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는 1906년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에서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1923년 17세의 나이로 프랑스로 가 쉬트라스부르그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28-29년에는 독일의 프라이부르그 대학에서 후서얼과 하이데거에게서 배웠다. 그 후 여러 해에 걸쳐 그는 후서얼과 하이데거의 사상을 프랑스에 소개했다.
그의 철학자로서의 활동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된다. 그의 철학적 경향은 전쟁 동안 그가 겪은 경험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의 가족들은 유태인 학살과정에서 희생된다. 레비나스 자신은 프랑스 시민이자 군인으로서 전쟁포로로 독일에서 강제노동을 했으며 그의 부인과 딸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서 지냈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그는 하이데거가 나찌에 연관되었을 때 그때까지의 하이데거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철회하고 그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탈무드에 있는 용서에 관한 교훈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많은 독일인들을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용서하기가 어려운 몇몇 독일인들이 있다. 하이데거를 용서하기는 어렵다.”
전쟁에서의 경험 때문에 그는 철학의 과제는 존재론이 아니라 윤리학에 있음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는 “윤리학이 존재론에 우선된다”고 주장하는데 이 말은 그의 이러한 철학적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서양철학은 존재자의 본질과, 그 본질을 본질 그대로 파악할 수 있는 자아의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서양철학의 역사는 존재론의 역사였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자아중심적인 존재론을 거부하고 그보다 더 우선되는 윤리학을 강조한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는 ‘생각하는 나’대신 윤리적인 ‘나’로부터 출발한다.
윤리적인 ‘나’는 무엇을 말하는가? 타자와 대면하여 자아중심적인 나의 자발성을 의문시하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윤리란 도덕성을 의미하지 않으며,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지시해 주는 지침도 아니다. 윤리란 바로 타인의 존재를 무시하는 자아중심적인 자발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레비나스는 자아의 자기동일성 보다는 타자가 더 우선된다고 본다.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비로소 자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후서얼에 의하면 모든 시간적인 대상들을 지각하는 인간의 의식은 본질적으로 시간의식이다. 이 시간의식이 바로 최후의 인식 근거인 순수의식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타자를 통해서 비로소 시간이 의식된다고 주장한다.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의 의식은 타자와의 차이를 의식할 수 있게되며 이러한 차이의식이 바로 시간의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의식으로서의 자아는 타자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타인의 얼굴은 초월을 요구하는 신의 목소리이다. 타자를 만날 때 나는 이제 책임적인 주체가 된다. 타인의 얼굴을 수용하는 것은 자아의 초월작용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타자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타자는 우선적으로 자아에 대하여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외재성이다. 타자는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로 통합시킬 수 없는 절대적으로 다름, 즉 절대적 타자성을 가지고 있다. 타자는 유한한 자아의 사유대상이 아니며, 자아로 환원시킬 수 없는 외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타자는 언제나 ‘저편’으로 남아 있으며 ‘절대적으로’ 자아를 초월해 있다. ‘절대적’이란 뜻의 라틴어는 ‘absolutus’로 이 단어는 ‘절단하다, 떼어내다’를 의미하는 ‘absolvo’에서 유래한다. ‘absolutus’는 ‘absolvo’란 동사의 과거분사로 원래 ‘떼어내어진, 절단된’이란 뜻을 가진다. 따라서 ‘절대적 타자’란 ‘자아로부터 분리된 타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타자를 사물적 대상들 처럼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자아에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은 폭력이다. 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또 다른 사람이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면 그 행동은 폭력이다. 반대로 사랑은 상호분리성이다. 즉 타자를 절대적 타자로 인정해 주는 것이 사랑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데거도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제인 ‘amo volo ut sis’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나는 사랑한다. 즉 나는 사랑의 대상이 그가 존재하는 그대로 존재하기를 원한다.“
타자를 타자로서 인정하는 것이 레비나스의 윤리의 기초이다. 그렇다면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와의 만남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타자를 만나는가?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를 만날 때 우리는 얼굴을 통해 만난다. 타인은 나에게 얼굴을 통해 다가온다. 내가 타인의 얼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듯이 타인의 얼굴은 내가 임으로 거부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타자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자세는 어떤 것인가? 타자의 얼굴은 내가 임의로 피할 수 없는 낯선 침입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타자의 얼굴에 대해 단지 수용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타자와의 이러한 관계를 레비나스는 ‘관계성 없는 관계’라고 표현한다. 즉 자아와 타자는 ‘창문없는 모나드’로서 서로 상호침투가 불가능하고 단지 타자를 지각함으로써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다. 지각(perception)은 라틴어 ‘percipio’에서 유래된 단어인데, 이 라틴어 단어는 다시 ‘per-’(~ 을 통하여)와 ‘capio’(받아들이다)의 복합어로 주체의 자발적인 작용이 배제된 수동적인 수용성을 의미한다.
내가 타자를 수용할 때 타자는 더 이상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침입자가 아니라, 내면의 닫힌 세계에서 밖으로의 초월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접촉점이 된다. 타인의 얼굴은 초월을 요구하는 신의 목소리이다. 타자를 만날 때 나는 이제 책임적인 주체가 된다. 타인의 얼굴을 수용하는 것은 자아의 초월작용이다. 이와 같이 레비나스는 주체성을 ‘타인을 받아들임’이라고 이해한다. 인간의 삶은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가지면서도 얼굴을 통해 드러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책임을 통해 이루어진다. 타인의 얼굴에 비친 하나님의 빛을 통해 주체성이 밝아진다.
타자의 얼굴은 타자의 존재를 나에게 전달해 주는 가면이다. ‘가면’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는 persona인데 이 단어에서 인격(person)이란 개념이 유래한다. 가면은 타자의 인격이다. 타자의 절대성을 인정해 주는 것은 타자의 가면을 벗기지 않는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인격적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격적이라는 개념과 윤리적이라는 개념은 동일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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