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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살 예수의 얼굴
    2004-12-30 10:59:43   read : 4222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2세 예수의 얼굴(사진)을 이탈리아 로마경찰청이 복원했다고 뉴욕타임스가 26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로마경찰청이 수염이 난 예수의 얼굴에서 약 20년 세월의 흔적을 지워 12세 시절 예수의 얼굴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로마경찰청은 이 작업에 범죄 혐의자의 젊은 시절 사진에서 나이 든 모습을 뽑아내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했다. 복원에 사용한 원본은 이탈리아 토리노 성당에 있는 ‘토리노 수의’에 나타난 예수의 얼굴이다.

    신문은 이렇게 복원된 예수의 얼굴은 매끄럽고 부드러운 피부에 잔잔한 푸른 눈과 생기 있는 입술, 곱슬거리는 금발머리를 지니고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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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종교가 타락하면 성직자 급증한다?"
    스타(?) 목사의 종교적 엘리트주의 경계…성직자 수가 증가해서 종교가 타락했나

    "고등종교가 타락하면 성직자가 급증한다." 이것은 최근의 목회자 수 급증현상을 기독교가 타락한 결과라고 해석하는 일부 스타 목회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면 신학을 희망하는 지원자의 수와 성직자 수의 급증 현상이 종교(특히 개신교)가 타락한 증거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러한 주장이 종교현상의 단면만을 바라보는 편향된 시각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한국 개신교의 경우 지난 30여 년간 신학 지망생 수가 계속해서 늘어난 반면, 천주교와 불교의 성직자 수는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천주교와 불교에 비해 개신교의 성직자 수가 급증했다고 해서, 개신교는 타락했고 천주교와 불교는 타락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현재 개신교, 천주교, 불교 할 것 없이 범종교적 차원에서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의 주류 종교가 성직자 수와 무관하게 종교의 중요한 기능인 사회통합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과 유럽의 상황을 비교해 보면, 이러한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현재 한국 개신교 각 교단의 경우와는 달리, 유럽의 개신교에서는 신학 지망생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유럽의 개신교가 한국 개신교보다 상대적으로 덜 타락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유럽의 개신교 역시 성직자들의 윤리적 문제, 특히 천주교 신부들에 의한 아동성적학대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수직적 교단구조를 가지고 있는 영국 성공회에서는 소수의 성직자들에게 지도력이 편중되어 나타나는 문제점과 잘못된 예산 집행 등으로 교단의 재정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교단적 차원에서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즉, 성직자 수와 무관하게 종교의 타락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볼 때도, 유럽이나 북미에서 대 각성 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선교사나 목회자로 헌신했고, 그들 중에 다수가 미지의 세계로 흩어져 선교사로 일생을 헌신하여 복음 전파에 귀한 생애를 바쳤다. 우리나라에서도 평양 대 부흥운동 이후로, 그리고 1960년대 초반 이후 80년대 중후반까지 개신교 목회자 수가 급증했고, 이러한 목회자 수의 증가가 효과적인 복음전파와 교회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직자 수를 종교타락여부의 변수로 삼을 수는 없으며, 성직자 수의 증가현상은 오히려 영적 부흥의 결과임을 기독교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물론 최근 신학 지망생들 가운데는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화려한 모습을 보고, 밖으로는'주의 영광'이라는 기치를 내세우면서, 안으로는'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대다수의 신학 지망생들은 순수한 복음의 열정으로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반면 한국의 천주교와 불교의 성직 지망생들의 수는 날로 감소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은 해당 종교의 중요한 해결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그러므로 "성직자 수 급증=종교 타락현상"이라는 주장은 단편적인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종교 내의 성직자 수가 다수가 아닌 소수로 유지되는 것이 그 종교의 건전성을 보장한다는 논리의 이면에는 종교적 엘리트주의가 숨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개신교 내에서 이러한 종교적 엘리트주의는 소위 잘 나가는 스타 목회자들 혹은 수준 높은 신학 훈련을 받은 신학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이러한 종교적 엘리트주의는 이미 중세 가톨릭에서 나타났던 현상으로, 성직자와 평신도를 계급적으로 구분하고 성직의 상대적인 우월성만을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다.

    물론 과도한 목회자 배출은 그 자체로 목회자의 질적 저하와 관련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수의 성직자 유지 자체가 교회의 건전성을 보장해 주는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효율적인 목회자 수급정책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교회에서 신학 지망생의 수가 급증하는 현상은 무엇 때문인가? 나는 세 가지 원인을 제시한다.

