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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낙제 목사에 낙제 아들 / 설교 강단의 위기와 쇠퇴 이유는 무엇일까요
    2003-09-29 06:25:18   read : 2197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도시교회 목사가 부러운 어머니...그래도 난 "농촌이 좋다"


    신학교 시절,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비판적인 시기에, 내가 과연 앞으로 목사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하느님의 일을 꼭 목사가 되어야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목사의 길을 피해가고 싶었다.

    나는 젊음이라는 무기로 철저하게 무장한 채 방황과 객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 때 만큼 내 인생에 있어서 진지했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사고는 경직되어 있었다.

    당시 사회의 구조악과 모순에 눈을 뜨면서 더 이상의 방황을 끝내고, 차라리 목사가 되어 이 사회의 변혁에 동참하는 것이 하느님이 내게 주신 소명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학교 3학년 때 나는 내 삶의 돌파구로 <농촌목회>를 선택했다. 그 때 결심이 나는 평생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면서 맘몬과 바벨로 혼재된 오늘의 한국교회로부터 참다운 목회의 모범을 만들고 싶었다.

    나를 아끼던 주변 사람들로부터 도시 목회의 길(교회개척)을 권유받기도 했고,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한 교회도 있었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농촌으로 내려갔다.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어느덧 농촌목회 19년째에 접어들었다. 처음 내가 가졌던 생각대로 농촌을 한번도 떠나지 않았다. 그 동안 교회를 세 번 옮겼는데, 세 교회 다 농사 외에는 부업거리가 전혀 없는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다.

    그러면 신학교 시절, 내가 하느님께 기도하고 나 자신에게 약속한대로 시방 살고 있는가? 아무리 점수를 후하게 주어도 50점을 줄까 말까이다. 60점 이하가 낙제이니, 나는 낙제 목사다.

    농사짓는 목사 되겠다고 결심했는데, 땅이 없으니 남의 땅을 빌려 오리논 논농사를 조금 지어 보았다. 시늉만 낸 것이다. 트랙터로 논을 갈고 콤바인으로 털고 하는 건 다 교인들 손에 맡겼으니 오죽하겠는가?

    오리 밥 주러 다니고, 논에 퇴비 넣어주고, 호미 들고 들어가서 김 매주는 게 고작이었다. 논 한 배미 빌려서 농사랍시고 짓는데 하루에도 대여섯 번 논에 나간다. 논에 하루 대 여섯 나가 보는 것을 사람들은 ‘논에 나가 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루는 장로님 한 분이 찾아오셔서 “목사님 농사 그만 두셨으면 좋겠시다.”고 어렵게 말씀을 하신다. 교인들 집 농사를 거드는 것도 대단히 조심스럽다.

    50여 가구 되는 가정을 다 도울 수 없다. 어차피 선택을 해야 한다. 일손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아예 교인이 아닌 집을 돕는다. 그런데 그렇게 농사를 거들다 여러 번 오해를 받는다.

    목사가 농민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농사시늉 하기도 어렵다. 요즘도 텃밭을 가꾼다. 마늘, 상추, 강낭콩, 파, 감자, 가지, 토마토, 땅콩… 등등 종류도 여러 가지다. 제초제를 안 주니 풀이 엄청나다. 장마철 비 온다고 잠시만 내버려두어도 완전 풀밭이다. 김매는 일은 거의 아내 몫이다.

    내가 농사꾼이라면 완전 낙제 농사꾼이다. 그리고 농촌에서 살면서 교회의 새로운 모델, 이상적인 모범을 만들어 보겠다고 결심했는데, 별로 큰 성과가 없다. 그러니 얼치기 목사임이 틀림없다. 그래도 나는 농촌이 좋다. 흙이 좋고, 들이 좋고, 산도 좋고, 나무도 좋고, 풍경이 좋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사람이 제일 좋다.

    내가 목회도 신통치 않게 하면서 가는 교회마다 최 장수 목회를 했다. 나를 불러주는 데가 없어서 그렇긴 하지만…. 내 설교 주제의 절반은 ‘감사’다. 언제인가 컴퓨터 기록장치에서 내 설교를 참고하기 위해 키워드로 ‘감사’라는 단어로 검색을 했더니, 설교의 절반 이상이 감사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다.

    내 생활에 ‘감사’가 없기에 아니면, 교우들이 ‘감사’에 인색한 삶을 살기에 ‘감사’라는 설교를 자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강요된 어거지 싸구려 감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감사’를 생활화하면 할수록 공짜로 생기는 보너스가 많다. 부흥강사들의 긍정적 사고방식 하고는 조금 다른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사’가 부족하다.


    목회하면서 늘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23년 전 하느님 부름을 받고 가셨고, 홀로된 어머니를 모시는 일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목회하면서 그게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교회 옆, 허름한 오두막집을 돈을 주고 사서 입식으로 개조해서 어머니가 거처하실 집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대단히 만족해 하셨다. 장로님들을 비롯해서 온 교우가 환영해 주셨다. 참으로 고마웠다.

    그런데 5년 전, 어머니가 대구에 사는 동생네 집에 가셨다가 쓰러지셔서, 척추수술을 했는데 수술이 잘못되었는지 그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신다. 그것이 제일 안타깝다.

