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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혜진의 신앙고백 “낮은 자존감으로 힘들었어요”/ 요덕수용소서 풀려나 탈북한 김곤태 씨의 증언 채취록
    2007-11-23 16:50:07   read : 5731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아름다운 얼굴만큼이나 고운 마음씨로 더욱 사랑받는 탤런트 한혜진 씨. 지난해 <주몽>이라는 국민드라마로 스타덤에 오른 그가 언론 매체에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신앙에 대해 공개해 관심을 끈다.

    그는 지난 15일 CTS TV의 간증 프로그램인 ‘내가 매일 기쁘게’ 녹화 현장에서, 힘들었던 가정사와 연예계 활동,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있었던 신앙의 성숙에 대해 전했다.

    “‘헛 것을 믿었구나’라고 생각했죠”

    듣기로는 한혜진 씨 집안이 많이 어려웠다고 들었는데, 혹시 신앙을 가지게 된 것도 이와 관계가 있을까요?



    - 어머니가 저희 집에서 처음 하나님을 영접했어요. 당시 아버지가 사업을 실패하시고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외숙모께서 교회에 한번 나가보라고 하셨대요. 어머니는 근처 교회에 나가서 말씀을 듣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셨죠.

    어머니가 40일 작정기도를 들어가시면서, ‘집안에 붙여진 빨간 딱지들을 떼어주시면, 당신이 있다는 것을 믿겠습니다’라고 기도하셨대요. 작정기도 후 그것들이 다 떼어지니 아버지도 함께 믿을 수 있었다고 해요.

    그 이후 저희 세 자매는 멋모르고 교회에 나가 놀았어요. 그때가 5살 때였죠. 초등학교 때에는 교회에서 찬양하고, 부회장을 맡으면서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한 번은 오후 예배를 빠져서 부장집사님께 엄청 혼났거든요. 그 뒤 그 집사님이 무서워 한동안 교회를 못 나갔던 적도 있어요.

    그러면 온 가족이 교회를 다니시게 되면서 집안 상황은 좀 나아졌나요?

    - 아니요. 계속 나빠져서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적도 있었어요. 대학 다닐 때였는데, 아버지 식사를 챙겨줄 사람이 없어서, 교수님께 ‘아버지께서 누워계셔서 점심을 챙겨드려야 하는데 출석 인정을 해 줄 수 없느냐’고 부탁드렸죠. 그랬더니 교수님이 ‘네가 가는 것은 좋은데, 출석체크는 해 줄 수 없다’고 냉정하게 말하시는 거예요.

    집에 오는 길에 엄청 울었어요. ‘정말 이 세상에는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돌아와서 아버지를 보는데,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그래서 더 독해졌던 것 같아요. 돈에 대한 욕심이나 일에 대한 욕심, 모두에서요.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어린 마음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도 할 수 있었겠어요.

    -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밉지도 않았고요. 저 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했어요. 그냥 ‘우리가 헛것을 믿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숨 쉴 구멍을 조금도 주시지 않았으니까요. 시장 창고를 개조해 살고 있었는데, 비가 오면 물이 새고…. 제가 연기자 생활을 할 때도 거기서 살았으니까요.

    이렇다보니 제 자존감도 너무 낮았어요. 오디션 떨어지면 밤잠을 자지도 못하구요. 주위 연예인들이 마냥 부러웠어요. 딴에는 연기자라고 어머니께 ‘여기서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강남에서 살자’고 그랬죠. 그 때 저희 집에 딱 천만 원이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월세를 많이 내더라도 가자고 하셨어요.



    ▲©뉴스미션

    희망의 씨앗이 싹트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신앙을 회복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 것 같아요.

    - 제가 2004년에 아침드라마 <그대는 별>을 찍을 때였어요. 일은 하는데, 회사에서 출연료를 안 주는 거예요. 끝내는 힘들다고 저를 놓더라구요. 당장 드라마는 찍어야 하는데 정말 막막했어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요. 그때 하나님이 생각났죠. 지금의 심정을 얘기할 분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래서 새벽에 나와서 교회를 갔어요. 어릴 시절 사랑 받았던 기억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게 된 거죠. 그때 목사님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눈물이 났어요. ‘세상에는 저런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저 분은 날 위해 저렇게 하셨구나’라는 게 믿어지는 거예요. 그 다음날부터 ‘하나님 저 좀 만나주세요’라고 기도하니까 평안을 주시더라구요.

    그 이후 신앙생활에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 계속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고, 하나님을 너무 알고 싶다’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청년부를 나가라는 말씀을 주시더라구요. 사실 저는 연기자고 낯도 많이 가려서 과연 청년부를 나갈 수 있을까 했는데, 언니들한테 같이 가자고 해서 새해 첫날 결단을 하고 함께 나갔어요. 청년회에서 하나님이 누구시고, 성령님이 누구신지부터 배우고 모임에도 참여하게 됐어요. 그 안에서 중보기도의 힘을 알게 되고, 이전에 막혀서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게 됐죠.

    하지만 그렇다고 어려웠던 상황이 한 순간에 해결된 건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 아침 드라마가 끝나고 일이 안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 앞으로 어떻게 살지 묻고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연기자를 안 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까지 했죠. 때마침 어떤 연극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술집으로 불러내서는 ‘야, 나 너한테 한 푼도 줄 수 없어, 하고 싶음 하고 하기 싫음 하지 마’라고 말하는 거예요. 너무 슬퍼서 ‘왜 이리 힘든 일만 주시냐’고 주님께 기도하며 울었죠.