    첫째, 성직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다. 성직을 "직업적인 목회자"로만 제한시켜서 생각하고, 성직자와 평신도를 계급적 구조로 보는 관점으로 인해, 소위 은혜 받은 젊은이들이 세상의 다른 영역들보다는 신학교에만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난립하는 개신교 신학교들의 구조적 문제를 들 수 있다. 현재 대부분의 신학교들이 거의 학생들의 등록금에만 의존하는 재정구조로 학교를 운영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과도하게 많은 수의 신학생들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인가된 신학교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무인가 신학교마다 입학의 문을 활짝 열어놓아서, 신학을 위한 준비가 안 된 학생들을 끌어당기는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신학교들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사립대학들이 겪고 있는 현상이다. 아무튼 이러한 신학교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60년대 이후 현재까지 계속적으로 신학생 수가 급증해 온 것이다.

    셋째, 각 교단의 교세확장정책과 연결되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 개신교의 각 교단들은 교단 소속 신학교들을 적극적으로 신설 및 확장해 왔으며, 소속 신학교들의 입학생 정원확충을 통해 해당 교단의 교세를 확장하려는 정책을 펴 왔다. 각 교단의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현재 각 교단마다 신학 졸업생들이 과포화 상태에 있으며, 졸업 후에도 임지를 구하지 못하는 신학생들의 수가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종교, 특히 한국 개신교의 타락현상에 대한 진단 및 처방은 단순히 성직자의 수로 측정할 문제가 아니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성직지망생들의 성직에 대한 잘못된 이해뿐만 아니라 신학교 운영 문제 및 개신교 각 교단들의 과도한 교세확장정책 등과 같은 구조적 문제들에 기인하는 것이며,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들이 취업하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현실과 맞물려서 신학생 수의 급증을 초래했다.

    그 결과 신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점점 더 자리를 찾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만인제사장직에 대한 올바른 교육과 함께 신학교 운영을 위한 각 교단의 적극적인 지원 및 신학생 수급정책의 근본적인 변화 등을 통해 현 난국을 타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김승호 / 한성교회 담임목사, 에큐메니칼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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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문 막지 말고 앞문을 열어젖혀라
    교회는 막힌 데 없이 앞문도 열고 뒷문도 열어 모든 사람에게 열린 곳

    수년 전 한 이름 있는 목사님께서 「뒷문을 막아라」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의 취지는 이렇습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교회 성장이 멈추었거나 오히려 감소 추세에 있는데, 그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한 해에도 수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 앞문을 통해 교회에 발을 들이지만 교회가 제대로 그들을 정착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 뒷문을 통해 슬그머니 교회를 빠져나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분은 교회 성장을 이루려면 이렇게 빠져 나가는 교회 뒷문을 막는 프로그램의 개발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그 분은 교회성장에 관한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목사님의 의견에 일부 공감을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는가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러나 이 관점에서 놓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오늘의 교회 성장의 정체 상황이 과연 뒷문의 개방 때문일까 하는 의문에서 비롯됩니다.

    저는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즉, 한국교회의 성장 지체증은 '뒷문의 개방'이 아니라 '앞문의 폐쇄'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자기 폐쇄적인 길을 걸어오는 바람에 사회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세상을 등지거나 분리된 집단이 아닌 세상의 빛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온 민족이 일제 치하에서 고통을 당할 때 교회는 앞문을 활짝 열고 그들 가운데 들어가 고통을 함께 나누고 위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기에는 보수, 진보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색깔은 달랐을지언정 그들은 교회 앞문을 활짝 열고 민족과 더불어 애환을 같이 했습니다. 그 결과 어떠했습니까? 사람들은 교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교회의 삶에 헌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하는 일이면 선하게 여겼고 목사님들은 민족의 지도자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교회 성장은 바로 이런 사회의 '교회를 향한 신뢰'를 근간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며 교회는 서서히 앞문을 폐쇄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자족했습니다. 교회 안에 쌓여진 풍부한 물자와 인력은 교회로 하여금 바깥 세계로 나갈 이유를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세계 유례없는 교회의 성장에 취해 교회는 '그들만의 공간'으로만 남아도 충분했습니다. 교회 앞문은 점점 견고하게 닫혀만 가고 세상의 사람들이 뱉어내는 신음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등지니 세상도 교회를 등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무관심하기 시작했고 꽁꽁 닫힌 교회 문 속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좋지 못한 소문에 머리를 내저었습니다. 사마리아 이웃과 같았던 친근한 교회들은 어느덧 쳐다보지 못할 큰 성으로 여겨졌습니다. 민족 지도자로 존경받던 목회자들은 사회 공동체에 짐이 되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교회 성장의 정체 원인은 바로 이런 현상에서 찾아야 합니다. 사회가 교회에 대해 등을 돌린 현재의 상황이 계속되는 지난 세기 경험했던 교회 성장의 기적은 다시는 볼 수 없는 전설이 될는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뒷문을 막는다고요? 저는 이런 접근은 교회성장에 단기적이고 부분적인 도움이 될지언정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앞문이 폐쇄된 상태에서 뒷문을 막는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 결론은 교회의 동맥경화 현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단기적으로 교인의 수가 더 불어날는지 모르지만 교회의 앞문이 굳게 닫혀 있는 한 그 인원 증가는 또 다른 문제점을 야기할 것입니다. 교회의 영성은 생동감 있게 흘러야 합니다. 생수가 흐르듯이 말입니다. 흐르지 않고 고착된 물은 결국 부패된다는 교훈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할 단계에 와 있습니다.

