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운철 kofkings@amennews.com
부활주일을 앞두고 그와 관련된 설교 모음을 준비했습니다. 지난 자료 중에서 몇 편을 선정, 핵심 내용을 요약했습니다. 부활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도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부활절: 부활절의 원래 명칭은 유월절을 뜻하는 ‘파스카’라는 히브리말에서 왔다. 죽음의 노예상태에서 출애굽의 해방을 이루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죽음의 어둠을 이기고 승리하신 주님과 더불어 제자들도 다시 일어났던 절기다. 이 절기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오랜 절기이며 또 교회력의 근원이다.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고 생기에 찬 교회를 일구어가는 계절로서, 교회력의 색깔은 흰색이다.
①제목: 부활에의 소망
본문: 행 10:34-43, 고전 15:19-26, 요 20:1-18
<석의적 접근>
사도행전 10:34-43: 본문은 고넬료와 가이사랴에 있는 사람들에게 행한 베드로의 설교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 베드로가 행한 설교와 좋은 비교를 이루고 있다.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이방인인 고넬료의 신앙을 온전하게 유지시키도록 예수의 행적을 압축적으로 가르쳤다. 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본 구절에서는 부활 사건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즉 예수께서 혼자 스스로 일어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베드로가 위의 본문과 같은 내용의 설교를 열 차례에 걸쳐 행했던 점을 미루어보아 부활이 초대 기독교에 있어서 선포의 주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시지 않고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했던 소수의 선택된 사람에게만 나타났다는 점이다.
고린도전서 15:19-26: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서 부활의 시초요 보증임을 구약의 두 예를 들면서 밝히고 있다. 첫째의 예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는 것이다. 첫 열매라 함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수확한 이삭으로 성전에 바쳤던 수확물과 연관이 있다. 즉 첫 열매를 수확하면 곧이어 큰 추수가 오고 모든 곡식이 거두어지듯이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사실은 곧이어 모든 성도가 부활한다는 보증인 것이다. 둘째의 예는 사망과 생명에 있어서 전 인류의 머리인 아담과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의 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20:1-18: 본문에서는 예수 부활의 증거들을 기록하여 부활의 확실성을 나타내주고 있다. 먼저 한 여인이 부활을 증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은 무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달려와 제자들에게 예수의 시신이 도둑맞았다고 전한다. 누가복음 24:12에 의하면 베드로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였고, 본서는 요한이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달려갔으나 들어가지는 않았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빈 무덤과 수건이 세마포와 함께 있지 아니한 것만을 본 반면에 요한은 무덤에 들어가 ‘보고 믿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이야말로 독자로 하여금 예수 부활을 믿도록 하는 핵심구절이요 목표인 것이다. 이것이 또한 본서의 목적이기도 하다. 요한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는 데 있어서 물적 증거보다는 개인의 신앙 인격에 미친 영향을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설교 본문>
서론: 복음 전도자 토레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르켜 “기독교가 증거하는 것들을 굳게 지켜주는 견고한 요새”라고 하였다. 부활은 하나의 역사적 토대로서 기독교의 다른 모든 교리들이 이것을 기초로 하여 세워지며 이것으로 모든 의심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든지 아니 믿든지 이것은 개인의 신앙에 관련된 문제이나, 확실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며 또한 부활에 대한 성도들의 소망은 그 삶을 더욱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는 점이다.
정의: 부활이란 식물이 싹이 나고 다시 사는 자연 현상도 아니며, 진화나 발전 개념 또는 부화현상 같은 것도 아니다. 오직 옛것은 완전한 죽음에서 새롭게 살아나는 재창조의 역사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이천년전 이스라엘 지방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듯이 우리도 죽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믿는 일이다. 첫 아담 때문에 모든 인간이 죽었듯이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서 모든 성도가 살아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도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건이며 이를 믿는 것이 바로 부활에 대한 소망인 것이다.
동기부여: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위험 속에 살고 있다. 만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맹수와의 싸움, 화형 등 여러 순교적인 행위가 이해될 수 없다. 바울 또한 그가 자신을 부인하고 온갖 고난 속에서도 복음 전도 사역에 모든 열정을 바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소망은 성도들에게 모든 행위의 기초로 작용하는 근거였다. 이것이 없다면 모든 복음의 가르침은 쓸모없는 것이며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은 죄 가운데 있고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자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뒤에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소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주춧돌이라 할 수 있다.
방법론:
* 부활의 역사성을 믿고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
*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을 지킨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 깨어서 의를 행하고 근신한다.
* 부활의 증언자가 된다.
결과: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갖는 자는 먼저 고난을 이겨내는 인내와 담대함이 있다.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을 증거한 바울은 무수히도 많은 환란과 핍박을 받았지만 모든 어려움을 담대하게 맞이했다. 이는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는 인간다운 삶을 갖게 된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자는 내일을 준비한 줄 알며, 오늘 역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마지막으로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는 영화에 참여하게 된다. 마지막 성도의 부활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 모습과 같이 썩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②제목: 부활의 확실성과 우리의 소망
본문: 고린도전서 15:1-11
<본문 해설>
바울은 부활의 확실성을 세우는 데에 가장 중요한 부활의 역사성을 수신자인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알게 하려는 의도를 가진다. 이것은 부활은 초대교희의 선포의 핵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르침의 주요 요소이었음을 의미한다.
“내가 전한 복음”: 바울은 로마서 2:16에서 ‘내 복음’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의미한다. 이 말은 당시의 거짓 복음(갈 1:8)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고린도전서에 다시 “내가 전한 복음”이란 말을 사용하는데 이는 바울의 복음 이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울이 전하고 있음을 주지시킨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이며 복음서에서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구원인데 바울은 그 복음을 부활이라고 한다. 부활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첫째로 전한 것이었고 그 첫째 복음을 재확인한다.
“알게 하노니”: ‘그노리조’는 말로 알린다는 ‘앙겔로’와는 달리 전달하는 내용을 특별히 강조하는 동사로서 부활을 강조하려는 바울의 뜻이 나타나 있다. 바울이 알게 하는 부활은 말로 알려지는 내용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달아지는 확신이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사건을 경험하고도 믿지 못한 사람들이 만이 있었다. 보고 듣는다고 해서 반드시 믿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굳게 지키고”: 현재형으로 이미 받은 부활을 굳게 지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계획성이나 조직성이 없이 되는 대로 헛되이 믿어서는 안 된다. 부활의 신앙을 잘 지키면 이미 받은 구원도 계속 얻는다.
“내가 받은 것”: 바울이 주께 직접 받은 것인지 다른 사도들을 통해 받은 것인지의 양론이 있으나 주께 직접 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 말은 갈라디아서 1:12과 일치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것, 곧 속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한다. 이것은 받은 것만을 전하고 받지 않은 것은 전하지 않는 사도의 자세를 가리킨다.
“성경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성경의 예언의 성취이다. “성경대로”를 3절과 4절에 반복하여 부활이 자신의 감정에 의한 사건이나 사도들에 의하여 조작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른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살아나사”: ‘에게게르타이’는 현재완료형이다. 이 시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살아계시는 것을 표시하며 이 장에서 바울은 항상 현재완료형을 사용하고 있다. 특별히 수동태 직설법인 것은 부활이 성부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며 성자께서 그 영광에 함께 동참하신 것을 뜻한다.
