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에 팔린 옛 머릿돌교회, 갈보리교회가 다시 매입 / 장경동 목사 설교, 남는 게 없다 2007-04-13 14:34:04 read : 6508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단서 되찾아온 옛 머릿돌교회, 경매로 소유권 넘어가 갈보리교회가 다시 매입
우여곡절 끝에 이단으로부터 되찾은 교회가 교계의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의 교회는 서울 광진구 자양3동 뚝섬유원지 건너편에 위치한 기독교대한감리회 갈보리교회(사진·강문호 목사). 강변북로를 달리다 영동대교를 막 지나면 20m 높이의 하얀 십자가가 눈에 띄는 교회로 예장 합동 등 주요 교단에서 이단으로 판정한 D측 S교회로부터 125억원에 최근 매입했다.
교회 건물은 대지 436평에 지상 12층 지하 2층, 연건평 2264평으로 광진구에서 가장 큰 규모다.
이 교회 건물은 원래 예장 통합 머릿돌교회(조정해 목사) 소유였다.
하지만 건물 공사에 따른 은행 대출금 80억원과 이자를 갚지 못해 2005년 말 경매에 부쳐졌다.
당시 시가는 250억원. 최초 경매가는 108억원이었으나 4회 유찰을 거쳐 56억 7150만원에 S교회로 낙찰됐다.
S교회로 낙찰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적지 않았다.
서울 명성교회(김삼환 목사)가 머릿돌교회를 대신해 응찰에 나섰으나 낙찰가에 조금 못미치는 액수를 제시, 차순위 낙찰자가 되는 아쉬움을 남겼다.
또 예장 통합 함해 노회는 이단성이 있는 집단이 건전한 교회를 침공하는 일에 한국교회가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며 헌의안을 총회에 제출했다.
이 과정에서 물리적인 충돌로 일부 성도들이 다치기도 했다.
강문호 목사와 2000여명의 성도들은 “어려운 난관을 거쳐 이단으로부터 되찾은 교회이니만큼 더욱 더 선교 활동에 힘쓰는 교회로 거듭나겠다”고 입을 모았다.
글·사진=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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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교회에 대한 권리 없다”
동부지법, 이성곤 목사측 교단탈퇴 결의 무효 재확인
지난 2004년 분규 발생 이후 2005년 양분된 상태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광성교회 문제와 관련 서울동부지방법원이 이성곤 목사측에 대해 교회를 차지할 아무런 권리 없이 예배당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광성교회 문제가 새 국면을 맞을 것으로 예상된다.
동부지법은 이성곤 목사측이 남광현 목사 등 통합측 광성교회 소속의 부목사와 장로 등 12명을 상대로 제기한 ‘업무방해’(2006고정2198) 사건 선고와 관련 12명 전원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는 한편, “이성곤 목사측의 예배 업무는 불법한 것이고, 오히려 정당한 권리를 찾으려는 피고인들(통합측)의 행위는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정당 행위이거나, 예배를 방해하는 상대방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정당행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그리고 이성곤 목사측의 교단 탈퇴 결의에 대해서도 대법원이 지난 2006년 4월 내린 결정을 인용, “교인총회의 소집 절차나 결의 방법에 중대한 흠이 있는 것으로서 무효”라고 말했다.
또한 “탈퇴 결의가 무효인 이상 이성곤 목사측 교인들은 예배당을 포함한 광성교회에 대한 아무런 권리가 없고 피고인들을 포함한 광성교회측 신도들이 정당한 총유적 권리를 갖게 되며, 종교적으로 보더라도 이성곤 목사측 교인들이 광성교회에서 종교 행위를 할 아무런 권리가 없고 광성교회 신도들이 그러한 권리가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법원은 또한 이성곤 목사측이 아무런 권리 없이 계속해서 광성교회 예배당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으며, “광성교회측(통합측) 교인들의 예배를 방해한 것은 퇴거 불응죄 또는 예배 방해죄를 구성한다”고 말했다.
이를 이유로 법원은 통합측 교인들의 예배당 진입을 비롯한 행위들은 그 동기나 목적이 정당하고 수단과 방법 또한 상당성이 인정되는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에 해당되며, 피고인 12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기독교연합신문 공종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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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법 재개정되길…" 목사6명 국회 담장기도
[조선일보 2007-04-13 07:42:36]
사학법 재개정을 촉구하며 무기한 단식에 돌입한 목사 6명이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도회를 열었다. 이들은 국회 앞 담장에 손을 댄 채 기도를 하고, “선교의 자유를 훼손하는 사학법이 재개정되길 바란다”고 요구했다.
이 기도회엔 열흘째 단식 중인 우세현(홍은돌산교회) 목사와, 7일째 단식을 하고 있는 서경석 기독교사회책임 공동대표(서울조선족교회 목사), 단식 사흘째를 맞은 유영길(초양교회)·윤상운(종소리교회)·최충하(전 예장대신 총회 총무)·김규호(선한일하는교회) 목사 등이 참석했다.
기도를 마친 김규호 목사는 “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자유를 달라고 기도했다”고 했고, 윤상운 목사는 “사학법 재개정을 위해선 순교도 두렵지 않다. 우리의 단식은 기도보다 더 간절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 4월 12일, 사학법 재개정 촉구 무기한 단식에 돌입한 우세현,서경석 목사등 8명의 목회자와 신도들이 여의도 국회 담에 사학법재개정을 염원하는 오렌지색 리본을 달고 기도하고 있다.
[김경은 기자 larrisa0204@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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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목회자들이 뜨고 있다.
곳곳에서 역랑을 발휘하는 여성목회자들...능력 발휘하도록 제도적 뒷받침 필요
갈수록 침체되고 있는 한국기독교계에 여성 목회자들이 새로운 부흥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여성 목회자들은 목회의 기본소양이라 할 수 있는 특유의 '모성'을 바탕으로 교회를 개척해 성장시키기도, 특수목회에 헌신하기도 하며 잃어버린 영혼의 인도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열정으로 1천 5백명 교회로 성장시킨 이희수 목사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에 있는 군자 대현교회( 이희수 담임목사 )는 지난 1999년 창립된 순복음교회이다.
이교회는 창립 당시 교인이라고는 이희수 목사와 남편인 박식순 장로, 아들 등 가족 3명이 전부였지만 8년이 지난 지금은 출석교인만 천5백명에 달하는 중대형 교회로 성장했다.
군자대현교회가 이처럼 부흥하게 된 배경에는 이희수 목사의 남다른 노력과 강한 성령의 은혜가 있었다.
이 목사는 여성목회자로 40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목사안수를 받았지만 교회 주보를 직접 거리에서 배포하고, 주변 아파트단지의 가정집을 매일같이 돌며 불신자 전도에 나섰다.
이희수 목사는 또, 교인들의 일상생활을 꼼꼼하게 챙기는 섬세한 목회사역을 통해 교인들에게 감동을 전했다.
이렇다보니 군자대현교회는 전체 교인의 80% 이상이 초신자이지만 1년도 안돼 성령을 체험하는 놀라운 은사가 나타났다.
주일 예배 시간에 모든 교인들에게 30분 이상 기도를 하도록 한 것이 성령체험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희수 목사는 현재 시흥시 기독교연합회 서구지역 회장과청송교도소 교정위원으로 활동하며, 여성목회자도 얼마든지한국교회의 당당한 주역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전담양 목사
최근 입당예배를 드린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임마누엘 교회(담임목사 전담양). 이 교회는 지난 2003년 고양시 한 농촌마을의 비닐하우스 단지에서 처음 예배를 드린지 4년만에 출석교인 3백명의 어엿한 중형교회로 성장했다.
멀리 분당에서도 교인들이 찾아오기도 하도, 따땃함을 느끼고 싶은 대형교회 교인들도 찾아올 만큼 강한 성령의역사가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이같은 부흥의 기적을 일군 주인공은 전담양 목사.
비록 52살이란 늦은 나이에 목사안수를 받았지만 전 목사는 폭넓은 성경해석과 철저한 복음주의 신앙을 통해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또, 평소에는 푸근하고 자상한 어머니의 모습이지만 강단에 올라 설교말씀을 전할때면 남성 목회자 못지않는 강한 카리스마가 묻어나기도 한다.
전목사는 한국교회는 여성목회자들의 기반이 취약하지만뛰어난 설교 능력만 갖춘다면, 여성목회자들도 얼마든지 부흥시킬 수 있다며, 특히 여성목회자의 경우 자신만의 능력과 은사를 찾아내 개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어머니의 마음'을 쏟아내는 특수목회자 정순영, 김선옥 목사
교회 개척이 아닌, 돌봄 사역에서 달란트를 발휘하는 여성목회자들도 많다.
가정폭력 피해여성 쉼터에서 사역하는 정순영 목사는 지난 8년 동안 가정폭력으로 상처받은 여성들을 돌봐왔다.