    저는 때때로 누가복음 9장 중반부에 기록된 말씀을 상기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느 날 제자 셋 (베드로, 요한, 야고보)을 데리시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이곳에서 주님은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됩니다. 거룩한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와 선지자들의 수장격인 엘리야가 주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눕니다. 하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그야말로 '영광 영광 할렐루야'가 장엄하게 펼쳐진 순간입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베드로가 너무나 감격하여 주님께 청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베드로는 아예 이곳에 집을 짓고 천년만년 살자고 청하는 것입니다. 앞문도 막고 뒷문도 막은 뒤 이곳에서 기쁨을 누리며 살자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에 대해 아무 말씀 아니 하시고 산 아래로 향하십니다. 산 아래에는 산 위의 영광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곳에는 귀신들린 자, 병든 자, 가난한 자들이 어울려 온갖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주님 앞에는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분은 산 위에서 머물지 않으시고 산 아래로 향하셨습니다. 산 위의 영광의 문을 열어젖힌 채 산 아래로 내려와 그들을 초대하셨습니다.

    교회는 막힌 데가 없어야 합니다. 앞문도 활짝 열고 뒷문도 활짝 열어 만인에게 개방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점점 앞문과 뒷문을 꽁꽁 막아 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루마니아 출신의 세계적 석학 멀치아 엘리아데는 성스러움(聖)과 속됨(俗)을 이분법적 시각으로 보는 것을 지양하면서 성 속의 변증법적 관계에 주목하는 지혜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성과 속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속됨이 없는 성스러움은 하나의 허구일 뿐이고 성스러움 없는 속됨은 맹목적이며 이 둘의 상호 끊임없는 대화 속에 사회의 건강성은 확보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엘리아데의 지적은 한국교회에 깊은 통찰력을 가져다줍니다. 앞문 뒷문을 걸어 잠근 채 세상과 격리되어 성스러움을 추구한다며 하늘의 기쁨만을 누리려는 폐쇄된 신앙집단은 현실 없는 공허한 집단으로 전락될 것이지만, 앞문과 뒷문을 활짝 열고 복음의 활력 있는 영성을 세상과 공유한다면 우리 교회는 진정한 성장과 성숙의 길을 찾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읽게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뒷문을 막아라'는 자기 폐쇄적, 방어적 자세를 넘어 '앞문을 열어젖히라'는 자기 개방성으로 나가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뒷문을 잠그는 노력으로 앞문을 열어젖힌다면, 주님처럼 세상 가운데서 참된 생명의 빛을 비춘다면, 교회를 향한 세상의 차가운 시선이 다시금 따뜻한 시선으로 바뀌지 않을까요?
    김동환 / 감리교 목사·한영선교센타 대표·영국감리교교구목사, Ph.D.(버밍험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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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잔언약, 우리시대 '전가의 보도'인가?
    최근 복음주의권의 접근, 인본주의적 그릇된 열정
    최재호 cj8412@newsnjoy.co.kr

    시장의 기관장홀리클럽 활동을 문제 삼았던 포항의 불교계와 일부 시민단체들, 한국기독당이 출범했을 때 그들을 바라보던 교계와 국민들의 시선, 최근의 기독교사회책임의 발족에 대하여 이런저런 비판과 우려의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

    우리 기독인들은 과연 어떤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까? 예수 그리스도의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신 말씀을 동일하게 적용해도 되는 것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매우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여기저기에서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말들이 쏟아지고 있고,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어오던 보수 기독교계조차 정치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주도해 온 '성시화운동'이나 '홀리클럽'의 경우 이번에 적지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현장은 경상북도 포항이었고 대상은 포항시장이었으나 홀리클럽과 성시화운동에 대한 세상의 시각과 평가이기에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취재과정에서 성경이 말하는 입장을 들어보기 위해 몇몇 신학자들의 견해를 들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타 종교와 공존하여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상,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선교방식은 오히려 선교의 문을 닫게 할 수 있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지적이 나왔다.

    이 말은 기독인들이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부여한 보편 가치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존경과 인정을 받을 때 자연스럽게 기독교회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질 것이란 말로도 풀이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것이 우선이다.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서 사회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이가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지금처럼 "너희나 잘해라"는 반응만 돌아오지 않을까.

