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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영리에 기초한 성공과 번영 신학의 파산 / 한국교회 설교의 위기
    2009-08-28 12:04:55   read : 4286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월간 프리칭 9월호 원고: 특집 - 한국교회 설교의 위기

    I. 생존이 문제되는 시대의 신학은?

    용산 참사와 쌍용자동차 점거농성과 대량구속 사태에서 생생하게 드러났듯이, 자본의 이윤 극대화를 국가권력이 법치를 명분으로 뒷받침하는 사회에서, 성공과 번영은 소수 권력자들만의 전유물인 반면에, 대다수 민중은 생존 자체를 위해 또 다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정치권력과 재벌과 언론권력과 심지어 학자집단까지 혼인관계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어 조선시대의 세도정치 당시보다 더욱 공고하게 지배체제를 이루고 있는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들끼리 서로 적(敵)이 되어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이유 역시 성공과 번영이 아니라 생존 자체를 위해 벼랑끝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 "전쟁"을 하는 마당에, 한국교회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이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생존 자체를 위해 자본의 살인적인 착취와 비인간적인 중노동을 견디는 과정에서 심리적인 상처와 사회적인 소외와 영적인 빈곤함 때문에 신음하며, 자유와 해방에 대한 "타는 목마름"을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등을 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 종교권력으로 성장한 대형교회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불의한 지배체제에 맞서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하수인이 되어버린 때문이 아닌가?

    한국교회가 점차 사회적인 신뢰성마저 잃게 된 이유가 이처럼 교회가 예수 당시 예루살렘 성전처럼,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민중들을 억압하는 지배체제에 의식적으로 편승하거나 아니면 그 체제의 탈정치화(脫政治化) 전략과 행복 이데올로기라는 집단최면에 사로잡혀 그 체제의 시녀 역할에 안주하여, 사회적인 불의와 모순들을 볼 수 없도록 만드는 차단막(遮斷幕)이 됨으로써 약자들의 저항의식마저 마비시키는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버린 때문이 아닌가?

    한국교회가 주도적으로 선출한 이명박 정권이 친재벌 정책과 대북정책을 통해 한국사회의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으며, 이런 모순들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짓밟고 공안체제로 나아가고 있는 마당에, 또한 기상청이 금년 5월에 발표한 바에 따르면, 1912∼2008년 사이에 한반도 온난화 속도(섭씨 1.7도 상승)가 전 세계 평균(0.74±0.03도 상승)보다 2배 이상 빠른 현실에서,

    그리고 소위 "4대강 정비사업"으로 인해 환경파괴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판국에, 이처럼 민족 전체가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한국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 "정의와 평화와 피조물의 보전"(JPIC) 운동에 힘을 집결하지는 못할 망정, 전국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에 대해서조차 한국의 49개 교단지도자라는 목사들이 반대 성명서를 낼만큼 역사적인 반동세력으로 기능하는 또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벼랑끝으로 밀려난 사람들, 300만 명에 달하는 "백수들"과 600만 명 이상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부에 와 닿도록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최소한 그들을 심정적으로나마 위로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아니, 평생 동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왔던 교인들이 그동안 만났던 목회자들 가운데 진심으로 존경하는 목회자가 매우 드물 만큼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철저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 목회자들 가운데는 평생 동안 "십자가의 길"을 "생명의 길"이라고 설교하면서도 자신들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목회자들이 대부분인가?

    이처럼 많은 목회자들이 평생 동안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이라며 선포해왔던 설교 자체를 스스로 배반하고 부인하는 현실은 자신들의 설교가 그들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거짓이었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삶에서 실제로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의식 및 생활방식과 직접 연관된 이런 문제들은 물론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개교회 성장주의 논리와 극심한 빈부격차 구조, 그리고 종교 단체들의 보수적인 풍토와도 연관된 것일 터이지만, 그 근본적인 신학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이 글은 한국교회가 교회성장 이후 시대를 맞아 탈기독교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현재의 절박한 시점에서, 설교와 목회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한 문제제기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II.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의 교회성장신학과 그 문제점

    교파와 신학에 상관없이 한국교회의 가장 일반적인 신학과 목회 형태는 그 기본 구조가 4영리(Four Spiritual Principles)이며 그 실질적인 내용은 성공/번영의 복음(gospel of success and prosperity)일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를 잘 믿으면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될 뿐 아니라 저 세상에 가서도 축복을 받는다"는 메시지이다. 즉 예수는 이 세상의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 천당에 들어갈 티켓도 주신다는 패러다임이다.