    그런데 뜻하지 않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아침드라마로 신인상 후보에 오른 거예요. 저 같은 신인에게는 드레스를 협찬해주지 않는데, 겨우 어렵게 드레스를 협찬 받아서 시상식을 갔어요. 신인상 수상자로 제 이름을 부를 때 잘못 부른 줄 알았어요. 너무 놀랍고 감격해서, 이 감격을 어떻게 얘기할까 했는데 하나님이 먼저 생각났어요.

    바로 그 때 공식적인 자리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얘기를 한 거예요. 그때부터 <굳세어라 금순아>와 <주몽>팀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오디션을 보긴 했지만 너무 못 본 거예요. 그래서 그냥 ‘하나님이 주시면 하자’라는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렸어요. 기다리니까 하자고 연락이 온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거죠. 감독님을 뵈니까, 수심이 가득했지만 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별 걱정이 없었어요.

    하나님이 경제적인 풍요도 함께 주신 거죠. 그러면서 예전엔 돈 욕심이 많았는데, 그 욕심이 없어졌어요. 그런 점이 더 감사했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벼랑 끝에도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있다는 자체가 큰 힘이 돼요.

    주몽, 힘들었지만 도약을 이루게 해 준 작품

    <주몽> 얘길 안 할 수 없죠. 정말 대단한 드라마였는데, 종영 후 반응은 어땠나요?

    - 정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구나 라고 느낀 게, 지금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에 방영되고 있어요. 이란에도 방영될 예정인데, 현재 <대장금> 시청률이 90%래요. 그런 나라에 주몽이 방영된다는 거예요. 이런 게 그 나라에 복음이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고, 선교하시는 분들에게도 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으면 선교할 때 쉬워지지 않겠어요.

    북한도 다녀오셨죠?

    - 북한에 ‘주몽의 묘’나 벽화 등 많은 유산이 남아 있어서 주몽팀이 함께 다녀오게 됐어요. 원래 복음의 시작이 그 땅이었는데, 지금은 한 인간을 우상시하고 신처럼 받드는 현실이 참 안타까웠어요.

    호텔에서 스위스 여성분들을 만났는데, 저희에게 한국말로 찬양을 적어달라는 거예요. 알고 보니 북한 지역에 단기선교를 오셨더라구요. 그걸 보면서 ‘세계적으로 북한에 복음 전파의 뜻을 품으신 분이 많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에 비해 저는 ‘가까이 있는데도 품지 못했구나’라는 부끄러움도 느끼고….

    1년여의 촬영 동안 어떤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 많은 분들이 ‘시청률 잘 나오는 드라마에서 연기해서 좋겠다’며 부러워하셨어요. 하지만 사실은 연기자 생활하면서 최대의 고비였어요. 왜냐면 제가 그때 굉장히 사람을 두려워했거든요. 많은 악성댓글과 현장 사람들로 인해 상처를 받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됐어요. 물론 저를 위한 말들이겠지만, 저는 굉장히 상처도 많이 받고 자존감도 낮아지게 됐어요. 참 많이 힘든 시간이었어요. 날마다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하며, ‘왜 이 자리에 보내주셨어요’라고 원망했죠.

    밖에서 볼 때는 그런 힘든 일이 있었을 거라고 보이지 않았는데.

    - 많은 분들이 제가 주몽을 하면서 즐거움 속에 있을 줄 아셨는데, 저는 뭔가의 억눌림과 짓눌림이 있었기 때문에 힘든 시간들이었어요.

    저를 칭찬하고 사랑하고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안 보이더라구요. 교회에서 드라마 잘 보고 있다는 인사를 하면 ‘내가 연기 못 한 것을 봤을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마음 그대로 받아드리지 못했던 거죠. 어느 정도냐면, 연말 시상식에도 갈 수 없을 정도였죠. 그래서 불참하겠다고 했더니 담당자가 많이 당황했어요. ‘그러면 상 안 주면 갈게요’라고 했더니 더 당황해 하더라구요.

    별 수 없어서 하나님께, ‘저에게 절대 상 주시면 안 된다’고 울면서 기도했어요. 그 정도로 자존감이 낮았던 거예요.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더라구요. 상을 받으러 올라가면서 어떤 깨달음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뜻하심을 거부하는 것도 교만이라는 거죠.

    그때 더 감동을 받았던 건 많은 수상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때문이었어요. 지수원 선배님, 승수 오빠, 한예슬 씨, 정려원 씨 등 너무나 많아 놀랬어요. ‘나만 하나님 믿고 나만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교만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숨겨놓으시고 이미 많은 일을 하고 계시는데 말이죠.

    주몽 출연진과 스텝 중에도 크리스천이 많았다는데, 어려울 때 도움이 많이 됐겠어요.

    - 오연수 선배님, 김승수 선배님, 진희경 선배님, 저희 아버지로 나오셨던 김병기 선생님, 나중에 투입된 탐희 언니, 배수빈 오빠도 크리스천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데 다들 거부감이 없었어요. 주몽 오빠(송일국)에게 생일 선물로 성경책을 줬더니, ‘노력해볼게요’라며 웃더라구요. 그거 보면서 하나님이 오빠를 많이 사랑하시는 것을 느꼈어요. 반드시 (송일국 씨가) 구원받고 영접하리라는 믿음이 있어요.

    다들 도움을 많이 주셨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투입된 탐희 언니의 도움이 컸어요. 원래 여자 연기자들이 처음 만나면 예뻐서 서로 견제하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녹화장에서 살짝 봤는데 언니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 거예요. ‘아, 이 언니도 크리스천이구나’라고 생각하는데, 언니가 먼저 김밥을 건네면서 ‘하나님 믿느냐’고 묻자 눈물이 났어요.

    이후 둘이서 하나님 얘기 하면서 많이 울고, 은혜 받았어요. 이 드라마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 잘 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고 다짐하기도 했구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우리가 많이 노력해야 한다’면서 말이죠. 언니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라고 생각해요.