    성경적이진 않지만 나름대로(?) 열정적인 기독교회가 오늘날 종종 범하는 오류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특히 복음주의권에서 요즘 자주 들고 나오는 '전가의 보도'같은 논리는 바로 1974년 빌리 그래함, 존 스토트의 주도로 만들어진 '로잔언약'이다.

    일부 교계의 학자들은 '로잔언약'에 대해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빌리 그래함이나 존 스토트의 명성에 압도당한 나머지 정확한 근거나 정당성을 따져 볼 의지도 상실한 채 막연한 추종의 길을 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일각에서 "'로잔언약'의 적용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한 것이냐"는 문제제기를 해도 묵살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복음주의권에 상당한 논리적 근거와 타당성을 제공해 주고 있는 '로잔언약'은 한국교회의 주류의 자리를 차지한 복음주의 노선을 따르는 많은 이들의 시각과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상당수 교계지도자들이 복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그들이 교계와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자 복음주의는 자연스럽게 '메인스트림'으로 등장했다.

    우리 사회의 복음주의자들은 손봉호, 김명혁, 이만열, 홍정길, 김진홍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한국교계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지칭되고 있고, 그에 걸맞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 정통 개혁주의 노선을 지지하고 따르는 나로서는 다소 긍정하기 힘들지만, 이들의 세계관이나 성경관이 옳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복음주의권이 우리 사회에 대해 적용하는 방식까지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성시화운동이나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이들의 면면을 볼 때, 근본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사회와 교회 사이에 높은 담장을 가로질러 두었던 그들의 선배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변화는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교계는 물론 사회로부터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취하는 방법에 있어서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의 입장들과는 다른, 어떤 면에서 그분들보다 '더 나은'(?)' 입장을 보인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과 구분을 두었으나 세상과 분리되어 사는 것이 아닌 세상속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것을 명령했다.

    이는 교회가 운동(Movement)이나 구호로 세상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기독인으로서 성경이 가르치는 삶의 모습을 구현하며 살아갈 때 가능한 일이다. 즉 삶 자체의 문제이지 의도적인 조직화나 운동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조에성경신학원의 이광호 교수같은 이는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사회의 문제점들로 로마 식민통치나 노예제도 등에 대해 제도개선이나 혁명을 말씀하지 않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셨다. 하지만 사회에서의 당신의 제자들의 사명에 대해서 분명한 언급도 하셨다. 사도바울도 그랬다"면서 "역사적 정통 개혁주의자들은 복음주의자들과 달리 더 나은 미래적 교회보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지향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이 어떠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주장했다.

    돌아보건대 포항에서 빚어졌던 갈등들은 어떤 면에서 성경보다 더 잘해보려는 인간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성경의 사도들과 제자들, 교회가 하지 않았던 일들을 우리시대에 해보려고 하는 그릇된 열정에서 빚어진 문제는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만큼 생각하고, 성경이 말하는 데까지 걸어가며, 성경이 제한하는 곳에 머무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라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 자세로 이 사회를 살아가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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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빈치코드 깨기'식으로는 '다빈치코드' 절대 못깬다
    '다빈치코드' 열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구교형 ku6699@hanmail.net

    한 달 전쯤 아주 우연찮은 기회에 친구에게서「다 빈치 코드」(이하 '코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서점가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도무지 처음 듣는 이야기다.

    전화를 끊고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니 세상에! 원작 소설은 물론 이 소설에 대한 해설, 사전판 등 관련서적이 5, 6종이 검색되었다. 관심 있던 차에 마침 한 TV 방송국에서 '코드'를 호기심으로 추적하는 프로그램을 한다고 하여 보며 그 열풍을 짐작할 수 있었다.

    '코드'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은 이미 많이들 알고 있을 터이니 나는 새삼 다시 언급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사실 이 책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코드' 열풍에서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왜 이 시점에서 이런 단순한 책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으며, 그 폭발적 인기가 주는 의미(교훈)가 무엇인가 숙고하는 것이다.