“게바에게”: 5-8절의 나타나신 순서는 중요한 자료다.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데, 이때는 열한 제자였으나 ‘열두 제자’라는 말이 이미 고유명사화한 듯하다. 그리고 “오백여 형제에게”라는 말은 당시에 단지 부활의 환상을 보았을 뿐이라는 환상설을 반박하는 좋은 구절이며 ‘야고보’는 주의 형제 야고보로서 그가 그리스도의 공생애 중에는 믿지 않았으나 부활을 목격한 후 변화하여 믿게 되었을 것이다. 외경 히브리인 복음에도 그가 주의 형제 야고보임을 언급하고 있다. “모든 사도”는 열두 제자가 아닌 바나바, 실라 등을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 사도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마지막에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대면한 자신의 목격담을 기록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그의 생애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유산이나 조산을 뜻하는 낱말로 바울은 자신을 조산된 자같이 부족한 존재로 여겼다. 우리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헬라 사회에서도 부족한 자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관습적 용법이다.
“지극히 작은 자”: 바울이 그리스도 앞에서 낮아진 자신의 신분을 고백하는 말로서, 그의 겸비는 교회를 핍박한 자신의 전과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항상 신적인 부정 다음에 신적인 긍정이 따르는 법이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그랬고(사 6:5) 베드로도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에 그랬다(눅 5:8).
“하나님의 은혜”: 바울은 부활의 빛 아래서 자신의 사람됨과 수고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한다.
“내, 저희, 너희”: 부활의 역사성은 복음의 공통성을 제공한다. 바울이나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이나 복음을 받은 교회가 부활을 함께 전하고 함께 믿는 것이다.
<설교 본론>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 14:14)라는 욥의 질문 이후 계속된 의문과 질문은 부활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결론이었고 교회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많은 반론과 의심이 반복된 논쟁의 중심이었다. 부활에 대한 반론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개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도난설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간 뒤 그가 부활했다는 주장을 유포한 것이라는 가설이다. 그러나 무덤은 혼자서는 열 수 없는 돌문으로 닫혀 있고, 당시에 세계 최강이라고 자처하던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훔쳐갔다면 이것이야말로 기적이다. 둘째는 환상설이다. 마리아 등이 예수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부활을 열망하였기 때문에 환상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반기독자 르낭은 “부활은 히스테리증이 있는 보잘것없는 여자의 말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500명이 한꺼번에 부활을 목격하였다고 하는데 500명이 한꺼번에 환상을 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셋째는 가사설 혹은 기절설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는 것이다. 사실도 아닌 거짓을 사도들이 생명을 걸고 선포했다면 이것 또한 우스운 일이다. 이외에도 부활의 상징이나 의미는 인정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바울은 부활을 논하면서 고린도전서 15:14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니”라고 하였다.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의 기초요 죽음과 영생에 대한 해답이다. 그래서 불트만은 “기독교는 십자가에서가 아니라 부활에서 시작하였다”라고 하였다.
1. 부활은 성경의 성취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다. 일반적으로 죽은 자는 살지 못한다고 하지만 성경은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는 성경이 이미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호세아 6:2, 시편 16:10-11, 17:15-24, 이사야 53:10, 요나 2:10 등이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을 예언하시고 부활하셔서 말씀대로 성취됨을 증거하고 있다. 부활장인 이 장에서도 그리스도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믿음도 헛것이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리라(16절)고 하였다. 성경은 분명히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의 예언을 성취시킨 사건이었다.
2. 부활은 역사적 사건
성경은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말한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하여,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하는 풍습을 들어 형제들이 모두 다시 살게 되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질문하였다. 헬라 철학은 연혼의 불멸은 인정하지만 부활은 부정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부활을 부정하려는 여러 가지 학설들과 비판들이 있었지만 부활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다. 성경이 그 역사를 확인하고 있고 당시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그 역사를 증거하고 있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사실이기에 지금도 우리의 마음에 믿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부활에 대한 믿음을 방해하려던 공작들이 오히려 부활을 확증하는 것이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가 무덤에 갔을 때에 그 무덤이 비어있었던 것은 가장 확실한 부활의 역사적 사실이다. 그래서 로마서 1:4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고 우리의 메시아가 되셨고 교회의 기초가 되신 것이다. 뉴비긴은 “만일 첫 번째 부활절 아침에 그 무덤이 비어 있을 수 없었다면 교회가 생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부활은 지나간 한 과거적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모든 기독교인들 나아가서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현재적 사건이며 그리고 우리의 죽음 후에 다시 부활할 것을 확인하는 미래적 사건이다.
3. 부활은 은혜의 근거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사도된 은혜를 조화시킨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사도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증을 그리스도께 직접 받아(3절)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에게 있어 사도된 은혜이다. 바울에게 부활은 사도됨의 은혜이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모두에게 은혜의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가 부활함으로 우리에게 교회가 주어졌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소망이 주어졌다.
사도들이 선포한 내용은 부활이었다. 예수님의 죽음 후에 그들은 용기 없는 무기력한 사람들이었지만 부활 후에 다시 용기를 회복하고 부활을 선포할 만큼 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부활은 교회의 선포의 내용이었고 모든 기독교인들의 소망의 핵심이었으며 기쁨의 근원이었다. 사람이 자신의 죽을 날과 어떻게 죽는 것을 아는 것은 고통이지만 그리스도는 이 계획된 고통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러나 사람이 다시 산다는 것을 알면 죽음은 고통만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을 죽으시고 죽음을 전제로 한 부활을 하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이 땅에서 인간으로서 계획된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을 우리 모두가 죽게 될 것이고 죽어야 사는 죽음을 전제로 한 부활을 모두가 영광중에 맛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것이 은혜요, 이것을 아는 것이 은혜이다.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③제목: 부활 신앙
본문: 요한복음 20:1-18
<본문 성격>
예수의 부활에 관한 초기 전승들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 하나는 부활 이후 예수가 여러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전 15:5-8)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었던 무덤이 비어 있음을 발견했다(막 16:1-8)는 것들이다. 요한이 교회의 부활절 신앙(8, 19-23절에는 사도의 임무가 내포됨)에 관한 중심적인 진술로 의도했던 이 단락에서는 두 가지 유형의 전승이 기술적으로 결합되었다.
공관복음서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하여 갈릴리 지방에 치중한데 반하여 요한이 유대지방에 관한 보고를 보충하여 전체적인 균형을 잡고 있다. 이 설화에서 마가의 짧은 부활 이야기(막 16:1-8)의 문학적 영향을 받은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내용상 이것은 독립적인 설화이다. 1. 이 설화에는 요한의 특징적인 신학적 주제들, 즉 보는 것과 믿는 것과 예수의 아버지에게로 올라감이 내포되어 있다. 2. 사랑받은 제자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3. 부활의 최초 목격자가 막달라 마리아인 것은 공관복음도 마찬가지이지만 요한은 보다 더 세밀한 내용을 제공하고 있다.
