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의 삶의 기저(基底)를 천착하여 거기에서 당시의 시대적, 정신적 유산을 찾아낸다는 일이 결코 간단치 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리교가 낳은 심훈의 '상록수'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작중 인물 '채영신'이 바로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 최용신(崔容信)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1930년대 초, 일제의 잔혹한 탄압과 문화말살정책에 자신의 온 몸을 불태워 이 민족의 정기와' 배워야 산다'의 자력갱생(自力更生)의 거룩한 심지가 되었던 최용신 선생의 삶의 흔적을 반추하며, 그의 정신을 보존 계승하는 작업은 대단히 소중한 일이리라.
상록수의 시대정신은 한국 감리교회의 신앙전통과 결코 유리될 수 없는 소중한 버팀목이다. 거의 그의 삶의 흔적이 사라질 듯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한 인간의 주체적인 삶의 진실과 민족애의 뜨거운 열정 앞에, 진정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동시에 오늘의 한국 감리교의 신앙유산과 정신적 기초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물음을 전제로 하고 그의 삶의 단편(斷片)을 조심스럽게 이어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최용신은 1909년 8월 함경남도 현면 두남리에서 최창회(崔昌熙)씨의 5남매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뼈대있는 경주 최씨 문중으로써 선조 때부터 대대로 경주에 살다가 12조 때 정치적 격변의 와중에서 원산 섭섬으로 귀양을 와서 그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최용신의 조부는 이 지방의 덕망 있는 인물로 사재를 털어 덕원에 학교를 세우는 등 나라의 기운을 회복하기 위해 교육을 통해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최용신의 집안은 빈한한 살림살이였다.
다행히 일찍 기독교가 뿌리를 내린 곳이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당시의 가난한 생활체험을 통해 '겨레의 살 길은 농촌계몽에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최용신 선생의 학창시절 모습.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영향을 받아 독립사상과 애국애족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런 진보적인 집안 분위기에 고무되어 선교사가 운영하던 루(樓)씨 여학교를 1928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여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자신이 학비를 조달했으며. 빈곤한 생활 중에서도 궁기(窮氣)를 내비치지 않고 성서묵상과 강인한 의지력을 키워나갔다.
루씨 여학교 재학시절에 남긴 글들을 잠간 들여다보자.
"… 문화의 눈이 구 여성만 모인 농촌으로 하여금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게 못한다면 이 사회는 어느 때까지든지 완전한 발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농촌 여성의 향상은 우리들의 책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한 생활만 꿈꾸어야 옳은 것인가.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퇴치에 노력해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어느 날 담임선생과의 졸업면담에서 "저는 농촌에 들어가 농촌계몽운동에 일생을 바치겠습니다." 고 대답한 것을 보아 그때 이미 앞으로의 삶이 내정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후 1928년 봄, 남녀공학인 협성신학교 본과에 입학한 최용신은 황에스더(1892∼1971)선생을 만났으며, 그의 가르침에 큰 감명을 받아 이로 인해 농촌계몽운동에 대한 그의 염원은 더욱 뜨거워 졌다.
황에스더 선생이야 말로 최용신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端緖)를 제공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최용신으로 하여금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빛나는 삶, 민족의 밑거름이 되어 살아가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장본인이 바로 황에스더 선생이다.
최용신은 협성신학교를 다니면서 첫해에는 황해도 수안 용현리로 실습차 농촌계몽을 나갔지만, 주민들의 몰이해로 별 성과 없이 돌아오고 말았다. 학교로 돌아온 그는 기숙사에서 자신의 실패에 대해 혹독한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그 이듬해 포항 옥마동으로 농촌 계몽을 나가서 그는 거기서 자신의 전 생애를 필사(必死)의 각오로 농촌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였다.
신학교 졸업을 일년 앞두고 당시 수원지방 여전도사업을 위해 일했던 밀러 여선교사의 요청과 YMCA의 지원으로 파송 받아간 곳이 경기도 반월군 천곡(샘골)이었다.
그 때 천곡에는 장명덕(張明德)전도사에 의해 일년 전부터 학원이 세워져 있었다. 최용신이 천곡에 도착한 때가 1931년 10월이었고, 그로부터 그는 만 2년 4개월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하였다.