    1.「다 빈치 코드」현상의 의미

    솔직히 말해 이 책 기본 뼈대의 사실성(예수가 결혼해서 그 자손이 현재까지 살고 있다, 성배의 비밀은 막달라 마리아다, 지금까지 교회는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은폐하고 탄압해 왔다 등)은 아주 초보적인 신학적 상식만 갖고 있어도 그저 웃어버리고 말 정도로 유치하고 조잡하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웬 사탄의 자식 같은 놈이 주님과 교회를 난도질하고 있다"며 흥분할 것이 아니라, 그런 황당무계한 내용임에도 (기독교인들까지 포함해서)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책의 매력은 무엇인가? 먼저 현대인(특히 젊은이)들의 기본적 정서에 아주 부합하는 형식과 내용을 갖고 있다. 이 책은 무엇보다 호기심과 반항심 많은 현대인(젊은이)들이 전통적인 권위를 파괴하고, 금기에 도전하고 싶은 욕구를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고 있다. 예수의 결혼, 거대종교인 기독교(교회)의 위선과 비밀, 동성애, 창녀의 성화, 여성주의 등 현대인(젊은이)들이 관심가질 만한 권위의 파괴와 금기의 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금기도전의 대리만족이라고 할까.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기독교와 신앙현상이 갖는 극도의 불신감을 표현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아주 공감하며 통쾌해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다 빈치 코드의 비밀'을 어떻게든 감추고 억압하려는 기독교열성분자(교황청, 오푸스 데이)들은 진리와 평화를 말하면서도 진실억압을 위해 암살을 계획하는 예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처럼 그려진다(막 3:1~6). '그래 종교인들이란 음모가가 아니면 이중인격자요, 고집쟁이, 시대착오적인 자들이야.' 반면 전통적인 신앙관이나 교회의 가치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숨겨진 진리를 찾는 자, 진실한 자로 그려진다.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신앙과 교회가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그렇게 위선적으로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황 클레멘트는 CIA 같은 군사 책략을 통해, …무시무시한 교황의 지령이 드러났다. 클레멘트의 편지에는 신이 자신을 찾아와 계시를 내렸는데, 성당기사단이 악마숭배와 동성애, 십자가 모독, 남색, 그 외 불경한 행동의 이단적인 죄들을 범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사들이 사로잡혀 잔인하게 고문당하고, 이단자로서 말뚝에 세워져 화형당했다…."(「다 빈치 코드」247쪽)

    중세시대의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된 이런 내용들은 오늘날에도 이방인들에게 한없이 배타적이고 율법주의적인 교회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자연스럽게 이 책에 기록된 많은 다른 근거 없는 기록들마저도 사실인 양 믿게 만든다. 나는 이 책의 진위를 떠나 저자 댄 브라운에게서 다음과 같은 그의 마음을 느낀다.

    첫째, 그는 지금의 기독교(교회)가 아주 싫은 사람이다. 무엇보다 현실 기독교의 천박함, 위선, 거짓, 이기주의, 물량주의 등을 끔직스럽게 싫어하는 마음을 느낀다. 또 댄 브라운은 이 책을 통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신앙관)을 거부하고 싶어 한다. 세상의 주인입네 하며 인간보다 위에 앉아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그런 초월자가 아니라, 그저 우리 보통 인간들처럼 결혼해 자식 낳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그런 평범한 신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욕심을 버리고 세상 살아가는 좋은 지혜나 이따금씩 가르쳐 주면 더욱 좋을 그런 신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과 같은 이런 부패하고 위선적이고 권위적인 기독교(교회)는 없어질 것이다.

    나는 이 책의 독자들은 은연중에 이러한 저자의 마음에 공감하며 빨려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주요종교성직자들 가운데 목사가 호감도 최하위', '주요종교들 가운데 개신교의 종교 이탈율이 최고인 반면 종교선호도는 최하위'라는 수치가 보여주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코드'가 얼마나 사실성이 결여된 책인가를 신학적으로 밝혀주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생각한다.

    2. '다 빈치 코드 깨기'식으로는 '다 빈치 코드' 절대 못 깬다

    '코드'식으로 전통적인 신앙관을 설득력 있게 비판하는 대중서적은 최근만 해도 많이 출간되었다. 「예수는 없다」(오강남, 2001년), 「예수는 신화다」(티모시 프리크, 2002년) 이런 책들에 대응한다고 곧 바로 「예수는 있다」(이국진, 2003년), 「예수는 역사다」(리 스트로벨, 2002년)와 같은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었다.

    이와 같이 올해도 역시 '코드'를 제압하려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다 빈치 코드 깨기」(어윈 루처/이하 '깨기')와 「다빈치코드, 진실인가 허구인가 」(행크 헤네크라프)라는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었다. 또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몬트리올 예수'에 대응마로 떠오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같은 것들도 있다.

    그러나 난 단호히 말할 수 있다. 이런 '깨기'식의 책들로는 결코 기독교 비판적 대중서적들을 온전히 대응할 수 없다. '코드'와 같은 책들은 기독교에 대해 깊은 의식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관심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반면 '깨기'식의 이른바 '대응서적'은 단지 어떠한 경우에도 별로 흔들림이 없는 굳건한 신앙인들에게만 '그러면 그렇지' 하고 안도하게 만드는데 그치고 있다.