마치 여느 가정집처럼 보이는 단독주택에서 사회복지사 한 명과 함께 사역하는 그녀는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친정어머니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예배와 상담, 그리고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입소자들과 그 자녀들을 위한 치유와 가정의 회복을 돕고 있는 정목사는 "이렇게 여성들을 깊이 상담해야하는 목회는 남성목회자들은 할 수 없어요. 어머니로서 아내로서의 경험이 있는 여성목회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라고 특히 '여성성'이 필요한 목회라고 말한다.
가정폭력 피해여성뿐 아니라 성매매 피해 청소녀들을 돌보는 일에도 여성목회자가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성매매 피해 청소녀들을 위한 지원시설인 '새날을 여는 청소년 쉼터'.
1998년 감리교 여성지도자들이 모여 가출청소녀를 위한 공간으로 출발한 이곳엔 현재 8명의 십대 청소녀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이 결손가정의 아이들로, 가출로 숙식 공간이 필요하게 되면서 '조건만남'으로 성매매에 발을 들이게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의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은 김선옥 목사다. 그녀는 쉼터 관장이지만 전혀 고압적이지 않다. 깨어진 가정으로 고통받은 아이들을 자신의 자녀처럼 사랑을 쏟아부었고, 결국 소녀들은 김목사를 '엄마' 또는 '할머니'라 부르며 따르게 됐다.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았던 가출 청소녀들. 하지만 김목사 앞에서는 학교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진로 상담까지 수다를 푼다. 마치 엄마와 딸의 대화와 다를 것이 없다.
김목사는 "저 또한 한 아이의 어머니이기에 이같은 돌봄 사역을 더 잘 감당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라며 돌봄사역에 있어 '어머니의 마음'이 꼭 필요한 요소임을 강조 한다.
여성목회자들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 필요
하지만, 이렇듯 여성목회자들이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발휘하기엔 많은 제약이 따르는 것이 현실이다.
우선, 목회지로의 청빙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남성목회자를 선호하는 현실로 인해 목회능력과 상관없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청빙후보자 명단에도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교회를 맡은 여성목회자의 대부분은 미자립 교회나 농어촌 지역에 집중돼 있다.
이밖에도 사례비나 설교의 기회 등 많은 곳에서 차별은 존재한다.
여성목회자들도 남성목회자들과 똑같이 공부하고 시험을 통과해 목사안수를 받았기에, 여성목회자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상대적으로 클수 밖에 없다.
이는 교회의 의사결정 기구에 여성을 거의 참여시키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와 뿌리 깊은 가부장적 문화 때문이란 분석이다.
때문에 목회의 필수 요소라할 수 있는 '모성'을 가진 여성목회자들이 오히려 목회의 기회를 얻기가 힘들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한신대 채수일 교수는 "여성목회자들이 특수 목회로 나가는 것은 그쪽에 더욱 재능이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제도권 교회가 기회를 주지 않아서 이기도 하다."며 총회에 여성총대의 비율을 법적으로 할당한다든지, 여성목회자 청빙의 비율을 법으로 정한다든지의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결국, 여성목회자들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해서는단지 목사안수를 허용하는 것을 넘어 목회의 기회를 균등하게 가질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CBS 종교부 조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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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의 새벽기도
아직까지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요즘 이곳 중국 북경에는 여느 때와 달리 새벽기도의 열기가 후끈 달아올라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많은 한인교회들이 짧게는 2주일에서 길게는 40일까지 일제히 특별새벽기도를 시작한 것이다.
20만 한인들과 12만의 조선족, 1,500만명의 한족이 살고 있는 이곳 북경 땅을 주님의 사랑으로 품기 위해, 더 나아가 열방을 품기 위해 기도로써 새벽을 주님께 헌신하는 이들이 합심하기로 한 것이다.
그중 한 교회는 "120 기도운동"이라는 제목으로 특별새벽기도가 한창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들은 120명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전심으로 기도한 결과, 그 곳에 모인 모든 제자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기적의 주인공이 된 것을 기억하는 이 교회 성도들은 “120명이 전심으로 기도하는 기적”과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기적”, 그리고 “3천명이 회개하며 5천명이 돌아오는 기적”, 이 세 가지 기적의 주인공이 되어 기도용사로 거듭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주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있다.
비록 새벽제단을 쌓을 수 있는 장소가 여의치 않아서 집사님이 운영하시는 식당에서 모이고 있지만, 어린 아기부터 청년, 장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성도들이 앉을자리가 없이 서서 기도해야할 정도로 뜨거운 열정으로 기도하는 모습은 분명 주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이다.
* 사진, 글 : 임지원 통신원(중국 북경)
‘건강한 교회’는 모든 기독 신앙인들의 소망일 것이다. 특히 목회자에게는 말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위한 목회는 어떤 것일까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질문이지 않을까?
로렌스 패리스 목사는 위 질문에 대해 ‘목회 10계명’으로 답을 내리고 있다. 다양하고 광범위한 목회에 대한 이야기를 10가지의 주제로 함축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책 이름도 <목회 10계명>(생명의말씀사, 2006)이다. 단지 이론서가 아닌 실제 목회 현장에서 발생, 경험된 생생한 이야기가 이 책의 특징이다. 목회자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목회자와 함께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 나간다는 점에서 일반 성도들에게도 좋은 책이라 생각된다.
10계명의 제목들만 보면 다음과 같다. 1) 교회의 형성 배경을 알라, 2) 필요한 변혁만 시도하라, 3) 설교에 목숨을 걸라, 4) 교회 재정을 투명하게 관리하라, 5) 비현실적인 기대에서 자유로워라, 6) 자기관리에 충실하라, 7) 이 사람들을 주의하라, 8) 교회 밖의 활동을 제한하라, 9) 목사의 역할을 분명히 알라, 10) 분별하고 집중하라
이 책의 특징은 기존 교회에 새로 부임한 신임 목회자의 시각으로 목회를 바라본다는 데 있다. 평범하게 보일 수 있는 목회 원칙들이 새롭게 시작되는 목회 속에서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 그 현장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목회를 새롭게 했거나 준비하고 있는 이에게는 목회의 철학이나 원칙들을 세울 수 있고 이미 목회를 하고 있는 이에게는 자신의 목회를 새롭게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례를 들어보자. 첫 번째 계명인 ‘교회의 형성 배경을 알라’는 교회의 기원이나 중요성 등의 일반적인 이론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부임하게 되는 교회의 환경을 파악하라는 내용이다. 로렌스 목사는 “목회자들은 새로 주어진 목회 환경에서 충실하고 효율적으로 사역하기 전에, 그 환경의 가치 있고 복잡한 요소들을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
구체적인 예로 가) 창립교인들은 누구이고 그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나)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는 목사들은 누구이고, 어떠한 인물들이었는가? 3)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일깨워 준 ‘부흥의 시기’는 언제였는가? 4) 성도들의 교회 생활 중에서 한때는 활발하다 멈춘 것이 있다면 어떤 일(예를 들면 지역사회를 위한 사역이라든가 예배의 형식을 바꾼 일 등)이었으며 그 이유는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가? 5) 어떤 갈등이 있었고 성도들은 그 갈등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6) 그 지역에 공존하는 다른 교회가 있었는가? 등을 파악하라고 언급하고 있다(pp.16~17). 교인이 아닌 분들 중에 지역에 오랫동안 살고 있는 노인들을 초청해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며 적극 추천하기도 했다.
로렌스 목사는 계속해서 신임 목회자가 성도들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 없이 성도들의 삶을 너무 많이, 너무 빠르게 변화시키려고 한 것이 결국 목회의 실패의 원인 중 하나임을 지적하며 교회에 꼭 필요하고 덕을 세우는 변혁만을 시도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두 번째 계명인 것이다(pp.32~33). 다시 말해 신임목사는 새 목회지에서 자신 있게 추진할 수 있는 ‘블루칩’, 즉 몇 가지 탁월한 계획들을 한꺼번에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블루칩은 꼭 필요한 변화를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목사가 원하는 변화가 아무리 신앙적으로 견고해도 성도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목사만의 의지로 그 블루칩이 낭비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 블루칩은 성도를 위해 주어진 것이지 목사 자신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목사는 이미 시행된 변혁이 마무리될 때까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거나 성도들에게 알리는 일은 삼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가지 변화가 뿌리를 내려 삶의 일부가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설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여느 목회자도 그렇게 주장하는 것처럼 로렌스 목사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역시 언급하고 있다. 성도들 입장에서 그들이 설교와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지 못하면 그 목사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의구심을 갖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물론 성도 중심으로 설교가 흘러가서는 안 되지만 설교의 방향이 성도를 향해서임을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네 번째 계명은 교회 재정에 관한 내용이다. 로렌스 목사는 목사가 성도들의 헌금 액수를 알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고 명쾌하게 답을 내리고 있다. 그는 친구 목사의 예를 들었다. 평소 자신과 교회에 불평을 가장 많이 해 왔던 한 성도의 헌금 내역을 본 후 그 친구 목사는 전과 같이 그 성도를 대하기 힘들어졌다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임목사는 자신의 헌금 액수 외에는 다른 성도의 헌금 액수를 알고 싶지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겠다고 성도들에게 확인해 주어야 목사가 교회에서 별 탈 없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임 목사의 부수입 문제는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까? 결혼식이나 장례식 주례 그리고 특별 집회나 신학교 강의 등을 통해서 얻게 되는 수입을 말한다. 자신의 개인 수입으로 처리해야 하는가 아니면 교회에 헌금을 해야 하는가? 미국사회나 한국사회나 이 부분은 민감한 문제임이 틀림없다. 로렌스 목사는 이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 그 수입을 ‘목사 판공비’라는 이름으로 한 구좌에 넣고 교회에 사용처는 알리지만 목사가 임의로 쓸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로렌스 목사는 계속해서 성도들에게 호감을 사려고 노력하는 일 자체를 비현실적인 기대라며 그 생각에서 벗어나라고 경고하고 있다. 호감을 위해 목사 혼자서 모든 일을 계획하고 주도하고 처리하는 태도는 오히려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제대로 사용치 못하게 하며 사역 의지도 잃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섯 번째 계명이다. 또한 목사 자신의 체력, 가정생활, 친구 관계 등 개인 관리를 잘 해야 하는 것이 여섯 번째 계명이다.
