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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수 교수 목회서신- 2
    2003-02-27 10:51:06   read : 1518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긋남 (딤전 1:6-7)

    조병수 교수/ 합신(신약신학)


    어긋남은 인간의 본성가운데 하나이다. 앞으로 가려하지만 뒤로 가고, 올라
    가려고 하지만 내려가는 것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의 일부이
    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까지도 고통스럽게 고백했을까. "내가 원하는 바 선
    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19). 인
    간의 본성 가운데 들어있는 어긋남이란 것은 모든 방패를 뚫는 창과 모든 창
    을 막는 방패 사이에 일어나는 모순보다도 더욱 악질적인 것이다.

    이런 악질적인 현상이 디모데가 목회하는 에베소 교회에도 발생하였다. 사
    도 바울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제시하였지만 어
    떤 사람들은 도리어 이것들로부터 벗어나 헛된 말에 빠졌다 (6절). 언뜻 생각
    하기에는 사도 바울이 제시한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
    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열광적으로 환영을 받았을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는가. 아니 그랬어야 옳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이상 (理想)이 열광적인 환
    영을 받았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
    러나 문제는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사도 바
    울이 제시하는 이상을 외면하고 도리어 헛된 말에 빠졌다. "헛된 말"이란 발
    언과 관계된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헛되다"는 단어는 하나님을 믿기 전에 비
    신앙적인 생활과 풍습을 나타낸다 (행 14:15; 벧전 1:18). 사도 바울은 "헛
    된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복종하지 않는 자와 속이는 자에 병행적으로 묘사하
    여 질서를 어그러뜨리고 양심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딛 1:10).
    헛된 말을 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
    법에 관한 다툼을 일삼았을 것이다 (딛 3:9).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사람들
    이 사도 바울에게서 제시받은 선명한 고급 이상세계를 버리고 신앙을 갖기 전
    의 세속적인 저급 언어세계로 돌아가버리다니.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을 추구
    하고 선한 것보다는 악한 것을 선호하는 것을 보면, 군자에게서 도적이 나오
    고 개혁을 부르짖는 무리에게서 허위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인간의 어긋남은 부
    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본성에는 상위현상이 있다.

    그런데 인간의 어긋남 현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만일에 어긋남을 빚
    어내는 사람이 최소한 자신의 문제점을 깨닫기라도 한다면, 그래도 그 사람에
    게서는 어떤 희망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좌절하는 것은 불행하
    게도 어긋남의 현상을 빚어내는 에베소 사람들에게서 이런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 (7절) 하였다. 어떤 분야에
    서 교사가 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가르침은 깨달음을 전제로 하기 때
    문이다. 그래서 어떤 분야에서 가르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깨달은 자가 되
    는 것이 우선이다. 이렇게 볼 때 율법을 가르치는 자가 되려면 율법을 깨달
    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율법과 관련하여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신이 무엇에 관하여 확신하고 있는지 깨닫
    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율법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참으로 놀랍
    게도 에베소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에게서 이런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
    다. 그들은 소원과 현실 사이의 엄청난 상위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
    러냈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
    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7절). 결국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어지럽히고 진리
    를 헷갈리게 하고 말았다. 가르치는 자가 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깨
    닫지 못하고 가르치는 자가 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알
    지 못하는 사람은 말하지 말며, 깨닫지 못한 사람은 가르치지 말라. 알지 못
    하고 말하는 것이나 깨닫지 못하고 가르치는 것은 단지 인간의 불행한 본성가
    운데 하나인 어긋남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악질적인 인간의 본성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옛날처럼 지금
    도 여전히 교회와 사회에서는 인간의 어긋남이 천연스럽게 반복되고 있기 때
    문이다.

    사람과 법 (딤전 1:8-10)

    서론은 이렇다. 사람이 법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법은 인간의 사회에서 필수적이다. 법이 없으면 사회는 순식간
    에 파괴되고 말 것이다. 법은 인간이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을 막는다. 법
    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안정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법의 기능은 인간을 행복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법은 매우 좋은 것이다. 사도 바울이 "율법이 선한 것
    인 줄 우리는 아노라"(8)고 말한 것은 그가 법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말로써 사도 바울은 율법이 처음부터 사람을 하나
    님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바로 세워 사회를 질서 있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제정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를 지도하여 하나님에 대하여는 의를 지키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
    여는 함께 공존할 수 있게 만든다. 우리는 율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으로부
    터 벗어나지 않고 사람들에 대하여 악한 것을 행하지 않게 된다. 이와 같이
    율법은 선한 것이다.