일행과 함께한 막달라 마리아가 최초의 목격자인 동시에 “뛰어서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에게” 빈 무덤의 사실을 알렸으며, 부활의 사실을 최근 거리에서 확인하였으며, “하나님께로 내가 올라간다고 말하여라”하시는 부탁의 말씀도 듣고 있다. 이 여인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치료의 은혜를 입었으며(눅 8:2) 십자가의 증인으로서 현장을 지키고 있었으며(마 27:56) 상황에서 필요한 모든 일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여인의 역할이 크고 필요하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몬 베드로는 두 번째 증인의 위치에 서고 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세 번째가 된다. 부활에 관해 기술할 때 요한이 의도했던 바는 무엇인가? 부활은 예수가 아버지에게로 올라가는 과정 가운데 한 단계로서 서술되어 있다. 요한이 기술했던 당시 교회의 부활 신앙은 부활이 구약성경에서 예언되었다는 확신을 지지하였다(예; 시 16:10).
17절에서 부활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 간의 새롭고 보다 친밀한 영적 연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비록 마지는 일이 아직도 영광 받으신 주님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혔던 분이라는 증거를 뒷받침해 줄 수 있을지라도(27) 부활 이전의 법과의 접촉은 더 이상 적합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이후 아버지의 오른편에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였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일반적인 신앙의 내용이지만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저자만이 이러한 신앙을 관찰할 수 있는 사건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요 아버지로, 혹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이요 아버지로 서술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다. 여기서 요한은 비록 그가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와 제자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동일한 말로 서술하고 있으며 제자들은 그의 형제들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제자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름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는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자기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1:11).
<설교 본문>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사실성과 그 원리를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간간히 부활이 없다고 가상한다면 모든 것이 헛것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부활 신앙이 무너진다면 “깨어서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자”하는 얘기가 힘을 잃게 될 것이고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전 15:32)하는 풍조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상 사람이 죽음의 문제를 바로 정리해서 생각을 하지 못한다면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히 2:14-15)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그 자체로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흔들릴 때에 현실생활에 미쳐질 영향이라는 실제적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안건입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였지만 주님의 부활의 사실에 차츰 이해가 가는 막달라 마리아와 그 일행들은 놀라운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하는 등 필요한 조치들을 취해 나갔습니다. 그것이 동력이 되어서 제자들은 자신들을 수습하고 할 일들을 찾아 나섰으며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까지 찾아가서 그리스도의 삶과 부활에 대하여 증언하였고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부활 신앙을 넣어주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울 사도는 부활 신앙의 타당성을 생활 주변의 이치를 들어서 설득력 있게 설명을 하면서 동시에 부활 신앙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다면 금생 이후도 문제이겠지만 당장 오늘의 삶이 문제라 생각하면서 큰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내생과 금생 양쪽으로 이 문제만큼 심각한 것이 없다는 논리입니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영원한 삶에 의하여 긍정된 것으로 이해한다”라고 말합니다. 부활 신앙에 의하여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게 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생시처럼 가까이 계시면서 현실적인 문제들을 주선해 주십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고전 15:26). 이 원수는 마지막 시점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법”(롬 8:2)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일생 동안 종노릇시킨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현실은 “사망의 왕노릇하는”(롬 5:14) ‘죽음에의 존재’(하이데거)가 된 셈입니다. 죽음이 지배자로 군림한 것입니다. ‘아담 시대로부터 모세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죽음이 지배하였다’ 이것이 내면이었습니다. 죽음에게 포위를 당하여 진로를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국면 전환이 이뤄졌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죽음을 겪으신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세력을 잡고 있는 악마를 멸하시는 것이고, 죽음의 공포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국면 전환이 일어나게 되는 것인데 그 사실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롬 5:17).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은 이들은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는’(롬 6:4) 사람들이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산자’(롬6:11)가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지상생활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삶을 영원한 축제로 만든다고 말한 이도 있습니다(아타나시우스). 그 변화를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그는 에베소서 2:5절에서도 증언했습니다. 예수님도 친히 요 5:24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빼앗고 가능성과 의미를 파괴하던 죽음의 세력은 말소된 것입니다. 이 말소 절차로 말미암아 사람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영광에의 참여가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죽음이 이제는 마지막이 아닌 것입니다. 죽음을 정복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은 지상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의 삶 속에 담겨져 있는 현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넘어서서 희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죽음에 젖어 있던 삶이 진정한 삶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이루어져나가는 창조적 삶이 되어서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어쩌지 못하는 이기고도 남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롬 8:37-38).
시편 118편 22절에 집 모퉁이의 머릿돌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제 2성전이 건축과 관련해서 거대한 머릿돌 문제가 논란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건물 전체가 힌놈 골짜기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남서쪽 바깥 벽 모퉁이를 받치기 위해 거대한 석재가 사용되었습니다. 그 힌놈 골짜기의 이름은 칠십인역에서 게헨나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곳은 쓰레기 소각장으로서 점차 지옥불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를 잡습니다. 이 모퉁이돌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지옥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막아주는 안전핀이십니다. 죽음으로 미끌어지고 있는 사람들을 반듯한 삶으로 바로잡아주는 것은 영원한 모퉁이돌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에게 이루어진 해방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해방되지 못한 이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말하자면 사회에 대한 관심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예속된 동족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과 같은 관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뤄진 해방은 사람을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주인의 자리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루터).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지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해방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너무나 부당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차라리 바로에게로 돌아가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밥이나 배불리 먹자고 하면서 노예 신세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창조적 제사직’(몰트만)을 가지고 다가가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해방을 소개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물론 억압의 장본인인 바로에게도 모세는 다가가서 부당한 처사를 중단할 것을 정식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임이 오늘의 교회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십자가의 중압감과 죽음과 절망감에 완전히 압도되었던 부활의 증인들은 부활의 사실을 확인하려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최초의 증인인 여인들은 사도들에게로 ‘뛰어가서’ 확인 작업을 함께하자고 했습니다. 천사들에게도 핵심 사항을 질문했습니다. 부활하신 스리스도와 직접적인 대화도 시도했습니다. 심지어는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만져보려고까지 했습니다. 전혀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고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는 경험한 사실을 종합하고 정리해서 제자들에게 자세히 알려줬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대목이었기에 “이제 저는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말하여라”하는 당부의 말씀을 주님에게서 직접 듣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뒤에 주님이 직접 제자들에게 오셔서 모든 사실을 확신해 주셨습니다.
증인들이 뛰어 다니면서 증언했던 부활신앙은 모든 것을 무너지게 만들고 있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받쳐주고 있는 모퉁이돌입니다. 무너짐이 심각하기 때문에 그 무너짐에 대한 방안은 모퉁이돌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 속에는 어제가 들어 있습니다. 나의 오늘은 나 스스로가 어제 만든 것이고, 나의 내일을 오늘 내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날’(히3:13)에 무엇을 했는가에 따라서 내생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영원으로 발진하는 발진 기지입니다. 현재는 모퉁이돌 위에서 어제를 정리하면서 영원을 준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많이 심는 사람은 많이 거둘 것이고 적게 심는 사람은 적게 거둘 것입니다.
