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신학 (Liberation Theology) 2003-03-01 09:33:32 read : 1834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정승원 교수의 현대신학 해설 <기독교 개혁신보>
'해방 신학'은 보통 세 가지 유형으로 분리된다. 흑인 신학, 여성 신학 그리
고 라틴 신학이다. 그러나 '해방 신학'하면 주로 라틴 신학을 말한다. 여기서
도 라틴 해방신학을 간단히 다루도록 하겠다. 해방 신학은 기존의 서구 기독
교의 신학을 전면으로 부정하며 그 출발점 혹은 전제부터 달리 시작한다. 해
방 신학의 전제는 바로 사회-경제적(socio- economic) 해석 방법이다. 즉 사
회적, 경제적, 정치적 중립성을 띠고서는 성경을 바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
다. 이것은 단지 선입관이 아니라 그 동안에 주어졌던 북미-구라파의 해석적
전제와 다른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해석적 작업에 있어서 단지
개념(ideas)에 그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즉 어떤 종류의 행동이 따
라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바로 정의를 행하는 것이라는 렘
22:16을 강조하면서 진리는 그 자체가 실천적이라고 한다. 이것을 소위 프락
시스(praxis)라고 한다. 이것은 기존의 추상적인 서구 해석학이나 신학에 대
항하는 개념이다.
또한 바른 신학은 이 프락시스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지 전통
을 수호하고 보호하는 것에 벗어나서 세상의 종으로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 바
른 신학이라고 한다. 이것은 북미-유럽의 신학적 상황을 다시 '상황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마디로 orthodoxy에서 orthopraxis로의 이전을 요구하
는 것이다.
해방 신학자 구티에레즈(Gutierrez)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으므로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또 주장하기를 인간은 실천을 통하여
자신을 초월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요 사회
에 참여할 권한이 있으며 비인격적인 구조를 거부하고 버릴 권한이 있다고 주
장한다. 해방 신학자들은 기독교인들이 어떤 초자연적인 것에만 관심을 둠으
로 인간의 사회적-경제적 상황을 도외시하는 것을 죄악시하기도 한다. 인간
의 상황이 바로 하나님의 상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자율성을 위한 주장에 불과하다. 그리고 심지어 해방신학자들은 만인
구원설을 주장하기까지 한다. 만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결국
만인이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세
속 신학과 같이 聖-俗의 구분을 거부한다. 창조 자체가 구원의 행위이라고 한
다.
해방 신학자들은 또한 제1계명의 모든 거짓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은 불
의를 받아들이는 어떠한 형태의 기독교를 섬기지 말라는 의미도 된다고 한
다. 하나님은 인간 역사에서 억압받는 자를 위해 일하신다고 말한다. 구티에
레즈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는 하나님의 칭호는 사실 "I
will be who I will be"이라고 한다. 이 말은 하나님은 자신의 행동하심에서
그가 누구신지 밝혀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인류와 함께 그리고 인류
안에 발견된다고 한다. 또한 해방 신학자들은 대부분 현대 신학의 역사적 예
수 개념을 받아들인다. 예수는 바로 해방자였다고 강조한다. 주로 세가지 해
방을 이야기한다. 정치적 해방, 인간의 해방, 죄의 해방이다. 죄란 이기욕이
요 이웃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죄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집합적 차원이라고 한다.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은혜를 받는 것이요,
이 은혜는 죄의 근원을 제거하고 이기욕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한다.
이러한 해방 신학을 간단히 평가하자면 먼저 해방 신학에서 우리는 배울 것
이 많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랑의 실천이란 단순히 하면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다. 그것에 중요한 신학적, 해석학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해방 신학은 위험한 요소들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 하겠다. 예를 들어, 자신
의 사회적-경제적 전제를 내세울 때는 그들 역시 북미-유럽의 전제와는 또 다
른 편견 혹은 선입관에 사로 잡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진리의 실천적 의미
는 맞는 것이지만 성경의 진리가 우리의 실천에 의해 좌우될 수는 없는 것이
다. 그리고 프락시스가 너무 강조된 나머지 텍스트는 상관없이 행동 자체에
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무엇보다는 해방 신학의 인
간 중심적 신학은 매우 위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이 기준이 되기 때문
에 만인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요 결국 자력 구원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
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죄의 영적 성격을 무시하는 것이다. 하나님
이 인간이 되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간이 모든 것의 척
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정말 하나님의 성육신을 믿는다면 그 사건 뒤에 있
는 신적 능력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의
초점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초점이 두면 당연
히 인간의 상황보다는 하나님의 계시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승원 교수의 현대신학해설
이야기 신학(Narrative Theology)
'이야기 신학' 혹은 '설화 신학'이라고도 하는 이 신학은 1970년대에 출현한
상대적으로 최근에 생겨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신학은 주로 성경 해석
학과 관련하여 발전된 신학으로 이 신학 역시 자유주의 신학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이 신학 역시 다른 현대 신학들과 같이 신학의 가능성
(물론 이런 가능성은 정통 신학을 떠난 데서 오는 고민이다)을 나름대로 공급
하기 위한 신학적 사조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이 신학의 대표적 주자들로서
는 가브리엘 팩커(Gabriel Fackre), 마이클 노박(Michael Novak), 한스 프라
이(Hans Frei), 제임스 맥클렌돈(James McClendon) 등이 있다.