    나의 어머니는 보행을 못하신다. 워커를 잡고 간신히 방에서만 왔다 갔다 하신다. 그래도 신앙의 힘으로 늘 밝게 사신다. 참 감사하다. 나는 어머니의 신앙을 절반도 못 따라간다.

    문제는 어머니와 생각이 맞지 않을 때가 가끔 있다. 나는 농촌 목회를 감사하고 만족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나의 어머니는 도시교회의 대형 목사들을 은근히 부각시켜 말씀하실 때가 계시다.

    일테면 도시교회 큰 교회 목사들은 목회에 성공한 것이고, 훌륭한 목사라는 것이다. 요즘 기독교TV가 생기면서 어머니는 낮에 혼자 지내시기가 무료하니 주로 기독교TV 방송을 보시며 소일하신다.

    거기서 얻은 걸러지지 않은 정보는, TV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가끔 어머니와 충돌하게 된다. 다 내가 못난 탓이다. 우리 어머니는 공부는 많이 하신 분이 아니지만 지혜롭다.

    말씀도 잘 하시고, 기도도 잘 하신다. 어머니는 장남에 대한 기대가 20년 동안 농촌을 벗어나지 못하고 맨 날 세월아 네월아 하고 사는 내가 무능한 존재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가끔 어머니가 전화를 하신다.

    “오늘, 박 목사 설교가 너무 은혜롭고 좋았어, 어휴 설교가 아까워, 서울 같은 도시 큰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설교 잘한다고 알아줄 텐데….”

    어머니의 마음을 안다. 어머니가 내 마음을 기쁘게 해 주려고 하시는 말씀을, 또 어머니의 기대에 내가 미흡하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시골교회가 좋다’하고 어머니는 ‘시골 교회가 성이 안 차신다.’ 기왕이면 크 교회 목회하길 바라신다. 이것이 어머니와 나의 문제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어머니와 충돌하면 참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가 기분이 좋으면 얼굴이 해바라기처럼 환한 표정을 지으신다. 조금 속상하면 얼굴이 금방 어두워지신다. 어머니의 속내를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또 나는 내 식대로 어머니를 설득하려고 한다. 낙제 목사에 낙제 아들이다.

    그러나 나는 농촌교회가 좋다. 그리고 어머니가 좋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나의 속마음이요, 진실이다. 앞으로 얼마나 농촌에서 더 살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농촌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하느님이 나를 어디로 이끄실지 모르지만.


    ▲박철 목사.

    사기치는 목사가 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왜 자꾸 약장사 같은 목소리로
    과장을 하게 되는 걸까?
    다정다감한 목사가 되어야지 하면서도
    왜 무뚝뚝하고 내가 보기에도 험한 인상으로
    사람들을 대하게 되는 걸까?
    양떼들을 진심으로 아끼며 돌보는
    선한 목자가 되어야지 하면서도
    왜 건성건성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걸까?
    하느님 눈치 보며 살아야지 하면서도
    사람 눈치 보다가 사람 꾀임에 빠져
    골탕먹고 마음 상해 하는걸까?
    돈에 욕심없는 목사가 되어야지 하면서도
    결국은 속물근성의 인두겁에서 벗어나
    자유롭지 못한 걸까?
    연하디 연한 쑥처럼 고요한 성품을
    가져야지 하면서도
    왜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성깔을 내고 요란하게 되는 걸까?

    아, 빈듯하여라
    허한 게 속이 빈 듯하여
    아, 영락없는 나는 낙제 목사다
    얼치기 목사다.(1993)
    (박철. 낙제 목사)

    박철(지석교회. 시인)

    기독교보다 먼저 한반도에 오신 예수
    복음 전해지기 전 사람들은 지옥 간다는 이원론적 사고 벗어나야


    가끔 믿음의 심지가 깊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혹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전해진 지 불과 110년(가톨릭 210년)이 조금 지났는데, 그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모두 '지옥'에 가게 될까요?" 이 질문은 솔직하고 정직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의 참된 가치는 합리적인 생각에 적절하게 답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한국이라는 땅덩어리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국이라는 국호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단지 공간적인 개념으로만 국한해서 얘기할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내 조국 한국은 우리에게 5천 년을 이어온 정신적 유산과 핏줄의식, 문화 등을 넘겨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 사람은 쌀밥에 김치, 고추장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그런 입맛을 전수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제에 대해서 우리는 내 조국 '한국'을 신앙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사람들로서 이야기를 조망하기 바랍니다.

    흔히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오류는 모든 사물이나 사건 혹은 역사이해를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정리해 버리는 것입니다. 아마 그런 생각은 '세상은 악하다'는 이원론적인 사고로부터 출발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선하시고 인간은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앞서의 질문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의 사람들은 '몽땅' 지옥에 간다고 어떤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총체적인 시각을 갖고 성서를 읽어야 합니다. 물론 이원론적인 사고의 근거가 되는 단편들이 성서 안에서도 나타나지만, 총체적인 틀을 갖고 성서 속의 하느님의 생명관 또는 자연관을 보게 되면 이런 이원론적인 사고를 벗어나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참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은 당신이 창조하신 자연세계, 이를테면 땅·사람·역사·사건 등을 통해서 당신의 비밀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참 인격을 가지신 하느님이시라면 자신의 뜻에 따라 당신이 창조하신 자연만물을 끊임없이 사랑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활동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을 공동번역 성서로 읽으면,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입니다.




