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즈교수의 열린예배 비판에 대한 반론
최근 개혁주의 설교연구원 주최로 호주 장로교 신학교 교수인 반즈(Peter Barnes)교수가 발표한 세미나에서 매우 강하게 윌로우 크릭교회를 비판하였다.
표면적으로는 빌 하이블스 목사와 윌로우크릭교회를 비판하였지만 본질은 소위 열린예배(구도자 예배, Seeker Service)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반즈 교수의 논문에 나타는 열린예배가 문제가 있다는 논지를 보자면 크게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열린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첫째로 반즈교수의 의견을 요약하자면 예배는 인간을 기쁘게 하는 목적으로 드려져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최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반즈는 "복음을 제시하기보다 사람들을 기쁘하게 하는 공연을 베푸는데 강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같은 주장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당연히 커버넌트 신학교의 예배학 교수 로버트 레이번(Robert G. Rayburn)이 예배에 대하여 정의한 것처럼 "성경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는 오직 구속받은 자들만이 제대로 드릴 수 있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열린예배를 반대하는 이들은 절대로 "예배"라는 명칭을 열린예배에 붙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열린예배는 영적으로 성숙한 이들을 위한 예배가 아니라, 영적으로 미성숙한 이들이거나 아직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고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을 위해 준비한 예배이다. 그런 의미에서 열린예배는 복음전도적인 관심에서 드려진다. 복음전도적 관심,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의 모범을 좇아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제시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를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굳이 예배라는 명칭대신 전도집회라고 부르면 좋지 않은가하는 주장이 옳을 수도 있다. 당연히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이들이 상당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장하기를 원한다면 아직 육체적으로 미성숙한 영아부, 유치부를 비롯한 주일학교, 혹은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중고등부가 드리는 많은 형태의 예배들도 집회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잠재적인 예배자이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예배는 아닐 수 있지만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찾고 있거나 열려있기에 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예배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열린예배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반즈 교수는 사람들을 전도하는 목적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다보니까 복음의 거룩성이 상실되고 천박해지게 되었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비신자들에게 부담을 주지않으려는 시도는 자칫하면 예배가 쇼로 흐르거나 하나님의 거룩이나 죄에 대한 심각성을 생각하지 않는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만일 열린예배가 기성신자들을 위한 예배라면 당연히 이같은 주장은 옳은 주장이 아니다. 간혹 일부 교회들이 찬양집회 혹은 기성신자들을 위한 축하행사등을 열린예배로 칭하면서 타협된 형태의 예배를 취하는 것은 일면 반즈교수가 지적한대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왜곡된 예배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 하지만 열린예배는 기성교인들을 위한 예배가 아니다. 앞에서 말한대로 영적인 어린아이나 비신자들을 위한 예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린예배는 단순히 사람을 기쁘게 하는 예배가 아니라 영적인 어린아이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위하여 문화를 적용한 예배의 형태를 띄게 되는 것이다. 반즈 교수가 긍정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교회를 다니지 않는 자들이 구도자들의 느낌을 추구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심사숙고한 시도들"로 예배를 준비한다. 그런 의미에서 열린예배만큼 잘 준비된 복음이 녹아있는 예배는 많지 않다.
윌로우크릭교회 구도자예배에서도 볼 수 있지만 예배 시작부터 설교가 선포되고 마쳐질 때까지 진행되는 복음이란 주제를 매우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은 기성교회의 예배보다 훨씬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기성교회의 예배가 더 큰 문제이다. 이미 오래된 교회의 강단은 그 메시지가 기존 신자들에게 중심을 둬서 선포된다. 상대적으로 청년, 청장년 세대라든지, 초신자 그룹에 대하여는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기성신자들에 큰 관심을 둔 설교는 현재 한국교회가 만나고 있는 청년, 청장년세대의 교회 이탈현상으로 가져왔고, 새로운 전환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셋째로 반즈교수는 열린예배를 비판하는 관점이 문화적인 방법인 영상매체 이용을 비판한다. "열린예배가 사용하기 좋아하는 영상매체는 중립적인 것이 아니기에 과다하게 영상매체를 사용할 때 복음적인 교리가 한 쪽으로 치우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묻는다 "음악을 들으며 드라마 관람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 회개에 이르며 구원을 얻는 믿음으로 돌아오게 되었는가?" 이같은 주장은 지금 이 시대가 이미 문자보다 영상이 익숙해진 비주얼 시대라는 점을 간과하기 때문에 나온 주장일 뿐만아니라 얼마든지 문화 내용물에 복음을 집어넣으므로 전도의 효과가 극대화되는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오히려 거대한 음모로 다가오는 미디어산업 앞에서 다양한 미디어 접근을 통한 복음제시와 새로운 미디어 자원의 개발은 피할 수 없는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더 이상 문자만을 가지고는 우리가 만나려고 하는 사람들, 특히 청년, 청소년 세대들과는 코드가 일치가 될 수 없고, 그만큼 교회는 스스로 복음을 담는 그릇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꿈이있는교회가 행하고 있는 영화설교 혹은 드라마설교와 같이 영상을 이용하는 예배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대상과 쉬운 접촉점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미디어가 아니라 미디어에 담겨진 내용이 더 중요하다. 