당시 샘골에는 서울에서 군포까지 기차로 와서 서쪽으로 20여리 길을 걸어서 갔으며. 동리에는 40호 가량의 농가가 옹기종기 모여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우선 최용신은 여러 마을을 순회하며 농민들의 생활 상태와 교육에 대한 열의 등을 타진해 보았으며, 주민들과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자기의 계획하는 일에 후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는 마을을 다니며 신입생을 모집했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부모를 만나 "자녀를 가르치십시오. 가르쳐야 합니다"고 권면하면 "돈이 있어야지요. 월사금 낼 돈이 어디 있습니까" 하는 식이었다. 아이들을 만나도 마찬 가지었다 "돈이 있어야지요. 나무는 누가 하고요."라는 대답이었다.
"너의 집은 농사를 짓지 않니?"하고 물으면 "농사는 지어서 무얼 해요. 가을에 타작을 하면 장리쌀로 나가고 밭도지와 텃도지를 갚고 나면 빗자루만 가지고 들어오시는 걸요."라고 대답할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단이었으리라. 최용신은 실망치 않고 "이제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라를 찾고, 또 잘사는 나라로 만들어 우리 모두가 배불리 먹고 잘 살아 보자."라는 애원을 하며 부모들의 승낙을 받아냈다.
이렇게 하여 모집한 학생이 40여명으로 이들에게 한글, 산수, 재봉, 수예, 가사, 음악, 성서 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낮이면 씨름하듯 수업을 하고 저녁이 되면 쉴 짬도 없이 부녀자들을 모아놓고 한글을 가르쳤다.
너무나 회생적인 그의 열심에 감동하여 처음에는 낯설게 대하고 냉소적이었던 동리 사람들이 차츰 호감을 갖고 존경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3개월이 지나자 학생수가 불어 6칸 초가 예배당이 좁아 학생을 다 수용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방도를 궁리한 끝에 학원인가와 강습소 개축을 계획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이 전시체제로 몰입하던 단계에서 하나하나 죄어가는 때라 학원인가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요시찰 대상인 황에스더의 지휘아래 있는 최용신이었으므로 그것은 더욱 어려웠고, 또 당시 동아일보에서 주축이 되어 벌이고 있던 귀농운동(歸農運動)-소위 브나로드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온갖 탄압을 일삼을 때라 어려웠다.
그러나 여러 인사들의 도움으로 1932년 5월 어렵게 인가를 얻어냈다. 그는 매일 바쁜 일과 중에서도 강습소 건축을 위해 동분서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교인 몇 사람과 지역의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요청했지만 쉽지 않았다. 낙심치 않고 끈질기게 쫓아다닌 결과, 염석주(廉錫柱)씨를 만나게 되었다.
이 분은 정미업과 목축업을 하고 있었는데 최용신의 뜻을 이해하고 많은 돈을 회사했으며 강습소 건립 후에는 그 학원의 이사장이 되어 최용신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또한 지성이면 감천(感天)이라고 반월면 일대의 갑부요, 둔대교회 설립자인 박용덕씨가 흔쾌히 1,052평의 땅을 학원부지로 기증하였다.
최용신은 동네 구우계(求牛契)에도 관여하여. 최용신의 열정에 고무된 부녀계원들이 모아들 돈 전액 300원을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다.
1932년 10월 27일 건축 발기위원회를 조직하여 그 이듬해 1933년 1월 15일 50평의 강습소 건축을 완성하여 자축의뜻으로 낙성식을 가졌다. 예배당이 비좁아서 고생하던 끝에, 넓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게 된 학생들은 기쁜 마음으로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최용신의 수업은 철저한 기독교 정신으로 일관하였다. 애국 애족하는 사상과 하나님 사랑과 부모사랑, 이웃사랑, 그리고 나라와 흙을 사랑하는 농민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해 봄이 되어 학생을 모집하니 110여명이나 되었다. 최용신은 한 사람이라도 더 가르쳐서 깨우쳐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학원의 시설미비를 이유로 60명 이상은 수용할 수 없다고 통고하였고 온갖 회유와 탄압을 서슴치 않았다. 이사회를 열고 수차례 당국과 교섭을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결국 학원의 문을 닫거나 그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최용신과 어린 학생들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통곡하는 모습은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면소재지의 학교가 천곡학원의 학생모집으로 학생수가 미달된다는 이유로 보통학교를 다닐 만큼 여유 있는 집안의 아이들은 갖은 압력을 넣어 강제로 빼앗아 갔다.
