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바를 아시나요? / 행11:19-30 2005-10-14 11:35:59 read : 4223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행11:19~30
바나바를 아시나요?
Do you know Barnaba?
성령의 감동과 환상으로 베드로의 이방인 선교와 아울러서 스데반의 박해로 흩어졌던 성도들의 열정적인 전도로 점차 이방인 선교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의 박해가 이방 선교를 가속화시켰듯이 때로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의 명령을 깨닫는 수단이 된다.
“코포랄 위리암 슐츠”는 한국동란에서 21세의 꽃다운 나이로 전사한 그는 미 제5함대 소속 해병이었다.
비록 그가 총탄에 맞아 유명을 달리했으나, 그가 즐겨 부르던 찬송 135장,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일세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 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 겠네”
그의 이 찬송은 용사들에게 큰 위로를 주었고 용기를 돋아주었다고 한다.
때로 참호 속에서 전우들은 그와 함께 합창을 하기도 했는데 그의 죽음을 계기로 여러 명이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한다.
그의 한 동료 전우는 말하길 “그가 우리에게 기도하고 찬송한 후에는 어두운 밤도 그렇게 어두워 보이지 않았어요.
우린 그를 우리 중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즐거워했었지요.”라고 했다고 한다.
한 인물을 평가하는 데에는 그 나름대로 가치 판단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사회학이나 심리학, 교육학 등에서는 사람의 가치와 인격을 판단하는 데는 주로 세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고 한다고 보고 있다.
첫째는 본성이요, 둘째는 노력이요, 셋째는 환경이라고 말한다.
나무로 예를 들면 뿌리가 뻗고 양분을 많이 섭취할 수 있는 토양이 필요하며, 다음은 좋은 종자가 필요하고, 또 그 다음은 양분을 빨아올리고 가지를 내고 꽃을 피워 열심히 열매를 맺는 일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인격을 판단하는 가치기준도 이러한 요소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좋은 성품과 열심 있는 노력과 환경이 필요한 것이다.
본문 말씀 속에 나오는 바나바에게서 중요한 특징적인 면을 살피면서 그가 가진 좋은 점과 축복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나바와 안디옥 교회는 뗄 수 없는 관계다)
1. 안디옥 교회는 박해로 인해 설립되었다.
19절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하였는데 스데반의 순교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예루살렘 밖으로 흩어지게 했다.
o. 빌립은 사마리아, 아스도, 가이사랴 지방 각 성으로 다니며
전도했고 (행8:5, 40).
o. 다른 성도들 일행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면서 베니게와 구브로에서 주로 유대인들에게 전도했다.
o. 그 가운데서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 몇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 들에게도 전도함으로 안디옥 교회가 시작되었다(행11:20-21).
박해와 핍박은 선교의 촉진제가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성령 충만으로부터 권능을 소유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생명운동, 구원 운동, 전도 운동이 일어난다.
고난이 오히려 선교의 촉진제가 되며 삶에 능력이 된다.
20절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라고 했다.
안디옥에서 예수를 전파한 것은 이름 없는 평신도들이었다.
그들은 구브로 베니게에서는 접근하기 쉬운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다가 안디옥에 와서는 좀 까다롭고 논리적이며 철학적인 사고를 가진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복음을 증거 하는데 있어서 사도나 장로나 집사의 신급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복음 증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있으며, 성령 충만으로 사단 마귀를 결박하는 권능과 그의 상응한 충성이 따를 뿐이다.(행1:8, 2:4)
예루살렘 교회가 사도들에 의해서 설립된 유대인의 첫 교회라고 한다면 안디옥 교회는 平信徒들에 의해 세워진 이방인의 첫 교회였다.
안디옥은 로마제국 내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꼽는 세 번째 큰 도시였다.
당시 인구 50만이 넘는 대도시로 로마의 행정구역으로는 수리아 지역의 수도였다.
사울의 회심, 이방인 고넬료의 개종, 수리아지역의 안디옥 교회 설립으로 하나님은 이방인 선교의 준비를 끝내셨다.
이후 안디옥 교회는 복음을 소아시아와 유럽에 전파하는 세계 선교의 本部가 되었다(행13:1-3)
이 교회가 평안할 때 생긴 것이 아니라 고난, 핍박 중에 흩어진 평신도들이 세웠다.
고난은 우리에게 또 다른 축복과 능력의 통로가 된다.
2.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최초 선교사였다.
행13:2-3절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는 말씀이었다.
즉 바나바와 사울은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선교사로 파송된 사람이었다.
이들을 파송한 안디옥 교회는 어느 모로 보나 선교적인 모범적 교회였다.
o. 무엇보다 안디옥 교회는 계급의식이나 인종차별이 없는 교회였다.
거기엔 헤롯왕의 젖동생인 귀족출신의 마나엔이 있었고,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즉 흑인 출신의 지도자도 있었다.
안디옥 교회는 신분과 계급과 인종을 초월하여 지도자를 받들어 주님을 충성스럽게 섬겼다.
o. 안디옥 교회는 사랑으로 뭉쳐 일하는 교회였다.