    그러나 율법이 선하다는 것에는 어떤 조건이 있다. 그것은 율법을 법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율법은 선하다는 말에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8)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이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때때로 율법이 법 있게 사용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이 법대로 사용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율법을 존중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율법을 가볍게 여기거나 우습게 여기는
    것은 결국 율법의 선한 기능에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더 나아가서 율법이 법대로 사용되지 않는 것은 율법을 하나님과 인간사회를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
    한 행위는 율법의 조항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율법의 본래 정
    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어 율법의 선한 기능에 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마지막으로 율법이 법대로 사용되지 않는 것은 율법을 적극적으로 악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요즘처럼 법망을 놀라우리 만치 요리조리 잘도 피해서 행복
    한 삶을 추구하는 어떤 현대인들에게는 이 셋째 의미가 가장 잘 어울릴 것이
    다.

    위에서 언급한 의미들 가운데 어떤 것이든지 간에 율법이 법대로 사용되지 않
    으면 율법의 기능이 전환되고 만다. 선한 율법이 악한 율법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율법은 악한 자들에 대하여 싸우는 것이 된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갑작스럽게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
    니요 오직 불법한 자(그리고 그와 비슷한 자들)를 위하여 세운 것"(9)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앞에서 "율법은 선한 것"이라고 말해놓고 이제는 "법은 옳은 사
    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라 불법한 자를 위하여 세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은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맥을 잘 살피면 이런 역접관계가 무엇을 의미
    하는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율법은 법대로 사용되지 않으면 그 기능이 전환된다. 율법은 법대로 사용되
    지 않을 때 선한 기능에서 악한 기능으로 나아간다. 율법은 모든 종류의 악
    한 자들과 투쟁한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 악한 자들의 대표를 열거하고 있다
    (9-10). 사도 바울이 말하는 악의 종류는 하나님에 대하여(경건치 아니한
    자), 자신에 대하여(행음하는 자), 가정(특히 부모)에 대하여(아비와 어미를
    치는 자), 사회에 대하여(사람을 탈취하는 자)행해지는 것으로 분류된다.

    이런 자들에 대하여 율법은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율법은 모든 악한 자들과
    싸우는 하나님의 군사이다. 이렇게 하여 율법은 사람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을 막는다. 율법은 하나님에 대하여는 공의를 지키게 하고 사람들에 대하여
    는 질서를 지키게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율법은 법의 정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서론과 결론이 다를 수가 없다. 결론은 이렇다. 법이 사람을 위하
    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법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일과 사람 (딤전 1:11)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일을 보면 사람을 안다. 물론 역도 성립된다. 사람을 보면 일을 안다. 대체
    로 진실한 사람이 하는 일치고 추잡한 일이 없는 법이다.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이든지 간에 오늘날 세상의 모든 구석에서 행해지는 추잡한 일들의 배후에
    는 그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 진실하지 않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하는 일을 보면 그 일을 하는 사람을 알 수 있다. 일이 일군을 규정하며, 일
    의 성격이 일군의 품위를 결정한다. 사명인의 인격과 지위는 사명의 종류와
    성격에서 드러난다. 작은 일은 그것을 맡은 사람이 작은 사람임을 보여주듯
    이, 큰 일은 그것을 맡은 사람이 큰 사람인 것을 보여준다. 작은 일을 맡은
    사람이 큰 사람인 경우도 드물지만, 큰 일을 맡은 사람이 작은 사람인 경우
    는 더욱 드물다. 그래서 일을 보면 일군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구태
    여 일군의 성격과 학력을 따져보지 않더라도, 그가 맡은 일과 사명의 성격만
    보아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완벽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이것은 열매가 나무를 규정하는 것과도 같다. 열매
    를 보면 나무를 안다. 좋은 열매는 그것을 맺는 나무가 좋은 열매인 것을 보
    여준다. 왕직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고, 돼지 치는
    일을 보면 탕자가 얼마나 천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일을 보면 사람을 안
    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무엇이 맡겨졌는지 말한다. 그것은 "복음"이다. "내
    게 맡기신 바 ... 복음을 좋음이니라" (딤전 1:11).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짧
    은 한 마디의 말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에게는 자
    신을 설명하기 위하여 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
    는 것은 복음을 맡았다는 사실에서 간단하게 증명된다.

    사도 바울의 위대함은 그에게 복음이 맡겨졌다는데서 보여진다. 복음을 맡은
    자가 귀한 사람이 아니며, 복음을 맡지 못한 자가 천한 사람이 아닌가? 영화
    와 존귀의 관을 머리에 쓰게 되었다는 것으로부터 사람의 귀함이 나타나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었다는 것으로부터 인자의 귀함이 나타난다 (시 8:5-6).
    거룩한 것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으로부터 개의 천함이 드러나고, 진주를 내주
    지 않는 것으로부터 돼지의 천함이 드러난다 (마 7:6).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첫째로 복음
    은 "하나님의" 복음이다. 이것은 복음의 유래를 지시한다. 복음은 하나님에게
    서 나온다. 복음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 복음을 맡은 직분도 하
    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복음의 유래와 사도직의 유래는 동일하다. 복음
    이 하나님께 걸려있듯이 사도직도 하나님께 걸려있다. 사도 바울의 직분이 위
    대한 것은 그의 배후에 유래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사도직은
    신적 위대함과 신적 존귀함을 가진다. 하나님은 "복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
    므로 사도 바울의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성립된다.