반즈교수가 인용한 맥루한(Marshall Macluhan)의 주장처럼 "매체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열린예배의 신학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반즈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복음전도의 소극성과 주님의 지상명령을 교회의 첫 번째 임무로 보지 않는 관점에서 나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반즈교수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교회의 첫 번째 임무는 전도가 아니라 성도들을 온전히 세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물론 종교개혁적 개념에서 교회의 존재이유를 "참된 예배"라고 규정하는 관점에서는 옳다. 물론 이 경우에도 교회의 존재이유는 거룩하게 세움받은 성도들이 세상에 영향력을 끼침으로 모든 민족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교회의 목적은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을 받은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라 이해될 수 있다는 뜻이다. 뿐만아니라 하인리히 오트가 "신학해제"에서 많은 신학자들의 논의를 정리한 것처럼 교회의 존재이유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마5:13-16)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도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주님은 교회에게 지상명령을 내리신 것이다.(마28:18-20)
주님의 지상명령은 대상이 범 우주적이어야 하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결국 교회는 변해가는 문화적인 상황 앞에서 적절한 대안을 모색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이 전해지는 것보다 복음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 혹은 복음을 담는 방법이 그 시대의 문화양식을 빌리는 것이 과연 성서적인가하는 물음들이 발생한 것이다. 물론 이런 논의들을 계속 논의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동안 교회 안에서만 논의되어지는동안 매우 빠른 속도로 교회는 세상과 유리되어갔고, 그 현상으로 청년들을 포함하여 교인들이 교회에서 이탈하는 현상을 가져온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감리교신학대의 장성배는 이렇게 주장한다. "전통적인 기독교는 하나님의 구원의 영역이 교회 안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다보니 하나님의 활동영역마저도 교회 안으로 축소시켜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선교 영역과 방법에 대한 논의가 교회 밖으로 벗어나서 논의할 수는 없는가? 하지만 해외선교만은 이미 교회 중심적 사고에서 탈피되어 논의되고 실행되고 있다. 결국 열린예배의 신학적 근거는 선교신학적 범주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선교신학적 범주에서 열린예배는 어떤 타당성을 갖을 수 있는가? 그것은 선교의 주체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은 교회 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를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 새롭게 해석된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활동영역은 전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로 넓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지구상의 모든 인류와 문화가 하나님의 섭리와 관심의 대상이 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 혹은 교단의 전통이나 교리 혹은 신학이 하나님의 선교에 방해요인으로 작용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현재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예배 형식 또한 문화적인 옷을 입고 있는데, 그 문화양식 때문에 하나님의 선교가 막힌다면 크나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하나님의 선교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불신자들이 교회에 나오기 싫어하는 가장 큰 요소중의 하나는 문화장애물인 것이 사실이다. 조지 헌터는 이 문화 장애물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여 이렇게 말한다. "교인들과 같이 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반대한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와 계명인 희생과 사랑을 삶 속에서 표출되기 보다는 해묵고 동떨어진 교회의 하부문화(subculture), 예를 들어 "동 떨어진 언어"나 "경건한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의해서 신앙양식이 결정되어지고 복음과 깊은 상관관계가 없는 의복, 음식, 음악 혹은 건축양식에 이르기까지 외적인 요소들에 의해 신앙양식이 결정되어졌다. 한국에서도 술과 담배 문제가 구원의 기준처럼 제시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우리가 먼저 선교의 방법을 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문화적인 장애물에 대한 해결방법은 하나님이 먼저 제시하셨다. 이같은 하나님의 선교 사역의 핵심에 존재하고 있는 성육신 사건이 그 근거를 말한다. "성육신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인 사건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방법을 고집하지 않으셨다." 결국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위로 찾아오셨는데, 그 방법은 그 시대의 유대인의 문화의 옷을 입고 찾아오신 것이다. 일종의 문화적 동일시(cultural identification) 혹은 상황화(contextualization)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구원의 내용이며 동시에 구원의 방법이다. 즉 성육신은 복음의 내용이며, 동시에 복음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성육신 속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을 깊이있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핵심이 들어있는 사건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로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이루어가고자 한다면 우리도 역시 성육신적 방법을 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열린예배의 신학적 근거는 결국 하나님의 선교, 그 핵심인 성육신에 찾을 수 있다. 모든 문화적인 장벽을 뛰어넘으시고 성육신하신 사건에서 우리의 사역의 열려진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구도자 청년들을 위한 열린예배가 과연 적합한 것인가를 묻기 전에 하나님의 성육신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예배가 과연 문화적인 적응력이 이루어진 예배인지를 묻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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