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에 우리가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열매 맺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보낸 편지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이방인 교회입니다. 바울이 제 1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구성원들이 사도 바울에 의해서 복음을 받고 세례를 받았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다음 그곳에 유대인들이 왔습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도 믿어야 하지만 자기들처럼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자기들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서, 다시 말해서 복음의 원조들에게서 들었던 것이라고 하며, 바울은 사도라고는 하지만 예수님의 직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바울보다는 다른 사도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보여줍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보니까 정말 경건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생각해 보아도 예수님을 믿기만 한다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값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떠나 율법주의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러다 보니 교회가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며 결국에는 그 교회가 영적으로 변질될 지경에 빠졌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 비해서 어떻게 더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는 그 모든 원동력이 성령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16잘에 보면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다가 여기 22절과 23절에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이 성령의 열매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복음 아래 있을 때 그들에게서 자연 발생적으로 나타나는 삶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 믿기 전에 나타냈던 육체의 일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 믿기 전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을 때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여기 19절 이하에 나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것이 그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 때 행했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홉 가지 열매는 육체의 일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육체를 좇아 행할 때 나타나는 성품과는 판연히 다른 것입니다.
또 이것은 또 다른 율법적인 속박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런 열매를 맺혀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또 다른 율법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이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열매라는 말을 썼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으면 이런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우리들의 성품에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두 가지 면에서 변질되었는데, 하나는 율법주의적인 경향입니다.
이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유대교적인 영향을 받아 율법주의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 한국 교회에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다분히 유교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요즈음에 이르러서는 그 반대적으로 그런 것 저런 것 다 필요 없다는 탈 율법적인 경향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그런 모순된 모습들에 식상한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은 완전한 자유를 의미한다고 해서 주일 지키는 것도 십일조 행하는 것도 교회의 예배 의식이나 질서를 지키는 것도 다 율법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그런 것에서 다 벗어나 제멋대로 신앙생활하려는 자유가 아닌 방종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갈라디아서에 대한 이해입니다. 갈라디아서 가운데서도 특별히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이 성령의 열매에 대한 바른 이해가 그 어떤 때보다 필요한 때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분명 복음 아래 있고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였습니다.
구원 받은 믿음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게 되는데 그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다보면 자연히 우리들에게서는 성령님에 의해서 맺혀지는 성품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 성품은 사랑이고 희락이며 화평이고 오래 참음, 자비, 양선, 그리고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성품은 우리가 힘쓴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노력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역사로 나타나는 것인데, 그렇다고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저절로 이런 열매들이 나타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나무 가지가 열매를 맺을 때도 보면 줄기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는데, 나무를 떠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는 것 아닙니다. 그 안에 보면 끊임없이 탄소동화작용을 하고 뿌리로부터 물과 영양분을 흡수하고 정말 그 안에서 끊임없는 활동들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주 안에 있다고 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열매 맺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님을 좇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가 육체의 소욕들과는 싸워야 하고 늘 기도와 말씀을 힘입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서 이런 품성들이 나타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많아 졌지만 열매 맺는 성도들은 그렇게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대부분의 이유가 예수를 믿더라도 율법적으로 믿고, 특별히 우리나라의 경우 유교적인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반대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핑계대고 자신이 해야 할 것에 대해서 게을리 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성령의 열매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는데, 이 말씀들을 들으면서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우리가 다시 한 번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힘입으며 성령님을 의지함으로써 우리 가운데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들이 풍성히 나타나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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