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찾아오신 하나님 / 욘3:1-5, 욘3:10 2005-10-14 13:44:21 read : 5650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두 번째 찾아오신 하나님
요나 3장 1~5절, 10절
오늘 본문 말씀에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하신 뜻깊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제멋대로 도망가다가 큰 풍랑을 만나 죽을 뻔하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그 물고기가 토하는 바람에 가지 않으려고 하던 니느웨 성에 들어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라고 외쳤더니 뜻밖에 하나님을 믿고 왕부터 온 국민과 짐승들까지도 금식하여 베옷을 입고 회개했더니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고 구원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배반자를 찾아오신 하나님
선지자 요나는 원수의 나라, 니느웨 성으로 가서 “40일 후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한다”라고 외쳐 회개시키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가기 싫어서 다른 성읍,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원수의 나라이고, 멸망해야 속이 시원한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큰 풍랑을 일으켜서 결국 요나를 바다에 집어던졌는데 큰 물고기를 준비했다가 꿀떡 삼켜서 니느웨 성에 갖다 토해버렸습니다. 요나서 2장에 보면 물고기 뱃속에서 자기의 죄를 깊이 회개하며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요나의 불순종하고 배신한 죄를 용서하고 두 번째 이 배신자 요나를 찾아와 사명을 주셨습니다. 요나 3장 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하는 은혜로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기만 하면 두 번이 아니라 열 번이라도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고 사명을 맡겨주시는 인자하심과 사랑이 한량없으신 분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은 반역자, 배신자라도 회개하고 돌이키기만 하면 용서하시고 찾아오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죽을지언정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라고 장담을 했지만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매를 맞고 침뱉음을 받고 고통을 당하실 때에, 한 소녀가 와서 예수님과 일당이라고 하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주님을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네가 수제자로서 나를 배신해? 괘씸한 놈” 그러시지도 않았고, “죽을지언정 나를 배반하지 않겠다던 네가 작은 계집아이 앞에서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해? 네가 그럴 수 있느냐?” 그런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배신자 베드로를 다시 찾아간 예수님은 다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고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묻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 하시고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시고,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실 때, 세 번씩이나 물으시니까 베드로는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할 때에 주님은 역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요21:15-17).
아무리 주님을 배반하고 잘못했을지라도 과거의 잘못을 묻지 않으시고 앞으로 할 일, 사명을 맡겨 주신 분입니다. 그뿐 아니라 아침 일찍이 찾아가셔서 숯불을 피워 생선을 구워서 아침식사 준비를 하시고 와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생선을 볼 때에 베드로는 5병2어로 5,000명을 먹이던 생각도 났을 것이고 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실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 잡았던 생각도 났을 것이고, 피워놓은 숯불을 볼 때에 비전들과 함께 숯불을 함께 쪼이다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이 생각났을 것이고, 주님이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때에 자기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것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로 베드로를 책망하시지 않고 사랑으로 대해주셨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둘 다 잘못했지만 베드로는 곧 회개하고 돌이켰는데 유다는 후회는 했으나 회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회개할 기회를 몇 번 주셨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최후의 만찬 시간에도 유다가 떡을 집을 때에 주님이 떡그릇에 손을 넣으시며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하셨는데도 회개치 않았고, 또 주님이 “이 가운데 나를 팔 자가 있다”라고 하실 때 유다도 “랍비여 내니이까” 하고 물을 때 직접적으로 “네가 말하였도다”(마26:25)라고 일러주셨지만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나중에 후회하며 자살은 하면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돌이키고 회개했기 때문에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자를 끌고 와서 사람들은 돌로 쳐 죽이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고 하시고 군중이 다 사라진 다음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 하시며 돌려보냈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잘못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비방하고 참소하며 사람을 괴롭히지만 주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창으로 찌르고 모욕하는 무리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누가복음 23장 33~34절에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사실은 이 말씀을 한 번만 하시지 않고 로마 군병들이 채찍으로 내려칠 때에도 “아버지여, 용서하시옵소서. 알지 못해서 그럽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다 넘어지실 때에도 “아버지여, 용서하시옵소서”, 십자가에 눕히고 못을 박을 때에도 “아버지여 저들이 몰라서 그러는 것이오니 용서하시옵소서” 하고 여러 차례 그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2. 하나님께 절망이란 없습니다
어떤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하나님은 포기하시지 않고 그에 대한 소망을 저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끌어다가 옥에 가두고 죽이는 데 가담한 사람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탕에 맞아 순교할 때도 바울은 총 지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다음에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물이 되었고 신약 성경의 절반 이상을 기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하고 큰맘 먹고 질문할 때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8:21-22). 그만큼 주님의 용서와 사랑은 넓고 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쉽게 못 살 사람이라고 단정해버리고 포기해버리는 잘못을 범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지금까지 강도짓만 하다가 붙잡혀 처형당하는 강도가 회개하면서 구원해주기를 요청할 때에 “너 같은 놈이 무슨 염치로 천국 가겠다고 하느냐?”라고 하시지 않고 즉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구원해주셨습니다.