안디옥 교회는 길리기아 다소에까지 바나바를 보내어 사울을 데려와 이방전도의 기수로 만든 역동적이며 살아있는 훌륭한 사랑의 공동체였다.
그 뿐만 아니라 글라디오 황제 때에 유대나라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지방에 있는 안디옥 교회가 수도에 사는 예루살렘교회 형제들에게 구제금을 보내기도 했다.
안디옥 교회는 통이 크고, 넒은 시각을 가졌으며, 마음이 큰 사랑을 쏟는 공동체였다.
오늘날 강한 이기주의와 잘못된 개인주의로 흐르고 있는 성도들과 한국교회는 반드시 안디옥 교회 공동체를 본받아야겠다.
바라기는 우리교회 공동체는 바나바나 바울과 같은 훌륭한 신앙인격을 갖춘 하나님의 일꾼들을 많이 키우고, 양성 배출하는 안디옥 교회와 같은 모범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루터나 칼빈, 웨슬레나 스펄젼, 무디나 빌리 그래함 같은 위대한 복음 전도자를 배출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하여 안디옥 교회 이후에도 사도행전 29장을 또다시 써 내려가는 역동적이며 생명력 있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서로 섬깁시다.
3. 바나바는 본성이 착하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24절에 보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소개하였다.
우리는 이 짧은 소개의 말만 보아도 바나바의 성품과 인성과 믿음이 어떤가를 금방 알 수 있다.
앞서 다메섹 길에서 핍박자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는 극적인 회심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아무도 이 사실을 선뜻 믿으려하지 않았다.
주님의 교회를 그렇게나 헐고 핍박하고 믿는 자를 투옥시키기에 혈안이 된 그가 개종했다고 해서 선뜻 교회 지도자로 인정하고 일꾼으로 쓰려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바로 그때 초대교회 역사의 무대에 당당히 나타나서 사울을 데려다가 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한 사람은 바로 바나바였다.
지금 누가 누군지 모르는 살벌한 현장에서 사울을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울을 교회 전면에 내세운 후 바나바는 바울보다 먼저 부름 받고 일꾼 되었으며 사역의 선배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 서서히 그 중요한 요직을 내어주고 어느 날 조용히 사역의 무대에서 모습을 감추고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바나바는 출세 지향적이거나 인기 지향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 잘 해보겠다는 사역 지향주의자요, 복음 확장지향주의자였다.
바나바는 자신이 꼭 필요로 할 때와 필요치 않는 때를 너무도 잘 분별하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필요로 할 때는 담대히 나서서 사역을 능력 있게 했고, 필요치 않을 때는 큰 일꾼을 앞장세우고 후회 없이 감사하며 사라진 착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무릇 사람은 시작할 때도 좋아야 되지만 마지막 마무리하는 순간은 그에 못치 않게 더 좋아야만 한다.
눅23:50절에 아리마대 요셉은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바로 그 사건 이전에 아리마대 요셉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아무런 소개도 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제자들까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다 도망가 버린 그 비겁함의 현장에 당당히 나타나 예수님의 시신을 자신이 묻히려고 준비한 자신의 무덤에 안장시켜 드렸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거리에서 나팔을 불거나 혹은 꽹과리 소리를 내면서 요란하게 떠드는 사람보다는 바나바나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조용한 것 같으면서도 생동감 있게 일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많은 수고와 봉사를 하는 착한 성도가 많아져야 하고 필요로 하고 있다.
그리고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꾼은 고사하고 성도도 될 수 없다.
원래 빈 그릇과 얕은 물이 큰 소리를 내는 것처럼 성령과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세상 기준과 세상 풍속에 젖어 있기 때문에 늘 요란하고 시끄럽기만 하다.
하나를 하고는 열을 한 것처럼 내세우기를 좋아하고 알아주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알아주고 축복해 주시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더 이상의 칭찬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험들 일도 없다.
또한 그는 아무리 많은 수고를 하고 일을 하였어도 차마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부끄러워서 내놓을 수 없어 늘 아쉬운 마음만 가지게 된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라고 늘 찬송하면서 구속의 은혜를 늘 충성으로 보답한다.
전에는 죄인이요, 악한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죄의 종이었던 자지만 주님의 부름을 받고 난 후 착하게 되었고, 새사람 되었으며, 성령과 믿음을 부어 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며 충성하게 된다.
이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도 크고 엄청난 것이기에 바나바와 바울과 수많은 전도자들과 선교사들은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고 발이 닳도록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주님의 그 사랑과 죄인을 구원하시는 그 은혜를 목이 쉬도록 외쳤다.
순교자들은 그 구원의 감격이 너무도 큰 것이었기에 심장이 멈추는 순간까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부르면서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주례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죄인 중에 괴수요, 만삭되어 태어나지 못한 자”같은 우리를 위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여 돌아가시기까지 나를 사랑해 주신 주님을 위해, 그의 교회를 위해 생명 다하도록 충성하며 삶의 현장에서 생동감 있고 역동적인 삶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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