    주몽 하면서 한참 힘들었다고 하니,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네요.

    - 탐희 언니 도움이 컸는데, <주몽>이 끝나고 바빠서 자연스레 언니랑 멀어지게 됐어요. 그래서 또 자존감이 낮아져 전화도 받지 않고, 하나님이 무워서 말씀은 읽지만 남는 건 없고 그런 상태로 지냈죠.

    그러던 어느 날 하용조 목사님이 전화를 해서 ‘병원으로 와 줄 수 있느냐’고 하는데, 거절할 순 없어서 가겠다고 했어요. 두려운 마음에 탐희 언니와 함께 갔는데, 목사님이 투석을 하느라 너무 힘든 모습이었어요. ‘하나님이 일본에 대한 비전을 주셨는데, 함께 가줄 수 있느냐’고 목사님이 물으셨어요. 사실은 너무 가기 싫었어요. 자존감이 너무 낮은 상태니까, ‘거기에 가서 내가 뭘 해, 신앙도 낮고’라는 생각 때문이었죠. 하지만 투병 중에 계신 목사님을 보니 차마 거절을 못 하겠더라구요.

    그런데 ‘러브소나타’에 가서 큰 충격을 받았어요. 함께 간 연예인분들이 20명 정도였는데, 그 분들의 신앙을 보고 많이 놀라고 도전을 받게 됐어요. 그 자리에서 도전을 받으면서 질투심도 느꼈죠. 그래서 ‘하나님, 저도 저들처럼 기쁘고 감사하고 싶고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요, 하나님 만나고 싶고 듣고 싶어요’라고 기도했어요. 그날 삭개오에 대한 말씀을 주셨는데,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게 이거구나’라는 느낌이 들고 짜릿했어요.

    그동안 신앙에 많은 성장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지금 한혜진 씨의 신앙 고백은 어떤가요?

    - 2004년에 하나님을 영접했는데, 그때는 ‘하나님은 무조건 복을 주시는 분’으로 알았어요. <주몽>할 때까지는 사랑만 주시고, 복만 주시고 하신 분인 줄 알았죠. 하지만 주몽하면서 계속 힘드니까, ‘이상하다 하나님은 이러는 분이 아닌데’라며 하나님이 두려웠어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는 하지만 ‘하나님께 내가 무얼 잘못했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두려운 마음이 가득했어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멀어지게 됐구요. ‘하나님이 날 생각 안하시나, 왜 힘들지?’, 이런 게 느껴지니까 많이 힘들더라구요.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께서 돕는 자를 보내주셔서 제가 회복하고 있는 시기에요. 또한 ‘고난이나 어려움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어요. 그래서 지금 기쁨과 감사함으로 이 자리에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혜진 씨의 순수하고 맑은 신앙고백은 오는 19일 밤 10시30분, 20일 오전 10시30분, 21일과 22일 오전 0시30분에 CTS TV를 통해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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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석 목사 “대형교회들 수평이동적 전도 지양해야”

    부산기독교사회책임 작은교회 세미나 개최... 교회 개혁 촉구 성명 발표 [2007-11-22 14:17]



    ▲이날 세미나에서 강의를 전하고 있는 서경석 목사 ⓒ허난세 위원

    부산기독교사회책임(공동대표 김성수, 김철봉, 남송우, 안용운, 임정덕, 정성훈, 조운복)이 지난 16일 부산 서면교회(담임 전상수 목사)에서 ‘작은교회 네트워크 및 미자립교회 자립 대책’ 세미나를 개최했다.

    2005년 작은교회 3천 개가 문을 닫은 것과 무임목사의 숫자가 수만 명에 달하고 있다는 한국교회 현실에 대한 대책 마련을 위한 이날 세미나는 150여 명의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의 관심 속에서 열렸다.

    사무총장 나영수 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세미나에서는 기독교사회책임 공동대표이자 나눔과기쁨 상임대표인 서경석 목사가 ‘한국교회 현실과 미자립교회 자립 대책’이란 주제로 강의했다.

    서 목사는 “큰교회들은 큰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작은교회들이 잘 할 수 있는 일은 작은교회에게 남겨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목회는 규모보다 목회자의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으며, “작은교회들이 살아야 한국교회가 성장하는 것이다. 수평이동적 전도는 이제 지양돼야 한다”고 작은교회 살리기 운동의 의의를 역설했다.

    이어 작은교회운동 사무총장 최충하 목사와 김명균 목사가 운동을 소개했으며, 류춘실(나눔과기쁨 서울시협의회장) 목사와 라용주(안산 이동나누미 활동가) 목사가 사례발표를 통해 참석한 2백여 명의 목회자들에게 미자립교회 자립의 모델을 제시했다.

    한편 이날 행사 중간에 교회 입구 계단에서는 부산기독교사회책임의 주최로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자는 목회자들의 뜻을 모아 한국교회 개혁을 촉구하는 성명서 발표 및 기자회견을 전개했다.



    ▲세미나 중간에 주최측 관계자들과 참석자들은 한국교회 개혁을 촉구하는 성명서 발표 및 기자회견을 교회 계단 입구에서 전개하기도 했다. ⓒ허난세 위원

    최충하 목사의 성명서 낭독으로 이들 목회자들은 예수의 삶을 따라 사는 영성의 회복, 사회지도력 강화로 민족의 희망이 되는 교회가 될 것, 작은교회와 큰교회의 공존 모색, 목회자 수급 불균형문제 해소,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개혁의 사령탑이 될 것 등 총 5가지를 촉구했다.