    사회적 성공과 물질적인 번영 자체는 누구나 바라는 것인 동시에, 성서의 하나님도 누구에게나 주시기를 원하는 축복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성공과 번영을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분명한 목표와 사명으로 정하고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여 자신의 일에 매진할 때,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몇 배 더 높은 생산성을 얻게 되며 또한 경쟁에서 이기게 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로 나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해도 무한 경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이기 때문에, 아직 경쟁의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는 계속해서 성공/번영을 향해 경쟁에 더욱 매진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경쟁에서 낙오하거나 완전히 탈락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평화"(peace of mind)를 영적인 축복으로 포함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의 신학은 이처럼 한편으로는 물질적인 욕망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의 평화"와 "천당행 티켓"이라는 심리적이며 영적인 욕망 모두를 결합시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만든 매력적인 신학으로서, 순복음교회를 비롯해서 한국교회 대부분의 설교자들의 신학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많은 교회들,

    특히 지난 30년 동안 급성장한 오순절 교회들의 가장 근본적인 신학임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이 신학은 산업화-도시화가 시작된 후 거의 50년 동안 한국교회의 성장을 주도한 신학이었으며, 오늘날도 여전히 대형교회들만이 아니라 교회성장을 위해 몸부림치는 대다수 설교자들의 기본 신학인 것으로 생각된다.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의 복음이 과연 "예수의 복음"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복음"인가 하는 신학적인 문제, 즉 이 신학이 로마제국의 신학, 곧 "평화와 번영"이라는 미명 아래 극소수 특권층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신학인가 아니면 그 제국의 신학에 맞서서 예수운동이 선포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신학인가 하는 문제는 각자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나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논의하지 않겠다.

    문제는 마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복권(Lotto)에 당첨될 수 있기 때문에 자유경쟁체제이며 불평등과 모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성공/번영의 신학이 가르치는 행복 이데올로기는 사회적인 성공과 물질적인 번영이 마치 각자의 "더 높은 사다리 오르기"인 것처럼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비현실적인 환상을 심어주며, 시장자본주의체제의 비인간적인 무한 경쟁에서 "무조건 승리"하는 것이 행복한 인생의 지름길이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사명인 것처럼 가르친다는 점이다.

    이런 승리주의 신학은 도정일 교수가 {시장 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에서 역설하듯이, 자본주의가 지닌 야만성을 절대적 가치로 선포함으로써 결국에는 하나님 대신 "돈이라는 신"을 섬기도록 조장하여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며 공동체 의식과 규범을 증발시켜버림으로써 사회를 정글처럼 "돈밖에 모르는 사회"로 만들어놓았다는 점에서, 교회가 시장 전체주의의 앞잡이로 동원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로, 사회적 안전망이 거의 없는 사회에서 성공/번영 신학은 무한경쟁에 대한 승인만이 아니라 "경쟁에서 낙오하면 죽는다"는 "거세 공포"를 주입시킴으로써, 자신과 가족의 생존에만 몰두하게 만들어, 자신의 내면세계를 아름답게 가꾸고 사회적 불의와 모순들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기보다는 체제에 무조건 순응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특히 예수 당시에도 지방의 제사장들은 굶고 있는데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은 호화로운 저택을 건축하기에 바빠서 결국에는 시카리파 자객들이 대제사장들을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졌던 것처럼, 오늘날 한국의 상당수 미자립교회 목회자는 생존 자체가 어려운 반면에,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사치를 누리고 있을 만큼 교회도 양극화되어 있는 현실에서,

    대형교회들이야 예루살렘 성전체제처럼 항상 권력자들과 부자들을 편드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그들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지만, 상당수의 미자립교회 목회자들까지 교회성장을 위해 성공/번영의 신학을 선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기득권 유지와 직결된 보수적인 메시지를 선포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 복음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 불의와 구조적 모순들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그런 불의와 모순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려버리거나, 그런 불의와 모순들이 예수의 재림이나 휴거를 통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으로 선포함으로써, 이 세상을 좀더 사람다운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저항의식을 마비시킨다는 점이다.