④제목: 죽음을 이기신 예수
본문: 사도행전 10:34-43, 고린도전서 15:1-11, 요한복음 20:1-18
<석의적 접근>
사도행전 10:34-43: 부활절 전체의 본문은(성령강림절을 포함해서) 사도행전을 첫 번째 본문으로 잡고 있다. 사도행전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카리스마적인 선포가 많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라는 사람 앞에서 행하여진 베드로의 설교다. 고넬료는 꿈을 통하여 시몬을 청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게 되며 베드로 또한 이방인들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환장을 통하여 발견하게 된다. 이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었다. 바로 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온 세상, 만유의 구주가 되신다. 여기서 유대인들을 위한 예수가 아니라 바로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예수의 모습이 강조되고 있다. 37-42절은 예수의 행적과 죽음과 부활을 섬세하게 알리고 있다. 바로 베시지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초대 사도들의 설교에서 반복되어 강조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었다.
고린도전서 15:1-1: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기독교인은 반드시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인들이 듣기 싫어하는 명령조의 교훈이다. 본문의 첫 부분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바울이 이미 설교한 내용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울이 설교하였던 것은 바울 자신이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은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한다. 5-7절에 나타나는 예수를 만난 여러 가지 예들은 시간적인 순서라기보다는 예수를 보았던 여러 가지 경우들을 나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은 바울이 개인적으로 강조하는 선택 사항의 교훈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사도들이 빼어놓을 수 있는 그러한 주변적인 교훈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본문의 바로 뒤에서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우리 인간들의 부활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구약학자 제케만이 말하듯이 바울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 모든 인간들이 경험할 부활의 첫단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20:1-18: 예수의 부활 사건의 중심에는 “내가 주를 보았다”고 고백을 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경험이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죽은 예수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죽은 예수를 찾을 수 없었다. 도리어 다시 사신 예수께서 마리아를 찾아오셨던 것이다. 본문은 3번에 걸친 마리아의 이야기가 평행을 이루다가 마침내 18절에서 예수를 만난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고백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철저하게 예수 부활의 사건을 예측하지 못한 죽은 예수를 찾던 마리아에게 다시 사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여 주셨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마리아의 고백은 여기에서 달라지고 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오늘의 본문은 마리아의 이 고백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멋진 드라마와 같다.
<설교 본문>
서론: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인간에게 있어서 최종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는 바로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이나 종교들이 이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대답하려고 노력해 왔다. 플라톤의 철학, 동양의 철학, 불교, 그리고 시닉이라고 불리는 헬라의 철학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모든 철학과 종교는 이 문제에 대하여 사색의 단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정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니라”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들은 죽음을 벗어나고자 하는 바램을 가지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동기부여: 플라톤 이후의 철학자들은 영혼 불멸론을 가르치면서 인간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은 불멸한다는 사상을 가르쳐 왔다. 또한 시닉학자들은 죽음을 정복하기위해서 도리어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쳤다. 다시 말하면 죽음이 자신을 엄습해 오기 전에 자신이 죽음을 향하여 돌짐함으로써 죽음에게 먹히기보다는 자신이 죽음을 선택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죽음을 향해 가든 죽음이 다가오든 결국 죽음이 우리를 정복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죽음을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방법론: 이러한 우리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이 있었다. 바로 요 3:16의 말씀대로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서 인간의 몸을 입고 사망의 권세 아래 들어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죽음을 이기는 방법을 유일하게 제시하여 주셨다(히 2:14-15). 그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바로 이 죽음을 이기시는 사건의 중심에 예수의 부활이 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제어하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께서 다시 사신 이후로 그 사실을 믿고 예수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에게 죽음의 권세를 이길 능력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가장 큰 선물인 것이다.
결과: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으로 인해 우리 죽음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고후 4:14).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죽음의 문에 드리워졌던 수많은 가시와 쏘는 것은 제하여졌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담대함을 선사한다. 이제 더 이상 죽음이 우리를 가로막지 못하는 것이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의 경계가 없으며 죽음이나 사는 것이 모두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대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고백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다.
⑤제목: 생명의 역사
본문: 출애굽기 14:15-31, 요한계시록 1:10-18, 누가복음 23:50-24:12
출애굽기 본문은 팔만 내밀면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이스라엘의 승리를 증언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크시다. 이 크신 능력으로 백성을 늘 이끄신다. 모세와 백성들은 그들의 행진을 가로막는 홍해 앞에서 떨어서는 안 된다. 다만 팔만 내밀면 홍해가 갈라지고 적들은 망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누가는 확인만 해보면 알 수 있는 주님의 부활사건을 증언한다. 여인들이 주님의 시선에 향료를 발라드리려고 무덤으로 갔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천사 둘이 나타나 주님의 부활을 증언한다. 특히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반드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신다고 한 말씀을 기억해보라고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일으키는 사건이다. 다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확인만 하면 주께서 부활하신 놀라운 사건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부활하신 영광의 주께서 크신 권세를 가지고 교회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주신다. 박해의 때에 교회들이 구원과 승리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부활의 아침에 고난 가운데 있는 세상을 향해 틀림없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증거하도록 하자.
1. 순종하는 신앙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밑바탕이다. 부활 신앙은 교회의 기초요, 교회의 서 있는 자리다. 이러한 부활 신앙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에는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는 신앙이 있다. 그것은 출애굽의 신앙이다. 성서 전체를 통해 흐르고 있는 출애굽의 신앙은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이며, 해방자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다. 이 출애굽 신앙은 부활신앙과 의미적으로 같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상태로 죽음의 상황에 빠져 있을 때, 출애굽으로 해방과 구원을 이룬 것이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고 승리하는 부활 신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출애굽의 사건은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일으키신 사건이다. 오늘 출애굽기 14장의 본문이 이것을 증언해 준다. 이집트를 떠나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군대를 두려워하여 모세에게 항변한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끌어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몰려들어 불평하고 아우성치며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모세가 대답한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해방자 하나님이 이끌어내셨으니 하나님을 믿고 나갈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다. “너희는 앞으로 나아가라. 지팡이를 들고 손을(팔을) 바다 위로 내밀어라”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다 위로 팔을 내밀자 놀라운 능력의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큰 동풍으로 바닷물을 물러나게 하시어 홍해가 갈라져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하셨던 것이다. 홍해는 가로질러 생긴 그 길로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간 후에, 쫓아오던 이집트 병거와 군대는 다시 덮여진 바닷물로 몰살을 당하게 된다. 그때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하심과 사랑을 확인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찬양하게 된다.