    '코드'를 읽는 사람들은 신학자가 아니며 신학에는 대개 관심이 없다. 그러나 '깨기'식의 책들은 언제나 대다수 신앙적 회의감을 갖는 사람들은 읽지도 않을 형식으로 신학적 사실성만 강조하며 설득하려고 한다. 이건 '코드'같은 책들이 주는 행간을 읽지 못하는 것이다.

    그 결과 '코드' 1, 2권은 한 대형서점 12월 1~3주까지 종합순위 1, 2위를 차지한 반면 「다 빈치 코드 깨기」와 「다 빈치 코드, 진실인가 허구인가 」는 같은 서점, 같은 기간 동안 종합이 아닌 종교부문에서만 '15위, 9위, 12위' 그리고 '23위, 25위, 13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코드'식의 책에 대한 기독교계의 '깨기'식의 대응으로는 언제나 후자의 설득이 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3. 정말 '다 빈치 코드'를 극복하려면

    진리(진실)를 움켜쥐고 있으면서도 교회는 세상은커녕 왜 성도들조차 이해시키지 못할까. 단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기독교, 교회)가 믿을 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누차에 걸쳐 바른 말(앎)과 더불어 바른 삶이 함께 가야 할 것을 가르쳤다(마 5:16, 요 13:34, 35, 고전 4:18~20, 약 2:14~17). 그러나 교회는 거대화, 제도화되면서 올바른 삶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에만 집착함으로써(정치적인 이단논쟁, 신학논쟁 등) 민심을 잃어버렸다. 우리가 '코드'식의 책을 진정으로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임기응변이 아니라 저변에서부터의 근본적 자세변화가 있어야 한다.

    1) 비밀주의를 걷어치우라

    사실 '코드'류의 책들은 전적으로 교회의 비밀주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소설이다. 성경의 정확무오성, 성경의 생성과정과 성경으로 채택되지 않은 문서들의 존재,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관심 등 교회에서 자상하게 가르칠 수 있는 내용들도 우리는 의심은 물론 언급조차 하지 못하도록 배워왔다. 별 것도 아닌 내용들을 소수 목회자나 신학자들만이 알 수 있는 비밀처럼 독점해 왔고, 그게 자신들의 품위를 지켜주는 대단한 권위처럼 여겨왔다.

    그 결과 일반인들은 평소 자신들이 당연한 것처럼 믿어왔던 상식과 조금 별스러운 얘기만 들어도 모든 것이 온통 흔들리고 의심스러워지는 것이다. 결국 교회의 비밀주의와 ‘무조건 믿어라’ 식의 맹목적 신앙은 ‘코드’와 같은 또 다른 반대편의 '맹목적 신앙'을 낳았다.

    "아가씨, 그때까지 역사에서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그저 한 사람의 예언자일 뿐이었다오… 위대하고 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결국 '인간'일 뿐이었지. 죽음을 면할 수 없는."(「다빈치 코드」 357쪽)

    교회가 폐쇄적으로 비밀주의를 고수하는 한 크게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임에도 김용옥, 오강남(「예수는 없다」) 등 상식과 금기를 깨는 약간의 도전만으로도 복음은 온통 의심스러워지게 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세계관적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단지 신학적인 정당성만을 갖고 논쟁을 벌이는데 그런 시도는 처음부터 소득을 얻기 힘든 불리한 싸움에 말려드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 성경, 교회에 대한 신화적(신비적) 비밀주의를 버리고 진리와 사실에 접근할 수 있도록 성실한 의심, 정당한 궁금증을 격려하고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 가령 이 책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마치 비밀인 듯 숨겨져 있는 약간의 사실에 논리적 비약을 거쳐 결국 성경이 신뢰할 수 없는 문서임을 가르친다. "성서는 인간의 작품이란 말일세, 신의 작품이 아니고. 성서는 구름에서 기적적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야. 격동의 시기에 인간들이 만들어낸 역사적인 기록이지. 그리고 그것은 수도 없는 변형과 첨가, 개정 작업을 거치며 진화해 온 것이라네."(「다 빈치 코드」354쪽)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상식 가운데 "성경은 일점일획 모두 성령의 감동을 받았기에 영원불변하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진실과 더불어 오해와 한계를 담고 있다. 즉, 이 말은 기본적으로 모든 성경이 무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당시 배경 속에서 인간의 언어로 취하였기에 불가피한 시대적 제약성마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의 언어라는 제한된 그릇에 담았기에 표현상의 오해, 시대와 문화적인 한계성을 분명히 갖고 있다. 가령 고대 이스라엘과 중동문화의 배경에서 처음 기원한 구약율법이 오늘날에도 문자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만약 성경이 오늘날 쓰여졌다면 그것은 분명 2000~5000년 전의 신구약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변치 않는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 속에서 바른 의미를 찾는 현대적 재해석이 불가피하다. 이걸 억지로 가로막는 한 앞으로 더더욱 경망스러운 예수상(우주인 예수, 동성애자 예수 등)이 나올 것이다. 사실 '예수가 죽지 않았다', '결혼해서 가족을 꾸렸다'는 등의 얘기는 이미 오래된 고전적인 잡음에 불과하지 않은가.