    셋째로, 일반적으로 에큐메니칼 신학은 사회정의(이웃 사랑)를 통한 인간화를 강조하는 반면에, 에반젤리칼 신학은 개인적인 경건과 영성(하나님 사랑)을 통한 내세 구원을 강조함으로써, 성공과 번영에 대해서도 에큐메니칼 신학은 공동체 모두를 위한 하나님 나라, 특히 사회적 약자들과 낙오자들이 충분히 인간답게 사는 하나님의 통치를 추구하는 반면에, 에반젤리칼 신학은 개인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예수의 가장 큰 계명(누가 10:25-27)을 나누어 갖고 있는 에큐메니칼 진영과 에반젤리칼 진영이 여전히 서로 반목하는 형편이지만, 교회성장에 성공한 교회들이 대부분 에반젤리칼 진영이기 때문에, 에큐메니칼 신학이 교회 현장에서는 더욱 위축되어버림으로써, 교회성장신학은 결국 한국교회의 보수화와 역사적인 반동세력의 기초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III.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 신학이 파산한 증거

    그러나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 신학은 교회성장신학으로서 이미 파산한 것으로 보인다. 그 분명한 증거는 빠르게 몰락하고 있는 서구 교회를 비롯해서 한국교회도 성장이후 시대를 맞아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성공과 번영을 가장 고르게 누리고 있는 나라들, 예를 들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경우, 기독교인의 비율이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매우 낮을 뿐만 아니라,

    성공과 번영을 가장 열심히 추구해왔던 유대교인들도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에서 사회적 성공과 물질적 번영이라는 교회성장신학의 목표가 교회성장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자가 되고 풍요를 구가하는 만큼 교회를 떠난다는 말이다. 개신교의 주류 교단들(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루터교 등)도 급속하게 몰락하여 유럽과 미국 등에서 이미 "교회의 죽음"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현실이다.

    즉 30년마다 교인수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유럽의 교단들은 앞으로 30년 이후에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할 것으로 예상된다.(러시아 공산주의 혁명 이후 지난 70년 동안 성직자 5만여 명이 처형당했다가, 1990년대 초부터 수백만 명이 세례를 받고 교회수가 현재 13,000개로 급증한 러시아 정교회의 경우는 여러 요인들로 인해서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최근에는 인구의 60%가 정교회 신자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1% 미만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교회에 출석하기 때문이다). 유럽과는 달리 자유시장 체제 속에서 경쟁하고 있는 미국의 주류 교단들 역시 최근 보도에 따르면 대체적으로 30년 후에는 교회의 절반 정도가 문을 닫아야 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이미 교인수가 감소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안티기독교운동을 비롯해서 사회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 역시 이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 신학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IV.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 신학이 파산한 이유들

    1) 물질적 풍요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이다.

    첫째로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 신학이 교회성장신학으로서 파산한 현실적인 이유는 전 세계적으로 무한경쟁하는 시장경제구조와 지구적자(Earth Deficit)와 맞물린 경제적 침몰의 소용돌이(downward spiral) 때문에 물질적 풍요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현재의 멸종 규모와 속도로 볼 때, 지질학적으로 지난 6,500만 년 동안 지속된 신생대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인류문명은 이미 물질적 풍요의 시대가 끝나고 생존과 결핍의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즉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 신학은 세계경제가 전반적으로 성장하여 교인들의 살림살이가 향상되고 해마다 더욱 풍요를 누리게 되던 시절에는 확실히 호소력이 있었으며 그 메시지의 현실성이 분명히 입증되었지만,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무한경쟁과 그 모순들로 인해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성공과 번영이 아니라 생존 자체가 목표가 되었을 만큼, 장기적인 경제불황과 특히 젊은층의 높은 실업률 속에서 현실적인 성공/번영의 환상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경제구조라는 것이 빈부격차가 더욱 악화되는 20대80의 냉혹한 구조일 뿐만 아니라, 인구폭발과 자원고갈, 환경파괴와 기후변화 문제 등 포괄적인 지구적자와 맞물려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경제적 침몰의 증상들, 예컨대 유가상승, 곡물가격 상승(2005년에서 2008년 사이의 3년 동안에만 국제곡물시장에서 옥수수와 밀은 세 배가 뛰었고 쌀 가격은 다섯 배가 뛰었다) 속에서, 경쟁에서 성공하여 물질적 번영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더 이상 현실적인 성공/번영의 복음을 믿을 수 없게 되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말이다. 이런 현실은 지난 3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급성장한 오순절교회들의 미래 역시 장담할 수 없게 된 사회경제적 이유를 말해준다.