이 출애굽 사건, 홍해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직접 일으키신 사건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것을 확인만 하면 되었다. 말씀에 순종하여 팔을 내밀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구원의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하게 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 놀라우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출애굽의 기적을 이룬 사건 밑바닥에 순종의 신앙이 있다는 것은 부활 신앙의 밑바닥에도 순종하는 신앙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하나님 뜻에 순종하시는 결단이 부활의 은총으로 이어졌음을 이 부활의 아침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2. 주님의 말씀을 확인할 때
부활의 믿음을 가진 신앙은 주저없이 발을 내디디어 홍해를 건넜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직접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경험한다. 예수님의 부활도 하나님께서 직접 일으키신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했던 사도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다고 증언한다. 베드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고 했다. 우리의 믿음 때문에 부활이 확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크신 능력으로 일으키시는 사건이기에 확실한 것이다. 그리고 부활 사건이 이처럼 확실하기에 우리는 어둠과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여인들은 빈 무덤을 확인한다. 빈 무덤에서 천사 둘과 만난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하셨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 그대로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여인들이 확인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팔을 내밀었을 때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던 것처럼, 빈 무덤을 찾은 여인들은 빈 무덤을 통해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확인할 때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경험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백문이불여일견’이란 말이 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는 어떤 일을 듣는 것보다 그 일을 직접 보아야 믿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넓은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을 우리는 다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듣거나 보지 못하였어도 이 세상에는 신비롭고 놀라운 일들이 많이 있었다. 부활 사건도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건으로 우리의 이성적인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건이다. 이 부활의 사건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길은 여인들이 빈 무덤을 확인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알게 된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확인하는 신앙을 통하여 알게 된다.
3. 생명의 역사를 증거하는 일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받은 계시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믿음으로 살도록 하기 위한 책이다. 복음서가 십자가 고난을 통한 사랑의 예수님을 증거하였다면, 요한계시록은 심판과 승리의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이 묘사하는 교회는 지독한 수난과 박해를 당하고 있는 교회다. 이들에게 사도요한은 죽음의 세력, 악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예수님을 증거함으로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며 승리와 영광을 얻는다는 믿음과 소망을 심어주고 지키도록 한 책이다.
본문 1:10-18에서 사도 요한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어린양 예수님의 모습을 증거하고 있다. 그 예수님께로부터 고난 가운데 있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황제숭배와 우상숭배로 가득 찬 일곱 도시에 있는 교회들이다. 교회들에게 편지를 쓴 목적은 그들에게 부활하신 승리의 주님을 증거함으로써 신앙의 투쟁에서 최후의 승리는 교회들이 얻게 됨을 확신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고난 속에 있지만 흔들림 없는 소망으로 살게 하려는 것이다. 교회가 시련의 때에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세상에 증거되게 된다. 이 사실은 우리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역할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시대의 시련 속에서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자포자기하고 실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는 사람으로서의 의연함과 굳건함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증거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앞에는 홍해가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는 것과 같은 긴박한 상황이다. 또한 박해의 때를 살고 있던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처럼 고난 속에서 힘들어 하는 사람이 많은 때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 부활의 사건은 구원의 소식이다. 죽음의 사슬을 끊고 부활로 승리하신 주님을 영접하는 부활의 아침에 고난 가운데서 흔들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증거하여, 그들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⑥제목: 그 날이 오면
본문: 이사야 25: 6-9
<석의적 접근>
이사야 24:27은 마지막 때의 구원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사야의 책 중에서 독립된 내용이다. 이사야 25:6-9은 24:27 가운데서 잘 맞추어져 있다. 왜냐하면 시온산에 하나님이 만찬을 마련하고 있다는 마지막 때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적어도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25:6-8은 시온산에서 일어나는 구원을 묘사한다. 이 부분은 24:21-23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25:9은 12절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부분을 시작ㅎ나다. 이 부분은 9-10a까지는 감사의 노래를 포함하고, 10b-12절까지는 모압 족속의 멸망을 묘사한다.
묵시문학은 신학의 광범위한 사용으로 자주 특징지어진다. 이사야 25:6-9의 특성은 고대근동 신학의 더 커다란 내용에 견주어 볼 때 더욱 명백해진다. 첫째, 시온산의 배경이다. 대부분의 신들은 산에서 산다. 여호와는 구약에서 많은 수의 산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시내산, 호렙산, 모리아산이 있다. 그러나 가장 연관이 많은 산은 시온산이다. 둘째로, 본문은 하나님이 시온산의 만찬에 초대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은 사망을 이기신다는 두 가지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두 가지 사건은 모두 다 가나안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나안 신학에 의하면 바알이 그의 거룩한 산인 자폰(Zaphon)에 그의 성전을 건축한 후에 만찬을 열어서 초대한다. 이사야 25:6-9의 저자는 가나안 신학으로부터 새로 창조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언급함으로써 형태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설교 본문>
작가 김수형 씨의 ‘부활절 죽이기’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세상의 모든 사탄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부활절을 죽이기 위해서다. 이 때 한 원로 사탄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예수님의 탄생일을 잔치일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예수님이 탄생한 날을 연말로 휴일로 정하고 카드, 선물, 파티 등 필요 이상의 경축행사를 벌여서 부활절을 서서히 죽이자는 내용이다. 그러면 부활절은 사람들에게 흥미가 없을 것이고 그저 삶은 달걀 서너 개 먹으며 부활절 칸타타를 몇 곡 부르는 정도로 그 날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의아해 하던 사탄들도 원로사탄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각기 자신의 사역지로 돌아갔다. 결국 사탄은 기독교 문화를 세속화시켜서 기독교 신앙과 문화를 죽인다는 내용이다.
오늘은 부활절이다.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큰 절기는 부활절이다. 왜냐하면 이 날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새생명이 시작되는 날이요, 영원한 승리의 날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말씀은 그 부활의 날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에 대하여 증거하고 계신다.
1.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신다.
하나님은 백성을 구원하시는 사건을 만군의 여화의의 산에 벌인 잔치로 말씀하신다. 산은 구약에서 보통 통치 권력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메시야가 머물러 세상을 다스리실 예루살렘을 의미하며, 신약적인 의미로는 곧 교회를 의미한다. 이 교회는 부활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교회의 날에 모든 사람에게 음식이 제공된다. 만민 즉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다는 의미다. 이는 구원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현대에 들어서 민족주의에 대한 문제가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민족주의의 벽을 뛰어넘는다. 종이나 자유자나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모두 열려있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통한 교회의 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왕국을 세움에 있어 어느 한 세력에 의하여 세워질 것을 원치 않으신다.
우리의 교회는 어떠한가? 어떤 의미에서 장애인교회, 여성교회, 외국인을 위한 교회 등등 특수 집단을 위한 교회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참다운 교회는 비장애인이나 장애인이 함께, 해외동포나 외국인이 함께 참석할 수 있어야 하고 예배할 수 있는 교회여야 한다. 하나님이 나누지 않는 것을 인간이 나눌 권리는 없다.
2. 그날엔 우리의 영적 무지와 죽음이 사라진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의 권세를 이겨내심으로써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그리고 그리스도의 삶과 부활은 우리의 영적 통찰력의 범위를 한 단계 더 확장시켰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인간들이 넘을 수 없었던 죽음의 벽을 뛰어넘음으로써 우리들을 가로막았던 모든 면박과 휘장을 사라지게 했다. 이는 인간의 한계가 무너진다는 의미이다. 근시안적 삶의 태도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의미이며, 산자와 죽은 자의 이별로 인한 슬픔의 눈물 또한 과거의 것이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을 믿는 자는 소망 가운데서 현재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명의 위협 앞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당당히 신앙을 고수할 수 있었던 점은 바로 이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다.