    안용운 공동대표는 “현재 부산지역 나누미가 20여 명으로 적은 숫자다. 이제 부산에서도 나눔과기쁨 활동가들이 많이 탄생되길 바란다. 부산지역의 작은교회들이 금번 세미나와 ‘작은교회살리기운동’을 통해 자립하고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소망을 피력했다.

    부산기독교사회책임은 12월 4일 미자립교회 목회자 3백 명을 대상으로 정식 나누미 교육을 실시하고 위촉식을 열 예정이다.

    또 나눔과기쁨 부산협의회 주관으로 12월 14일부터 15일간 부산 벡스코 건너편 행사장에서 ‘사랑의 나눔 장터’를 개최할 계획이기도 하다.

    문의: 부산기독교사회책임 051)868-7405, 019-246-4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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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는 한국에서 없어져야 할 종교인가>

    [연합뉴스 2007-11-23 16:04:51]
    한국교회언론회 '안티기독교' 관련 토론회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개독교', '먹사', '똥경' 등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이른바 '안티기독교' 운동을 펼치는 네티즌들이 기독교를 비하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안티기독교운동의 중심에 있는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반기련.www.antichrist.or.kr)이 2003년 출범할 때 내건 창립 선언문은 "이 사회에서 기독교가 더 이상 패악질을 일삼지 못하도록 기독교를 박멸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안티기독교 운동을 하는 네티즌들 사이에 기독교는 마치 모기나 바퀴벌레처럼 우리 사회에서 박멸해야 할 해충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세계적으로 19억여 명이 선택하고 있는 종교이자 2005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개신교와 가톨릭을 합쳐 국내에 1천400만 명이 넘는 신자가 있다. 이처럼 다수의 신자를 가진 보편적 종교에 대해 최근 한국사회에서 일고 있는 '안티기독교' 운동을 어떻게 봐야 할까?

    한국교회언론회(대표 박봉상 목사)가 23일 서울 연동교회에서 개최한 안티기독교 관련 토론회에서 이찬경 반기련 회장은 "신의 정의를 부르짖고 공의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면서 신의 심판을 설교하는 종교 엘리트의 부패가 그들보다 더 교육기회가 없었던 신도들보다 더 치졸하고 야비하다"면서 "우리는 기독교가 자정능력이 아예 없거나 상실했다고 판단한다"고 안티기독교 운동의 배경을 밝혔다.

    이 회장은 "물질적 축복과 기복을 파는 종교업자들이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예수천당 불신지옥'으로 협박하고, 공룡화된 교회는 거대한 기업처럼 돌아간다"면서 "천민자본주의가 판을 치고, 교회의 외적 성장과 신도의 양적 팽창이 목사의 성공으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신도들은 결국 현금 지급기 노릇만 죽으라고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기독교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로 다른 문화와 다른 종교에 대한 멸시와 폄하를 일삼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망 사건을 순교로 미화하는 현실은 문화의 상대성과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기독교의 모순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그는 불상과 단군상을 부수고 장승을 훼손하며, 수만의 신도가 모여 모든 사찰이 무너지라고 통성기도를 했던 사례 등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배타성을 지적하면서 "존중받기를 원하면 먼저 존중하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조성돈 실천신학대학원대학 교수는 "2002년 월드컵 대화 때 개신교계가 붉은 악마 반대 캠페인 등 사회적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태도로 인해 안티기독교 형성의 빌미를 줬다"면서 "안티기독교 운동은 인터넷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익명성에 가려진 폭력성 등 위험요소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안티기독교 측은 기독교가 반사회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굿네이버스, 월드비전, 국제기아대책기구 등 활발한 구호활동을 펼치는 단체들은 대부분 개신교에 뿌리를 두고 있고, 주요 종교 사회복지법인과 시설 가운데 개신교가 차지하는 비율이 60-80%에 이른다"면서 "한국교회가 그동안 저질러온 잘못을 반성해야 하지만 안티기독교 세력도 건전한 인터넷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호주 시드니 사랑방교회 지성수 목사는 "2007년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악몽의 해로 기억될 것"이라면서 "아프간 인질 사태로 한국교회가 만난 쓰나미는 예수를 너무 열심히 믿다가 당한 인재(人災)"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교회의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인 선교활동의 부작용이 '기독교 박멸'이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고 자성하면서도 "한국 개신교의 문제는 교회의 정치권력화, 대형화, 세속화에 있는 만큼 안티 진영은 그런 문제를 갖고 있는 몇몇 대형교회와 달리 찬송가 구절처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일생을 고결하게 목회에 바치고 있는 다수의 성직자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정강길 세계와기독교변혁연대 실장은 "안티기독교의 성장은 기존 기독교의 폐해와 오류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기독교인이라면 이 문제를 회피하려 해서는 안된다"면서 "안티 진영의 '기독교 박멸주의'는 기존 기독교의 배타성과 폭력성을 똑같이 보여준다는 한계가 있지만 한국교회는 이를 계기로 새롭고 건강한 대안 기독교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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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은 날 무덤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요덕수용소서 풀려나 탈북한 김곤태 씨의 증언 채취록
    양봉식 sunyang@amennews.com

    북한으로의 송환은 죽음을 의미

    북한에서 김곤태 씨(가명)는 차분한 어조로 그의 젊은 시절, 의심들, 중국으로의 첫 번째 여행, 체포, 요덕 강제수용소에서의 4년, 석방, 강제이혼, 기근, 두 번째 탈출, 예수님과의 만남, 남한으로의 여행, 그리고 지금의 삶에 대해 증언을 시작했다.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인간



    ▲ 인공위성으로 찍힌 요덕수용소

    “나에게 가장 힘든 것은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방 이곳저곳으로 의자를 10번 옮기라고 한다면 나는 그 목적이 무엇인지 스스로 묻지도 않고 그 일을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어떤 대학 과정을 밟아야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면, 나는 모른다.”

