은 주님에게 영광과 기쁨의 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순종과 장차 멸망 받을 자들을 향하신 눈물의 날이었습니다.
* 1984년 목회자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83, pp.141~143
③ 제목: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성구: 요한복음 17:9~26
오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과 함께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마지막 드리신 기도’를 생각하면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 살던 분이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주시는 말씀을 그저 가볍게 듣고 넘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어떻게 하든지 그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것이 사람의 도리일 것입니다. 하물며 예수님께서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동안 계시다가 원수에게 잡혀 죽기 전날 밤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더할 나위 없이 귀하고 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16장에 마지막 설교의 말씀을 하신 다음, 17장에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내용이 나오는데,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그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크신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일이 잘 되면 교만해지고, 일이 안 되면 비굴해지기 쉽습니다. 또 사람은 억울함을 당하고 위태로운 때는 마음이 초조해 지면서 세상을 원망하고 타락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억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아시면서도 낙심하고나 좌절하지 않고, 도리어 제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이 무엇인지, 하나하나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받겠습니다.
1. 예수님의 기도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요 17:1)
모든 일은 목적이 분명해야 성공이 빠르고 또 목적이 선해야 인격이 고상해집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목적은 항상 ‘아버지를 영화롭게’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하는 기도였습니다. 리처럼 우리의 기도도 목적이 분명해야 되는데,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비는 축복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드린 기도의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2.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 되심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요 17:11, 21~23).
어떤 훌륭하신 분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의 아들 5형제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너희는 밖에 나가서 각기 막대기를 한 개씩을 가지고 오너라”
아들들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여 즉시 막대기 한 개씩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아버지가 또 큰 아들에게 말합니다.
“애야, 끈을 가져다가 너희가 각각 가지고 온 막대기 다섯 개를 하나로 묶어라”
그래 큰 아들이 다섯 개의 막대기를 끈으로 묶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 묶은 막대기를 부러뜨려보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그 막대기 뭉치를 부러뜨릴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막대기 뭉치를 다시 풀어 하나씩 나누어 주면서 부러뜨려보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쉽게 그 막대기를 부러뜨렸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 줄 알겠느냐? 너희가 하나가 되면 손댈 자가 없는 가문의 승리가 오고 너희 형제끼리 서로 싸우면 형은 동생을 망치게 하고 동생은 형을 망치게 하여 필경은 너희 다섯이 모두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백성이 좋은 점도 많지만 나쁜 점 가운데 하나는 서로 싸우기를 잘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남이 좀 잘 되면 배가 아파서 꼭 훼방을 놓거나 중상 모략을 하여 끌어내리려는 것입니다.
또 아주 작고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당과 파를 갈라서 서로 물고 뜯으며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싸우게 되면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자들은 오직 원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갈라서게 되면 우리는 너도 나도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가 되어 서로 화목해야만 합니다.
2)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기를 기도하셨습니다(요 17:15).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악하고도 험한 세상입니다.
첫째로, 이 세상은 질병이 가득 찼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인간으로 하여금 병들게 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물을 통해 발생되는 병만 해도 그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물을 통해서도 많은 질병이 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입속에 들어가는 모든 음식물과 또 마시는 물에 대해 항상 신경을 써야 하며, 또 위생에 주의하지 않으면 반드시 무서운 질병에 걸려 끝내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단 일초도 쉬지 않고 마셔야 하는 공기 속에도 여러 가지 병균이 있습니다. 대기 오염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마음 놓고 숨조차 쉴 수 없게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찼습니다.
조금만 부주의 하여 음식을 먹으면 곧 육체에 병이 드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조금만 부주의해도 우리의 인격,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좀먹게 하는 죄가 너무도 많습니다.
셋째로, 이 세상은 사람을 믿을 수 없는 곳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아홉 번은 신용을 잘 지키다가고 마지막 열 번째는 몽땅 떼어먹고 달아나는 짓을 예사로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 자기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신용을 지키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자기가 손해를 보게 되면 배신을 합니다. 또 처음에는 잘 하는 척하다가도 때가 되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배신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질병과 죄악과 불신과 실패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인생들을 생각하시고 기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 같은 죄악 세상에 빠지지 않고 순수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전시켜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3) 하늘에 속한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요 17:19).
거룩하다는 것은 죄와 구별되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두운 이 세상을 살면서 이처럼 거룩해 지려면 먼저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어두음을 밝게 비칠 수 있는 등불은 바로 이 지혜의 등불뿐입니다. 세상의 법은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 됩니다. 그러나 그 불은 꺼지기 쉽고 변하기 쉽습니다.