    2) 백성들의 마음에 파고들어 민심을 얻어라

    그러나 교회의 개방성, 민주성, 신뢰성 등을 통해 최종적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이단적 사이비 사상은 근절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민심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 불교 오랜 전통의 상징인 조계사가 개축을 하면서 사찰로서의 영성 수행의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인사동이나 탑골공원 등과 연계해 문화체험 코스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외국인이나 일반인들이 친숙하게 찾아올 수 있는 다양한 체험프로그램도 갖추기로 했다. 또 조계종을 이끌고 있는 총무원장을 비롯한 중심적인 승려들이 소년소녀 가장들과 결연을 맺고 연례행사가 아니라 직접 삶의 자리로 찾아가는 활동을 벌이고, 1사찰 1복지시설 결연활동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또 동지를 맞아 여러 사찰들은 팥죽을 끓여 동네주민과 방문객들을 대접하는 행사를 벌이기도 한다. 그런데 교회는 여전히 뾰족 첨탑을 달고 고압적이고 문화이질적인 모습으로 일반인들을 대하기 일쑤니 예수께 다가가기도 전에 우리의 높은 문턱에 막혀 버리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내 말에 의문이 간다면 기독교와 불교를 다룬 영화나 선전, 드라마를 보라. 97년 기독교를 배경으로 만든 코미디 영화 '할렐루야'는 한 청년이 교회를 배경으로 사기 치는 모습을 재미있게 그렸는데, 그 영화에서 기독교인들과 목회자들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매우 이질적인 사람들이거나 겉으로는 좋은 모습으로 치장하지만, 사실상 사기꾼 청년만큼의 순수성도 갖지 못한 사람들로 그려진다. 이와 비슷한 영화라면 2001년 '달마야 놀자'에 이어 올 해 또 개봉된 '달마야 서울 가자'를 들 수 있겠다.

    이런 영화에서 나오는 승려들은 뭔가 좀 모자라고 아직도 속세의 때를 완전히 벗지 못한 유치한 모습이지만, 세속인들의 고뇌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함께 어울리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물론 그런 모습은 2003년에 개봉된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 더욱 강조되어 그려진다. 속세와 격리되어 있으면서도 속세의 아픔을 어떻게든 끌어안으려는 불교의 고뇌가 그대로 드러난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동승'(2003년 작), 국제적으로 호평 받은 애니메이션 '오세암'도 불교의 뭔가 신비로우면서도 결코 백성들의 애환을 떠나지 않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요구르트 '불가리스' 선전에서 보이는 큰스님과 동자승의 아름다운 결합도 마찬가지다. 지율스님은 아무도 관심 없는 도롱뇽의 생명을 살리겠다고 벌써 몇 번씩 죽음을 넘나드는 단식을 감행하고 있다. 여름의 대명사 성경학교, 수련회는 온갖 사탕발림으로도 더 이상 사람들을 모으는 게 쉽지 않은 형편이지만, 각 사찰들에서 운영하는 단기출가체험, 일일산사체험, 수행프로그램 등은 불교인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폭넓은 호응을 받고 있다.

    한국기독교는 분명 변했다. 한국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주도하고 백성들의 아픈 곳을 찾아가 싸매 주던 이미지는 어느덧 사라지고, 세상의 기득권과 수구주의를 대변하는 모습이 되었다. 한국 불교도 분명 변했다. 1990년대까지 파벌과 이권에 따라 이합집산 하며 국민들의 외면을 받던 한국 불교는 부단한 종단개혁을 통해 새롭게 거듭나 백성들 속으로 파고들어가 폭넓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조용히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민심도 변한 것이다.

    '코드'는 티빙의 입을 빌려 성경과 그 기초 위에 세워진 기독교가 왜 믿을만하지 못한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왜곡은 이거라오. 예수가 죽은 지 사백 년이나 지나서 그 위치를 승격시켰기 때문에.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서는 대담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콘스탄티누스는 알고 있었소.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특성을 얘기하는 복음서들은 빼버리고, 그를 신처럼 묘사한 복음서만을 골라 아름답게 윤색했지요. 초기 복음서들은 금지되거나 모아서 불태워졌소."(「다 빈치 코드」359쪽)

    나도 위 대목을 아래와 같이 개작하면서 '코드'류의 책들이 주는 의도와 의미, 교훈을 대신하려고 한다.

