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갑자기 잃었을 때 위로하는 법 2002-12-20 00:09:18 read : 1731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졸지에 사별한 경우나 병상에서 오랜 투병 끝에 사별한 경우나 이별은 슬픈 것이며 남은 가족에겐 일정 기간 극도의 슬픔을 견뎌내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의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이때 주변의 따뜻한 위로와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는데 상처만 남기는 실수를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병원 현장에서 만나는 많은 분들을 통해 갑작스런 죽음이 남은 자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며 삶을 뒤흔들어 놓는지, 주변에서는 어떻게 도와야 하는 것인지 알아본다.
말없이 함께 있어 주라
어린 자녀가 사고로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달려와 “믿었으니 천국에 갔을 거야. 모두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이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시잖니?”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슬픔을 당한 부모는 “왜 나야? 왜 나의 자식을? 나하고 무슨 억하심정이 계셔서…. 그런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아”하며 오열했다. 그때 친구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 거야”라고 한 술 더 떠서 상처를 주고 말았다. 실제 있었던 일이다.
사랑하는 남편이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내의 눈물에는 계속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행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것이 맞나요? 아직 젊고 한창 일할 나이에 주님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는데요. 혹시 제게 잘못이 있어서 이런 형벌을 주신 건가요?”
영적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면서 내뱉는 이런 질문들에 무시하거나 어설픈 답을 주지는 않았다. 진지하게 들어주고 기도하면서 그분의 마음을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경청했다. 시간이 지나자 스스로 다져지고 회복되는 것을 볼 때 시간이 주는 치유의 중요함을 깨달았다.
욥을 문병하러 온 세 친구들(욥 2:11∼13)을 주시해 보면 좋겠다. 친구들은 소문을 듣고 달려와서 보니 욥의 자녀들은 죽고 재산도 일체 남지 않았으며 아내마저 떠났다. 욥은 홀로 남아 죽을병에 걸려 동구 밖 쓰레기 버리는 곳에 앉아 온몸에 재를 덮고 기왓장으로 긁고 있었다.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재앙을 욥이 홀로 담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 친구는 칠일 칠야를 아무 소리 못하고 옆에 앉아 바라만 보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취할 자세이다. 함께 있어 주는 것이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친구들은 ‘왜’라는 의문이 생겼고, 욥의 고난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려 들었다. 무슨 변명이라도 듣고 싶었다. 친구들은 욥을 탓하고 스스로 변호하며 설명하도록 고통 당한 사람을 괴롭혔다.
슬픔을 참지 말고 울 수 있도록
주변 사람들은 고통의 사건을 명확하게 해석하고 싶어한다. 성경 말씀에서 위로를 받고 시간이 지나면 말씀으로 해석이 된다. 말씀을 받아들일 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은 더 없이 좋은 방법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침묵이 금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갑자기 죽은 어린 아이들 장례 예배를 가끔 인도한다. 문병 온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 슬퍼서 우는 엄마에게 야단을 치며 왜 우느냐는 것이었다. 아이가 천국에 갔는데 울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며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절제하라고 다그쳤다.
울음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하나님께서 주신 감정 중에 눈물은 슬픔을 쏟아내는 가장 요긴한 방법이다. 슬픈 감정을 억제한다면 또 다른 상처를 안게 된다. 함께 울어 주지는 못할망정 애도의 장소에서 야단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사고로 잃은 지체가 있다. 너무나 갑자기, 그래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조차도 한 번 보지 못하고 숨진 어린 아들의 시신을 안아야 했다. 그 엄마의 놀란 가슴과 충격 어린 눈물을 누가 어떻게 위로하겠는가!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모여든 동료들의 침묵 속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다. 형식적인 위로의 말도 없이 묵묵히 예배에 참여하여 문상객들을 안내하는 그들은 진정한 위로자였다.
또 출석 교회 목사님이 위로의 예배를 자주 인도해 주어 가족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다. 그만큼 성숙한 믿음을 소유했을 뿐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이는 지혜도 남달랐던 것이다. 지금 어느 누구도 이 아픔을 해석할 수 없지만, 어느 때인가 하나님께서 그 엄마와 가족에게 어렴풋이나마 알게 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 속에 더욱 주님을 붙잡고 기도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일이 있다. 사고 당시 현장을 사실대로 제보한 사람이 있었는데 엄마는 당시 아무 것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없었고 다만 아들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도 큰산을 넘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주변 친지나 동료들이 신속하게 현장을 살피고 문제를 도와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장례 이후 시간을 돌봐 줘야
갑자기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돕는 일은 주변 문제까지도 신속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식견이 필요하다. 장례에 관해서도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교회의 지도자가 조심스럽게 인도해야 한다.
장례에는 긴 설교보다 찬양이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찬양 가사가 마음에 전달되는 것은 물론, 믿지 않은 친지들에게도 전도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찬양은 반드시 장례 찬송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고인이 평소 좋아하던 찬양을 부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가족이 원하고 고인에게 의미가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어린 아이가 갑자기 떠났을 때 아이가 가장 좋아하던 찬양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는 이야기를 엄마에게서 듣고 여름날에 가족과 함께 불렀던 기억이 있다.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시간에 아이의 가슴이 심호흡을 하며 약간의 반응을 보였는데 아이가 좋아하던 찬송이 그의 남은 청력을 자극하였다고 본다. 둘러선 가족들이 이 모습을 보며 천국에 갔음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 분은 평소 가장 좋아하던 “주만 바라볼지라”를 임종부터 하관 시까지 계속해서 불렀던 기억이 난다. 가족이 원했고 고인에겐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가 죽었을 경우 24시간이 지나면 장례를 치를 수 있다. 어른은 대부분 사흘 이내에 치른다. 장례를 치르고 나면 남은 가족들은 너무 허전하고 빈자리가 커지는 것을 느낀다. 식탁에 앉아서 숟가락도 들지 못한 채 바라만 보다가 각자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가장이 죽고 나면 어머니와 자녀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다 울음바다가 되기도 한다. 또한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가족도 마찬가지다. 목회자는 사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 가정을 방문하여 예배드리고 생전의 추억들을 나누면서 시간을 함께 해주어야 한다. 기도를 통해 지탱할 힘을 얻도록 도와야 한다.
가정 방문 때 대화를 나누고 함께 잠을 자기도 한다. 더러는 사후에 집을 옮기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무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정 떼려고 무섬증 준다”고 한다. 그러나 성도들 중에서도 심성이나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죽은 자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기를 두려워한다. 그때 연장자나 친분이 두터운 권사, 집사님들이 가끔씩 함께 지내 주는 것도 사후 돌봄이 된다. 얼마 간 지나면 홀로 서기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결론으로, 가장 좋은 위로자의 자세는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는 것이다. 급변하는 시대를 살면서 주변에서 뜻하지 않은 갑작스런 죽음을 많이 보게 되고, 또 그것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욥의 친구들처럼 함께 있어 주어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
빛과 소금
글 / 김정숙 삼성서울병원 기독교실 원목이며 지난해 한국원목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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