목회를 힘들게 하는 성도들은 누구일까? 신임목사는 누구를 조심해야 할까? 조심해야 할 사람들을 파악하는 것이 일곱 번째 계명이다.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항상 자신의 문제를 설명하느라 입이 바쁜 수다쟁이, 매사에 투덜대는 불평꾼, 혼자 모든 일을 주장하려는 일 중독자가 그들이다(p.90). 새로 부임한 목사에게 제일 처음 상담하러 온 중에 수다쟁이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문제 해결보다는 그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다. 불평꾼은 대체로 교회에서 자신이 소외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속감을 갖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의 모든 일에 다 관여하고 싶은 일 중독자에게는 책임감을 갖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
로렌스 목사는 병상의 성도를 위해 특별히 관심을 가질 것을 권유하고 있다. 특히 성찬이 있을 때는 그 주간에 성도를 찾아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함을 강조했다. 목사가 병자를 여러모로 돌보아 주는 것을 목격한 성도들은 자신이 병으로 누워 있게 될 경우 목사가 자신도 그렇게 잘 돌봐 줄 것이라고 크게 신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목사가 꼭 기억해야 할 몇 가지의 것들이 있다. 교회 밖의 일에 쓰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시간은 교회 성도들을 위해 써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교회 밖의 일은 대부분 목사에게 몰려오는 기회가 아니라 오히려 유혹임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목사는 바른 신학에 집중해서 교회를 지도하고 각 성도의 은사를 개발해서 교회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 주된 역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온전한 목사의 시간을 바른 신학의 정립과 가르침 그리고 그것으로 성도를 향해 달려가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성(性) 문제에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영적 간음이 될 수 있는 세상적인 명예에 대해서도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이것이 여덟, 아홉, 열 번째의 계명들이다.
신임 목사를 향한 로렌스 목사의 마지막 권면은 ‘멘토를 만나라’는 것이다. 생각대로 되지 않거나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찾아오는 ‘자기 연민(self-pity)’이라는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자신을 사랑해주고 권면해 줄 수 있는 멘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없으면 찾아내야 하는 적극성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홀로’ 사역하지 않고 함께 나눌 사람을 찾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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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2500명 교회 성장시킨 성시 비전가
교회성장의 '태풍의 눈' 주님의영광교회 신승훈 목사 인터뷰
라스베가스=김철영
"교회 부흥 전략요? 단순하게 하나님만 말씀만 전하고 순종하는 겁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믿고 순종하는 거지요. 그리고 내 경험과 체험 아닌 오직 하나님 말씀만 전하는 것입니다".
개척 8년 만에 2,500명의 교인이 출석하는 대형교회로 성장시킨 LA 주님의영광교회 신승훈 담임목사(53세, 남가주교협 수석부회장, LA성시화운동 부위원장)는 부흥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미주지역에서는 10명 모이면 한국에서는 100명 교회와 같고, 1000명 모이면 10,000명 모이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미주목회가 힘들고 벅차다는 것이다. 밤에는 일을 나가야 하고, 낮에는 잠을 자는 이중의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교회 출석 자체가 쉽지 않은 어려움도 있다고 한다. 그뿐인가. 타문화권에서의 한인들의 갈등과 상처는 고국에서보다 훨씬 크고 깊다고 한다.
세계성시화운동 전략회의와 라스베가스 성시화대회 둘째날 저녁집회에서 '교회에서의 성시화운동 사례'를 발표한 신 목사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LA성시화운동 이성우 목사의 권유도 있었지만, 그의 발표에서 한 주에 200명씩 새신자가 출석하고, 히스패닉과 노숙자, 교도소 사역 등 한인사회를 넘어서는 사역의 간증이 귀에 쏙 들어왔기 때문이다.
카지노와 포커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투스카니호텔 레스토랑에서 늦은 시간 식사를 주문한 신 목사와 신분희 사모를 만났다.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이미지와 밝은 얼굴을 한 신 목사는 언론에 소개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다가 설득 끝에 결국 거침없이(?) 간증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성시화는 전도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을 품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성시화는 크리스천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회개운동입니다." 신 목사는 성시화운동을 그렇게 정의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사람이 변하고 사회도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천은 크리스천답게 살아야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2005년 10월 7일부터 9일까지 LA 성시화대회가 열렸어요. 그 때 남가주교협에서 모든 교회들이 성시화대회에 참여하기로 결의를 했어요. 그래서 교인들과 함께 대회에 참석했어요. 그때 성시화의 비전을 받았어요."
신 목사는 대회가 끝나자 교회에 성시화국을 설치했다. 그리고 전도사역을 시작했다. 전도대상자를 마음에 품고 기도하는 태신자운동에서부터 홈리스(노숙자)사역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흑인목사를 세웠다. 이어 교도소와 양로원 선교를 시작했다. 양로원 절반이 치매환자지만 단순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신 목사는 히스패닉을 대상으로 노방전도를 시작했다. 그런데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간단한 몇 마디만 사용하면서 전도를 하다가 라틴어 사역을 시작했다. 아예 전임목사 2명을 세웠다. 한인사회의 울타리를 넘어 미국 사회로 사역의 지경을 넓힌 것이다.
이렇게 전 영역으로 복음전도의 폭을 넓히자 교회는 급속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 주에 200명씩 불신자가 교회를 출석하고 예수를 믿게 된 역사가 일어났다. 8년만에 출석교인 2500명이 된 것은 신 목사와 교인들의 복음전도에 대한 놀라운 헌신과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승훈 목사는 원래 사업가였다. 한 달에 순 수입 5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무슨 사업을 했는지 물었지만 "비지니스 몇 개를 했어요"라는 사모의 한 마디 외에는 끝내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제 꿈은 4천 만불을 벌어 한국에서 육영사업을 하는 것이 꿈이었어요. 그런데1988년 어느 날 신문에 LA의 보나벤쳐 호텔을 일본 사람이 4억불에 샀다는 기사가 났어요. 그 때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내 꿈이 싫어하는 일본인 돈의 4분 1밖에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평생을 돈을 벌어도 LA의 한 블록은커녕 빌딩 하나 못산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으니 신학을 해서 전도자로 살 결심을 했습니다".
탈봇신학교에 입학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토플 점수가 550점이 넘어야 입학 지원이 가능해요. 그런데 영어를 못하니까 학교 관계자를 찾아가서 설득했지요. 한학기만 공부하게 해 달라고. 그래서 공부를 하게 되었고, 한 학기 수업 후 영어시험도 통과했지요."
신학교를 졸업한 후 1993년 케냐 선교사로 떠났다. 그곳에서 신 목사는 5년간 사역을 하면서 초등학교 4개, 신학교 2개, 중고등학교 2개 등을 세워 사역했다. 신학교를 통해 졸업한 사역자들을 중심으로 400개 교회를 세워 사역하도록 했다. 그러나 신 목사는 몸이 약해져 쓰러지게 되었고, LA로 다시 돌아와 안식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안식년을 마치고 다시 케냐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기도하면서 개척하라는 음성을 들었어요. 그래서 김광신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3일 후 개척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1999년 1월 교회를 개척했어요". 신 목사는 그때 놀라운 교회 성장을 경험한 것이다.
신 목사가 목회사역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교인이 필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내 생각, 내 경험이 아닌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성경을 각 권으로 설교를 해왔는데, 성경 전체의 3분의 2를 강해했어요. 12년이면 성경 전체를 다 설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말씀만을 선포하니까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 같다는 신 목사는 교인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강조한다. 그리고 가족 구원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를 위해 1년에 두 차례 한국에 가서 교인들의 가족들을 초청해 복음을 전한다.
신 목사가 구원의 확신과 가족 구원에 열의를 보이는 것은 그의 신앙 여정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신 목사는 초등학교 1학년 때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안 믿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교회를 나간 것이다.