    그의 발언은 그다지 놀라운 것은 아니다. 30년 또는 그 이상 동안 스스로 생각하도록 허락되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생각 할 수 없다. 이미 이루어진 결정을 따라 사는데 익숙해진 사람은 스스로 결정을 할 수 없다.

    김곤태 씨는 1956년 중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적 이혼했다. 그 결과, 그는 이복형제들과 함께 자라났다. 1961년 그는 아버지와 함께 북한의 북쪽 지방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1964년 남쪽 항구인 원산으로 다시 이주했다.

    “어렸을 적, 나는 정말로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로 자라났다. 김일성 장군은 ‘부’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냈다. 남한은 미국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언젠가 우리는 우리의 동료들을 제국주의자들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학교 공부의 중요한 부분은 김일성의 말과 글들을 암기하며 배우는 것이었다. 내가 배운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하려면 10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체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이다. 당은 어머니이고, 김일성은 아버지이며, 김정일은 아들이다. 나는 더 이상 그때 배웠던 것을 정확하게 암기할 수 없다. 하나님이 그것을 나의 생각에서 지워주셨다”

    선택의 자유는 북한에서 알려지지 않은 개념이다. 김의 증언은 북한 당국이 한 인간을 어떤 식으로 사고하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당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준다. 우리는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 취급받는다. 실제로 당신의 성공의 기회를 크게 높여주는 것은 당신이 김일성을 만나보았는지의 여부이다. 그러면 당신은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승진하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나를 정말로 괴롭혔던 것은 내가 무슨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도 당이 결정한다는 사실이었다. 중등학교 졸업 이후 나는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일을 해야 했다. 그것은 매우 단순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북한이 지상의 참된 낙원이라고 믿었다.”

    서서히 자라난 의심들
    “언젠가 나는 등에 자루를 멘 남한의 한 농부에 관한 사진을 책 속에서 보았다. 그 아래에는 ‘이 불쌍한 농부는 남한의 부르주아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옷을 보았고 우리의 옷보다 훨씬 나은 것을 알았다. 게다가 우리의 농부들도 그 땅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문에서 나는 서독과 남한의 시위운동에 대한 사진들을 보았다. 그 사진들은 희미하게 처리되어서, 배경에 어떤 건물들이 있는지 잘 볼 수가 없었다. 표제란에 사람들은 지배 계층에 대해 극도로 화가 나있다고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그들은 시위를 하도록 허락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 이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간접으로 경험하는 다른 세계, 그러나 그것은 의심과 의문, 그리고 새로운 동경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 김씨의 증언이다. 1986년 김씨는 중국으로 처음 도망쳐 나왔다. 처음에 그는 중국에 계속 살고 있는 친척들을 찾기 위해 갔으나, 그는 환영받지 못했다.

    “친척들은 두려워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북한인을 숨겨주고 있었다. 요즘 북한 난민들을 숨겨주는 것에 대한 벌은 훨씬 더 심하다. 나는 광산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그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었지만 당국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 처음에는 나는 중국에 매우 실망했다. 여기서도 역시 냉혹하게 통치하는 공산주의 정부가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경계하며 스스로를 지켜야만 했다”

    그리스도인들을 만남
    중국에서 김은 처음으로 기독교와 접하게 되었다. 한 조선족 그리스도인을 통해 그는 성경을 받았다.

    “내가 머물던 집 주인의 아내가 나에게 교회에 가자고 초청했으나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성경을 읽으려고 노력했으나 창세기를 읽고 놀랐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기독교가 좋은 것이라는 것을 나는 주인 가정으로부터 알 수 있었다. 특히 그들이 나로 시기나게 한 것은 사랑이었다. 그들은 나의 이전의 모습과 매우 달랐다.”

    4개월 후 김씨는 결국 발각되었다.

    “나는 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고 몇 명의 중국 공안원들을 만났다. 나는 성경책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체포했다. 감옥만 해도 나는 중국이 내 나라보다 실제로 얼마나 더 나은지 깨달았다. 감옥 음식조차 북한의 일상 음식보다 훨씬 더 나았다.”

    김 씨는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송환은 죽음을 의미한다. 김곤태 씨는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하나님을 붙들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려웠다. 즉시 처형되지는 않을까? 아니면 노동 수용소에 보내지지 않을까? 비록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지만, 종종 기도는 했다. 나는 풀려나기를 기도했다. 결국 그분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이목을 집중시킨 뮤지컬 <요덕스토리> 장면

    감옥에서의 8개월
    김 씨는 심하게 고문당하지 않았다. 그 상황이 오히려 그에게 고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매우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비밀 기관에 잡혀 보낸 8개월의 시간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매로 때렸으며 먹을 것을 거의 주지 않았다. 나는 단순하게 그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구할 수도 없었다. 나는 같은 자리에 온종일 앉아 있어야 했으며 그것은 다리에 심한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게다가 우리는 씻을 수도 없었으며 이를 닦을 수도 없었다. 이들이 밤낮 몸에 기어 다녔다. 밤에 나는 벼룩과 이와 심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야 했다. 찢어진 담요는 나를 거의 보호할 수가 없었다.”

    “몇몇 다른 사람들은 더 심한 상황에 있었다. 한 죄수의 다리는 동상에 걸려 잘라내야만 했다. ‘불쾌한 사람’으로 알려진 한 죄수는 어느 날 옷을 다 벗긴 채 간수와 함께 밤을 지새워야했다. 그날 밤은 영하 20도였다. 괴로워하는 그의 신음소리는 다른 죄수들과 나를 거의 미치게 만들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머리를 벽에 계속 부딪쳐 자살했다.”