완전한 인생이 없는 것처럼 인간이 만든 세상의 법도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도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 됩니다. 인간생황을 보다 더 편리하게 하여 줍니다. 병든 육체를 치료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도 완전한 등불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편리하면 편리할수록 더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목말라 하며, 인간의 의학은 새로운 병의 발생을 뒤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혜입니다. 지혜는 곧 진리입니다. 진리를 소유한 자만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악과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다. 진리에 순종하면 사랑하는 자만이 죄악과 분리될 수 있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만이 어두운 세상을 밝은 대낮과 같이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거룩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거룩해 진 사람은 자신의 길은 물론 다른 사람의 앞길까지 비추어 주는 빛의 사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4)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요 17:24).
사람들은 여러 가지를 보면서 기뻐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상인은 장사가 잘 되어 번창해가는 사업을 보고 기뻐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예금통장에 예금액이 점점 늘어가는 것을 보거 히죽거리며 좋아합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은 참된 기쁨에 속하지 못합니다. 떠가는 구름을 보거 “저 구름은 내 것이야”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다면 미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떠가는 구름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만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돈을 조금만 모아도, 쥐꼬리 만한 권세를 잡아도 그것이 천 년 만 년 자기의 것인 줄 아록 교만한 사람도 미친 사람입니다. 세상의 허망한 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하는 어떤 부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가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그에게 물었더니 돈 모으는 재미로 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저녁에 가서 내 장부를 조사해 보고 예금통장에 잔액이 전날보다 늘어났으면 기분 좋게 잠을 자지만 예금 잔고가 조금이라도 어제보다 떨어진 날은 잠을 잘 수거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너 그러지 말고 이제는 좋은 일에 네 돈을 좀 써라. 만사는 기회가 있는 법인데 그러다가 선한 일에 한 푼도 써보지 못하고 죽으면 어떻게 할래”하니까? “내가 죽긴 왜 죽어, 난 돈 모으는 재미로 산단 말이야” 하고 큰 소리를 치더니, 얼마 후에 죽었습니다. 그 많은 재산 가운데 그가 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장례식 비용밖에는 없었습니다. 또 감옥에 같혀 보면 재미있는 일이 많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무엇을 놓고 기뻐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데 예수님 자신에게 주신 영광을 제자들도 볼 수 있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3.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시고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나의 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낙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시작했으면 전진뿐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앞의 요단강은 육지가 되고, 여리고는 편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사악한 세상, 넘어지기 쉬운 세상, 의인이 핍박을 받으며 악인이 큰 소리 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르는 우리를 보전해 주시도록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처럼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며 하나가 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성도는 모두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값 주고 산 하나님의 자녀이니, 이들이 하나가 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죄와는 상관이 없는 거룩한 사람들이 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낙심하고 쓰러지기 쉬운 세상에서 주님이 받으신 영광을 바라보고 기뻐하며 참된 길을 걷게 하여 달라고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이 같이 기도하고 계심을 믿고 담대하게 전진함으로 하나님께 복을 받아 누리므로 자신이 천국을 소유하고 남들에게 빛을 비춰주며 후손들에게는 풍년의 곡식을 물려주는 성공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김창인, 절기설교집, 충현교회출판부, 1986, pp.113~127
④ 제목: 주님의 사람이 되려면
성구: 빌립보서 2:5~11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극진히 사랑하셨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사는 동안 언제나 그와 함께 계셨고 그에게 전적으로 능력과 지혜를 베푸셨다. 그를 십자가에 매달리도록 내버려 두셨으나, 마침내 그를 죽음의 권세의 손아귀에서 빼어내시어 부활하게 하셨고 하늘로 부르시어 보좌에 오르게 하시고, 하늘과 땅의 가장 큰 영광을 그에게 입혀주셨다.
이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서만이 아니고, 모든 믿는 사람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힘써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영광을 입혀 주시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고별하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1, 4~5)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영광은 무엇인가? 십자가를 지시고 메시아의 사역을 완수하신 것이 첫째 영광이요,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이 둘째 영광이요, 하늘나라 영광 보좌로 승천하신 것이 셋째 영광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받으실 영광이 아니고, 어떤 사람에게든지 열려진 영광의 길이다. 주님께서는 영광에 이르는 이 길을 우리들에게 오늘 말씀하신다. 이 길은 우리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진영에 속한 하나님의 편이 되게 하시는 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님의 사람이 되는 길인가를 오늘의 본문에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첫째로 자기의 것을 다 내어 놓는 사람이 주님의 사람이 된다.