3. 그날엔 모든 무릎이 주를 경배한다.
그리하여 그 날이 오면 모든 민족들은 그분을 향하여 이르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라고 말한다. 영원한 예배가 시작된다. 천국은 어떠한가? 그곳의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은 계시록을 통하여 보여주고 계신다. 그 주요한 특징은 천국은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 엄마, 아빠가 된 젊은 부부에게 있어서 가장 흥분되는 사건은 이제 막 옹알이를 끝낸 어린아이가 어눌하지만 “엄-마, 압-빠”라는 말을 할 때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창조주를 창조주로 인정하는 것, 구원자를 구원자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자 그분의 창조 목적이 맞는 일이다. 첫 사람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창조주께 돌릴 영광을 사탄에게 돌렸던 비극의 역사는 이제 곧 끝나고 구원의 날이 오면 모드 사람이 하나님을 노래하게 된다. 에덴이 복원된다. 이러한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꿈이 단지 꿈이 아닌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으로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소망은 부활을 통하여 확인될 수 있다.
결론: 부활의 날은 심판과 잔치라는 두 가지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하며, 거룩한 순결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그 날은 영광의 날이요, 영원히 지속되는 천국 예배의 날이다. 반대로 배교와 불신의 사람들에게 그 날은 심판의 날이요, 영원한 형벌이 시작되는 날이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의 자세는 매우 다르다. 부활의 소망을 지닌 사람은 현재의 환난과 핍박을 이길 힘이 있다. 아무리 유혹이 크다 할지라도 영적 순결과 거룩함으로 이를 이겨낼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를 보았다. 이제 그와 연합함으로 우리도 살아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에 대해 소망하고, 믿으며 살기를 원하신다. 이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강하게 한다.
⑦제목: 복음의 완성
본문: 마가복음 16:9-20
(정훈택: 총신대신학대학원 교수)
많은 현대어 번역 성경에는 마가복음 16장 9절에서 20절의 내용이 인쇄되어 있지 않다. 한국교회가 즐겨 사용하는 개역판 한글 성경은 이 부분을 괄호([ ])로 감싸 놓았다. 그리고 “어떤 사본에는 9-20절이 없음”이란 각주를 붙여 두었다. 인쇄본 헬라어 신약성경으로 가보면 이 부분에 복잡한 원문비평자료가 소개되어 있다.
이런 현대적 경향을 마치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라낸 결과’요, ‘한국교회는 그런 변질된 성경을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오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의 본문을 보여주는 현존하는 사본들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사본들은 이 본문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에 비교적 늦은 시기에 필사된 신약성경 사본들이 이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본문을 현대어로 번역하여 인쇄할 때 이런 부분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까? 최초의 원문만을 살리려 한다면 당연히 이 부분을 인쇄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마가가 처음부터 이 부분을 마가복음의 결론으로 썼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마가복음 16장 9-20절은 주석할 필요도 없게 된다. 어떤 현대어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이런 내용이 있다는 것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처리하는 것에 대부분의 신자들은 아쉬움을 느낀다. 오랫동안 교회가 이 본문을 알고 있었고,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또 적지 않은 사본들이 - 비록 다소 늦은 시기에 필사되었다 하더라도 - 본문을 마가복음의 결론부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본들을 없는 것처럼 취급할 수는 없지 않은가! 추정 원문과 일단 구분하면서도 교회가 오랫동안 알고 사용해 왔던 정경의 한 부분임을 알리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괄호를 사용하는 것 이상은 없을 듯싶다. 우리는 원문비평학적 관점이 아니라 이런 정경적 관점에서 이 부분을 주석하려고 한다.
학자들의 연구를 따르면, 마가복음 16장 9절에서 20절에 사용된 단어나 표현법이 마가복음의 다른 부분(1:1-16:8)에 나타나는 것과는 다소 다르다. 즉 언어학적 통일성이 이 부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이 언어학적 통일성의 결여를 이유로 본문을 마가복음의 진정한 결론부로 맏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외형적 분석에 치우치지 않고 보도된 내용을 주목하면, 본문이 마가복음에 적합하지 않다고 배척하기 보다는 정반대로 그 결론부로 아주 적합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마가복음이 16장 8절이나 소위 ‘짧은 결론구’로 끝난다고 가정해보자. 마가가 1장 1절에서부터 기록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채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의미하는데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16장 1-8절에 기록되어 있는 부활에 관한 천사의 소식이 그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복음서가 - 비록 간략하기는 하지만 - 더 많은 얘기를 담고 있지 않은가! 마가복음에도 예수님에 관하여 기록할 것이 아직 남아 있어야 한다. 예수님 자신이 이런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수차례 예고하셨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이어질 다른 일들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가 마감된 후 복음을 전하며 그 일환으로 복음서를 저술한 마가가 이 얘기를 전혀 몰라서 기록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정말 마가복음 원본이 16장 8절에서 끝난다면 이것이 마가에 의해 고의적이거나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즉 알려지지 않은 어떤 원인 때문에 마가복음 원본은 끝이 채 마무리되지 않은 채 16장 8절까지만 기록되어 지금과 같은 형대로 필사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초대교회에는 마가복음의 끝으로 여겨지는 12절이 별도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언제, 어디서인가 마가복음에 덧붙여지게 되었고, 12절을 포함하는 마가복음 전체가 필사되어 함께 전해졌을 것이다. 이 12절을 마가복음 최초의 원문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이 열두 절이 마가에게서 비롯된 전통이 아니라고 확정하기도 어렵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 예수님의 선교 명령,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과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심을 알려주는 마가복음의 마지막 12절은 다른 복음서의 부활 이후 소식들과 병행을 이루면서도 마가복음만의 독특한 색채를 가지고 있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결말로써 마가복음에 아주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적지 않은 사본들이 이 결론부를 마가복음의 끝에 가지고 있다는 것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교회가 이것을 즐겨 마가복음의 결론부로 읽어왔음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읽는 것이 마가복음의 전체 흐름에도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교회가 알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결론부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은 다음의 네 가지다.
1)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16:9-11)
2) 시골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심(12-13절)
3)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14절)
4) 복음 전파를 명령하심(14-18절)
5) 승천하신 예수님의 사역(19-20절)
마가가 그의 책으로 알리는 예수님에 관한 모든 내용을 복음, 혹은 복음의 시작으로 명명했기 때문에 부활하심 이후의 이 이야기들을 우리는 그렇게 시작된 복음의 결말, 내지는 완결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의 완성’이라는 별칭을 제목으로 붙여 보았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가 이렇게 완결되었고, 그 결과 사람들을 구원하는 아름다운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 완전하게 탄생했다는 뜻이다.
마가복음의 다른 이야기들처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나타나신 이 사건들을 알림에 있어서도 마가복음의 이야기들은 간단하고 단순하게 사실만을 보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중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복음 사건, 그리고 이 사건을 알리는 소식에 직면한 제자들의 불신앙이다. 즉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하셨음을 알리지만 그들은 계속 “믿지 않았다”(11, 13절). 이 불신앙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남으로 해소되었다. 즉 신앙으로 바뀌었다.