    2) 성공/번영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 신학이 교회성장신학으로서 이미 파산한 이유는 이 신학이 결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는 신학이라는 점 때문이다. 행복 = 소비/욕망이라는 일반적인 행복방정식은 소비를 많이 할수록 더 행복해지지만, 욕망은 많을수록 불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공/번영 신학은 인간의 자연적인 욕망, 곧 남보다 더 잘 살고 싶어하며 출세하고 싶어하는 자연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내면세계의 온전함과 평화를 추구하도록 이끌기보다는 오히려 물질적인 욕망을 노골적으로 자극하여, 인간의 소유욕과 탐욕을 끊임없이 조장하고, 소유와 소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확인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지난 반 세기 동안 소비가 엄청나게 증가하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상당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기는커녕, 상대적인 박탈감에 시달리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즉 경제적인 성공과 번영은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신학은 내면의 풍요함에 관심을 집중하도록 만들기보다는 자기의 외부, 곧 새로운 상품들과 이웃들의 소비수준에 관심을 기울이는 레이더(radar) 형 인간을 만들어, 자본이 광고를 통해 인위적으로 창출하는 무한 욕망 앞에서 항상 부족함을 느끼며 불만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국은 OECD 10위를 넘나드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구조조정이 일상화되고 "고용 없는 성장"이 확대되어, 청년실업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극심한 불안을 겪을 뿐만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도 고용불안, 성과주의, 작업속도 증가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병들어 가고 있으며, OECD 최장 노동시간을 견디며 경제성장을 추구한 결과 한국인의 경제적 행복지수는 100점 만점에 39.9점으로 나타났다(한겨레 21, 2008/1/29)

    . 또한 하루 평균 33명이 자살하는 한국사회(2005년)는 그만큼 절망이 깊은 사회임에 틀림없으며, 한국교회의 성공/번영 신학은 이런 상대적 박탈감과 절망감을 조장하는 데 일조해왔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3) 성공/번영 신학은 이기주의와 비윤리성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 신학이 파산한 이유는 이 신학이 이기주의와 비윤리성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이 신학은 기독교를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저 세상에서도 복을 받는 종교"로 만들어, 결과적으로 하나님보다는 돈을 섬기도록 만들며, 보상심리에 기초하여 인간의 탐욕과 이기주의를 조장하는 신학일 뿐 아니라, 4영리로 요약된 기독교 교리를 객관적인 진리로 가르치고 믿음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결국 믿음과 생활을 분리시켜 언행불일치를 초래할 가능성이 많고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킴으로써 교회의 사회적 신뢰성을 상실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신학은 본질적으로 개인적 차원의 성공/번영을 추구하는 이기주의를 조장하며, 개인구원의 "은총"만 있을 뿐이지 제자직의 "책임"이 강조되지 않는 신학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믿을 만한 사람 찾기 힘들다"는 말을 흔히 듣게 되는 이유는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신학이 이처럼 믿음과 생활을 분리시키는 틀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신학은 예수의 종교를 본래의 "길의 종교"가 아니라 "믿음의 종교"로 둔갑시키고, 구원의 은총을 "값비싼 은총"이 아니라 "싸구려 은총"으로 둔갑시킨 전형적인 신학이다.