소설 '상록수'에 실린 작중 인물 채영신의 기도문 가운데 한 토막을 소개하여 당시 최용신의 심기가 어떠했는가를 가늠해 보기로 하자.
"… 주여 당신의 뜻으로 이곳에 모여든 귀엽고 사랑스런 어린 양들이 오늘 그 삼분의 일이나 목자를 잃게 되었습니다. 주여! 그 가엾은 무리가 낙심하지 말게 하여주시고 하나도 버리지 마시고 다시금 새로운 광명을 받을 기회를 내려주시옵소서…."
반월과 수원경찰서에서 뻔질나게 최용신을 호출하여 갖은 말로 회유도 하고 핍박을 하였다. 때가 왜정 치하여서 학교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와 한글을 쓰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최용신은 한글과 국사를 가르쳤다.
당국에서 알면 무서운 체형을 받게 된다는 사실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심문을 받고 나오면서도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비분강개한 마음을 스스로 달래며 초연하게 자신의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대륙침공을 위한 병참기지를 삼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우리 민족의 고혈을 짜내는 시기였다. 최용신에게 사사건건 시비하는 이유가 그가 기독교도라는 점, 신학교를 다녔다는 점, 한국 역사와 성서를 가르친다는 점 때문이었다. 당시 구약성서의 출애굽사건의 이야기는 왜경의 이러한 탄압구실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하루에 세 반. 네 반으로 학생을 한 장소에 앉히고 가르친다는 것도 무리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숨 돌릴 틈도 없이 가르치고 동리 부녀자들을 모아 한글을 가르쳤다. 무지한 부녀자들에게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고 수 없이 강조했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방학 때가되면 샘골을 중심으로 야목리, 둔대리, 게모게, 안산 삼거리 등 여러 곳에 흩어진 교회를 도보로 순회하면서 한 주간씩 단기교육을 시켰다.
연중무휴로 하루도 짬이 없이 열과 성의를 다했다. 큰 문제들을 대충 해결하고 열심히 일하다가 아무래도 자신의 지식의 부족함을 느껴 유학을 결심하고, 1934년 3월 일본 고베 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다 3개월도 안되어 그만 각기병에 걸려 눈물을 머금고 귀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샘골 사람들이 "아파서 누워 있어도 좋으니 샘골로 돌아오라."고 한사코 권면하자, "죽어도 샘골에 가서 죽자."는 마음으로 본래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복귀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날마다 최용신의 병 낫기를 기도하고 몸에 좋다는 약을 구해 왔으며 알뜰히 보살펴 주었다. 다행히 심신을 회복하여 전보다 더욱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샘골부인 회원들과 함께.
그러나 안정도 잠시뿐 또 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일년 전부터 반으로 줄었던 보조가 1934년 10월부터 완전히 중단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최용신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우선 학원관계자들과 상의하고 천곡교회 목사와 중직들을 찾아 의논했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당시 최용신이 <여론>이라는 잡지에 기고했던 호소문 중 일부를 들어보자.
"사업가의 열성도 강제도 제한이 있어 이제부터는 후원을 끊는다는 소식이 들림에 우리는 낙망의 눈물, 비통한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가르칠 줄도 알고 배울 줄도 알건마는 우리에게는 여유가 없습니다.