"교회 가면 뭘 주는 것 같아서 나가기 시작했죠. 또 매주 출석하면 상을 준다고 하면서 그래프로 그려서 출석을 독려했어요. 그런데 목사님 아들인지 한 친구는 출석률이 높아 그래프가 많이 올라갔고, 저는 집안의 사정으로 내 딴으로는 열심을 냈지만 그래프가 높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너는 뭐냐'라고 해서 시험에 들었어요". 그 날로 교회에 발걸음을 끊었다.
고등학교 때는 열심히 놀다가(?) 3학년 때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다. 그런데 미션스쿨이었다. "전학하자마자 성경시험을 봤는데 0점을 받았어요. 그러자 성경시험을 낸 선생님이 '승훈이는 0점 받았다'고 발표한 거에요. 남녀공학이었는데 창피를 당하면서 '저런 게 성경을 가르치나' 생각하면서 속으로 복수할 결심을 하게 되었어요".
승훈은 복수의 방법으로 채플에 참석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선생이 '승훈이 왔나'라고 유일하게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승훈은 친구들을 빼돌려 채플에 참석하지 않고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즐겼다. 친구들 중에는 채플 헌금을 훔쳐오는 이도 있었다. "교회를 미워한 거죠. '목사가 사람을 사랑해야지 나를 못 살게 하다니'라는 비판적인 생각을 가졌지요."
고등학교 졸업 후 승훈은 한양대 상대를 입학했다. 군대를 다녀와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생각했으나 한 학기를 공부하고 나니까 다른 친구들은 모두 취업을 해서 공부할 기회가 없어졌다.
대학을 졸업한 후 영어교사와 족집게 교사로 이름을 날리던 승훈은 1981년 미국 이민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했다. "사업 정보를 얻으려고 사람들과 교제하기 위해 교회를 나갔어요. 먼 친척 한 분도 교회를 다니라고 권유를 했고요."
사업을 하면서 6년간 교회를 나갔지만 놀러 다닌다고 빠지고, 사업 때문에 빠지고 그렇게 교회당을 드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대 신앙의 전환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날 한 집사님이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라고 묻더군요. 기분이 나쁘더군요. 자기가 뭔데 그런 질문을 하나 생각했어요. 자기는 있다고 하더군요. 충격을 받았어요. 저는 '하나님께 인사만 잘하면 되지' 라고 생각했는데요."
당시 집사였던 그는 집으로 가던 중 차를 세우고 구원의 확신을 달라고 기도했다. 한번, 두 번 기도해도 반응이 없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주인이신데 내 마음대로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나님 미안합니다' 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핏 값으로 나를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 주인이신데 내 맘대로 산 것에 대해 '예수님 미안합니다'라고 말씀드렸죠. 그러자 통곡이 터져 나왔어요". 차안에서 30분을 울었다. 그리고 제 마음에 뭐가 들어오는 느낌도 받았다.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 후에는 어떤 분이 '성령 세례를 받았나?'라고 물었다. "그 분은 성령 세례를 받으면 한 시간 이상씩 기도할 수 있고, 방언의 은사도 받는다고 그래요. 그래서 어느 기도원 집회를 참석해서 은사를 받을 사람 나오라고 해서 나갔는데 '할렐루야'를 계속 하라고 그래요. 그런데 입에서 할렐루야라는 말이 잘 안 떨어져요. 저 혼자만 받지 못하고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와 버렸지요."
그런데 기도하면서 '네 자존심을 죽여라'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서 '할렐루야' 라는 말을 하라고 해도 하기 싫어했던 자신의 자존심을 회개했다. 비로소 방언이 터지고 성령세례도 받게 되었다.
"성령 세례를 받고 보니 세상이 바로 보였어요. 이민 사회가 보였어요. 돈 벌 때 느끼지 못한 만족과 기쁨을 느꼈어요. 영적인 체험도 많이 했어요. 그 때부터 전도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사람들이 자꾸 주의 종이 되라고 권유하더라구요."
주님의영광교회는 지난해 4월 1984년 LA 올림픽 복싱경기장으로 사용했던 대형 체육관을 매입했다. 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체육관으로 영화배우 실베스타 스텔론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록키>를 촬영했던 바로 그 체유관이다.
지난해 10월 입당하면서 리모델링을 해서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한인 최대 교회당이다. "원래 이 체육관은 80년 전에는 교회가 있었던 곳입니다. 실베스타 스텔론이 영화 <록키 Ⅲ>을 찍겠다고 장소 사용을 요청했으나 거절했습니다. 싸움터가 이제는 수천명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영적 전쟁의 기지가 된 것이죠".
지난 해에는 가을에는 세븐, 빅마마, 휘성 등 청소년들에게 인기 있는 가수들이 이곳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다. 신승훈 목사가 5분간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신 목사는 청소년들 앞에서 직접 메시지를 하면 거부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영상메시지로 대신했다. 참석한 청소년들도 박수로 신 목사의 메시지에 반응했다.
"성도들이 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내 형제, 내 누이라는 생각으로 성도를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원하는 또 하나는 목사의 헌신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거쳐왔던 신앙 여정에서 경험했듯이 교인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고, 성령의 세례를 받도록 도와주고 싶습니다."
"주님의영광교회 교인들은 다 순종 잘 하고 큰 소리내는 법이 없다"고 자랑하는 신 목사의 얼굴과 목소리에는 꾸밈없는 웃음과 진실한 마음이 묻어 나왔다. 주님의 영광교회는 이제 새로운 사역을 펼친다. 이성우 목사(미주성시화운동 상임총무, LA NLTC훈련원장)를 중심으로 새생명훈련원(NLTC) 사역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신학교에서 너무 많은 신학 이론은 가르치는데, 실천은 없어요. 성시화운동의 결국은 전도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삶이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됩니다. 성시화운동의 결국은 전도사역입니다. 목사님들이 전도사역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신 목사는 내년에 남가주교회협의회 회장에 취임한다. "교협 회장이 되면 목사들을 재교육하는 일을 할 생각입니다. 특히 사역을 하지 않는 목사들을 훈련해서 전도인의 삶을 살도록 도울 겁니다"
신 목사는 지난해 11월 자신의 신앙 간증을 담은 <예수 없이 못 사는 남자>라는 책을 두란노에서 출판했다.
그는 그 책 서두에 이렇게 썼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여정은 재미와 쾌락과 안락이 있어 보여도 결국엔 불안과 파멸입니다. 내 속의 불안과 두려움의 싹들을 잘라낼 길이 없습니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과 같은 인생, 그런 인생이 바로 불신의 인생입니다. 저는 수십 년 동안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마도 불신자들의 일반적인 모습이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끊임없이 부르시는 하나님과 끊임없이 망설이는 나 사이에 흐른 시간이 무려 33년입니다. 이제 전도하면서 그때의 저와 같은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신 목사는 아직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성도들에게,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을 잡고 일어나 타는 목마름으로 지쳐 쓰러져 가는 이들에게 예수 사랑의 손을 내밀 것을 그의 지나온 삶의 빛과 그림자를 통해 우리들에게 권하고 있다.
자, 이제 선택은 당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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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동 목사 설교, 남는 게 없다
웃음 뒤 남는 게 없는 설교…졸린 설교가 낫다
며칠 전 평소에 가깝게 지내는 이 아무개 목사에게 전화를 드렸다.
“목사님, 제가 장경동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 글을 써야하는데, 좋은 생각이 있으면 말씀 좀 해주시죠.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참 난감하네요. 설교 내용을 붙잡고 평할 만큼 내용이 충실한 게 아니고, 그렇다고 그분의 넉살 좋은 선포방식을 문제 삼는 것은 너무 뻔한 이야기가 될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설교가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니까 말입니다. 목사님은 장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 전화를 받은 이 목사님은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더니, 요즘 본인도 삼일기도회 때는 장경동 목사의 부흥회 설교를 신자들에게 시청하게 한다고 말했다. 좀 의외였다. 신학과 신앙의 깊이가 상당하며 말에도 설득력도 있는 분이 이유야 어디에 있든지 장경동 목사의 설교를 공개적으로 본다는 게 말이다. 흉허물 없이 지내는 분이라서 나는 따지듯 수화기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
“뭐라고요? 아무리 나이 드신 분들만 참석하는 삼일기도회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그렇지 장 목사의 설교를 중개할 수 있어요? 당장은 재미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그분들의 영성에 손해가 갈 것 같은데, 아닌가요?”
이 목사의 생각은 이런 것 같았다. 주로 할머니들이 대상인 삼일기도회에서 말씀의 깊이에 들어가 봐야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오히려 졸기만 하니까 그것보다는 장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게 그래도 낫지 않느냐는 말이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는 대학생인 내 딸에게도 들은 적이 있다. “아빠 설교를 듣고 있으면 졸려요. 좀 화끈하게 해보세요.” 그런데 나는 내 설교가 졸리다 말을 들었어도 하나도 서운하지 않다. 엉뚱한 것을 전하는 설교보다는 졸리게 하는 설교가 차라리 낫다는 게 내 지론이니까 말이다.
