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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모던 문화에서의 설교와 설교자
    2003-03-24 19:30:56   read : 2093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예배의 핵심인 설교가 교인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있다. 매스미디어에 길들여진 교인들, 특히 청장년들은 10여분 이상 설교에 집중하지 못하고 설교자의 독백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은 “단순히 문화적 현상으로 단정 짓기에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교육훈련원 주최로 지난달 22일부터 23일까지 열린 제11회 목회자 전문과정교육에서 이성민교수(감신대 설교학)가 강연한 내용중 ‘포스트모던 문화에서의 설교와 설교자’란 내용을 4회에 걸쳐 발췌 게재해 그 대안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주>

    이성민 교수
    (감신대)



    설교를 통해 항상 새로움 요청

    설교는 지루한 것이어야 하는가? 포스트모던의 시대의 교회에서 설교는 설교자와 회중에게 부담스러운 사역이 되고야 말 것인가? 이러한 징후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Charles Rice는 전자 미디어에 길들여진 청중이 15분 이상을 한 연설가나 설교자에게 집중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면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의 설교자들은 설교의 시간을 보다 짧게 조정하는 것밖에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인가?

    설교가 설교자에게 부담이 되고 회중에게 지루해진 이유가 단지 청중의 인내심의 한계가 짧아진 것에 있다면 더 이상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 없고 그저 수용할 수밖에 없는 문화현상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단정하기에는 예배에서의 ‘말씀의 사건’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또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설교의 시간을 단축한다는 것은 설교자의 무책임성으로 인정될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먼저 설교의 사역이 그리스도교의 예배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하고, 설교가 진부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 이유를 찾아보며, 문화와의 관계성 속에서 설교의 사역이 가지는 의미와 위치를 새롭게 점검해 보고, 또한 포스터모던 문화 속에서 교회의 설교 사역이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전망하도록 하고자 한다.

    전통적 가치 대변
    설교의 사역은 일차적으로 변하지 않는 복음을 세상 끝날 까지, 그리고 땅 끝까지 전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시대와 문화 속에서 전파된다. 복음과 시대와 문화의 만남은 특정한 교회의 전통을 꽃피우고 설교는 이러한 교회의 전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복음은 동일하지만 꽃 피우고 열매 맺은 교회의 모습은 다양하다. 복음 선포의 책임과 아울러 교회는 설교의 사역을 통하여 교회의 전통을 전수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의 권위가 높아질수록 설교가 본질적인 계시의 기능에 사역의 중심을 두지 않고 교회의 전통적 가치를 대변하는 역할을 핵심적 직무로 삼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나님의 은혜와 계시의 통로로써가 아니라 교회의 가치관 등 교회의 전통적 가치나 특정한 신학적 관점을 대변함으로써, 복음을 선포하기보다는 교회와 신학 사조의 권위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설교는 교회의 전통을 유지시켜 주는 도구로 활용되면서, 설교가 윤리적이고 신학적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불가피한 현상이기 하나 그럼에도 설교는 도덕 강연이나 신학 강연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변혁의 힘 담아야
    설교가 교회의 신학의 전통을 세워주는 기능을 불가피하게 수행하면서도, 설교는 전통적 가치관을 뛰어넘는 변혁의 힘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모든 사역이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설교 사역의 중심적 목적은 사실 전통을 세우고 유지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와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키는데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설교의 사역은 본질적으로 개혁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고 소개한다. 회개의 과정에는 지금까지 당연하게 인식하던 전통을 복음의 빛 아래서 재평가하는 단계가 따른다. 참된 의미의 능력있는 설교는 전통을 변호하는 설교라기보다는 교회와 사회의 전통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시키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하는 변혁의 도구로써의 설교인 것이다.




    2. 설교사역에서의 문화화




    설교자 회중이 함께하는 ‘말씀 잔치’


    복음과 문화

    ▲교육훈련원 주최로 열린 전문목회과정교육 워크샵 모습
    설교가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로 수행되지 못하고 단지 교회의 전통을 수호하는 차원에만 머무르게 될 때에 설교는 오히려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게 된다. 가장 우려가 되는 점은 설교자와 회중이 ‘복음’과 ‘전통’을 구분하지 못하는 결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설교를 통해 교회의 전통적 가치관을 맹목적으로 보호하려고 하다가 보면 ‘전통의 수호’가 ‘복음의 선포’로 인식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복음’은 불변하지만, 그 ‘복음’을 표현하는 교회의 삶의 양식은 그 시대의 문화와 가치관의 옷을 입게 된다.