    모든 고소 내용 인정하다
    “협력하는 것이 최고였다. 그들은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으로부터 내가 어머니에게 보냈던 편지를 발견했다. 그 안에 나는 실제로 중국이 그렇게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썼다. 그리고 확실히 북한보다 훨씬 더 나은 것도 아니었다. 내가 감옥으로 송환되었을 때 나의 아내는 강제로 이혼하도록 강요받았다. 사실 그것은 잘된 일이었다. 이것은 나의 자녀들이 반역자가 된 나에게 더 이상 관계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만약 그들이 공적으로 나에게 관계된다면 그들의 성공의 기회는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이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1988년 3월 31일, 끔찍했던 8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15번 수용소 ‘요덕’으로 보내졌다. 이 이름은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를 연상하게 한다. 이 거대한 강제 노동수용소는 함경남도의 어느 산속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거의 탈출이 거의 불가능하다. 성공적인 탈출의 시도가 발견된 지역들에 대해서는 창살을 댄 높은 벽이 세워졌다.

    어떤 구역들은 감전장치가 세워졌다. 게다가 지뢰밭들과 다른 치명적인 덫들이 놓여 있었다. 2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는 7미터 높이의 감시탑이 있었다. 탈출하려고 하는 이들마다 총에 맞았다. 만약 누군가 살아서 붙잡히게 되면, 그는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 죄수들은 소보다 더 심하게 취급받았다. 음식은 거의 없었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들은 한 벌의 옷만을 받았다. 많은 죄수들이 질병과 기아에 쓰러졌다. 살아있는 자들은 걸어 다니는 망령들처럼 보였다고 했다.

    김 씨는 수용소에 갔을 때 충격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감옥에서의 8개월 이후 나는 전과 똑같아 보였다. 게다가 나는 다시 약간의 희망을 가졌다. 간수는 나에게 처형되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다. 기차로 수송이 되었으며, 여행 끝부분에는 화물 트럭을 타게 되었다. 입구를 통해 들어갈 때 나는 위를 올려다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풀려날 수 없는 죄수들과 함께 감옥의 한 부분을 처음 차로 통과하여 들어갔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막사에 도착하기까지 최소 30킬로미터 이상 요덕수용소 안으로 차로 들어갔다. 수용소에서 모든 새로운 죄수들은 평가를 받고, 세 개의 -강한, 보통, 약한-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이 평가는 얼마나 많은 음식을 받으며,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결정짓는 것이었다. 8개월의 감옥생활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나는 강한 그룹에 배정받았다. 나는 땅에서 일을 해야 했고, 때때로 다른 죄수들보다 약간 더 많은 음식을 배급받았다.”

    절망적인 상황



    ▲ 뮤지컬 <요덕스토리> 장면

    보통 음식은 하루에 세 번, 옥수수 100그램이 못 미치는 양이었다. 죄수들은 창의력이 있어야했다. 때때로 김곤택 산에서 발견되는 식용의 식물로 야채수프를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때때로 쥐, 뱀, 또는 개구리를 잡아서 먹기도 했다. 개구리 알 또한 요덕의 죄수들이 먹으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보통 김은 해가 뜨자마자 3, 4시에 일어나야했다. 그리고 저녁 늦게 막사로 돌아왔다.

    “전체 체계가 나를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나는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처형 현장도 지켜보았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는 한 큰 홀에 모이게 되었는데 지도자 중 한명의 생일을 기념하여 몇 명 죄수들이 모범적인 행실의 대가로 풀려나게 됨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모범 죄수가 되고 여기서 생존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석방될 가능성을 얻기 위해 요덕에 최소한 3~5년은 더 있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떤 실수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믿을 수 없는 상황
    요덕에는 죄수들이 매를 맞는 일이 정기적으로 발생한다. 어느 날 김 씨는 방탄 방어벽에서 일을 해야 했다. 그의 동료 죄수 중 한명이 토마토 몇 개 훔친 것 때문에 매를 맞고, 옷을 벗기고, 사슬에 묶이게 되었다. 간수는 그를 그렇게 밤새 누워있게 했다. 그는 포복자세로 그에게 기어서 다가가 그를 그의 등으로 옮겼다. 왜냐면 그는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또 다른 죄수가 김일성이 명령한 것과 약간 다르게 옥수수를 심었다는 이유로 얼마나 잔인하게 매를 맞을 수 있는지를 보았다. 최라고 불리는 한 죄수는 영양실조와 병 때문에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역시 매를 맞고 어쨌든 다시 일터로 보내졌다. 최는 마치 미친 듯이 행동을 했다. 그는 개의 음식을 훔쳤고, 심지어 도끼로 그의 손가락을 잘랐다. 나는 5명의 죄수들이 처형되는 것도 보았다. 그들은 탈출하려고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줄에 묶이고, 얼굴에 가면이 씌워지고, 무릎을 꿇은 채 3발의 총에 맞았다. 마침내 총이 그들의 심장과 머리를 향해 발사되었다.”

    뜻밖에 만난 그리스도인들
    그는 요덕에서 만난 그리스도인들의 증언도 했다. 그의 증언은 하나님이 암흑 가운데서 그의 백성을 어떻게 돌보고 계시는가를 알 수 있게 했다.

    “나는 요덕에서 그리스도인이 있으리라고 전혀 기대하지 못했다. 7명의 그리스도인 그룹의 리더를 만났다. 그들은 스스로를 사랑의 공동체라고 불렀으며, 비밀리에 종종 만났다. 나는 그 수용소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금지된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때때로 그는 나에게 성경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나는 그것을 매우 즐겼다. 그러나 나는 나의 죄를 고백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그렇게 하도록 요구했을 때, 나는 눈을 감고 한마디도 더 하지 않았다.”