    둘째로 복음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속성을 설명한다. 복음
    은 영광스럽다. 복음은 하나님의 구속 은혜를 내용으로 삼는다. 복음은 인류
    의 구속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가운데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에 근거하
    여 성령의 확실한 보증으로 성취된다는 것을 전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영
    광스러운 복음을 맡았다. 그러므로 복음의 영광은 사도의 영광이다. 복음이
    영광스럽기에 사도도 영광스럽다.

    복음은 유래로 보자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며, 속성으로 보자면 구속의 영
    광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이 유래한 하
    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이 지니고 있는 영광을
    기뻐할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누구인가.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며, 구속의 영광을 기뻐하는 사람이다. 그가 맡은 복음이 그에게 이 두 가지
    를 한꺼번에 허락하고 있다.

    일을 보면 사람을 안다. 작은 일은 작은 사람에게 맡겨지고, 큰 일은 큰 사
    람에게 맡겨진다. 큰 사람에게 작은 일을 맡기는 법도 드물지만, 작은 사람에
    게 큰 일을 맡기는 법은 더욱 드물다.

    extra nos (딤전 1:12)

    조병수 교수

    인생을 바꾸게 만드는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불의의 사고나, 자
    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생하는 사건과 같은 것들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
    다. 내 생각으로는 인생을 바꾸게 하는 동기들 가운데 누구로부터 신뢰를 받
    는 것이 하나의 중대한 동기가 되는 것 같다. 물론 누구에게서 어떤 신뢰를
    받느냐에 따라서 변화의 정도에 상당한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인생
    을 바꿀만한 결정적인 신뢰를 받아본 적이 있는가? 내가 묻는 것은 어둡고도
    어두운 인생에서 밝고도 밝은 인생으로 변화시킨 그런 신뢰이다. 사실상 우리
    는 과거에 여러 차례 현재의 우리를 빚어내는데 도움을 준 중대한 신뢰를 받
    았던 적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단지 과거의 일은 대체적으로 쉽
    게 잊어버리기 때문에 기억을 못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묻는
    것이 옳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결정적인 신뢰를
    받아본 적이 있는가? 어둡고도 어두운 인생에서 밝고도 밝은 인생을 변화시
    킨 그런 신뢰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
    런 경우가 있다면 과거의 어두운 모습에 대하여 전율하는 것보다 현재의 밝
    은 모습에 대하여 더 크게 전율할 것이 틀림없다.

    사도 바울의 과거는 어둠보다도 더 어두운 것이었다. 사실 그는 이처럼 부
    끄러운 자신의 옛 모습을 자주 언급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 ...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다" (고전 15:8-9).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빌 3:6). 의심
    할 바 없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몸을 떨었을 것
    이다. 그는 여기에서도 자신의 옛 모습을 가리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
    자요 폭행자이었으나" (13)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입에 담기조차
    싫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세 마디의 말을 하는데 참으로 힘이 들
    었을 것이다. 이 세 마디의 말은 사도 바울의 어둡고 부끄러운 과거를 고스란
    히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행위가 악한 것인지도 모르는 전적 무지의
    세계였고, 스스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전적 무능의 세계였다.

    그런데 이런 무지의 그늘과 무능의 어둠에 빠져있던 사도 바울에게 빛이 찾
    아왔다. 그 빛은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고 있을 때 하늘로부터 비춘 "해
    보다 더 밝은 빛" (행 26:13)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밝은 것이었다. 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뢰였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 (12). 이 말은 다르
    게 표현하자면 신뢰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믿어주셨다는 말
    이다. 바울이 주님을 믿기 전에, 주님이 바울을 믿은 것이다. 바울이 주님을
    인정하기 전에, 주님이 바울을 인정한 것이다. 바울에 대한 주님의 신뢰, 이
    것이 은혜이다. 사도 바울의 새로운 시작의 원인은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
    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있었다. 변화의 원인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
    람 밖에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 15:10)라고 말한 것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신뢰한 것이 어찌 단순한 일이겠는가? 기왕에
    주님께서 바울을 신뢰할 바에는 세상에 다시없을 만큼 철저하게 신뢰하셨다.

    주님의 신뢰는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 첫째로 주님께서는 바울을 믿어주셨
    고, 둘째로 능력을 주셨고, 셋째로 직분을 맡기셨다. 주님의 신뢰는 그저 심
    정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생동적이고 실제적인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바울에
    게 자신의 마음을 주셨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힘을 주시고 결국은 일도 주
    셨다. 주님의 은혜에는 한치의 빈틈도 없고 조금의 허점도 없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철저한 주님의 은혜 앞에서 전율했다. 그는 자신의 어
    둡고 부끄러운 과거 앞에서 떨던 것보다도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찬란하고 영
    광스런 주님의 신뢰 앞에서 더욱 크게 떨었다. 우리 밖으로부터 (extra nos)
    오는 주님의 신뢰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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