    설교가 교회의 전통을 대변하게 될 때에 따르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설교가 그 시대의 문화를 반목하는 경향을 띠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교와 문화와의 불필요한 갈등 양상을 만들어 내게 된다는 것이다. 설교가 반문화적 양상으로 나타날 때 교회는 불필요하게 많은 문화 현상을 정죄하게 된다. ‘죄’라기 보다는 단순한 가치관의 변화에서 오는 문화 현상을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 문화와 호흡하고 사는 사람들을 ‘문화적 죄인’으로 단정하게 될 때에 교회는 ‘복음적’이라기 보다는 ‘반문화적’인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때로 복음의 사역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복음은 내용적인 측면에서 ‘기쁜소식’으로 율법적이지도 전통적이지도 반문화적이지도 않다. 복음은 율법과 전통과 문화와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에 매여있지 않으며 반대로 그것들을 억압하지도 않는다. 복음은 독립적인 하나님의 계시로서 존재하면서 결실을 얻기 위해서 율법과 전통과 문화 안에서 활동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이 땅을 초월하여 계신다. 그리고 이 땅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거하신다.
    아르테마이에르(Elizabeth Achtemeier)는 자연세계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간에 의해서 합당하게 관리되어야 함을 지적하면서도 자연세계를 절대시하는 것을 경계한다. 자연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계시는 자연세계 안에서는 제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피조물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여 예배하지는 말 것을 권고한다.
    문화를 자연계시의 발전된 단계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문화를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빛으로 바라보고 관리하여야 할 책임을 통감하게 되면서, 동시에 문화가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것은 경계하여야 한다. 문화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그리스도를 담고 있는 그릇이 되면서도, 동시에 복음을 배척하는 체계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설교에서의 문화화
    설교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획일적이거나 반문화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문화화를 경험한다. 설교의 사역은 다양한 전달 방법을 필요로 한다. 설교는 설교자의 독백이 아니다. 설교는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 하는 말씀의 잔치이며, 풍성한 잔치가 되기 위해서는 설교자의 부단한 노력이 요청된다. 설교자는 커뮤니케이션의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동시대의 사람들이 최고로 동감할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설교는 복음의 문화와 사회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문화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회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문화화(enculturation)이다. 문화화 없이 인간 사회란 존재하지 못한다.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협동, 경험의 나눔, 이러한 경험들을 세대 사이에 전수하는 것, 조화로운 상호반응, 그리고 개인과 사회 자체의 생존까지 모두 다 인간이 그들의 사회에 의하여 문화화 되어왔기에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설교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에 인간의 수고와 노력을 초월하는 영적 감동의 내재가 필수적이지만, 그러나 설교자는 적극적으로 대화하려는 자세와 진지한 노력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따라서 설교는 회중의 성격에 따라 구조와 표현 방법에 있어서 다양한 접근을 필요로 하며, 이것은 곧 설교의 사역에 있어서의 문화적 수용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설교는 성서의 계시의 문화화 과정이다. 성서 해석의 과제에 나타나는 어려움의 원인은 부분적으로는 성서 본문 자체에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해석자 자신에게 있다. 본문의 역사적 특수성은 후대의 독자들이 본문을 적용하고 관계를 맺는 일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의 역사적 특수성의 옷을 벗기는 일이 해석자의 과제이다. 본문의 내용을 오늘의 상황에 맞도록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설교는 역사적 특수성을 지닌 성서의 본문을 특정한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회중들에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전하는 사역이다.


    ‘설교의 문화화’ 생명력 발휘에 도움


    청중의 지루함 덜어내야
    언어의 표현은 ‘대화체’로


    포스터모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선택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과정은 매우 복합적이다. 이제는 콜라와 사이다의 선택이 아니라, 펩시와 코카콜라의 선택이며, 더 나아가 다이어트 펩시와 레귤러 펩시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사람들은 자기 기호에 맞는 생활 양식을 중요시하며, 결정해서 주는 것보다는 찾아서 선택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이제 앉아서 인내하기보다는 자기에게 복음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전해주는 설교자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특성을 생각하면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설교의 문화화를 위하여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지루함은 설교자의 잘못
    포스트모던 문화는 지루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복음에는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다면, 복음을 전하는 설교는 결코 지루할 수 없다. “지루함은 악의 한 형식이다 … 지루함은 그 자체가 죽음의 형식은 아닐지라도 죽음의 예고이다.” 설교가 지루하다가 평가되는 경우 그 책임은 설교자와 청중에게 함께 물어야 하지만, 근본적인 책임은 설교자에게 있다.
    왜냐하면, 복음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죽어가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청중이 살아있다면 설교자는 큰 방해를 받지 않고 권능있는 설교를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의 선포는 청중의 무관심과 괴리감을 전제하고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생명을 경험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설교자의 설교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매력을 끌지 못하고, 매 주일 예배의 설교가 지루함의 연속이라면, 설교자는 신속히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는 설교자로서 부르심을 받았지만 설교 사역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목하고 권능의 설교를 하려고 하는 노력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복음의 선포는 지루할 수 없다. 포스트모던 문화는 선택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소외와 자아상실로 인한 죽음의 행진을 예고하고 있다. 따라서 포스크모던 시대는 생명을 향한 갈망이 그 어느 시대와 문화보다도 강렬한 시대이기도 하다.