장경동 목사와 연관된 또 하나의 작은 사연이 있다. 작년 가을 어느 주일엔가 우리 신자가 후배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함께 예배를 드린 적이 있다. 서양미술을 전공한 그 후배라는 여자 분은 현재 대학원에 다니면서 그 대학의 기숙사 조교로 활동하고 있었다. 성품이 맑고 지성적이고 신앙이 돈독할 뿐만 아니라 인상도 좋은, 그야말로 나무랄 데가 하나도 없는 분이었다. 원래 그분은 매주일 결혼할 남자가 살고 있는 대전에 가서 장경동 목사가 시무하는 대전중문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장경동 목사에 대한 그녀의 칭찬을 듣고 나는 좀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나는 기독교 TV 방송으로 장경동 목사의 설교를 몇 번 시청하고 ‘별로!’라는 인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당혹감이나 딜레마는 내가 지금껏 설교비평의 대상으로 삼았던 분들과 그 청중들 사이의 관계를 지켜볼 때마다 경험했던 것이다. 본인들은 은혜 받는다고 저렇게 아우성인데, 제삼자인 내가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 사이에 끼어드는 것은 첫사랑에 깊이 빠져있는 젊은 두 남녀에게 “꿈 깨라!”면서 툭툭 치고 다니는 것처럼 좀 생뚱맞은 행동 아닌가. 혹은 성령을 거스르는 잘못은 아닌지.
웃음 뒤 남는 게 없는 설교…졸린 설교가 낫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이런 논리는 내가 자주 들어온 것이다. 작년 연말 의기투합하는 몇 사람들이 송년모임을 겸해서, 한국교회와 대중설교자들의 문제점을 분석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대화 시간을 가졌다.
오랫동안 대학교에서 생물학을 가르치신 양 아무개 장로 한 분이 지나가는 투로 (혹은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었던 생각인지 모르지만) 이런 말씀을 내게 하셨다. “역사의식과 사회의식 없이 단순하게 교회에서 은혜 받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위로받고 자기 일상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설교와 목회라고 한다면 그런 대중적인 설교자들의 역할도 크지 않느냐?”
양 장로는 젊어서부터 진보적 신학의 영향을 받아 역사와 사회의식이 또렷한 분이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보수적인 정통 교회에 대한 연민과 관심이 많으신 분이다. 정통 교회에 안주하고 있는 듯한 자신의 모습에 약간 불편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역시 소위 ‘체제 내에서의 변혁론’에 무게를 두는 온건한 성품의 소유자이셨다.
이런 점에서도 대화의 소통이 가능한 분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날 그분이 제기한 질문이 무슨 뜻인지 그 속내를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세상살이에 지친 소시민들을 위로해주는 게 기독교의 역할에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상적이고 거창한 주제보다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관심에 기울이고 살아간다. 좋은 사람 만나서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서 울고, 애기 낳고, 집 장만하고, 잘난 척 하기도 하고, 기가 죽기도 한다. TV 멜로드라마에 취하고, 동창들 만나서 잡담하고, 그렇고 그런 일상에 빠져서 알콩달콩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과 그런 삶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노래하지 않는가?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역시 대개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통일·생태보전·민주화·여성주의·세계평화·경제정의·노동해방 같은 주제나, 하나님나라의 역사적 지평을 설교함으로써 ‘졸게’ 만드는 것보다는 ‘웃음보따리’를 안겨줌으로써 그들을 교회 공동체에 붙들어두는 게 기독교 신앙에 대한 관심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이 시대에 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유일한 대안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미시담론의 세계관은 교회의 설교 현장만이 아니라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199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 사회 안에서 가파르게 상승 곡선을 타고 있다. 1994년에 나온 최영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이런 사회적 현상을 극적으로 보여준 하나의 생기(生起)였다. 소위 386세대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최영미는 이 시집의 표제어로 삼은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이렇게 냉소적으로 노래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중략>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렇다. 사회·역사·우주가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하나님나라와 평화와 그의 통치가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이게 곧 우리 시대의 정신이고 알맹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거시담론과 미시담론의 철지난 논쟁에 다시 불을 붙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런 담론이 우리에게 무의미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두 담론은 한쪽이 어느 한쪽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실체에 대한 다른 관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개인들이 사회·민족·인류·우주의 문제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소박하게 자기의 삶에 충실하고 거기서 기쁨을 누리는 것 자체를 비난하거나 무시하거나, 또는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나라도 기본적으로 ‘밥상 공동체’라는 일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작고 개인적인 일상에 초점을 둔 설교를 귀하게 생각한다.
성서 해석 없고 매우 공격적 접근
그러나 문제는 그 일상에 접근하는 태도에 있다. 개인의 일상을 참된 생명의 능력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을 잡담 수준으로 타락시켜 결국 생명의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가벼움의 극치를 추수(追隨)하는 이 시대의 요청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추수(秋收)해야 할 할 설교자들이 따를 길은 결코 아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장경동 목사를 비롯한 적지 않은 대중 설교 명망가들이 혼란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본인들은 청중들의 영성을 살린다고 주장하고, 또한 그렇게 확신하고 있겠지만 실제로는 축소·왜곡하거나 손상시키고 있다는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내 주장의 근거를 간추려서 설명한다면 두 가지다. 하나는 이들이 성서를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들의 설교가 매우 공격적이라는 점이다. 설교자가 성서를 정상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채 사람의 영을 살릴 수 없으며, 청중에게 공격적으로 접근하면서 그들의 영을 살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맞물려 있다. 말씀의 해석이 없으면 영성이 빈곤해질 수밖에 없으며, 빈곤한 영성의 설교자들은 끊임없이 청중들을 공격함으로써 그 영성의 빈곤이 몰고 오는 위기를 망각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의 악순환으로 인해서 청중들은 물론이고, 그런 설교를 제공하는 설교자의 영성은 급기야 심리학적 메커니즘의 차원으로 떨어져버리고 만다. 우리의 생각과 예상을 뛰어넘는 생명의 영인 성령이 예민하게 작동해야 하는 바로 그 영역에 사람의 심리적 현상과 그 치료법만 무성하다는 말이다.
이 생명의 영이 살아 숨 쉬지 않는다면 비록 화려한 교회당과 최고급의 멀티미디어를 통한 열린예배와 요란한 신앙 언어의 성찬과 자기 몸을 불사르는 헌신과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면 이런 현상은 결국 ‘허무주의 영성’이다. 많은 설교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은 이런 현상을 어렴풋하게는 의식하고 있겠지만 정확한 실체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이 실체에 대한 해명이 바로 오늘 나에게 주어진 숙제다.
장경동 목사(이하 ‘장 목사’)는 자신이 ‘신바람’을 일으키는 설교를 한다고 생각하던데, 내가 보기에 그의 설교에는 청중들과 강사의 신바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말씀과 성령의 신바람은 별로 없다. 최영미가 노래하는 대로 잔치가 끝나서 먹을 게 없다면 그런대로 수긍이 간다. 하지만 잔치가 한참 진행되는 마당인데도 먹을 게 없다. 먹을 게 많았다가 손님이 넘쳐서 떨어진 상황이라도 참을 만하지만, 아예 처음부터 먹을 게 없었다는 이 사실은 비극이다. 그런데 거기에 모인 손님들이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쫄쫄 굶으면서도 배불리 먹은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이 사실은 차라리 희극이다.
이런 정도만 암시를 해도 장 목사는 그 실상을 충분히 눈치 챘을 것이다. 장 목사처럼 최소한도라도 자기를 성찰해나가는 분은 기존의 부흥강사들처럼 자기 착각에 완전히 빠지지 않기 때문에 비록 청중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하고 있지만 자신의 설교가 지나치게 빈곤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태가 노출되는 걸 막아보려고 장 목사는 본인의 힘에 부칠 정도로 애를 쓰고 있을 뿐이다. 나는 왜 장 목사의 설교에서 먹을 만한 말씀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CBS TV 방송국에서 방영되는 장 목사의 설교를 여러 번 시청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좀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도서출판 누가에서 출판한 장경동 목사의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이다>라는 책과 오디오 테이프 1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라>에 실려 있는 네 편의 설교(‘기도와 감사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라’, ‘외식을 걷어내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라’,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라’, ‘권능을 붙잡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라’), 대전중문침례교회에서 행한 최근의 설교 다섯 편(2004년 11월 28일~12월 26일, ‘타력’, ‘귀신’, ‘성령’, ‘원망’, ‘삼일’)을 꼼꼼히 읽거나 들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라>는 안산의 모 교회에서 행한 부흥집회 설교이고, 홈페이지에 실린 설교는 주일공동예배 설교다. 부흥집회에서는 그런 대중 집회 성격상 어쩔 수 없이 ‘오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서 주일공동예배에서는 상당히 자제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런 차이는 보기에 따라서 중요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다.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에서 약간 절제하는 포즈를 취했다고 해서 그의 설교에 내재해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에 기본이 잡혀 있다고 한다면 대중 집회에서 보이는 거친 부분들은 크게 문제 삼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설교가 먹을 게 없는 잔치인 이유는 성서말씀에 대한 해석이 전혀 없다는 데에 있다. ‘타력’(엡 2:8~10)이라는 설교에서 장 목사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에베소서의 본문을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 타력신앙이라고 설명했다.