    여기서 말씀(로고스)이란 하느님이 특별히 어느 종교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말씀을 '도'(道)라고 해석하는 신학자도 있습니다. 아무튼 하느님은 어떤 형태로든지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이 땅에 개입하셨고 활동하셨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의 활동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태초에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8편 3절을 보면 "그를 하느님 다음 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이 인간으로까지 낮아지셔서 인간을 돌보시며, 인간들에게 하느님이 지으신 모든 자연만물을 다스릴 것을 말씀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옛부터 우리 민족의 종교성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달을 보고 소원을 빈다든지, 냉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린다든지 하는 그 심성의 밑바닥에는 신을 향한 인간의 마음이 깊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높은 윤리관과 도덕률에 의한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 왔습니다. 그런 가치관의 배후에는 하느님이 우리 민족 가운데 깊숙이 개입하고 계셨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조상은 남한 인구의 3분의 1이 그리스도인인 지금보다도 더 따스한 정을 나누고 효를 근본으로 삼아 어른을 공경했으며, 예의바른 삶의 태도와 더불어 끊임없이 불의에 항거해 왔습니다.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신앙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요한일서 기자는 하느님에 대한 신관(神觀)을 한마디로 정의하여 "하느님은 사랑이시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옛 조상들은 그 사랑을 몸으로 살았습니다. 하느님 이야기에 대해서 무조건 독점하여 하느님을 '전매특허'인 양 생각했던 히브리 민족보다 더 '하느님 사랑'을 온몸으로 절절하게 실천했던 우리 조상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세계 기독교회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급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 민족이 옛부터 가지고 있었던 높은 '종교성'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종교학자의 말은 그런 의미에 적절한 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오늘 성서 본문을 천천히 곱씹어 봅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느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브리서 1,1-2)

    히브리서 기자는 요한복음 기자의 '말씀'(로고스)을 예수 그리스도와 대비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의 신학적 입장이 어떻든 저자의 생각은 태초에 예수를 요구하는 무엇이 세계의 본질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의 생각이 아니라, 처음부터 만상(萬象)의 기반이 되는 핵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활동하고 계셨다는 이야기가 성립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좀더 폭넓은 신앙관, 생명관을 가져야 합니다. 속 좁은 신앙적 단견에 빠지지 않도록, 모든 세상의 이치를 초월하여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에 겸손히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민족은 옛부터 하느님을 믿어 온 백성임에 틀림없습니다. 종교의 옷을 입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 민족의 심성 가운데 예수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고맙게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박철(지석교회·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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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비평을 걱정하는 김 목사님께

    설교 강단의 위기와 쇠퇴 이유는 무엇일까요




    설교의 위기와 쇠퇴 이유는 무엇일까요.

    김 목사님, 지난 주말 김동호 목사와 강준민 목사의 설교 비평과 관련해 목사님의 염려 어린 전화와 이메일을 받고 여러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그래도 김동호 목사만큼만이라도 목회한다면 그래도 희망이 있지 않겠냐'는 애정과, '같은 교단의 선배 목회자를 공론의 장에서 비평의 도마 위에 올린 것에 대한 불이익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등의 목사님의 충고에 우선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목사님께 글을 올리는 이유는, 목사님과 나눈 이야기와 독자 의견에 올라온 글들이 거의 동일선상에 있고 그 외에 저를 생각해주는 동료들과 선후배들의 조언 또한 그러하기에 그러한 궁금증들을 같이 나누면 어떨까 싶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우선, 설교에 대한 비판이 자칫 설교자의 인격과 삶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져 상처가 되면, 그리고 설교 평가가 설교자에 대한 감시로 기능하는 경우 설교는 위축되고 설교의 쇠퇴가 있을 수 있다는 우려를 하셨지요. 십분 동감합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이미 자신의 총체적 삶을 내놓고 설교하는 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평가와 비판 앞에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훈련을 각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설교 평가가 근거도 없는 비난과 인격에 상처를 주는 식의 욕설에 가까운 난도질이 되는 것은 당연히 문제가 되어야 하겠지요. 설교에 대한 평가의 기본 자세가 신앙적인 겸손과 진지함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자세는 설교 비평이 아니라 비방이라는 점에서 설교비평의 영역에서 제외시켜야 할 것입니다.

    설교 비평이 설교자의 인격과 삶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면

    물론, 설교 비평이 자칫 이러한 비난과 비방을 조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 때문에 설교 비평이 억제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당대의 설교자들(제사장과 율법학자)에 대한 비판을 하신 까닭은, 이들의 삶과 말에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비판이 없으면 백성들이 이들의 종교적 헤게모니에 휘둘려 끊임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러신 것이 아니었을까요?

    설교 비평의 근본 목적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설교의 선포를 돕는 일에 있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된 각종 이데올로기적 세뇌로부터 청중들을 지켜내기 위한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가 봅니다.