    설교의 생명은 통신
    복음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면, 이 복음을 전하는 설교의 생명력은 이 복음을 어떻게 전달하는가에 달려있다. 복음이 ‘what’의 문제를 다룬다면, 이미 계시된 ‘what’을 전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how’의 문제이다. 설교자는 끝임없이 ‘what’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끝임없이 ‘how’를 찾아내는 작업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스위트(Leonard Sweet)는 포스트모던 문화에서는 설교 시간의 길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설교를 통해서 얻어지는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문제는 설교가 얼마나 길어야 하는 질문이라기보다는 설교가 어떻게 진행되는가 하는 것이다.” 특별히 복음이 이미 충분히 제시된 문화속에서 설교를 통해서 복음이 진지하고 활기 있는 통로를 통해서 경험되어질 때 설교는 생명력을 발휘하게 된다.

    설교가 살아있는 통신이 되기 위해서 설교자는 전통의 옷을 벗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옷을 벗고, 포스트모던의 청중에게로 내려가야 할 필요가 있다. 전통을 모두 부정하고 포스트모던에 취해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포스트모던의 옷으로 과감히 갈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포스트모던 문화 현상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폴란드(Larry W. Poland)는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미디어를 이방인으로 여겨야한다”고 주장하며 미디어 문화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끼치는 부정적인 측면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사역이 문회의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는 문화는 그 자체로서는 선과 악으로 판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의 도구도 될 수 있고 악의 도구도 될 수 있는 사람의 양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설교가 살아있는 통신으로 자리 매김하려면 설교의 언어 구사는 대화체가 되어야 한다. 근대 문화 속에서 설교가 연설이나 강연과 같은 문어체를 주된 언어 구사의 수단으로 삼았다면, 포스트모던의 설교에 있어서 언어의 표현은 보다 구어체 중심이어야 한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목소리보다는, 대화식의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진행하면서, 때로는 속삭임으로, 때로는 강한 톤(tone)의 권면으로 화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야 한다.

    예배를 ‘축제의 장’으로


    설교는 살아 숨쉬는 ‘이야기’
    근대 문화 속에서 설교가 논리적 전개를 중심으로 이성적 판단을 중요시했다면, 포스트모던의 설교는 감성적 감동을 생명으로 한다. 근대의 사람들이 글과 책과 논쟁을 좋아했다면, 포스트모던의 사람들은 음악과 영화와 감동을 좋아한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논리적으로 설득을 당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 “나를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나를 감동시켜 주시오.”
    근대의 설교가 삼단논법의 기술로 서론과 본론과 결론의 틀 안에서 문장과 문단의 구성을 중요시했다면, 포스트모던의 설교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중요시한다. 서론과 본론과 결론의 눈에 보이는 틀 속에서 전달되는 설교는 감동적일 수 없다. 서론에서 이미 본론이 예견되고, 심지어 서론에서 결론이 나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의 설교자에게 시급히 필요한 기술은 ‘storytelling’이다. 설교는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여야 한다. 설교는 이제 더 이상 강연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하나의 드라마로 제시 되어야 한다. 성서의 계시가 과거의 기록이 아닌, 오늘 살아있는 이야기로 다가와야 한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창세기의 인물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문화 속에 사는 사람으로 소개 되어야 하며, 그들이 받은 고난과 축복이 바로 ‘나’와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한다.

    Storyteller로써의 설교자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시와 비유와 이야기를 통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과 대화(communication)하셨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은 시적 언어를 통하여 청중을 감동시킨다. 더 나아가 소금, 등불, 공중의 새, 백합화, 눈속의 들보, 좁은 문, 모래 위의 집 등과 같은 일상적 소재들을 통하여 청중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마태 기자는 이러한 예수의 설교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는 이야기식 설교의 모델이 된다. 청중의 문화 속에서 일어날 만한 이야기를 비유로 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쉽지만 감동적으로 전달하였던 것이다. 논리적 설교를 통해서 청중은 설득의 굴복을 경험한다면, 비유를 통해서 청중은 스스로 그 의미를 찾아가는 해석의 자유를 경험한다.

    설교자는 예술가
    근대의 설교자가 설득력이 강한 연설가였다면, 포스트모던의 설교자는 복음의 생명력을 연출하는 예술가이다. 근대의 부흥사가 목소리를 높였다면, 포스트모던의 설교자는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를 속삭이며 청중의 가슴에 불을 짚인다. 예배는 강연회가 아니다. 예배는 축제의 장이 되어야 한다. 포스트모던의 사람들은 보다 반응하며, 참여하며, 발산하며, 촉각을 세울 수 있는 예배를 갈망한다. 이제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적 본성이 예술을 통해서 드러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예술, 상상력, 이야기, 상징, 드라마, 이러한 것들이 교회를 채워야 한다.

    하나님 사랑의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있는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 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빛의 아버지가 주신 모든 선물들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다. 하나님 사랑의 충만함이 자기의 독생자 안에서 나타난 후에, 우리의 사랑의 응답은 그의 아들에게로 뿐 아니라 그가 구원하러온 이 세상 안에 있는 그의 구원의 대상들에게로도 향한다.

    하나님의 미(美)에 대한 우리의 심미적 응답은 우선적으로 항상 수용적인 자세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피조물이며, 우리는 자연세계와 그 형상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형성한 인간의 문화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의 예배 인도자는 드라마 연출자가 되어야 하며, 설교자는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청중들의 가슴에 그려주는 비전의 사람이어야 한다.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온 세계에 알게 할지어다(사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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