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림 받으며 살아온 삶 2002-11-21 22:17:48 read : 1727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휴먼 스토리 - 김진호 신임 감독회장)
盡人事待天命…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요8:50)
● 프롤로그
감독선거가 있기 하루 전이다. 총회 취재를 나온 교계 언론사 기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감독회장선거에서 누가 감독회장에 선출될 것인가 하는 것을 화제로 애기꽃을 피웠다. 그 자리에서, 그래도 감리교회통이라 자부하는 기자들 사이에서 김진호목사가 감독회장에 당선될 거라고 생각하는 기자는 없었다. 그런데 결과는 김진호목사가 감독과 감독회장에 당선되었다.
최근 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재수는 필수고 삼수는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것이 흐름이다.
그런데 출마하자마자 단번에 감독회장까지 된 경우는 선례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근래 들어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라할 수 있다.
어쨌든 기자들의 눈으로도 그의 당선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아니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자들의 그런 시각을 일거에 접어버리고는 당당하게 감독회장이 되었다.
이것은 김진호감독회장에게는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크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예라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내공이 강한 사람이다. 이러한 내공이 그가 살아온 날을 더듬어 보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 소년 김진호
그는 경기도 수원출생이다. 그 시절은 먹고사는 것이 문제였다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였다. 대부분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겨야했고, 이밥에 고깃국을 먹는 날은 일년 중에도 손으로 꼽히는 그런 때였다. 그의 나이 11살 때, 1949년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5남매 그리고 뼛속을 파고드는 가난을 유산으로 남겨둔 채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누나가 있었지만 11세 김진호는 장남으로서 어머니를 도와 가족을 부양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누나와 남동생 그리고 두 여동생등 오남매가 친척집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12살 때 6.25가 발생해 그는 화성군 비봉면 양노리로 피난을 갔다. 그곳에서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조피득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가 교회에 다니게 된 것은 어느 정도 교회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으나 더 큰 이유는 교회에서 먹을 것을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가난에 허기지던 시절 교회에서 나눠주는 선물과 먹을 것들은 그의 발을 교회에 붙들어 매기에 충분했다.
사실 교회에 발걸음을 들일 때는 신앙외적인 이유가 더 컸다. 그러나 교회 주일학교 교사들을 통해서 그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 주일학교 교사였던 최기훈장로(성동지방)의 사랑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가난 때문에 지치고 허기지던 시절, 교회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진심으로 그를 환영하고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나이로 보면 이 나이는 이때 쉽게 자존감을 다치게 될 수 있는 그런때였다. 더구나 어려운 가정환경은 자존심 강한 그를 쉽게 좌절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학교를 통해서 높은 자존감을 가지게 되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의 사랑과 칭찬 그리고 배려깊은 보살핌은 가난의 비린내를 쉽게 털어낼 수 없었던 그의 어린시절에도 그가 삐뚤어지지 않고 바르게 자랄 수 있게 한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사실 그는 부모님으로부터 신앙을 이어 받은 것은 아니었다. 따져보면 그의 가문에서는 그가 신앙의 개척자였다. 그가 신앙생활을 하고부터 전 가족이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뿔뿔이 흩어져서 살았던 가족들도 그가 목사가 된 이후에야 함께 모여 살 수 있었다. 말하자면 자수성가형 신앙인이라할 수 있다.
고등학교때 가족들과 헤어져 보냈으며 고학으로 고등학교 다녀 외로웠던 시절 교회가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 중고등시절에 기독학생운동과 학생부흥회를 통해 신앙이 성장했다. 숭실대에서 있던 학생 부흥회는 잊을 수 없다. 외롭고 가난한 시절에 아버님 같은 이병설담임목사님의 보살핌과 지도로 당시 방황하지 않고 목회자가 되야 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 배움의 길
그가 살아온 날을 회상해보면 그는 늘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이끌림을 받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된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빈 몸으로 그는 고학을 하면서 공부를 했다. 그가 삼일학교를 다니고 또 신학을 다 마치기까지 그를 돕는 손길이 없었다면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해 나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주위의 도움을 받아 수원 삼일학교에 진학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혼자서 생활고를 해결했다. 당시 삼일학교의 특별한 배려로 매점경영을 맡게돼 그것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 당시 그는 신앙적으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고2때였다. 토요일에 수원시 주최 전국웅변대회에 수원시 대표로 참가를 준비했는데 대회 날짜가 갑자기 주일로 옮겨졌다. 주일 성수를 위해서 대회를 포기했다.
미션스쿨인 삼일학교의 교장은 ‘김군이 잘한 일’이라고 격려했고, 그 일로 인해 주일에는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결의되었다. 그는 “당시 차주은 교장선생님은 나를 어여삐 여겨 내가 신학교 등록시 첫 번째 등록금을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지금은 그 일이 신앙간증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굉장히 어려운 일을 결정했는데 어떤 열정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고등학교 웅변을 잘해 수원지역 대표로 꼽히기도 했는데 그때 자질은 이후 목사되는데 큰 힘이 되었다.