    설교자의 인격과 삶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설교란 어느 분의 지적대로 지적 전달에 그치는 강의와는 달리 설교자의 삶과 인격이 하나님의 말씀에 녹아 증언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언제나 자신의 삶과 인격이 설교 속에서 말씀의 능력과 함께 드러나야 함을 의식해야 하며, 그것과 유리된 말씀 선포는 결국 위선이 되고 만다는 것을 각성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청중은 또한 이 문제에 대해서 매우 예민함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재론컨데 설교자의 사생활과 인격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으로 설교 비평이 번지는 것은 악의적이라는 점에서 지탄받아야 할 것입니다.

    설교 비평, 설교에 대한 '폐쇄적 성역화'가 가져온 폐해에 대한 각성에서 출발

    목사님, 설교자의 설교가 오늘날 비평의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은, 목사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한 언로 개방에도 그 이유가 있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설교에 대한 '폐쇄적 성역화'가 가져온 폐해에 대한 각성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설교자 개인의 욕망을 채우려 들거나 교권적 군림을 꾀한다든지 또는 정치적 이기심을 포장하는 경우, 또는 오도된 역사인식을 주입시키려 드는 상황에 대한 비판의식의 발생에 있습니다.

    또한 과거와는 달리 높아진 교육 수준과 지적 각성의 정도에 따른 도전을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이를 설교의 진정한 권위 속에서 해결하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는 또한 매우 성서적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은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아야 할 청중을 감시자로, 비평가로 만드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셨지요. 물론 저 또한 청중들이 비평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인 한 설교에 대한 비평은 피할 수 없지 않을까요? 따라서 제3의 설교비평자가 설교 이해의 기준이나 방법, 그리고 안목에 대한 논의를 펼쳐나가는 일은 설교자와 청중 모두에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여기에서 한 가지 함정은 많은 분들이 지적하신 것처럼 그 설교가 그 해당교회의 특수한 정황에 대한 응답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비평자가 절대적 능력을 가지지 않는 한 이러한 대목에 대한 온당한 평가가 불가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설교 비평의 의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나 문학에 대한 평론이 필자나 독자의 생각과는 다른 내용이 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 평론 역시 비평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비평적 논의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 교회의 특수한 목회적 상황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영화와 문학 평론과 설교 비평은 다르다고 할지 모르나 인간의 삶을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워나갈 것인가를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영화와 문학 평론도 그러한 각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니, 그 대상은 다르나 그 기준과 시각은 동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설교자의 절대적 권위를 전제로 하는 발상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설교학 자체가 설교 비평의 인식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설교학 강의는 설교 비평의 수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 비평의 부정적 영향에 대한 고려와 조심이 강조되는 것은 마땅하나 그것이 곧 설교 비평의 무용론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목사님이 예리하게 짚으신 대로 '부분과 전체의 균형'과 '유기적 관계'는 강조되어야 마땅합니다. 예화도 전체적인 메시지와 유리된, 부분적 이해를 위한 것으로 그쳐서는 예화주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화 자체가 중요해져 버릴 수 있는 것이죠. 예화도 전체 주제, 전체의 구조에 종속되어야 의미가 있고 빛을 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사람이 우려하는 대로, 자기중심적 평가의 문제는 모든 평가가 주관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일견 인정하나, 각자의 선 자리에서 보는 시각의 차이에 대한 수긍과 상호 비평에서 보다 나은 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가자의 자기중심적 시각에 대한 문제는 설교자 역시 그럴 수 있다는 점에서, 설교자와는 다른 시점에 서 있는 사람의 생각과 반응을 알 수 있는 통로로 삼는 것이 발전적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또한 단회적 설교 평가는 물론 일정 부분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설교자의 설교 전체의 경향에 대한 이해 없이 어느 하나의 설교만 가지고 보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설교라 해도 그 안에는 그 설교자의 총체적 삶과 성서이해의 종합적 인식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파악하고 전체적 경향의 문제를 짚어내는 노력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지혜는 우리의 신앙 안에서도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 여겨집니다.

    해당 교회의 은혜가 따로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 설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또한 보편적 차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별성과 보편성의 조화를 따지는 것은 설교 비평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이의 자세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지요. 물론 중요합니다. 이 대목은 앞으로 보다 정리해서 논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중의 태도를 무슨 지침으로 만들어 버릴 경우, 청자의 설교 이해를 제한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설교가 신앙의 발전을 위한 것이니 신앙적 각도에서 들어야 함은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제기되어야 하고 이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발전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김 목사님! 올바르고 건전한 설교 비평에 설교자와 청중의 건설적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일은 실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설교의 과제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런 점을 깨우쳐 나가는 일이 또한 설교 비평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설교 강단의 위기와 쇠퇴의 근본적 원인은

    오늘날 설교 강단의 위기와 쇠퇴는 설교 비평의 도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설교 자체의, 성서해석에 대한 교리적 정형화, 교권주의적 요소의 문제, 삶과 시대적 정황으로부터의 유리, 설교로 포장된 신변잡기적 잡담, 설교로 포장된 이데올로기 등등이 보다 본질적인 원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올바른 설교를 위한 열망은 어떤 설교자에게도 다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서의 가르침과 오늘의 현실적 도전이 어떻게 서로 만나 질문과 대답이 되며 이 두 개의 기본항이 우리들 모두에게 하나님 나라의 생명력에 충만해서 새로운 결단과 새로운 존재로의 탄생을 가능하도록 할 것인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늦은 주일 저녁, 힘든 사역을 하고 들어오신 목사님께 제 글이 짐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저에게 개인적으로 분노 섞인 내용으로 혹은 질책과 격려의 메일을 보내주신 분들께 일일이 답장을 드리지 못하고 이 편지로 가름하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한종호 / 월간 <기독교사상>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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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이유