‘불신앙’ 즉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믿음’ 개념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직접 경험하지 못한 소식 즉 지적 정보를 제공할 때 이를 받아들이는 것(지적 요소). 둘째, 자신보다 더 강한 분을 실제로 의존하는 것(인격적 요소). 이 부분에 강조된 제자들의 불신앙이란 그들이 예수님을 떠났다거나 그들의 주님으로 의존하지 않는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제자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그때부터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예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자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불신앙이란 그들이 그렇게 믿고 의존하는 예수님과 관련된 한 가지의 특수한 지식, 즉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정보를 쉽게 수긍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무엇을 하시는지 등이 당시의 시간적 한계에서 차곡차곡 진행되고 알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지적 능력이 이 엄청난 사실을 제때 수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제자들을 현대적 시작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님과 관련된 어떤 사건, 특수한 사실을 인식하고 수용하는 능력에 있어서 한계가 있었다 하더라도 제자들의 이 부정적 부분은 꼭 극복되어야 할 문제였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여 살아가는 그들이 예수님과 관련된 어느 하나라도 - 만약 주님이 알려주신 것이라면 - 거부하거나 모른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결국 제자들이 자신의 부활 사실에 대해 조금도 의심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게 만드시기 위하여 여러 차례 나타나시고 그들이 믿음에 도달하자 세계적 복음 선포를 명령하셨다. 승천하신 후 - 마가에 따르면 - 에는 자신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 곧 교회와 함께 역사를 헤쳐 가기 시작하셨다.
1.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16:1-11)
부활하신 예수님의 최초 목격자는 막달라 마리아였다. 본문은 이 여인을 “전에 (예수님이)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셨던 막달라 마리아”로 소개한다. 귀산을 쫓아내셨다는 이야기는 누가복음 8장 2절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마리아는 그 후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도 그곳에 있었고(마 27:56), 시신을 두는 무덤에까지 따라갔다(막 15:47). 예수님의 몸에 바를 향품을 준비하였다가(막 16:1) 안식일이 지나고 새벽이 되기 무섭게 무덤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복음 사건의 마지막 부분이 진행되는 동안 누구보다도 예수님 가까이 있었다. 전통적으로 이 막달라 마리아는 나사로의 누이로 알려져 있다. 예수님을 만나 누구보다도 예수님께 큰 은혜를 입었고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예수님을 섬겼던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다. 이 여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를 귀신에게서 해방시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사실 주님으로 나타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 비록 예수님이 친히 여러 차례 예고하셨지만 -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체포와 재판, 사형 집행의 과정에서 제자들은 슬픔을 경험했고 두려움을 경험했다.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을 기대하거나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 첫 부활절 아침에 그녀가 믿고 의지하고 섬겼던 그 예수님의 죽은 몸에 향품을 바름으로써 마지막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려 했을 뿐이다. 그래서 천사의 알림에 “놀라고 떨며 무덤에서 도망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8절)고 했다. 그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부활 사실을 믿게 되었다.
사실 앞에서 인간의 어떤 상식이나 어떤 평범한 경험도 힘을 쓰지 못한다. 허황된 것처럼 보이던 천사의 말은 이제 사실에 대한 증언으로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는 스스로 바로 그 사실, 즉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사건의 증인이 되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 마치 천사가 했던 것처럼 - 이 복음을 알렸다. 살아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났다”, “보았다”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 사실과 부활 믿음에 대한 증거로 제시되었다. 그녀가 보았다면 제자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맏아들이지 않았다. 천사의 소식에 여인들이 적절한 믿음의 반응을 보이지 못한 것처럼, 마리아의 소식 전달에 제자들도 적절한 믿음의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마리아가 달려가 예수님의 부활을 알렸던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10절)이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열한 제자들만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 따라왔고 예수님의 지산 생애 마지막 날을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보냈던 제자들 모두를 지시하는 용어이다. 이들은 안식일 후 첫날 새벽까지도 함께 모여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슬퍼하고 있었으며, 울고 있었다”고 했다.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분위기는 침울하고 음산한 것이었다. 부활을 기대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새로운 희망을 부풀릴 힘도 여유도 그들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금요일 성만찬 직후에 시작된 예수님의 체포, 재판, 사형 선고와 집행이 그들을 한없이 슬프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아직 감사와 찬송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시기였다. 사랑하는 능력의 주님을 잃은 슬픔이 그들의 두 눈에 끊임없이 눈물을 채웠던 것이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육체로 만나 두 발로 따라다닌 이 사람들에게 슬픔과 눈물은 불신과 좌절의 표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의 표식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십자가 앞에서 누가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을까? 이마를 찢고 굵은 핏방울을 주님의 뺨 위로 짜내는 가시 면류관을 보면서 누가 구원의 은총을 찬송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그 쓰라린 죽음의 잔을 - 죄와 용서와 구원이라는 이득이 있다 하더라도 - 기쁨과 환희로 마냥 환영할 수는 없는 그런 상황을 그들은 경험한 것이다. 그들 모두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은 슬픔과 눈물로 표현되고 있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과 죽음을 감사하고 찬송하는 묘한 역설적인 것이다. 복음을 바로 이해하자면 인간의 마음을 버려야 한다.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 즉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복음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새로운 희망의 불꽃을 만들어내기에는 어림도 없을 만큼 그들의 마음은 지난 며칠 동안 있었던 일에 사로잡혀 있었다. 모두가 그러했다. 주님께서 사랑하셨던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등도 그들 가운데 있었다. 천사의 목소리가 여인들을 믿음 속으로 불러들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부활 사실을 믿게 된 막달라 마리아의 확신에 찬 강한 소리도 제자들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지 못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부활하셨다는 엉뚱한 소식을 만들어낸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불신이 사실, 사건 앞에 여지없이 부서졌다고 말해야 한다.
2. 시골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심(16:12-13)
누가복음 24장 13절에 따르면 - 아마 같은 사건이 소개되어 있는데 - 부활절 당일에 제자들 중 두 사람이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알리고 그 증거로 자신이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할 때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말 따위는 믿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말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고 그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등은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어떻든 두 사람은 그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결국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남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전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지 못했던 이 두 사람을 믿는 사람으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천사처럼, 마리아처럼, 그들을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변화시켰다.
불신의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들로 바꾸는 것은 믿음의 힘이 아니라 사실과 진실의 힘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 사건이었기 때문에 죽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은 그것이 모두 사실이기 때문에 힘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굴복시키는 힘을 가진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들이 보고들은 것을 전했을 뿐 다른 사람들을 종교인이나 믿음의 사람들로 만들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목격자로 증인으로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었던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의 출발점은 믿음이 아니라 이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요 ‘사실’에 있다. 그리스도의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아니면 요한복음처럼 “하나님의 진리”가 기독교의 출발점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 사건이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든 이론과 상식을 접어두고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라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이다.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인들의 미친 짓이 아니라 떨어지는 사과를 보며 중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과학적이고 실제적인 지식이다. 우리의 믿음은 공중에 세워진 누각이 아니라 이렇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긍정하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이 과정을 밟아 믿는 사람이 되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사실 앞에서 그들의 불신을 내동댕이쳤다. 그들은 이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이 사실을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남은 제자들은 믿지 않았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기 마련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인 ‘다수가 따르는 것이 진리다’를 기준으로 한다면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하는 막달라 마리아나 두 제자가 이상한 사람들이 수밖에 없다. 따져보면 그들만 사실에 접했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많은 수가 옳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싸우기 싫어하는 세상이 걷는 편법일 뿐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던 이 첫 부활절은 모든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부활 신앙의 출발점이 어디에 있는가의 문제를 밝혀준다. 이 신앙의 출발점은 명백한 사건, 즉 역사에 있다는 시실을 확인시켜주는 그런 날인 것이다.