    김씨는 “당신은 하나님이 계심을 어떻게 압니까?”라고 물었다. 그 사람은 “태양이 존재하는 것을 당신이 모르는 것처럼 나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의 피부에 태양의 온기를 느끼듯이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밀고자들
    요덕에서, 간수들은 정기적으로 밀고자들을 지명한다. 이들은 매주 그들의 동료들이 잘못한 것에 관하여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되어있다. 밀고자들 중 한명이 그리스도인 그룹을 배신했다.

    “그들은 모두 끔찍하게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내 친구를 너무 세게 잡아 묶어서 그의 팔은 부러졌고, 아마 마취도 하지 못한 채 절단을 해야만 했다. 그 후 그와 나머지 사람들은 훨씬 더 엄격한 다른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런 수용소에서는 살아나올 수 없다. 그 후 나는 요덕에서 다시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했으나 행운이 다시 주어지지 않았다.”

    다른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김 씨도 종종 탈출하려는 시도를 고려해보았다. 그러나 그는 눈에 띄지 않았을 때 생존할 수 있는 더 많은 가능성이 주어짐을 깨달았다. 3년의 수용소 생활 후, 한 간수가 그에게 말했다.

    “만약 이번 해에도 행동을 잘 하면, 너는 내년에 석방될 것이다.”

    석방됨
    1992년 4월1일, 그의 마을(요덕은 여러 마을들로 나누어져있다)의 다른 수천 명 죄수들과 함께 그는 큰 홀에 출두해야만 했다. 2주 후가 김일성 생일이었다.

    “그 날을 기념하여 몇 명의 죄수들이 풀려날 예정이었다. 내 이름이 불릴 때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기쁨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침내 나는 이 지옥, 살아있는 집단 무덤 같은 곳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거기를 살아서 나온 것은 기적이었다. 풀려난 다른 죄수들 또한 엄청나게 기뻐했다. 나는 심지어 어떤 죄수가 그의 이름이 불릴 때 심장마비에 걸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얼마나 비극적인가.”

    요덕에서의 마지막 날은 1992년 4월 10일이었다. 그 때 그는 가족들에게 가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결국 그와 어떤 관계도 다시 맺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석방 후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한 가지, 북한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죄수의 경력 때문에 나는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여전히 창살 없는 곳에서 사는 죄수나 다름없었다.”

    1997년 4월 탈출
    “가혹하게 들리지만, 90년대의 가뭄은 나에게 뜻밖의 행운이었다. 가뭄 때문에, 사람들은 음식을 찾아 헤맸다. 많은 사람들이 짧게 또는 길게 북쪽으로 옮겨갔다. 내가 빠져나가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고, 감시는 어쨌든 덜 엄격해졌다.”

    김곤태 씨는 국경을 이루고 있는 북쪽 압록강으로 혼자서 갔다. 이전번처럼, 밤에 얕은 지점을 찾아 차가운 강을 걸어서 건넜다. 어떤 지점은 아직 얼어있었다. 강 하상에 둥근 돌들이 가득해서 얼음처럼 미끄러웠다. 그는 강을 통과해서 무조건 달리기 시작했다.

    “강은 100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어떤 지점에서 그는 미끄러지고 넘어졌으며, 심하게 다쳤다. 그 후 나는 숨을 장소를 찾아 산속을 가로질러 갔다. 여기 저기 아직 눈이 있었다. 어떤 장소에서는, 개처럼, 네발로 기어서 갔다.”

    마침내, 김은 숨을 장소를 발견했다. 그는 이후에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그리고 다시 몇몇 그리스도인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1997년 12월 그는 한국어 성경을 받게 되었고, 같은 달 세례도 받았다.

    그리스도인이 됨
    김곤태 씨는 자신의 개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그 일이 이루어졌는지 나는 모른다. 하나님이 나를 찾으셨고, 나는 그분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천천히 나는 성경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북한 사람들의 한 그룹의 지도자가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그들과 함께 나는 성경을 공부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김에게는 전혀 안전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남한으로 가기를 원했다. 1999년 봄에 그는 중국의 수도 베이징으로 가서 남한 대사관에 신청하고자 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이며, 너무 위험하다”고 충고했다. 2001년 4월에 김 씨는 북한인들을 중국으로부터 밀출국시키는 한 기관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떠날 준비가 해야만 했다.

    남한으로 밀출국
    7월 8일 해방의 전화가 울렸다. 안내자들은 그를 몽골로 일단 보낸 후, 몽골을 통해 남한으로 보내고자 했다. 그 그룹은 총 8명이었다. 그들은 네 명씩 두 조로 나누어 국경을 통과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6명은 붙잡히게 되었다.

    “그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북한으로 송환되어, 고문당하고, 만약 고문에서 살아남았다면 강제 노동 수용소에 보내졌을 것이다.”

    김 씨는 남한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이제 그는 북한에서 겨우 수십 킬로 떨어진 평화로운 곳에 앉아있다.

    “김정일이 권력을 잡고 있는 한 북한은 어떤 것도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단지 하나님만 북한에 돌파구를 만들어 내실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전쟁을 통해서? 자연재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피흘림이 없이 간섭해주시도록 기도하자.”

    이제 그는 모든 기회를 이용해 그의 나라에 대해,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해 알리는 일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북한에서만큼 박해받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아마 없을 것이라고 그는 단언했다.