또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갈 때에 실패하거나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으로 알고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포기하시지 않고 돌아오기를 원하시고 일으켜 세우시기를 원합니다. 아브라함 링컨 같은 사람은 주지사에 출마했다가 몇 번 실패하고,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몇 번 실패하고, 부통령에 출마했다가 실패하고, 여러 번의 패배 끝에 대통령에 출마해 당선되어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평생 갚아도 갚기 어려운 빚을 진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다 해결되었습니다.
3. 남의 잘못을 잊어주는 사랑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 죄를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기억도 하지 않으시고 잊어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이사야 44장 22절에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이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도말”이란 말은 노트에 잘못 쓴 것을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끗이 지워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25절에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기억치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잘못을 몇 십 년 지나도 잊지 않고 참소하고 비방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남의 잘못을 용서하고 잊어버려야 참 된 사랑입니다. 오래 기억하지 맙시다. 우리에게 배은망덕하고 배반하고 배신했을 때 그것을 잊어버려 주고 사랑을 베풀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우리 교회에 있던 목사님이나 또는 다른 교회 목사님 중에 배은망덕하거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배신행위 했을 때 도와주기는커녕 때려 내쫓아도 시원치 않을 사람들도 있었지만 잘못을 잊어버려주고 개척비를 대주거나 사랑을 베풀 때 마음이 편안하고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들도 잘못이 많은 죄인들이니까요. 어떤 분이 “크리스천이란 용서 받은 죄인이다”라고 했고, 어떤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함과 동시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아마도 이웃과 원수는 같은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원수에 대하여 좋게 이야기하라. 원수는 당신이 만든 것 이기 때문이다”, 또 “최대의 정복자는 때리지 않고 원수를 이긴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남의 잘못과 나에게 준 상처를 잊어버려 주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일행을 사마리아로 통과하지 못하게 가로막자 요한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진멸해 버리십시오”라고 할 때, 난 아래 주를 보면 누가복음 9장 55절에 “가라사대 너희가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하러 왔노라”고 어떤 사본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라비안 교파의 선교사가 에스키모인들에게 전도할 때 “용서”라는 단어가 없어서 그들이 만들어낸 단어가 “이쑤마지주중가마이너미크”인데 그 뜻은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것(not-being-able-to-think-about-
it-anymore)” 입니다. 참 좋은 단어입니다. 용서란 남의 잘못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려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사야 43장18~19절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Emerson은 링컨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의 가슴은 세계를 품을 만큼 넓지만, 그러나 남의 잘못을 기억할 만한 여백은 조금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인내를 경작하라(forbearance). 당신의 마음에서 좋은 수확을 거둘 때까지 남의 불친절함을 될수록 짧게 기억하도록 하십시오”.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리면서 자기와 말다툼한 화가의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니까 영 그릴 수가 없더랍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회개하고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니까 잘 그려지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글에 “용서란 꽃이 발에 밟힐 때 발하는 향기와 같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남의 잘못을 잊어버려 주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위대한 용서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잘못을 기억도 하시지 않고 도말해버리겠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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