    도올 김용옥의 성서 내용 비판에 대한 반론


    1. 들어가는 말

    오래 전에 TV를 통해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도올 김용옥의 논어 강좌는 들어볼 만한 내용이 매우 많아 시간만 주어지면 열심히 보았다. 물론 공자님 말씀을 진리로 이해한다기보다는 논어라는 분야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그런데 강의 내용 중에 성경에 대한 비판을 하였는데, 그것이 매우 잘못된 주장을 하기에 이것을 지면을 통해 바로 잡고자 한다. 내용은 예수의 탄생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비판했는데 상식 밖의 설명을 했다.

    그 내용은 배부른 임산부 마리아가 요셉과 함께 갈릴리에서 머나먼 베들레헴까지 인구조사를 받으러 올라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즉, 당시의 총독이 세금을 거두기 위해 인구조사를 하는데, 이에 응하기 위해서 갈릴리에 살고 있는 요셉이 본적지인 베들레헴에 가는 것이라면 요셉 혼자만 신고하고 돌아오면 된다는 주장이다. 무엇 때문에 만삭된 마리아와 함께 그 멀고 험한 길을 함께 가겠느냐는 뜻이다.

    당연히 이러한 성경의 기록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만들기 위해 사실이 아닌 것을 허구로 기록한 내용이라는 말을 했다.

    2. 문제와 증거

    김 교수는 성경에 대한 비판을 증명하기 위해 로마제국의 제왕 가이사가 당시에 호적하라고 명령한 역사적 자료가 전혀 없다는 것과 인구조사 당시 수리아 총독으로 재임했다고 밝히는 구레뇨라는 인물은 AD 6년, 즉 예수가 탄생한 때부터 최소 5-6년이 지난 후 수리아의 총독이 되었다는 내용을 제시했다.

    필자는 이중 역사적 증명(구레뇨에 대한 역사)은 다음 글을 통해 제시하기로 약속하고, 먼저 요셉과 마리아가 갈릴리에서 베들레헴까지 올라간 성경적 이유를 설명하도록 하겠다.

    3. 성경의 내용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누가복음 2장1-3절)".

    위 내용을 보면 요셉이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갈릴리에서 베들레헴으로 호적을 하기 위해 갔다는 기록 외에 다른 이유는 밝혀주지 않는다. 다만 정황으로 볼 때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탄생했으니 갈릴리 나사렛에서 출발할 때 마리아는 거의 만삭의 상태로 이동한 것에 틀림없다. 함께 가야 할 이유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만삭된 마리아와 요셉이 함께 올라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이 그를 다윗의 자손으로 만들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전설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4.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의 거리

    먼저 호적신고를 하러 가야 할 베들레헴까지의 거리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얼마나 될까? 현재의 지도로 살펴보면 직선 거리로 약 170km에 달한다. 이곳으로 올라가는 길은 2000년 전의 도로 사정을 이해하면 한쪽은 족장들의 길이고 다른 쪽은 갈릴리로 돌아 사마리아 땅을 거치지 않고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을 거쳐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이다. 이때의 유대인들은 부정한 사마리아 땅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 상식이기 때문에 후자를 선택해 돌아서 올라가야 한다.

    당시의 교통수단을 생각하면 이동 속도는 얼마 정도일까? 성경의 예를 보면, 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까지 3일 길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로 환산하면 약 100km 정도가 된다. 이것을 군인들이 3일에 이동했으니 하루에 약 33km 정도 이동하는 셈이다.

    동일한 길은 아니지만 갈릴리 나사렛과 베들레헴은 직선 거리 170 Km이다. 그러나 갈릴리를 돌아 여리고와 예루살렘을 거쳐 베들레헴으로 가면 약 230km에 달하고, 군인이 아닌 일반인이라면 하루에 약 30km 정도를 이동함으로 최소 10일 이상이 소요된다.

    일단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호적하는 문제도 그렇게 수월하지 않다. 당시의 사무능력을 감안하고 대대적 인구조사라고 생각하면 그 복잡함은 불을 보듯 뻔하다. 성경의 정황을 보면 요셉이 임산부를 대동하고도 여관을 구하지 못해 마굿간에 여장을 풀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리고 복잡했는지 짐작이 간다.

    또한 호적을 마치고 돌아온다는 것도 마찬가지의 거리가 계산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따라서 호적하는 기간을 2일이라고 추측하면 호적을 하기 위해 소요되는 모든 기간은 아무런 변고가 없을 때 22일은 족히 걸린다.