1.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타력입니다. 2. 기도하는 것도 타력입니다. 3. 믿음도 타력입니다. 4. 하나님을 아는 것도 타력입니다. 5. 우리의 구원도 타력입니다. 6. 우리의 의로움도 타력입니다. 그는 결론적으로 타력신앙이 예정론에 대한 오해로 받아들여지면 안 된다고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평신도들은 이런 정도의 내용을 장 목사가 걸쭉한 입담으로 풀어나간다면 상당히 은혜가 있는 설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설교는 성서의 세계에 들어가는 노력은 접어두고 본문에서 제목만 취한 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나열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전형적인 ‘나열식 설교’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기독교 사상> 2004년 5월호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 성서를 해석하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초기 기독교 당시에 이해된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좀더 세밀하게 추적하고 살피면서 오늘의 삶에서 이 은총이 어떤 의미인지 심층적으로 해명해야 할 것이다.
요나 이야기인 ‘삼일’((욘 3:6~9)이라는 설교에서 장 목사는 다음과 같은 신앙적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끝까지 이루십니다. 2. 하나님은 죄인도 사랑하십니다. 3.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4. 한 사람의 영향력이 나라를 살립니다. 그는 이 네 번째 교훈을 매우 강조하면서 ‘버터플라이 이펙트’(나비효과)에 대해서 감동적으로 설명했다.
요나의 기본 주제가 우리의 생각과 의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네 가지로 나열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차라리 첫 번째 항목인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끝까지 이루십니다”에만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만약 장 목사의 영성이 심층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면 이 한 가지 주제만으로도 선포해야 할 내용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별로 연결되지 않는 소주제를 산만하게 나열한 채 그것을 특유의 말재주로 밀고나감으로써 결국 말씀과 그 해석을 놓친 것이다. 나머지 설교들도 대부분이 이런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더 인용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장 목사만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목사들이 성서말씀을 해석하지 않고 단지 나열한다는 점에서 장 목사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런지 장 목사는 툭하면 “당신은 어떤데?” 하고 따지고 든다.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도 역시 별 수 없더라는 주장이다. 성서의 깊이를 파고들지 못할 바에는 자기처럼 청중들을 재미있게 하는 게 오히려 낫다는 말이다.
이 논리는 부분적으로는 옳지만, 근본적으로는 옳지 못하다. 장 목사 특유의 어법을 따라서 말한다면 “옳지 못한 것은 옳지 못한 것이지 다른 사람들이 옳지 못하다고 해서 자기의 옳지 못함이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는 말씀의 깊이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겪을 수밖에 없는 설교의 상투성을 벗어나기 위해서 청중을 감정적으로 다그침으로서 오히려 큰 문제를 일으킬 소지를 안고 있다.
장 목사에게는 바로 이게 문제다. 세계와 삶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어쩌다가 벼락부자가 된 졸부처럼 말씀에 대한 해석 능력 없이 청중을 제압할 수 있는 카리스마만을 확보한 장 목사의 설교에는 그런 능력이 없는 설교자의 설교보다 문제를 일으킬 위험성이 훨씬 높다. 역설적으로 그의 장점이 복음 앞에서는 단점이 된다는 말이다. 이 위험성이 곧 장 목사의 설교에 내재해 있는 공격성인데, 군중은 이런 공격적인 설교에 아주 쉽게 약점을 보이는 법이다.
설교의 공격성- 툭하면 “무식하다”
어떤 독자들은 장 목사의 설교가 공격적이라는 필자의 진단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평신도들의 눈에는 잘 드러나지 않겠지만, 고도의 해학과 웃음을 전면에 내세운 그의 설교 내면에는 공격성이 도사리고 있다. 장 목사는 모르긴 해도 상담학이나 심리학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공부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심리적인 약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그 약점을 파고든다. 바로 이것이다.
청중들이 그의 설교에 매료되는 이유는 단순히 웃긴다는 사실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심리적 약점을 정확하게 짚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적절하게 해소시켜준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서 공격적이라는 말은 그렇게 나쁜 의미만 있는 건 아니다. 한 인간의 심리적인 실존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그것을 정확하게 잡아내서 치료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인간 구원 문제에서 어느 정도 공헌하고 있는 셈인데, 이런 작업을 매우 공격적으로 끌어가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적절하게 치료하면 됐지 무엇이 문제인가? 만약 그런 치료가 핵심이라고 한다면 사이비 이단들의 접근 방식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의 종교 활동에도 나름의 인간 치유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문화 현상은 일정한 구원론적 정당성을 담보하고 있다.
한일 월드컵 당시 수십만 명의 ‘붉은 악마’들이 집단적으로 벌였던 거리 응원도 일종의 대중치료이며, 그런 점에서 구원 현상이다. 그뿐이 아니다. 교육학과 심층심리학에서 이용되고 있는 ‘음악 치료’나, 요즘 동네마다 들어서 있는 기 치료, 단 훈련도 역시 그런 토대에서 운영되고 있다. 청중들이 이런 걸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탓인지 많은 교회들이 영어 회화도 가르치고, 노숙자에게 밥도 주고, 탤런트를 불러다가 간증도 듣고, 의료 활동도 하고, 사회봉사도 하는 것 같다. 그것 자체가 바로 교회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교회도 있고, 본질은 아니지만 선교를 위해서 그런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대목에서 좀 더 심사숙고해야 한다. 하나님나라를 선포해야 할 교회가 과연 그런 일에 신경을 쓸 시간이나 물적 토대의 여유가 있는가를, 또는 그런 행태들이 자기의 본질에 대한 구도자적 치열성의 부재로 인해서 벌어진 ‘한눈팔기’는 아닌지를 말이다. 나는 여기서 그런 주변적인 일을 일절 거부하라는 게 아니라 그런 행위들이 복음의 근본을 흐리게 하거나 해체할 수도 있으며, 이로 인해서 교회가 자칫 사이비 구원론에 빠져버릴 수 있다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뿐이다.
지나가는 길에 한마디 한다면, 한국교회는 구원론에 대한 공부가 시급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나라·창조·재림·종말·성만찬 등등의 교의와 예전 속에서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가 간직하고 열어온 그 구원의 내용과 미래를 실질적인 차원에서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고 있는 한 우리는 구원론적 공동체로서의 자리를 유지해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정통 교회 안에도 유사 구원론이 얼마나 팽배한지 웬만큼 생각이 있는 분들은 알고 있으리라. 이제 장 목사의 설교에 내재해 있는 그 공격성이 무엇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잠시 살펴보자.
장 목사는 “무식하다!”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자주 사용한다. 청중들이 성서 구절을 빨리 찾지 못하거나 간단한 신앙적인 질문에 대해서 바르게 대답하지 못할 때 대놓고 무식하다고 외친다. 물론 분위기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서 그런 멘트를 하는 것뿐이라고 설명하겠지만, 그리고 그런 가학적인 말을 듣고도 청중들이 재미있어 한다는 게 사실이지만, 아무리 대중 집회라는 사실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어쩌다가 한두 번이면 몰라도 거의 습관적으로 그렇게 표현한다는 것은 그 집회를 시장 바닥의 약장사만도 못하게 만드는 행위다.
무식하다는 말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청중을 비하시키는 언급은 훨씬 심각하다. 그는 잘 나가다가 갑자기 엄숙한 자세로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거야!”라든지 “이혼하지 말란 말이야! 그냥 참고 살아!” 하고 호통 친다. 아마 정서적으로 불안하거나 주체적이지 못한 사람은 장 목사의 고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그것마저 농담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최소한 자신의 삶에 책임적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무모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쪽에 속한 사람이나 저쪽에 속한 사람이나 공격받았다는 사실은 매한가지이다.
이렇게 겉으로 공격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은 확인이 가능하니까 청중들이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경험을 청중들에게 일반화하는 것은 그것의 음모가 숨어있기 때문에 청중들이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당하게 된다. 그는 고등학교 때 은혜를 받고 성령을 체험했는데, 기쁨이 너무 큰 탓인지 헌금봉투의 제목을 혈서로 썼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자극적인 사건을 공개하는 모습을 보면, 간혹 버스에 올라와서 방금 교도소에서 10년 살다나왔다면서 먹고 살도록 물건 좀 사달라고 윽박지르는 자해공갈단의 협박 장면과 비슷해 보인다.
자기 자랑 열변
장 목사는 지금까지 거금의 건축 헌금을 열두 번 했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오른 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자주 인용했을 장 목사가 설교 강단에서는 자신의 헌금행위를 동네방네 선전한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장 목사는 집을 사기 위해서 8000만 원짜리 적금을 붓다가 마지막 번을 넣기 바로 직전에 이 돈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음성을 듣고 바쳤다고 한다.