배움에 굶주린 우리 농촌 어린이들은 장차 어디로 가야 합니까? 조선의 부흥은 농촌에 있고 민족의 발전은 농민에 있다 하거늘 배우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한 우리에게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오호, 우리 농민의 하소를 어찌 다 기필 하오리까? 이 앞으로 긴긴 밤에 잠 못 이루고 나오는 한숨과 흐르는 눈물에 땅이 꺼지지 마사이다. 여러분이시여! 곡식을 심으로 곡식을 심으면 1년의 계(計)가 되고 사람을 기르면 백년의 계가 된다고 하였거든 이 강산을 개척하고 이 겨레를 발전시킬 농촌의 어린이를 길러 주소서. 뜻있는 이여! 우리 농촌의 아들과 딸의 눈물을 씻어 주소서."(1934.10.30)
이런 애절한 그의 호소도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했다. 다만 수원농고에 재직하고 있던 그의 친구 류달영(柳達永)씨가 학생들에게 호소하여 얼마간 도와주게 되었다. 겨우 위기를 모면한 최용신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차츰 식욕이 떨어지고 음식도 못 먹고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그래도 아픈 몸을 이끌고 수업을 계속했다.
결국 1935년 정초에 병세가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어 수원 도립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병명은 장중첩중이었다. 진작 손을 썼어야했는데 너무 병이 깊어졌다는 의사의 진단이었다. 병원 의사들, 주민들, 제자들, 교우들의 간곡한 기도가 계속되었다.
추운 겨울에도 불구하고 교인들과 학부형들이 끊임없이 병문안을 왔다. 그러나 이러한 수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병세는 악화되어 화농성 복막염이 되었다. 최용신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는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만일 내가 떠난 후라도 학원만은 살려서 여러분의 손으로 훌륭한 학원을 만들어 주세요…. 제가 약혼한 지 올해로 11년이어요. 올 4월부터 두 사람이 힘을 모아서 농촌을 위해 일하고자 굳게 약속했어요. 그런데 이대로 떠나니 그 사람에게 미안해요. 제가 늙으신 어머니보다 먼저 떠난다면야 그것도 죄송한 일이고 제가 죽은 후에는 학원이 잘 보이고 종소리가 잘 들리는 곳에 묻어주세요…." 등의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결국 1935년 1월 23일 0시 20분, 최용신 선생은 하나성의 부르심을 받고 정든 이 땅, 사랑하는 교우와 제자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25년 6개월이라는 짧은 생애였다.
최용신의 삶의 흔적은 오래된 사진첩의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한 등불이 되어 우리에게 남아있다. 그러나 그의 살신성인(殺身成人)의 삶은 너무나 분명하게 이 민족의 제단에 각인되어 있다.
그는 분명 이 민족의 거룩한 '상록수'였다. 우리는 더 이상 그의 숭고한 삶의 뒤안길을 배회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에 관한 방치된 기억들을 새롭게 발굴 보존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시대정신으로 신앙전통으로 면면히 계승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최용신의 상록수에 새겨진 십자가의 상흔은 오늘 우리 모두의 삶의 푯대요,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예전에 <고난 받은 이들과 함께>에 실은 것이다. 중간에 틀린 곳이 있어 바로 잡았다. 나는 이글을 쓰고 변선환 교수님께게 지극한 칭송을 받았다. 변교수님은 나의 글에 일일이 코멘트를 해주시는 등 내게 이따금 전화를 주시곤 했다. 내가 언제 강원도 '정선'에 대한 기행문을 쓴 것을 읽으시고, 변교수님은 '정선아라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고 대만 신학자 C.S. Song의 저술에 대하여 당신의 신학적 관심을 일치시키는 작업을 하고 계시다며 꼭 만나자고, 그리고 내가 사는 남양이 어딘지 어떻게 찾아가야 하느냐고, 물어보시고 그리고 얼마 있다 세상을 떠나셨다. 그분의 목소리와 체취가 그립다.