    5. 율법의 규례와 요셉

    이제 유대민족이었던 요셉의 입장을 알아보기로 한다. 요셉은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에 놓이는데, 하나는 호적령 기간에 맞추어 베들레헴으로 올라가 호적을 마쳐야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율법의 규례를 따라 준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일지 몰라도 유대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이다. 당연히 요셉의 가정에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요셉이 행해야할 중요한 규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할례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에서의 제사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레 12장 2-3절)"

    이것이 유대민족들이 사내아기가 태어날 경우 8일 만에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규례다. 유대인 요셉은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최소 22일 이상이 걸리는 호적신고를 위해 베들레헴으로 떠나야만 한다.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면 태어나는 사내아이에게 할례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진다. 규례를 준행하자니 호적령을 피할 수 없고 호적령을 따르자니 하나님의 규례를 어기게 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 제기하기를 "할례의 문제라면 다른 사람이 나은지 8일이 되었을 때 행하거나 마리아가 하면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불가피할 때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래를 읽게 되면 생각이 달라지고 만다.

    "제8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33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자녀가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거든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해 일년 된 어린 양을 취하고 속죄제를 위해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취하여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자녀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레위기 12장 6절)."

    위의 규례를 보면 사내아이를 낳은 여자 곧 마리아는 33일이 차면 제사장에게 가서 속죄제사를 드려야 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으며 아이를 낳은 임산부가 행하는 규례다. 제사는 제사장에게 가서 행해야 하고 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상주하며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린다. 따라서 마리아는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8일만에 할례를 행하고 33일이 차면 예루살렘에 올라가 속죄 제사를 행한다.

    한편, 요셉은 호적령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올라가야 하고 베들레헴과 예루살렘과의 거리는 불과 1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갈릴리 나사렛에서는 무려 215km 거리에 있다.

    6. 결론

    규례를 준행한다는 것을 생명처럼 여기던 경건한 유대인 요셉의 입장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하고 33일이면 아이를 낳은 마리아를 예루살렘에 데려가 속죄제사를 드려야 하며, 한편으로는 호적령을 따라(기간이 정해진 영임)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 신고도 해야 한다.

    요셉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호적하러 가는 베들레헴까지는 약 230km의 거리가 있고 곧 출산하는 마리아와 갓난아이를 데리고 속죄제사를 드리기 위해 올라가는 예루살렘도 215km의 거리에 있다. 하지만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같은 길, 같은 방향이며 불과 10km의 거리에 있다. 이럴 때 독자들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

    예수의 탄생 시기와 호적령

    도올 김용옥의 성경 비판에 대한 반론2


    1. 들어가는 말

    기자는 지난 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이유'를 통해 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베들레헴 탄생에 대한 내용을 유대민족의 고유한 역사적 정황을 기초로 설명한 바 있다. 이 글은 도올 김용옥이 TV 방송을 통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던 예수 탄생에 대한 내용을 반론하는 것이며, 그가 제시했던 두 가지 비판중 "만삭된 마리아와 요셉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이동한 이유"를 설명해준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구레뇨라는 인물과 수리아 총독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에 대한 역사적 증명이다. 먼저 누가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베들레헴 탄생 시기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살피면,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례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하고 말하고 있다. 즉 호적령을 따라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올라왔으며, 이곳에서 탄생하고 예루살렘에들러 규례대로 행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복음이 전하는 구례뇨라는 인물은 AD6년 수리아의 총독이 되었다고 역사가 요세푸스가 전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누가복음이 전하는 내용과 모순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러한 주장은 도올 김용옥이 처음 제기한 것이 아니다. 일부 신학계에서 성경의 신화론을 증명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내놓은 말이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60년대말 창세기 설화 논쟁과 교단의 분열을 야기했던 원인이기도 했던 내용이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기록이 역사적 자료들과 상이하다는 이유로 허위라고 말하는 것은 혹시 너무 경솔한 판단을 한 것은 아닐까?

    2. 탄생 시기와 역사적 배경

    유대의 역사를 기초로 예수가 탄생했던 역사적 배경을 살피면, 유대의 하스몬 왕조가 로마의 폼페이우스에게 패망하고 장관 안티파테르가 유대를 식민 통치하기 시작한 이후의 시기이다. 또 로마 케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도)는 초대 로마의 제왕으로 즉위하여 B.C 63년부터 A.D 14년까지 통치하였는데, 바로 이 로마의 제왕의 명을 바도 구레뇨가 호적을 실시했다고 누가는 말한다.

    당시 유대 나라의 정치적 상태는 어떠한가? 초대 식민 통치자 안티파테르를 이어 그의 아들 헤롯 1세가 유대의 위임왕으로 통치한다. 헤롯은 아우구스도의 애굽 원정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이에 대한 대가로 유대의 위임 왕이 된다. 바로 이 헤롯이 B.C 37년부터 B.C 4년경까지 유대를 통치한다. 마태의 증언에 의하면, 동방박사들이 바로 이 헤롯을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최소한 B.C 4년 이전에 호적령이 내려졌음이 명백하다.

    유대 나라는 헤롯의 1인 통치 체제가 끝이 난 후 세 나라로 분봉되었는데, 이때부터 로마는 유대에 총독을 세워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다. 사실 헤롯이 유대의 위임왕으로 통치를 했다는 것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자치적 통치를 유지했다는 뜻이다. 당연히 이때는 로마의 통치기구인 총독이 유대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다만 유대를 포함하여 넓은 수리아 지역 혹은 동방 지역을 행정적으로 다스리고 있었고 이때 수리아 총독은 구레뇨가 아니라 바루스라는 인물이었다.