그것도 칭찬받을 만하지만 그렇게 온 천하에 알릴 일은 전혀 아니다. 이런 방식의 접근은 장 목사의 설교에 거의 구조적으로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인용이 필요 없겠다. 물론 그는 신자들의 신앙에 자극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라고 둘러대겠지만, 그게 바로 청중들의 약점을 파고드는 공격적 설교이며, 그로 인해서 청중들의 영성이 파괴된다는 사실을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다. 혹시 그는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연출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만약 그런 식이라면 나도 할 말은 참으로 많다. 눈물 날만한 일도, 감격스러운 일들도 많다. 조금만 과장하면 청중들이 은혜 받을 만한 일들이 제법 된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모두 ‘나’라는 사람의 특별한 삶과 조건 안에서 일어난 것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까지 일반화할 수는 없다. 특히 설교라는 것은 자기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전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가능한대로 간증 유의 이야기는 삼가야 한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사건과 경험들을 거침없이 쏟아낸다는 것은 아무리 좋은 의도였다고 하더라도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치기보다는 상처를 줄 뿐이다. 만약 청중들이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은혜를 받는다면 그것은 곧 영성이 망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장 목사는 바로 이 대목에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부담감을 주어서라도 은혜를 받게 해야 한다.” 그는 왜 구원과 은혜를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에 맡기지 못하고 자신이 감당하려는 것일까?
사실 장 목사만 유난히 이렇게 공격적으로 설교하는 건 아니다. 필자가 CBS 라디오로 듣고 있는 설교 중에서 70~80%가 공격적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정신과 전문의의 진단이 필요하겠지만 필자의 짧은 생각이라도 한마디 하자. 표면적으로만 보면 청중을 설득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작용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 실존 자체가 바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게 이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쁜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자기에게 집중해 있는 인간의 말은 늘 상대방에게 공격적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어떤 여자가 동창회에 나가서 자기 남편을 자랑했다면 그런 부분에 약점이 있는 친구는 시험에 든다. 또는 장애인을 돌본 이야기나 봉사활동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어떤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의 말은 아무리 선의라고 하더라도 늘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설교자는 내놓고 청중들을 자기의 믿음까지 끌어올리려는 의도가 강하기 때문에 훨씬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게 마련이다. 이런 대목에서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영성의 대가들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나 토마스 아 캠피스 같은 이들의 글을 읽으라고 권면하고 싶다.
공격성 설교가 받아들여지는 이유
위에서 설교자의 공격성에 대해서 짚었는데, 이제는 입장을 바꾸어 그런 설교를 듣는 청중의 문제가 무엇인지 짚어보자. 도대체 한국교회의 청중들에게는 왜 이런 직, 간접의 공격적인 설교가 먹히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제시될 수 있긴 하지만 한국사람 일반의 정서가 바로 여기에 한 몫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한(韓)민족은 바로 한(恨)민족이라고 하는데, 그 한의 정서가 승화하거나 계몽되지 못한 채, 또한 복음 선포의 도구라는 미명으로 우리 삶의 합리성과 주체성을 파괴하고 만 것 같다.
요즘 우리의 대중문화계에 ‘신파’ 신드롬이 일고 있다고 한다. ‘돈에 속고, 사랑에 우는’ 심순애의 신파가 21세기 오늘 우리의 삶에도 뿌리 깊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대박을 터뜨린 장윤정 씨의 ‘어머나’라는 트로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음악에서는 유치한 가사로 웃기는 신파가 유행인 반면에, 영상매체에서는 비현실적인 상황 전개로 울리는 신파가 주가를 올리고 있다.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 ‘12월의 열대야’,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불치병을 앓다가 죽는다.
배국만 평론가는 “2004년 한국 드라마는 새해 벽두 ‘천국의 계단’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죽음으로 연말을 마무리했다”고 꼬집었다. 이런 울리는 신파는 2005년에도 계속된다. ‘봄날’의 여주인공은 실어증에 걸렸고, ‘슬픈 연가’의 주인공은 시각 장애를 가진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다.(<한겨FP 21>, 1월 11일자 참조).
대중들이 이런 신파조의 대중문화에 열광하는 것은 비단 우리만의 현상은 아닌 것 같다. 소위 한류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겨울연가’의 배용준 씨가 일본의 아주머니들에게 백마 탄 왕자로 대우받는다는 사실을 보면 일본 청중들의 정서도 우리와 별반 다른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참으로 신기했다. 탄탄한 인문학적 토대에서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세계를 선구적으로 열어가고 있는 미야자키 같은 사람이 크게 대접받는 일본에서 콘텐츠는 거의 없이 단순한 이미지만으로 꾸며진 욘사마(배용준의 일본식 발음)가 그에 못잖은 찬사를, 열광의 강도만으로 치자면 훨씬 뜨거운 찬사를 받는다는 게 말이다.
우리나라 극장에서 개봉된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비롯해서 미야자키의 몇몇 애니메이션 작품을 이번 겨울에 필자도 보았다. 만화도 인간·세계·역사를 그렇게 심층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그의 작품에서 충격적으로 느꼈다. 어쨌든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세계의 대표자들인 미야자키와 욘사마가 동거한다는 사실을 보면서 필자는 이미지만으로도 대단한 대중적 성과를 올릴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에 대한 가치론적 판단은 논외로 치고 말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한(恨)·감성·이미지 중심의 목회와 설교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시류에 영합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개운치 않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본류와 너무나 멀어지는 것 같아서 불안한 생각까지 든다. 영화, 음악, 예술, 사업의 영역에서는 이미지로만 승부를 건다고 해도 크게 문제는 아니지만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 행위는 비록 신파조의 정서적 접근이 청중들에게 먹힌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벗어나야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우리의 설교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인간의 심리와 정서가 아니라 그 인간의 심리와 정서가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설교자들이 이 맥락을 예민하게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거나 웃음보를 터뜨리게 하는 방식으로라도 청중들에게서 어떤 열정적인 반응을 얻어내려고 한다. 대중의 신파적 기질에 영합하는 설교에 길들여지면 결국 설교자들은 청중들을 계속해서 그런 심리적 방식으로 다루려고 하고, 청중들의 영성은 성서의 세계가 아니라 이미지로 조작된 열정에 의해 지배당할 것이다. 그런 현상의 가장 적나라한 상태가 곧 사이비 이단이나 유사 집단에서 발생하는 집단적 ‘세뇌’인데, 이런 세뇌는 결국 공격적인 목회와 설교에 기인한다.
집단적 노이로제-기계적인 반응 연출
장 목사는 주일 공동예배의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두 가지 세리모니를 유도했다. 하나는 청중들끼리 인사를 나누게 하는 것이다. 이런 장면은 다른 교회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고, 일종의 코이노니아 의식이라는 점에서 그런대로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또 하나의 세리모니는 청중들의 두 손을 가슴에 모으게 한 후 이렇게 주문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이다.” 매 주일 대전중문침례교회 신자들은 설교를 듣기 전에 이 구절을 함께 외친다.
설교를 하기 전에 신자들끼리 인사 나누는 것도 좀 의도적인 느낌이 드는데, 이제는 한술 더 떠서 흡사 대학생들 엠티나 신입사원의 극기 훈련 때 반복해서 외치는 슬로건처럼 이런 구절을 신자들이 외친다는 건 놀라웠다. 어떤 TV 프로그램을 보면 초청 인사가 한마디 할 때마다 주부들을 중심으로 한 청중들이 인형이나 로봇처럼 ‘아!’라거나 ‘우!’라는 탄성을 거의 기계적으로 내지르는 경우가 있다.
집단적 노이로제 현상을 방불케 하는 이런 행태가 바로 장 목사를 비롯해서 적지 않는 설교자들의 설교 현장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은혜를 받으면 좋은 것 아닌가,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예배의 근본이 사람들의 ‘은혜’에 놓인 게 아니라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교회의 예배와 설교는 끊임없이 ‘열린 음악회’나 ‘개그 콘서트’를 닮아갈 것이다.
이미 우리 한국교회 안에 이런 조짐은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장 목사만이 아니라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 중에 청중들에게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치도록 하는 것도 역시 작위적이다. 이는 흡사 피라미드식으로 판매하는 회사의 직원들이 “나는 할 수 있다”는 구호를 반복적으로 제창하면서 어떤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과 비슷하다. 도대체 설교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사람들을 들들 볶으면서 약을 팔아야만 하는 것일까? 교회의 청중들을 ‘오빠 부대’로 만들 생각인가? 말씀과 영을 사람들의 감정으로 대체할 생각인가?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얼마나 이성적인데 열정적이고 희생적인 목회와 설교 현상을 그렇게 매도하는가? 요즘은 ‘아이큐’(지성)가 아니라 ‘이큐’(감성)의 시대라는 걸 모르는가? 칸트가 말한 대로 종교는 순수이성이 아니라 실천이성의 영역이며, 쉴라이에르마허가 말한 대로 절대의존 ‘감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기독교 신앙의 신비가 바로 이런 열정에 담겨있지 않는가?