특별히 그가 감사하는 것은 어렵고 힘든 청소년기에 선생님들의 신뢰와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점이다. 삼일학교에서 특별한 배려로 구내매점을 운영하게 된 것도 다 그의 신앙과 재능을 아낀 선생님들의 사랑과 배려 덕분이었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우스게 소리로 말한다. “당시 학용품과 빵을 팔아 학업을 했기 때문에 내게는 남다른 경영마인드가 그때 생기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다.” 농담이지만 그 이면에는 눈물과 아픔을 삼키며 성실하게 노력해온 그의 삶의 흔적을 읽을 수가 있다.
이렇게 삼일학교를 마치고 1960년도에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입학을 했으나 그는 수원에서 통학을 해야만 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은 이유는 학비 충당을 위해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야 했기 때문이다. 신학교를 다니던 중 1년8개월의 군대 생활을 마쳤다. 그리고 다시 복학하여 65년도에 졸업 했다.
● 목회자 김진호
목회는 신학교 4학년때 화성군 반월면에서 실습목회를 시작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당시 감독파송 제도에 따라 파송받은 교회인 동탄면 동탄교회에서 첫 번째 목회를 시작했다. 동탄교회는 당시 교세가 40명이었으나 그가 목회하는 동안 1백명으로 부흥했다. 첫 목회지였던 만큼 열심과 성심을 다한 것이 교회를 부흥되게 한 요인이었다.
그는 34살의 나이에 마산중앙교회 부담임을 맡은후 바로 담임을 맡게 되는데, 71년도에 마산중앙교회는 5백명 모이는 교회로 당시 삼남연회에서는 가장 큰 교회였다. 그 나이에 큰 교회에 부임해 간 것은 교계 핫 뉴스였다.
그가 마산중앙교회로 부임하게 된 내막은 상당히 회화적인데가 있다. 마산이 처가집이어서 다니러 내려는데, 마침 담임목사가 병중에 있었어 주일설교를 대신했다. 그것이 인연이 돼 담임을 맡게 되었다. 그가 마신중앙교회로 부임하게 되면서 그는 불필요하게 많은 시샘을 받았다. 그러나 그 특유의 뚝심과 성실성 그리고 겸손으로 등을 돌린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그에게 돌리게 만든다.
마산중앙교회 목회 7년, 그는 큰 경험을 했다. 지금도 그 시절이 가장 인상 깊다. 그는 지금도 농담처럼 말한다. “그 교회에서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다”고.
마산중앙교회를 1천명이 모이는 교회로 부흥시키고 정릉교회로 옮겼다. 정릉교회는 당시 어려움이 있는 교회였다. 그가 부임하여 7-8년간 목회하는동안 2백명 교인을 1천명교회로 부흥시켰다.
마산중앙교회 7년, 정릉교회에서 7년. 당시 목회 철학이 ‘젊어서는 7-8년 목회하고 또 다른 사역지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월곡교회로 옮긴다.
한 지방에 있는 정릉교회 보다 교세가 작은 월곡교회 교인들의 부탁으로 큰 결심을 갖고 교회를 옮겼다. 당시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것은 나의 목회철학에 따라 결심한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회생해보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그 길이 바로 가는 길이라 생각했기에 선택했다.” 그것은 그에게서 ‘목회의 출애굽’이었다.
월곡 8년, 도봉 12년 이젠 도봉교회에서 그의 목회적 삶에 마침표를 찍을 생각이다.
● 에필로그
되돌아보면 가는 교회마다 순탄하게 목회를 한 셈이다. 큰 교회를 두고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한 작은교회를 기꺼이 선택해서 간 그의 그 도전이 오늘 그를 만들어 온 초석이었다고 보면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김진호 목사, 이제 그는 감리교회의 최고의 수장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의 좌우명은 ‘진인사대천명’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그의 생의 태도이다. 그런 그를 보면서 생각나는 성경구절이 있다.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는 이가 계시니라(요8:50)”
그가 감독회장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선언한 말은 ‘감독회장을 명예로 알기보다는 감리교회의 부흥을 먼저 생각하겠다’는 말이었다.
그의 이 공언(公言)이 공언(空言)이 아니라면 감리교회는 그의 재임기간 동안 행복한 출항을 하게 될 것이다.
어렵고 힘들게 살아온 날들은 그의 오늘을 있게한 뿌리였다. 그는 눈물과 고통 그리고 좌절을 통해서 어떤 점에서는 온몸으로 인생을 터득했다. 인생에는 아픔을 경험한 자만이 아는 아픔의 빛깔이 있다. 서민적이고 진솔하고 친화력이 있다는 평가 역시 그의 그런 삶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람들이 내게 인간미가 있다, 친근감을 가지게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그런 내 인생의, 내가 살아온 삶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
감독회장 김진호 목사, 기자가 본 가장 큰 그의 장점이라면 결코 재주가 덕을 앞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목사 김진호의 영성은 바로 그런 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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