    3. 인구조사는 두 번 이상

    로마의 역사를 밝히는 기독교 백과사전에 의하면, 구례뇨라는 인물은 B.C 12년 로마제국의 집정관이 되었으며 A.D 6년 수리아 지역을 총괄하는 총독이 되었고 A.D 21년 로마에서 죽은 것으로 나오고있다. 이것은 요세푸스의 기록에도 나오고 있으며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누가 복음이 기록하는 구레뇨에 대한 내용과 역사적 자료에 나타나는 내용은 그 시기가 전혀 다르게 표기되고있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누가는 기록하기를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한다. 이러한 의미는 누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구레뇨라는 인물이 인구조사를 최소한 두 번 이상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기록하고 것이다. 즉 구레뇨라는 사람이 두 번 이상의 인구조사를 했는데 그 인구조사 중에서 가장 첫 번 한 것임을 명백하게 밝혔다는 뜻이다.

    4. 로마제국의 총독 직위

    구레뇨는 위에서도 밝혔듯이 A.D 6년에 수리아의 총독이 되었다. 그런데 로마제국에서 임명하는 총독의 직위를 살피면 두 가지 직위가 있다. 그중 하나는 'governor(NIV)'이며 다른 하나는 'proconsul'이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행전 13장 7절에서 로마의 총독 서기오 바울을 칭하면서 'proconsul'이라고 말하고 있다. 헬라어로는 '안뒤파토르'(행 13:7)이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기록에서 구레뇨를 총독으로 칭할 때는 'governor'라고 했으며 헬라어로는 헤게몬이다. 즉 누가는 로마제국의 총독이 두 가지 직위에 있음을 분명하게 알고 이것을 적절하게 사용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로마제국의 총독 직위를 조금 더 살피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위에서 이미 말했듯이 'governor' 총독이란 임시직에 해당하며 급으로 따진다면 시험적으로 임명 혹은 특별한 임우를 수행하는 경우의 총독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총독서리'의 칭호 혹은 감사관 정도로 보면 이해가 빠르겠다. 로마제국의 총독은 제왕의 추천을 받고 원로원에서 이를 인정하는 총독이 있는데 이를 'proconsul'이라고 하며 권위가 인정되는 총독이다. 하지만 'governor'는 제왕의 특명을 받고 특별한 임무를 처리하기 위해 파견되는 경우도 있음으로 이때는 오히려 'proconsul'보다 그 권세가 더 특별하기도 하다.

    그런데 구레뇨는 B.C 12년경 로마에서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으며 동방지역에서 특별한 임무를 감당하며 약10년의 세월을 지내게 된다. 이때 수리아의 총독은 바루스였지만 그는 로마제국의 제왕에게 신임을 얻지 못했으며 반란을 두려워하여 소극적으로 활동했다. 반면 구레뇨는 이곳에서의 활동을 통해 신임을 얻는다. 결과적으로 B.C. 2년 바루스는 수리아 총독 직위에서 해임되고 구레뇨는 A.D 6년 수리아 지역의 'proconsul'로 임명되었다가 A.D 21년 로마에서 죽는다. 그런데 누가의 기록을 보면 구레뇨가 'governor'일 때 첫 번 행한 인구조사라고 밝히고 있다. 즉 A.D 6년의 총독이 아니라 그 이전이라는 뜻이다.

    5. 결 론

    이제 결론적으로 본다면 구레뇨가 로마제왕의 특명을 받아 수리아 지역에서 'governor' 총독으로 활동했고 인구조사를 실시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게 되었음을 누가 사도는 증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누가는 다른 역사적 기록에 나오지 않는 사실 곧 구레뇨라는 인물이 제왕의 특명을 받아 수리아 지역에서 활동했다는 역사를 전해준다는 뜻이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를 증명하는 역사적 증거가 된다는 말이다.

    성경의 진리성을 반대하는 사람은 성경의 역사적 기록성조차 부정하는 경우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누가라는 역사적 실존 인물이 2000년 전에 기록한 내용을 2000년 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단지 자신의 소견으로 이해가 안 된다거나 역사적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정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후대의 사람은 역사적 인물이 기록한 역사보다 사실을 더욱 모르고있음을 깨달으면 좋겠다.
    강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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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겁고 행복하게 성령님과 동행하는 성화의 길
    말씀과 찬양과 기도에 전념하는 일생의 삶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의 탄성이 영적 생명으로 거듭난 신자가 성화의 삶을 시작하는 신호탄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그 무거운 죄짐을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하다 여김을 받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인 양심의 가책이라는 심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는 죄짓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루터와 칼빈이 지적한 대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자유를 상실한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로서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치 소금물을 마시는 것처럼 채울수록 목이 마르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끊임 없이 남을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며, 거짓을 꾸미는 추악한 삶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부정하고 스스로 자신이 자신의 왕 노릇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에덴동산에서의 타락 이래로 인간을 지배해온 사탄의 올무에 묶여 사탄의 뜻에 순종하며 지옥으로 행진을 하루도 쉬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으로 거듭난 새 영적 생명은 죄밖에 지을 수 없는 자유 대신,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인도에 순종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거듭난 신자는 아직도 육신 속에 살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앞세운 사탄의 유혹 가운데 살지만, 그렇지만 이제는 그 사탄의 유혹에 빠지기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가 더 쉬운 영적 능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으로 원죄를 씻음 받아 거듭난 인간은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의 영적 상태를 회복하여 성령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탄의 유혹을 능히 물리쳐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거듭난 영적 새 생명도 성령님과 동행함 없이는 세상 사람과 똑같은 타락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일에서부터 칭의 구원을 받기까지의 모든 구원의 역사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던 것에 유념하면, 성령님과의 동행함이 없이는 다시 세상에 속하는 사탄의 종 노릇을 할 수 있게 됨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에서 저희가 내 안에 내가 저희 안에 있게 해주시라고 기도하시고, 또 제자들에게 주님이 승천하시면 성령을 보내줄 것이고 성령께서 보혜사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면, 성령님이 곧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말세에 성도들에게 진리를 깨우쳐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며 신자에게 성화의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순종의 자유와 사탄을 물리치는 능력을 주시는 성삼위의 한 분이심을 새삼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성령에 충만해지는 일에 수고하고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에 충만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매일같이 말씀 묵상과 기도와 찬양에 열심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은 신통한 능력이 있음을 저는 경험하고 삽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심을 생각하면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세상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우리를 엄습할 때 성경을 펴십시다. 그 어느 구절을 묵상해도 우리는 성령님의 강력한 주장과 인도하심을 얻게 되며 사탄은 물러갑니다. 예배소서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말씀이 그대로 진리입니다.