    “나의 개인적인 메시지는 우리나라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이다. 북한을 위해 기도해 달라. 우리는 한국교회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 개인적인 사역을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 나는 중국에서 북한사람들을 돕는 한 기관을 위해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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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학생들..‘휴대전화용 책상 구멍을 뚫어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오른손에는 연필을 쥐고 왼손은 가지런히 책 옆에 두고 있는 모습. 초등학교 시절 바른생활 교과서로 배웠던 수업 시간 올바른 자세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혹여 기억을 한다 해도 직접 실천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완벽한 자세는 아니더라도 학생이라면 수업 시간에 필기할 수 있는 연필이나 펜은 들고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지금 학생들 손에는 연필보다 휴대전화, PSP, MP3가 더 오래 머물고 있다. 쉬는 시간은 물론이거니와 수업 시간까지 자그마한 기계들이 학생들의 손을 점령하고 있다.

    사실 학생과 선생님들 사이에 휴대전화, 휴대용 게임기를 둘러싼 싸움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사용하지 않더라도 소지하는 것만으로 압수를 하기도 하고 압수한 물건은 장기간 보관하는 등 여러 방법을 강구해 보았지만 지금도 싸움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단속을 심하게 할수록 학생들은 더 교묘한 방법으로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가고 있다.

    책상에 구멍 뚫어 선생님들의 눈 피해

    과거에는 사전이나 두꺼운 책을 쌓아놓고 그 뒤에서 몰래 문자를 보냈었던 것이 고작이었지만 날로 지능화되는 학생들의 기술은 선생님들도 놀라게 만든다. 다리를 꼬고 앉아 몰래 문자를 보내거나 게임을 하다가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면 재빨리 다리 사이에 넣고 손가락을 만지는 척 하는 방법은 애교수준에 머무를 정도이다.

    지금 가장 안전성(?)을 인정받고 있는 ‘책상의 구멍 뚫기’만 보더라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수업 시간이 지루해 연필로 조금씩 파내던 그런 작은 구멍이 아니다. 휴대전화나 PSP 같은 게임기의 액정 크기를 자로 재서 정확히 그 크기대로 책상에 구멍을 낸다. 학생들은 이 구멍을 통해 책상 안으로 휴대 기기와 손을 넣어 수업 시간에도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수업 시간중 몰래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방법©뉴스미션

    물론 준비과정도 있다. 선생님에게 들킬 것을 염두에 두고 미리 책상 안에 전자사전이나 노트 등 수업시간에 필요한 물건을 하나쯤 넣어둔다. 두 손을 책상 안으로 넣고 게임을 하기 때문에 선생님께 걸리면 책상 안에서 필요한 물건을 꺼내는 척 하기 위한 방법이다. 구멍은 재빨리 교과서로 가리고 준비해두었던 물건을 꺼내면 자연스럽게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이 방법이 인터넷을 통해 유행처럼 퍼져 선생님들의 감시를 받게 되자 학생들은 한 단계 더 발전된 방법을 생각해냈다. 안정성을 인정받는 방법이라지만 ‘책상에 구멍 뚫기’는 평상시에도 구멍을 가리기 위해 신경을 써야하며 일단 구멍의 일부분이라도 들키면 숨길 수 없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책상 구멍 전용 뚜껑도 등장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것이 ‘책상 뚜껑 만들기’다. 2cm에 가까운 책상 두께를 뚫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기에 뚜껑까지 신경을 쓰지 못 했던 학생들의 그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뚜껑이 있으면 구멍을 막아 평상시에는 자연스러운 흠집처럼 보이는 효과도 있고 선생님에게 발각됐을 경우 응급처치의 한 방법으로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뚜껑 없이 책상에 구멍을 뚫었다가 걸릴 경우에는 꼼짝없이 배상을 해야 하는 등 책임을 져야 한다. 이를 깨달은 학생들은 미리 뚜껑을 준비해두었다가 적발되면 구멍은 톱밥이나 지우개 가루로 막고 그 위에 준비해두었던 뚜껑을 덮어 감쪽같이 구멍을 없애버려 선생님들의 눈을 속인다.



    ▲뚫은 구멍에 뚜껑을 덮은 모습(출처:오마이뉴스)


    ‘책상에 구멍 뚫는 방법’까지 공유

    심지어 인터넷에는 ‘쉽게 책상에 구멍 뚫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제작 방법까지 올라와 있다. 적절한 도구, 재료, 각 단계별 사진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어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더 심각한 것은 게시글에 달려있는 댓글들이다. 분명 잘못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반응은 ‘존경합니다’, ‘대단합니다’였다. 물론 당장 따라해 보겠다는 댓글들도 보였다.

    갑자기 동생이 십자드라이버를 찾길래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인터넷을 보니 십자드라이버가 책상 구멍 뚫기에는 제일 좋다고 해서”라는 대답을 듣고 놀랐다는 강동진(21)씨의 말처럼 나쁜 행동임에도 따라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책상에 구멍 뚫기 제작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보여주고 있다.©뉴스미션


    즐거움을 넘어 중독까지

    또한 이렇게 수업 시간까지 휴대전화나 게임기를 사용한다면 중독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생긴다. 경기도 분당서울대병원이 최근 B고등학교 1학년 재학생 34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휴대전화 소지자 276명 중 29%인 80명이 휴대전화가 손에 없으면 불안감을 느낀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휴대전화의 사용시간이 길수록 중독에 빠진다는 것은 당연한데 수업 시간 중에도 휴대전화나 게임기를 사용하는 학생들은 중독이 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B고등학교의 경우 응답자의 35%가 휴대전화 장시간 사용으로 인한 손목 통증과 환청, 초조, 불안감 등을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런 증상들은 이러한 기기들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도 집중력을 흩트려 학업 성취도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을 가지고 온다.

    음향효과 없이 게임을 하는 것이 재미가 없다며 심지어 가느다란 이어폰 구멍까지 뚫고 있는 학생들. 수업 시간에도 학생들의 손은 늘 책상 속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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