오늘 본문에 읽어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비웠다(6~7절)고 했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옥심도 비우고, 꿈도 비우고, 긍지도 비웠다는 것을 말한다. 세상사는 사람이 자기 주머니와 자기 마음속을 비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려운 일이다. 누구나 비우기보다는 채우기를 바라고, 가진 것을 놓기를 싫어한다. 인간의 본능은 많은 것을 가지기를 원하는데 왜 주님께서는 반대로 비우라고 말씀하시는가?
주님께서 하루는 한 부자 청년을 만나 영생에 이르는 방법에 관하여 말씀을 하시다가 그 청년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 19:21)고 하셨다. 그리고 제자가 되는 조건을 말씀하실 때에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재산을 개인적으로 소유하지 않는 어떤 공산사회의 이상을 말씀하신 것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엄격한 의미에서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전체 국민의 무소유화 이념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과연 무엇 때문에 하신 말씀일까?
주님께서는 인간이 지금 향유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우상이 되어 있는 현상들을 많이 보셨다. 주님께서 만나셨던 부자 청년이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재산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이와 동일한 형태의 갈등은 가령 자기의 가업이나 가족과의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임을 성경은 말한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가족들과의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것도 주님께서는 핀잔하셨고, 심지어 부친의 장례마저도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지내게 하라”고 하시며 지체 없이 주님을 따를 것을 명령하셨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셨으며,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고 하셨다. 이것은 무엇인가? 세상에 불효막심하고 의리 없는 인간이 되어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말씀이 아니라. 주님보다 처자와 형제가 더 귀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고, 주님보다 자기 재산과 사업과 지위와 포부가 더 소중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둘째로, 남을 섬기는 사람이 주님의 사람이 된다.
오늘 본문에,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라고 하였다. 이것을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철저히 섬기는 자로 세상에서 사셨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도,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 10:45)고 하셨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과 우리 모두에게 이르기까지 교훈하시기를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눅 22:25~26)고 하셨다.
말씀으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으로도 섬김의 도를 보여주셨다.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네가 딛고 다니며 네가 더럽힌 발은 네가 씨는 것이 우너리이다”라고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부수고, “네가 더럽힌 발이지만 나의 수고로 너의 발의 더러움을 씻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이다”라고 말없이 가르치셨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주님께서 새계명을 가르쳐 주시기를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고 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섬기기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이다. 먼저 하나님을 섬기고, 또한 이웃을 섬긴다. 주님께서 구약성경을 두 마디 말(성구)로 요약한 대목에서 우리는 이것을 본다(마 22:34~40). 하나님은 어떻게 섬기는가? 하나님은 형체를 지니지 않은 분이시므로 다만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림으로써 섬긴다. 우리의 심령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주님과 기도로 대화를 나누며,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주니께 예배한다. 그리고 이웃을 섬기는 기준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셨다. 또 사랑의 범위에 대하여 가르치시기를 “원수까지 사랑하라”(마 5:44)고 하셨다.
셋째로,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주님의 사람이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에 관하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다. 우리들의 믿음의 표상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다. 내가 질 십지가란 무엇인가? 어디에 그 십자가가 있는가? 고행을 하라는 말인가? 그러나 기독교는 고행의 종교가 아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고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밤하늘에 수없이 별똥별이 떨어진다. 그 별똥별은 드넓은 하늘을 질주하고 있을 때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대기권에 들어설 때에 공기와 마찰하며 산화할 때 강렬한 빛을 내는 것이다. 주님께서 주님의 메시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셨을 때에 주님은 세상에 강한 배척을 받으시게 되었고 십자가 형틀로 밀쳐 보냄을 받을 수밖에 없으셨다.
그리스도인들이 져야 하는 십자가는 일부러 받는 ‘고행’이 아니라, 세상이 주는 ‘고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나타낼 때에, 즉 몸소 죽으심으로 대속의 제물이 되셨으나 부활하시어 우리의 부활도 약속하신 주님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또 하나님의 공의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힘 있게 사람들 앞에 나설 때에는 세상은 곧 우리들을 핍박하고 십자가 형틀로 보낸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진다’라는 말의 반대 개념은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가 아니라 ‘십자가를 피한다’로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일을 기념하는 주간을 맞이하는 여러분, 이 주간을 지킴으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자세를 다시 한 번 가다듬고, 교회의 힘을 키우는 복된 주간이 되기를 축원한다.
참고사항: 설교의 세 가지 소제목들이 모두 실천적 강령들이지만, 너무도 높은 수준의 실천 원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에게는 막연하게 느껴질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것이 결코 실현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고, 신실한 신자들에게서 오늘도 실천되고 있는 사항들이라는 점을 분명히 전달하도록 권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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