    매일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양에 열심하는 삶이 바로 성화의 길을 걷은 신자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 충만한 삶이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하며 보혜사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의 삶을 닮아 거룩하게 되어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성화의 삶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일이므로 무겁고 힘든 일리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성령 하나님과 함께 지고 가기 때문에 성화의 삶은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입니다.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자유와 평화와 행복의 삶입니다.

    성령 충만한 신자는 그가 칭의 구원을 받는 순간에 외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매일 같이 외치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불평이나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까? 감사하는 마음에 슬픔이 있을 수 있을까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남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하는 마음에는 불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은 많은 물질, 세상의 명예, 세상적인 미인과 즐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과 함께 성화의 길을 걷는 신자는 세상적 어려움에 봉착해도 그것을 믿음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 고난이 지금 이 시간 이 장소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최선의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에서 의미를 찾게 됩니다. 그것이 자신을 더욱 단련하여 정금처럼 순결한 영으로 만들기 위한 훈련이며, 때로는 징계인 것을 감사하며 받아들입니다.

    다윗 왕은 성화의 삶을 살았던 하나님의 종이지만, 여러 번 넘어지고 실수 했습니다. 그는 낮잠을 자고 난 후 우리아의 아내를 탐하여 살인죄까지 지었습니다. 충성스런 군대들은 생명을 내놓고 적군과 싸우는데 군대의 총수인 다윗 왕은 낮잠을 즐겼음을 보아 그가 당시에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게을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게을렀던 다윗 왕은 육욕의 노예로 떨어져 살인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 왕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기뻐하신 것은 그가 곧 나단 선지의 질책 앞에 왕의 체면과 권위를 내던지고 회개하고, 베개가 썩을 만큼 회개의 눈물을 흘릴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윗의 회개 기도인 시편 51편을 성화의 길을 가는 신자가 항상 드려야 할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성화의 길을 걷을수록 자기 자신이 더욱 더 부족하고 보 잘 것 없는 존재임을 처절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양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자가 성화의 삶을 살려고 애쓰는 신자입니다.

    저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만 있으면 이 세상도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칭의 구원을 얻은 신자가 말씀과 기도와 찬송으로 매일 성령에 충만하다면, 아직도 육신 속에서 꿈틀거리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꺾어 이기며, 우는 사자와 같이 신자를 삼키려 드는 사탄의 괴계와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성화의 길, 거룩한 삶의 길을 성령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다고 여깁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일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서서히 그의 성품이 변화되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의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신자의 성품으로 자리 잡아가게 됩니다. 마침내 우리 구원의 동역자 이신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변화된 성품을 통하여 맺어지기 시작하며 그 열매가 매일같이 여물고 익어가서, 육신의 옷을 벗을 때, 신자는 영화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화의 길을 가는 신자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성화의 길을 걷는 신자는 청지기의 삶을 살게 됩니다. 생명과 건강을 포함해서 재능 그리고 물질과 재산을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잘 관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이웃 사랑에 사용하라고 그 관리를 담당시킨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자는 십일조에서 그칠 것이 아니고 선한 방법으로 능력껏 벌어서 자기 생활비와 확대 재생산을 위한 투자를 제하고는 모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선진국에서 기부가 성행하고 유산을 자신의 자녀가 아니라 교회나 사회에 바치는 것은 청지기의 삶의 본보기가 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회 구원의 길이기도 합니다.

    저는 찬송가 427장이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신자들의 공통된 고백이고 찬송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으신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또는 자매님,곧 찬송가 427장을 불러보세요. 기쁘지요, 즐겁지요, 행복하시지요? 우리 모두 한 사람의 낙오자가 없이 성령님과 함께 기쁘고 즐거운 성화의 길을 육신의 장막을 떠날 때까지 걸어감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종국적인 구원을 얻도록 합시다.
    뉴스앤조이김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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