3.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16:14)
열한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저희들에게 나타나셨다. 마가복음만을 계산한다면 예수님께서 세 번째 나타나심이다. 우선 예수님은 저희의 믿지 않음을 꾸짖으셨다. 같은 제자들,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하는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때문이라고 마가복음의 기자는 평했다. 제자들은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이미 그 말이 사실임을 믿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도 단순한 들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 실제 사건에서 얻은 역사적 성질의 것이다.
예수님의 꾸중은 무엇을 알려주는가? 예수님은 열한 제자들이 부활하신 자신을 보지 않고도 믿을 것을 기대하셨음을 알려준다. 예수님의 이 기대에 열한 제자들은 부응하지 못했다. 열한 제자들의 불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구중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소식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만나 어쩔 수 없이 믿음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과 같은 종류의 믿음을 요구하는, 예수님의 기대, 호소, 격려, 자극의 역할도 한다. 제자들이 막달라 마리아, 혹은 시골로 가던 두 제자가 전한 내용을 들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음을 믿어야 했던 것처럼 - 예수님은 열한 제자들에게도 이런 믿음을 요구하셨다-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지만 복음의 내용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4.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16:15-18)
앞 절에 암시되었던 예수님의 기대가 마지막 명령에 좀더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끝나면 예수님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실 것이다. 자신의 3년의 공생애 중에 있었던 행적, 사역과 설교처럼, 예수님의 죽음, 부활도 지나간 사건, 역사가 되고 사람들은 이것을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주거나 전해 듣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믿음(인격적 신뢰)과 지식(예수에 대한 정보)을 얻었지만 이제 이런 방법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만난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이제 그것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듣고 믿을 것을 기대하셨던 것처럼 이제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음에 이를 것을 기대하신다. 그러기 위하여 제자들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구원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 된다. 물론 복음 전파가 자동적으로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20절에 언급되어 있는 예수님의 영적 직접 사역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승천하신 후에도 “주님은 (제자들과 ) 함께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계속되는 영적 사역을 배경으로 하여 제자들은 역사계에 살아 움직이는 눈에 보이는 구원의 도구가 된다. 목격자들, 제자들이 예수님이 증인이 되고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복음 전파가 하나님의 구원을 중개하는 눈에 보이는 도구로 활용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하신 말씀을 총체적으로 지시하는 것이다. 탄생부터 죽음과 부활까지, 탄생의 예고와 예언으로부터 승천하셔서 천상에서 영적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고 지배하시는 것까지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지식이 복음, 즉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좋은 소식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아니라 이 전체를 복음의 내용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할 책임을 부여받았다. 예수님의 생애나 말씀 중 어느 하나만을 일방적, 편파적으로 강조해서는 안 된다. ‘참 복음’이라는 식으로 특별하게 표현할 필요가 없다. 하나의 복음이 있을 뿐이다. 그 하나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고 사람이 되셔서 하신 모든 일, 전 생애를 지시하는 것이다.
5. 승천하심과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사역(16:19-20)
예수님의 부활하신 이후의 사역이 마가복음에는 모두 연결되어 기록되어 있다. 문학적인 관점에서만 말한다면 마치 아주 짧은 기간 즉 길어야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활과 승천을 함께 보도하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따르면 부활절과 승천절 사이에는 40일이란 긴 시간 간격이 있다. 9절부터의 각 사건이 정확하게 40일 중 어느 정도의 시점에 발생한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마가복음은 이런 시간 차이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사건들 자체만을 보도하고 있다. 이것은 마가복음의 특성일 뿐 복음서 사이에 연대기 상의 차이나 오류가 있는 것처럼 분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자들에게 복음전파를 부탁하신 예수님은 지상사역의 마지막을 하늘로 오르시는 것으로 장식하셨다. 인간으로 오셔서 모든 일을 마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것보다 더 멋있고 영광스러운 장면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늘로 오르셨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글자 그대로 - 사도행전의 묘사처럼 - 하늘로 올라가심을 뜻한다. 하늘로 상승하시던 예수님은 어느 순간에 인간의 세계,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에서 신의 세계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예수님은 본래의 신적 영광에 구세주와 심판주의 영광을 덧입으신 것이다. 예수님의 높아지심은 부활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높으신 신적 영광은 당분간 오직 그를 믿는 자들에게만 확실하게 인식되고 경배와 찬송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의 세계를 보상한다는 것은 인간의 경험과 언어, 감정으로는 분명 불가능하다. 신약성경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밀접한 관계와 역할을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묘사한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여받은 독생자의 위엄과 사역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표현이다.
그것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마가복음의 마지막 절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제자들이 이제 믿는 자들이 되어 자신들과 같은 믿는 자들을 만나기 위해 세계 곳곳으로 복음을 전파했음을 보여준다.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들의 노력이 확실한 열매를 맺도록 여전히 일하신다. 주님의 일은 사람들이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표적을 주시는 것이다. 그렇게 제자들의 복음 증거를 확실하게 보장해 주셨다. 이것에서 말하는 ‘표적’이란 17-18절에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혹은 그와 유사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간략하고 포괄적인 특성을 가진 마가복음의 마지막 절은 제자들의 복음 전파 사역과 예수님의 함께 일하심이 예수님의 목격자들의 생애로 제한되지 않고 그들로 인하여 믿음에 도달할 후대의 제자들, 즉 기독교인들 혹은 교회를 통해 주님의 오심까지 계속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즉 제자들과 복음 전파와 예수님의 함께 일하심은 이천여년 계속되었고 이제 막 21세기의 문턱을 넘었으며 아직도 땅끝으로 이어져 가고 있다. 한국교회 그리고 그 한 부분인 우리 믿는 사람들도 마가복음의 마지막 절의 연장선 위에서 우리 시대의 삶을 살아가며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마가복음 1장 1절에서 시작한 “복음의 시작”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지상에서 진행되었던 일들, 즉 복음서에 기록된 일들을 뜻한다. 그렇게 시작하여 마무리된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은 제자들의 삶을 통해 또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활동을 통해 세상 끝까지 계속될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그릿도의 복음의 연장의 한 부분이며 복음서들이 만들어낸 현세적 결과의 하나이다.
참고도서
2000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 핸드북, 홍성사
1999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자료, 대한기독교서회
1998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강단, 대한기독교서회
1997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 핸드북, 홍성사
1997년 강단과 목회(목회정보자료집), 기독교대한감리회 본부 선교국
1995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 핸드북, 홍성사
월간 <그 말씀> 200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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