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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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운동본부, '한국교회 나갈 방향 모색' 심포지엄
▲1부 예배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참석자들. ⓒ뉴스앤조이 주재일
한국새벽기도운동본부(대표회장 나겸일 목사)가 10월 6일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회장에서 '한국기독교가 나아갈 방향 모색'이라는 주제로 '한국부흥운동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11명의 발제·토론자들과 8명의 예배 순서를 맡은 교계 지도자들은 "한국교회가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100년 전 대부흥운동을 다시 한 번 일으켜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몇 사람을 제외한 대다수 참석자들은 "회개해야 한다"는 원칙적인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회개의 내용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 아쉬움을 남겼다. 이 자리에서 발표된 내용 가운데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기 위해서는 "새벽기도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기독교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100년 전 기독교 상징, 양심전(良心錢)
당시 사경회에 참여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거짓말이나 질투, 작은 도둑질에서부터 살인, 간음에 이르는 중죄까지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고 회개했다고 한다. 경찰들이 예배당에 몰래 들어와 죄를 고백하는 이들을 잡아가는 데 열을 올렸을 정도. 그러나 경찰들마저도 회개하고 교인이 될 만큼 성령의 역사는 강력했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이 교수가 100년 전 대부흥운동이 감정적인 차원을 넘어섰다고 말하는 이유는, 공개적인 회개에서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반드시 지불하는 구체적인 회개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이 교수가 대표적인 사례로 든 윤승근은 자신이 횡령하거나 훔친 돈을 갚으러 전국을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윤 씨가 갚은 돈에 '양심전(良心錢)'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교수가 말하듯이 양심전으로 상징되는 회개운동은 기독교의 인식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기독교정당 만들자"
뒤이은 발제자들과 토론자들은 대부흥운동이 다시 한 번 일어나야 한다는데 이견이 없었으나, 구체적인 대안을 놓고는 의견이 갈렸다.
신현균 목사(민족복음화운동본부 총재)는 "기독교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 목사는 이날 참석하지 않았지만 발제문을 보내 "이미 가정당이라는 정당을 만든 통일교가 원내교섭단체가 되면 기독교를 탄압할 것"이라며 "기독교정당 설립을 서둘러 정치적으로도 기독교 부흥의 기반을 닦아 놓아야 한다"고 밝혔다.
신 목사 외에도 상당수의 발제·토론자들이 최근 침체된 교회를 다시 일으킬 대책으로 기독교정당 설립을 꼽았다. 황우려 국회의원(한나라당)을 비롯해 문용자 권사(한국여성정치 서울연맹회장), 장헌일 원장(한국의정연구원) 등은 "기독교정당이 한국교회의 발전을 정치적으로 보장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반면 김진홍 목사(두레공동체 대표)는 "우리나라는 모든 교육이 무너졌기 때문에, 교육목회가 대안이다"고 주장했다.
▲박철·고성실 목사는 각각 농촌목회자와 여성목회자의 입장에서 기존 교회를 비판
했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한편, 이번 심포지엄에서 농촌목회와 여성목회를 대표해서 토론에 나선 박철 목사(지석교회)와 고성실 목사(한국여목연합회 부회장)가 기존 교회를 향해 따끔하게 충고한 것이 눈에 띄었다.
박 목사는 "목회자도 어느 정도는 농사를 지어봐야 한다", "신학교에 농촌과 농촌목회를 바르게 가르치는 과정이 필수과목으로 채택돼야 한다", "도시교회 시골교회에 부채의식 가져라" 등 일곱 가지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고 목사는 "남성 목사들은 여성 목사를 액세서리 정도로 취급한다"고 가부장적인 남성 목사들을 비판하면서 "교회 여성들이 남성보다 훨씬 더 많이 기도하고, 그 기도로 인해 한국교회가 이 정도라도 유지하고 있다"고 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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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기>지도자부터 회개해야 한다
발제자 이덕주 교수의 말처럼, 100년 전 '양심전'은 기독교인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다. 이 교수는 양심전이 자칫 감정으로 치우칠 수 있는 부흥운동을 기독교윤리를 세우는 데까지 끌어올렸다고 극찬했다. 옳은 말이다. 회개는 구체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100년 전 믿음의 선배들은 형무소로 끌려갈 줄 알면서도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했고, 부당하게 취한 돈을 돌려주려고 전국을 누볐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죄를 고백하고 형무소로 끌려가는 기독교인들을 두고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돈을 되돌려 주는 이들을 보고 어리석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철저한 신앙에 감동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들로 예배당은 넘쳤다고 한다.
100년이 지난 오늘, 교계지도자들이라면 누구나 대부흥운동이 다시 일어나길 간절히 바란다. 그들은 "한국교회, 이대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에 내놓아야 할 이 시대 한국교회의 '양심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한다.