    "왜곡은 이거라오. 그들('코드'류의 책을 통해 복음과 기독교를 뒤집으려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죽을 쑤며 모든 백성들의 민심을 잃어가는 틈을 타 기독교현상의 불합리한 점들을 폭로함으로써 동시에 모든 복음의 가치 자체도 일거에 믿을 수 없는 허구로 만들어 버렸소. 물론 이러한 왜곡의 밑바탕에는 교회(기독교)의 비밀주의와 민심이반이 숨어 있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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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격적으로 전하라

    청년 때에는 군사정권에 항거해 ‘오적’이라는 반골 시를 쓰는 등 민주화운동에 몸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미지를 주는 ‘김지하’로 바꿨습니다. 장년 때에는 입만 열면 생명타령을 해댔습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선생노릇을 해왔습니다. 이제 65세의 나이에 그는 허무개그를 하고 있습니다.1)

    “털털털 다 털고 나서 / 떠나도 되겠구나! / 단 하나 / 막내 놈 / 그림공부 밑천은 어떻게든 / 벌어놓고 / ... / 진리고 혁명이고 유토피아고 / 모두 다 / 허허허 / 강 건너 등불.”

    평생 직장이나 조직이나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살았던 자유인이었지만 지금 노년기에 접어든 그는 그저 심약한 어린아이일 뿐인 듯합니다.

    “...그래 / 이제는 아무 것도 / 아무 것도 없고 / 외로움밖에 없고 / 후회할 일밖에 없으니 / 참 / 개똥같은 인생이다.”

    2년 동안 병원에 외래환자로 다니면서 정신신경과 치료를 받았고 좌골신경통을 때문에 중국 연길에서 사온 호랑이 고약을 수시로 붙였고 거의 매일 아내와 함께 뜸뜨러 여의도를 오갔습니다. 바야흐로 온갖 병에 시달리면서 그가 허전하고 쓸쓸한 노년기에 접어든 것입니다.

    “시 짓고 / 그림 그리고 / 가끔은 / 후배들 놀러와 / 고담준론도 질퍽하게 / 아아 / 무엇이 아쉬우랴만 / 문득 깨닫는다 / 죽음의 날이 사뭇 가깝다는 것.”

    젊은 날에야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사회정의를 위해 대단한 혈기도 부려 보지만 늙으면 아이가 되고 그래서 다시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노인의 부모가 돼 줍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다시 노인의 부모가 돼 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노인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고아가 됩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12:1).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1983년 아웅산 폭파사건 때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했던 김재익 박사도 사망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특급 경제통이었습니다. 그와 경기고 동창이었던, 전 과기부장관 정근모 박사가 나라 일로 종종 그를 만나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나라 일만 이야기하다가 뒤로 미루곤 했습니다. 결국 그는 미얀마의 아웅산 국립묘소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좀 더 공격적으로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전4:2). 착한 행실을 통해 생활전도를 할 수도 있겠지만 과감한 입술전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이제 막 제대한 로저 심슨은 집에까지 차를 얻어 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가오는 차의 십중팔구는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급차가 멈추었고 문이 열렸습니다. 흰 머리의 중년신사가 미소로 환영해 주었습니다. 간단한 소개를 한 후 그들은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로저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는 강한 부담이 느껴졌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계속 미루다가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노버 씨, 꼭 드리고 싶은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요.” 로저는 구원의 길을 차근차근 전한 후에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순간 그 큰 차는 길가에 섰고 의외로 그 사업가는 핸들에 머리를 숙이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싶다고 말하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5년이 흘렀고 로저는 시카고 출장을 준비하다가 하노버의 명함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시카고 시내 한복판에 있는 그의 회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를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에 실망한 로저는 조금 뒤 커다란 책상 앞에 있는 50대 여자에게 안내됐습니다. “제 남편을 아세요.” 로저는 몇 년 전 자신을 태워 준 친절한 분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게 언제였지요.” “5년 전, 5월 7일 제가 군에서 제대했던 날입니다.”

    “그래요. 혹시 그 날 특별한 일이 있었나요.” “남편께서 그 날 주님을 영접하셨어요.” 갑자기 그녀가 마구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몇 분 후 그녀는 진정하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수년 동안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어요. 그런데 바로 그 날 남편은 정면충돌 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저는 하나님이 약속을 안 지키셨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주님을 떠난 삶을 살았거든요.” 「내 인생을 바꾼 100가지 이야기」에 나오는 한 토막입니다.

    구원받는 것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옷을 입으려면 첫 단추부터 잘 끼워야 하듯이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가장 급하고 중요한 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요일2:17).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잠31:30).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요3:36).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 우리의 가장 큰 감사제목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이겠지요.
    김종춘 목사(www.dreamel.com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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