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종국 목사(청소년교육선교회 대표)
청소년은 변화를 한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성장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의 방향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어제와 오늘이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정체라고 이야기하며 사람에게 권태를 가져다준다. 그리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빠지는 것이다. 이것은 퇴보 또는 퇴행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사람은 좌절을 느낀다. 그런데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아진 상황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발전 또는 성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이 성장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성장하게 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학교의 교사들은 어떠한가?
어느 사회학과 교수가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과제물을 내었다. 그것은 볼티모어의 유명한 빈민가로 가서 그곳에 사는 청소년 2백명의 생활 환경을 조사하는 일이었다. 조사를 마친 뒤 학생들은 그 청소년들 각자의 미래에 대한 평가서를 써냈다. 평가서의 내용은 모두 동일했다.
「이 아이에겐 전혀 미래가 없다. 아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뒤, 또 다른 사회학과 교수가 우연히 이 연구 조사를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학생들에게 그 2백명의 청소년들이 25년이 지난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추적 조사하라는 과제를 내었다. 학생들의 조사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사망을 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간 20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180명 중에서 176명이 대단히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직업도 변호사와 의사, 사업가 등 상류층이 많았다. 교수는 놀라서 그 조사를 더 진행시켰다. 다행히 그들 모두가 그 지역에 살고 있었고, 교수는 그들을 한사람씩 만나 직접 물어 볼 수 있었다.
"당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답은 모두 한결같았다. "여선생님 한 분이 계셨지요."
그 여교사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교수는 수소문 끝에 그 여교사를 찾아가서 물었다. 도대체 어떤 기적적인 교육 방법으로 빈민가의 청소년들을 이처럼 성공적인 인생으로 이끌었는가? 늙었지만 아직도 빛나는 눈을 간직한 그 여교사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말 간단한 일이었지요. 난 그 아이들을 사랑했답니다."
교사에는 다음의 4단계가 있다고 한다.
먼저 그저 그런 교사이다. 그는 학생에게 공과를 가르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고 다른 역할에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 공과에서도 자신이 이해한 것을 자신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일방적으로 전달하고는 그 결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책임을 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마치 우편배달부가 자신이 전하는 우편물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정확하게 전달되었는지에만 관심을 갖는 것과 같다. 우편물의 내용을 보고 수취인이 울던지 웃던지 관심이 없다. 심지어 죽게 되더라도 그의 책임은 아니다.
두 번째는 설득하여 이해를 시키는 교사이다. 그는 자신이 이해한 바를 잘 정리하여 학생에게 전달하는데 그 학생의 머리에 호소한다. 실지로 새로운 것을 깨닫는 것은 큰 기쁨이다. 따라서 학생은 가르치는 교사를 좋아하며 배우는 일을 즐거워한다. 배우기를 원하는 학생을 만나는 교사는 행복하다. 이따금 여러 교회를 돌면서 교사교육을 할 때면 열심히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해 주는 이들을 보게 된다. 그 때의 그 묘한 감동을 잊지 못해 나는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세 번째는 감동을 주는 교사이다. 지적인 이해와 함께 마음에 충격을 주는 교육이다. 이러한 감동은 지식을 더욱 풍요롭게 하며 실천의 동기를 충동시킨다. 때로는 웃음으로, 그리고 때로는 숙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감동을 전하는 교사들을 볼 때면 정말 귀한 자리임을 절감한다. 설교자는 청중을 두 번 웃기고 두 번 울리면 성공한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 교사들의 교육현장에서도 이러한 모습들이 자주 목격되어야 할 것이다.
네 번째는 영감을 주는 교육이다.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도전을 주는 것이다. 마치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베드로 복음을 전했을 때 3,000명이 되는 유대인들이 옷을 찢으며 '그러면 어찌할꼬?'하는 일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테레사 수녀는 우리에게 권면한다. "당신이 가는 곳마다 사랑을 전파하세요. 먼저 당신 자신의 집에서 그 일을 실천하세요. 당신의 자녀를, 아내와 남편을 사랑하세요. 그리고 그 다음엔 옆집에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세요.… 어떤 사람이든지 당신을 만나고 나면 더 나아지고 더 행복해지게 하세요. 신의 사랑이 당신을 통해 표현되도록 하세요. 당신의 얼굴에, 당신의 눈에, 당신의 미소 속에, 그리고 당신의 따뜻한 말 한 마디 속에 신의 사랑을 표현하세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청소년을 변화시키는 교회교육을 기도한다.
작년 한국 교계의 화제의 뉴스 가운데 하나는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사랑의교회의 강단 교류였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성령운동을 대표하는 교회요, 사랑의 교회는 제자훈련을 대표하는 교회이다. 따라서 양 교회간 교류는 단순한 강단 교류 차원을 넘어선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한국교회 성장의 양대 축과 같은 역할을 했던 성령운동과 제자훈련이 이제 새로운 방향성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성령운동과 제자훈련이 상호 연관성이 있다는 것과 하나의 목적을 향해 공유된 비전을 지향할 수 있음을 시사해준다.
제자훈련이 성공하려면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안다. 성령충만의 특징은 주님을 향한 비전과 열정이다. 나 중심으로 살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으로 목적의식이 바뀐다. 미지근하게 주님을 믿던 성도가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뜨거움으로 불타오르게 된다. 영국에서 시작되었던 불신자 전도 양육 사역인 알파코스가 성공했던 비결은 기초 양육 때부터 성령을 체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성령운동은 또한 제자훈련으로 보완된다. 목회 사역은 하나님 말씀으로 사람을 치료하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게 하신다. 한국에는 현재 1,200만 크리스천이 있다고 하지만 제대로 거듭난 크리스천은 600만 이내이다. 등록교인은 많은데 그리스도의 제자는 부족하다. 한국 교회에 교인 멤버십(church membership)은 제자화(discipleship)를 의미한다는 의식의 전환이 있어야만,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 신앙 운동(movement)이라는 것은 그 안에 생명력을 상실할 때 죽은 기념비(monument)가 되어버린다. 성령운동이든 제자훈련이든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성령운동과 제자훈련의 지향해야 할 비전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령의 능력을 통한 변혁적 선교이다.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강조점이 있어 왔다. 오순절 교회는 성령의 능력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었다. 장로교회는 성화에 강조점을 두어 왔다. 예수원의 고 대천덕 신부는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사는 바로 코이노니아라고 말하였다. 나는 이 모든 것에 동의하면서도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나님 나라의 선교에 있다고 보고 싶다.
최초의 선교사였던 주님이 오신 목적은 자신을 통해 도래하고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함이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선교의 역사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선교는 근본적으로 나눔이다. 기독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 그리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나누는 것이다. 자기 희생과 나눔은 하나님의 근본적 성품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불쌍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이다. 또한 성령의 체험이나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주님의 은혜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시사한다.
한국교회는 이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나눔운동과 선교에 앞장서야 한다. 세계 크리스천들이 수입의 1%만 소규모 대부금으로 기여하면 10억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50% 개선시키는 데 단 1년이면 된다고 한다. 무엇보다 한국 교회는 현재 북한 동포들이 겪고 있는 엄청난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북한에는 지금 결핵환자가 400만 명이 넘는다. 6세까지의 사망률은 50%에 달하고 7세부터 12세까지의 사망률은 20%나 된다. 통일보다 당장 시급한 것이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다. 한국 교회가 나눔과 희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을 성육신화시키지 못한다면 성령운동이나 제자 훈련은 그 생명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 선교를 감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에는 자기 희생이 요구되며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모두 다 사회의 각 영역에서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선교적 소명에 대한 헌신만이 한국 교회를 새롭게 갱신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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