그것이 곧 기독교 영성이 아닌가? 기독교 신앙이 죽어가던 유럽의 19세기에 ‘각성운동’으로 인해서 기독교 신앙이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어떤 방식이든지 신자들의 신앙을 고취시키고 교회 운동의 추동력을 확보하는 게 오늘 한국교회에 급선무 아닌가? 필자는 이 모든 반론에 대해서 또 다른 반론을 제시할 수 있지만 이 자리에서는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겠다. 왜냐하면 이런 반론은 필자가 말하려는 주제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무의미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나 신앙에서 웃음과 눈물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은 어떤 놀라운 세계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따라와야 할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 추운 겨울철에 자전거를 타면서 그 추위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서 노래를 부르고 싶을 때가 많다. 얼마 전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관람하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이런 내 삶의 모든 부분에 생명의 영으로 임재하는 성령의 신비 앞에서 황홀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도 잦다.
필자가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희로애락의 감정 자체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을 의도적으로 조작해나가는 행태를 경계하는 것이다. 웃고 울리는 감정의 바다로 몰입시킨 다음에 상투적이고 조잡한 설교를 주입시키는 인위적인 방법을 쓰지 말고,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성서의 세계를 직면하게 함으로써 신자들이 하나님나라의 깊이와 그 영에 사로잡히게 하라는 말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 하고 말할 분이 있겠지만 이건 전혀 다른 사태다. 전자의 경우에는 복음의 내용이 형해화(形骸化)하는 대신 인간의 열정만 무성하게 되는 반면에, 후자의 경우에는 복음이 (미래를 향해, 또는 진리를 향해, 또는 세상을 향해) 열려 있고, 또는 심화하는 대신 인간의 감정은 거기에 철저하게 의존될 뿐이다.
중요한 것을 무시, 쓸데없는 것을 중요하게
장 목사의 설교에 복음의 근본이 아니라 설교자와 청중의 열정만 범람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교회력을 무시하고 있다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교회력의 시작이자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대림절(2004년 11월 28일~12월 19일) 중에 장 목사는 대림절 설교를 하지 않았다. 대림절 첫 주일은 ‘타력’, 둘째 주일은 ‘귀신’, 셋째 주일은 ‘성령2’, 넷째 주일은 ‘원망’이었다. 물론 어쩌다 일어난 일이라고 대충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서와 복음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교회력을 놓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교회의 역사가 자기의 개인적인 신앙 경험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사실을 너무도 확실하고 절실하게 인식하고 때문이다. 대림절을 외면한 장 목사는 자신의 신앙적 경험과 열정이 교회력을 넘어선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연말에 너무 바빠서 ‘아차!’ 했을 뿐이겠지. 그러나 내가 보기에 바로 이런 소홀함이 가능한 그의 신앙 체계야말로 생명의 영이 아니라 인간의 열정이 중심으로 작동되는 한 전형이다. 물론 우리들도 모두 이렇게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할 때가 많기는 하다.
교회력을 무시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가 주일공동예배 때 행하는 설교 제목에서도 그의 그런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설교제목은 한결같이 한 단어로 구성된다. 진선미, 이십년, 기도, 목숨, 두 사람, 에베소, 의미, 고향, 순교, 관계, 생사, 새일, 전쟁, 질병, 기본, 구역, 증세, 구원, 일 등등, 모든 설교 제목이 이런 식이다. 적절한 설교 제목을 잡기 위해 설교자들이 진땀을 흘린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장 목사가 이런 문제를 이렇듯 무사려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설교가 일종의 ‘테크닉’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내가 굳이 이렇게 사소한 것 까지 딴죽 걸듯이 지적하는 이유는 자신의 주관적 신앙 열정,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오는 열정이 그를 신앙의 중심부가 아니라 종속변수인 인간의 심리와 감정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설교에는 꼭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도 될 것은 차고 넘친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곧 허무주의 영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도 장 목사의 설교가 한국교회와 사회에 놀라운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만은 높이 사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가 확보한 대중성 자체는 기독교 역사의 바른 발전과 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문제는 내가 여기서 구구절절이 토를 달 필요도 없다. 사람들의 열정만 가득하고 참된 생명의 영이 실종되어 있는 영성은 하나님나라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나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예컨대 한국 사회가 장 목사의 설교를 기독교 설교의 정형으로 착각한다면, 말씀과 영성의 깊이를 진지하게 추구하며 목회와 설교에 진력하고 있는 많은 젊은 목회자들의 자리는 점차 좁아들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작년 서울 시청 앞에서 반공, 친미 기도회를 열어 의식 있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기독교 극우 인사들의 행태나 인간의 열정에만 끝없이 집착하고 있는 장 목사의 공허한 설교는 약간 다른 옷을 입었을 뿐이지 기독교의 본질에 상처를 낸다는 점에서는 오십보백보다.
나는 여기서 장 목사의 설교만을 도마 위에 올리려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모두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 장 목사의 설교를 이렇게 비평한다는 것은 누워서 침 뱉는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땅 구석구석에 숨어서 생명의 영에 사로잡힌 채 큰 소리 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용맹 정진하는 젊은 설교자들 중에서 혹시라도 장 목사가 일으키고 있는 이런 신바람 설교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들이 있을까 염려되어 이렇게 공론화했을 뿐이다. 젊은 설교자들이여, 청중을 다룰 줄 아는 기술에 ‘혹’하지 말고, 다층적 영성의 내공을 쌓는 일에 ‘힘’쓰시라. 설교자들이 자기도 설득(구원)시키지 못한 채 남을 설득하려고 덤벼드는 것보다 더 큰 어리석음은 없으니 말이다.
정용섭 / 샘터교회 목사·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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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돈?…'내려놓음' 없는 새찬송가 출판 다툼
양봉식 sunyang@amennews.com
분당에 사는 류화선 집사(분당교회)는 4월 6일 종로에 갔다가 찬송가를 사러 기독교서점에 들렀다. 류집사는 일반출판사가 출판한 새찬송가를 사려고 했지만 서점직원으로부터 “우리는 그 출판사의 찬송가를 판매하지 않는다. 예장출판사와 기독서회가 출판하는 찬송가만 판매한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류 집사는 “서점의 이런 행태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이왕에 글씨가 크고 읽기 좋은 출판사의 찬송가를 사고 싶었는데 서점에서 독자들을 외면하는 것 같아 서운하다”고 말했다.
찬송가 공회는 <21세기 새찬송가> 출판과 관련, 예장출판사와 대한기독교서회에 3월 28일 출판계약해지를 통고한 가운데 찬송가 출판을 둘러싸고 기독 일반출판사와 예장출판사, 대한기독교서회 간의 출판을 둘러싼 논쟁이 심화되고 있다. 급기야 대한기독교서회가 운영하는 종로 5가 서점에는 두 출판사가 발행한 찬송가 외에 기독 일반출판사가 발행한 찬송가는 판매하지 않는 등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찬송가 출판을 둘러싼 출판사간의 다툼의 피해가 성도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번 찬송가 출판 사태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8백만명이 넘는 성도들이 찬송가는 물론 합본으로 된 성경책을 구입할 것을 예상하면 그 액수는 천문학적인 숫자가 된다. 그런 황금알을 낳는 찬송가 출판시장을 예장출판사와 기독서회가 독점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난센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익을 추구하는 일반출판사에게 성물을 줄 수 없다’는 두 출판사의 논리는 억지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더욱 가관인 것은 찬송가공회의 어정쩡한 태도다. 두 출판사에게만 출판권을 주고, 일반출판사는 두 출판사로부터 반제품(제본되지 않은 채 인쇄된 찬송가)을 받아서 출판하라고 한 것 자체가 가격 비교에서 전혀 맞지 않는 계약이었다. 계약부터 불합리하고 애매모호한 조항과 문구로 문제소지가 다분히 있는 출판계약을 한 것이다. 더구나 이중 계약을 의심케 했던 행보들이 찬송가 공회의 진정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뒤늦게 공회가 이중계약은 없다고 밝히고, 그동안 두 출판사가 계약위반을 했기 때문에 출판해지 통고를 했지만 결코 매끄러운 해결책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새찬송가위원회와 개편찬송가위원회로 구성된 찬송가 공회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이익을 두 출판사만 독점하지 않겠다는 결자해지가 없다면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행정적 구속력이 전혀 없는 교단장협의회까지 가세해서 감사 운운하는 꼴이 연출되는 등 웃지 못할 행태를 보이는 상황을 보면, 이해득실에 따른 진흙탕 싸움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대전의 허모 목사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를 바꿀 이유가 전혀 없을뿐더러 그 예산을 다른 곳에 사용할 생각이다”며 “새찬송가의 발행은 결국 돈을 벌겠다는 이면의 속셈을 드러낸 일이다”며 재물과 관련한 이익추구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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