이들은 먼저 진리가 어떤 명제적 혹은 논리적 체계로 표현될 수 있다는 기존
의 신학 전통을 비판하면서 시작한다. 성경은 어떤 철학적 혹은 신학적 체계
가 아니라 구속의 역사요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 자체를 중요시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들
이 주장하는 바는 기존의 신학에서 하듯이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의 뒷 배경
이나 사건들에 관한 해석을 독자가 나름대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
어진 텍스트의 이야기가 이미 해석이 된 이야기요 독자들이 자신들의 세계로
텍스트를 갖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텍스트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는 것이다. 성경이라는 텍스트, 즉 성경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실재의 모습이
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 신학자들은 성경 이야기 구조가 실재의 구조를
반영하는 것으로 믿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들은 '사건'과 '해석'의 구분을 거부한다. 사건이 곧 해
석이요, 해석이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 사건은 다름 아닌 이야기체로 기록된
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의미하는 바는 이야기만 읽고 더 이상 신학적 생각
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와 신학과의 관계에 있어서 신학은
이야기를 뒷받침 해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신학은 변치
않는 진리의 체계적 설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 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상은 다름 아니 신정통주
의인 것이다. 바르트가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과 '성육신된 그리스도'와 '설
교'를 통해 전달된다고 주장하였을 때, 그가 의미하는 것은 이 세 가지가 하
나님 말씀 자체라기 보다는 그 계시가 실존적으로 혹은 순간적 사건으로 역사
성을 띠고 위 세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을 말하였다. 이야기 신
학에서도 바로 하나님의 계시란 성경의 이야기체로 나타나는 그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야기 신학자들은 바르트와는 달리 주관주의에서 벗어
나 어떤 공동체적 의미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어떤 주관주의를 벗어
날 수 없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야기 신학자들은 성경의
이야기체를 사람의 해석이 가입되지 않은 그야말로 순수하게 열린 텍스트라
고 가정하지만, 이러한 가정을 하기에는 적어도 자신들의 주관성과 해석학적
전제가 이미 들어가 있는 것이요, 또한 그들 역시 성경의 의미 혹은 사건을
그들의 해석 체계에 이미 집어 놓았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야기 신학 역시 인간의 자율성을 나타내는 신학이라
고 비판할 수 있다. 즉 그들이 말하는 '이야기'란 다름 아닌 인간 자율성의
표현인 것이다. 인간의 자율성을 그야 말로 자율적으로 남게 하기 위해 이야
기가 순수하게 열려야 하며 그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하는 것으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율성을 통제하려는 어떤 교리적, 신학적 진리 체계를 단절
시키기 위해서 이야기가 계속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성경 안에 이야기
체가 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야기체로 기록한 말씀들이 많이 있다. 또
한 그 이야기에 깔린 플롯(plot)을 찾아 성경을 해석할 필요도 있다. 또한 정
체되고 단절된 교리적 해석의 위험성을 이야기 신학은 잘 지적하고 있다. 그
러나 우리가 분명히 지적해야 하는 것은 성경은 이야기체로만 되어 있지 않다
는 것이다. 성경에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처럼 교리적 기록도 있고 히브리서
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건을 해석하는 기록이 있고 법도
있고 시와 잠언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성경의 장르(Genre)에 있어서 알아야 할 한가지 사실은 그 뒤
에 분명한 '무엇'이 발생되었다는 것이다. 즉 분명한 객관적 진리가 그 장르
뒤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아무리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체를 대
한다고 해도 성경 기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객관적
진리가 바로 성경의 신적 권위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지 단지 각 독자가 열
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대함으로 진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열린 마음
이 순수하게 열린 마음일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열어야 하는 대상은 우리가
정해 놓은 해석학적 체계도 아니요 철학적 체계도 아니다. 그 대상은 바로 하
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인 것이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해석되고 인간의 언어
로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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