▲이번 심포지엄을 주최한 한국새벽기도운동본부와 발제·토론자들은 "개혁하자"는
원론적인 말을 던졌을 뿐, 개혁의 내용에 대해서는 인색했다. 왼쪽부터 대표회장
나겸일 목사, 발제를 맡은 김진홍 목사, 토론자 소강석 목사. ⓒ뉴스앤조이 주재일
이번 심포지엄을 주최한 나겸일 목사(주안장로교회)를 비롯해 대다수 참석자들이 "새벽기도를 통해 대각성운동을 일으키자"고 주장했지만, 무엇을 각성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는 외면했다. 김진홍 목사도 "교육목회의 핵심은 예수의 교육목회를 이어받는 일"이라고 말한 것 외에는 교육목회에 대한 특별한 설명이 없어 알맹이가 빠진 듯한 아쉬움을 남겼다.
토론에 나선 소강석 목사(분당 새에덴교회)와 조배숙 국회의원(새천년민주당)도 원론적인 주장에 머무르기는 마찬가지. 소 목사는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통회자복하며, 뜨거웠던 새벽기도운동과 성령운동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했지만, 고백할 죄의 내용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조 권사 역시 "현재 국회의원 가운데 40%가 기독교인이고, 14개 광역 자치단체장 중 8명이 기독교인이지만, 정치권에 대한 비난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대안으로 "자신이 봉사를 위해 선발된 종임을 인식하자"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날 "다시 한 번 부흥하자"고 핏대를 세우는 발언자들에게서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마가 11:13)가 보였다. 회개하자고 주장하면서도 회개해야할 내용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는 교계 지도자들의 모습이 겉이 화려해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키지만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와 영락없이 닮았다.
무화과나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뿌리 채 말라버렸다. 무화과나무는 사랑과 정의가 없고 율법종교만을 강요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하면서, 자신들은 온갖 부당한 방법을 동원해 제사를 지내러 성전에 오는 이들을 속여 이득을 취했다.
왜 지금 교계 지도자들이 대각성을 외치는 걸까.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처럼 사람들을 닦달해 종교로 이득을 취하기 위함은 아니길 바란다. 나아가 진정한 회개를 원한다면 먼저 지도자가 철저하게 회개한다는 것이 100년 전 대부흥운동이 주는 교훈이다. 이 교수는 100년 전의 대부흥은 위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밝혔다. 하디(R.A. Hardie) 선교사는 자신이 먼저 한국인들 앞에서 자신의 오만과 불신을 공개적으로 자복해 대부흥의 불길을 당겼다.
심포지엄의 내용 외에도 참석자들의 불성실한 태도가 특히 두드러졌다. 발제·토론자들은 자기 발언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마지막 토론자가 발표할 때는 사회자와 토론자 네 명만이 자리를 지켰다. 심포지엄을 시작하면서 사회자가 청중이 질문할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질문을 받을 사람이 먼저 자리를 떠나 토론 자체가 무의미할 지경이었다.
행사의 1부인 기념예배에는 300여 명이 참석했다. 찬송 시간에는 다같이 일어나 애국가를 불렀다. 그러나 2부 심포지엄이 시작하자 회의장은 썰렁해졌다. 겨우 100여 명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끝날 무렵엔 50여 명으로 줄었다.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무게 있는 주제로 토론하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보일 태도로 보기에는 실망스러운 모습이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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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왜 가려 하는가?
하늘나라 상급을 갖고 다투는 어리석은 제자들처럼
천국에 가서 영원토록 즐기며 살기 위해 가려는 것인가? 잘 먹고 잘 살고 행복이 철철 넘치게 살기 위해 가려는 것인가? 천국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할 수 있는 차원의 곳이 아니다. 인간의 이해로는 가늠조차 할 수없는 곳이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오해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하늘나라에 대한 인식이 지극히 인간적인 면을 보고 질책하셨다.
이들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구원론에 빠져 지내는 자들이다. 이들이 하늘나라의 본 뜻을 알았다면 그런 엉뚱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늘나라를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것이 은혜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의 생각하는 기준이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누구나 바리새인들처럼 지극히 인간적 발상에서 나오는 천국론과 구원론을 버릴 수가 없다. 구원을 받겠다는 열망 그 자체가 신앙의 본질로 언제나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욕망을 잠재우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구원론의 열망 대신 주님의 은혜,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자족하며 살기를 바라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늘나라에서 누가 더 큰 상급을 받을 것인가를 가지고 다투었다. 이런 제자들을 보시는 주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왜 제자들은 하늘나라에 가서 상을 받겠다는 염원으로 가득 찼을까? 이들은 주님의 십자가의 피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다. 염불보다는 잿밥에만 정신이 몰두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난 것이 인간이다. 양심을 화인 맞아 죽어 마땅한 존재로 태어난 것이 인간이다. 이런 도저히 구제할 길 없는 더러운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고 나약한 존재들을 택하여 주님의 은혜를 증거하시는 것이다. 이들은 피상적 사건으로 다가오는 천국에 정신이 팔리는 자들이 아니라 오직 실제적 사건으로 내게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에게 온 정신이 집중되는 것이다. 은혜 속에서 사는 자가 은혜를 모독하고 구원얻을 것만을 걱정한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를 모독하는 짓이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건만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 자들이 구원론에 정신을 집중하고 사니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인지 구원론에 빠져 사는 것인지 답답한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두워 주님을 믿지 못하고 헛된 곳에서 찾는 것이다.
김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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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새로 태어나는 삶, 우리 마음이 예수님 마음이 되는 것
요 3:1-11, 겔 36:24-28
바리새파 사람이요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왔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은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그가 예수님 앞에 오자 이렇게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하시지 않고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을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보시오.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소."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가 바리새파 사람이요 유대인의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아 온데서 그가 하나님나라를 갈망하는 자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현재 그의 주변에서 이룩되는 일들이 생명을 살리는 일들이 아니라 생명을 죽이는 일들이라는 것을 마음 아파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룩되는 세상이 오기를 갈망했다. 이것을 예수님은 아셨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주변에 이룩되는 일들이 죽음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이라는 것을 절감해야 새 길을 찾게 된다. 니고데모는 이렇게 새 내일을 간절히 갈망했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서 새 내일의 징조를 본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찾아 왔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은 조용하고도 진지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두시오.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오."
새 날을 보려면 우리가 먼저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에 니고데모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음성으로 묻는다.
"다 자란 사람이 어찌 다시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니고데모는 새로 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이 말씀을 이해할 사람이란 땅 위에 그리 많지 않다. 새로 난다는 것은 그의 가치관이 변한다는 말. 삶의 목표가 새로워진다는 말. 이웃을 향한 그의 삶의 자세가 바뀌는 일. '나' 중심의 자세에서 '우리'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 이웃의 아픔이 자기의 아픔이 되고 이웃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이 되는 심정을 가지게 되는 것. 내 가정, 내 나라만이 문제가 아니라 온 인류가 다 내 이웃이라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늘 기도하고 이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하게 된다는 일이다. 옛 것을 다 버리고 새 것을 옷 입듯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처럼 되는 것을 말한다.
에스겔서 3장 24절 이하에 있는 말씀이 그것을 말한다. 때가 이르면 오래 동안 산지사방에 흩어져서 고생하든 무리들을 하나님은 불러모아 그들에게 성령의 비를 내려주시고 그들 마음에서 돌 같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 같은 마음을 주어 새 사람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신 것은 그들이 오랜 고난의 경험을 통해서 이 세상의 악을 경험하고 그 길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영이 지배하는 사랑과 정의의 신천신지를 갈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새 내일을 갈망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의 영을 내리셔서 새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으나 자기 자신이 그렇게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해 본 일이 없다. 그런 것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해 보았다.
대부분의 우리도 마찬가지다.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늙은 개에게 새 재간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우리들의 삶이 그렇게 변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입에서 쉽게 “저 사람은 할 수 없어!”라는 말이 뛰쳐 나온다. 상대방은 소망이 없는 자라는 말이다.
“내 나이에 이제 무엇을 어떻게”하고 체념을 한다. 자기 자신이 변한다는 것도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런 삶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하는 니고데모의 물음은 사실 우리들의 물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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