    이 신학에 따르면 설교자는 청중들에게 예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한 믿음을 요구할 뿐, 설교자 자신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서 이 세상의 힘과 유혹에 대해서 죽고 자기의 욕심을 비워 아가페적인 삶을 살아내는 본을 보여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즉 이런 신학에 입각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처럼 육신이 건강하고 심령이 평안하며 부자가 되는 일에 몰두하면 될 뿐이지, 예수를 자신의 구체적인 생활의 주님으로서 모시고 따를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대형교회 목사들이 종종 감투를 얻기 위한 선거비용으로 엄청난 교회 예산을 임의로 사용하기도 하며 교회를 세습시킬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인 행동들을 한 것 때문에 사회적인 지탄을 받으면서도 정작 본인 자신은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들의 신학이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 신학으로서, 본질적으로 예수는 구원 역사의 무대 위에서 주인공인 반면에 신자들은 무대 아래의 팬(fan)으로 충분할 만큼 특별히 제자직을 요구하지 않는 믿음의 종교로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신학에 따르면, 예수는 우리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죄많은 인간들로서 죄없는 예수를 따를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십자가 위에서 이미 감당하였기 때문에 우리들은 예수를 찬양하고 감사하면 되지 굳이 예수를 따를 필요는 없으며, 또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를 따라서도 아니 된다는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 심

    지어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에서, 솔직히 자신은 "예수처럼 살고 싶지 않으며 교인들에게도 예수처럼 살라고 가르칠 마음도 없다"고 실토하는 목회자들을 종종 만나게 되는 것은 제자직의 "쓰디쓴 그리스도"(bitter Christ)보다는 성공/번영 신학의 "달콤한 그리스도"(sweet Christ)의 매력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신학의 결과는 설교자와 교인들 모두를 위선자로 만들기 십상이며 생각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등지게 만들고 있음이 분명하다.

    4)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라는 반지성주의 때문이다.

    넷째로,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 신학이 교회성장신학으로서 파산한 또 다른 이유는 이 신학이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물음을 던져주어 주체적으로 씨름하는 과정을 거쳐 신앙적인 성숙에 이르도록 격려하기보다는 오히려 신앙 문제에 대해 명쾌하고 일방적인 정답을 주입시켜 단순히 암기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에, 교인들이 실존적인 위기를 겪게 될 때 가장 절박하게 신앙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주체적인 단계를 거치지 않은 채 주입된 신앙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오늘날 고등학교 졸업자의 80% 이상이 대학교육을 받는 한국사회에서, 이 신학은 지적인 측면에서 너무나 단순하고, 한국교회의 대다수 목회자들이 그 단순한 신학을 기독교 전통의 세부적인 내용으로 채울 수 있는 신학적 훈련을 받은 기회가 드물어서, 흔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라고 윽박지르게 되는 것이 오늘날 고등교육을 받은 대다수 젊은 교인들에게는 지적인 정직성의 측면에서 걸림돌이 되어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두드러진 집단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더군다나 이 신학은 교회 밖에 있는 비종교인들에게는 더욱 설득력이 부족한 신학이다. 예를 들어, 4영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론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건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면, 예수 처형에 앞장 선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음모, 가롯 유다의 배반과 본디오 빌라도 총독의 예수 처형 모두가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뜻이며,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폭력과 죄악 역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폭력과 죄악이라고 정당화하는 것이 되고 만다.

    더군다나 대속론의 핵심인 안셀름의 소위 만족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 자신의 정의와 명예가 훼손되었기 때문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보혈로 인해서 하나님 자신의 정의와 명예가 회복될 조건을 만족시킨 것이라면, 결국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의 명예와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시킨 엄청난 "아동학대"에 해당한다는 논리적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안셀름의 만족설이 발표된 시점이 제1차 십자군 전쟁을 준비하던 당시였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정의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것처럼,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을 무슬림들에게 빼앗겨 기독교 국왕들의 정의와 명예가 실추된 것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십자군 전쟁에 나아가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라는 정치적 선전과 세뇌공작의 일환이었다는 비난도 피할 수 없을 만큼 오늘날에는 설득력이 부족한 신학이라는 말이다.

    한 발 더 나아가 4영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예수의 동정녀 탄생 교리일 것인데, 이 교리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예수에게는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없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예수는 Y 염색체가 없는 비정상적인 남자였다는 말이 되며, 예수 이외에도 처녀에게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알렉산더 대왕, 플라톤, 아우구스투스 황제, 네로, 석가모니, 크리슈나 등도 모두 예수처럼 신성을 지닌 존재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 신학은 지나치게 단순하며 오늘날에는 지적인 면에서 설득력이 부족한 신학임이 분명하다.

    5) 반생명적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 신학이 파산한 이유는 오늘날과 같은 기후붕괴 시대에, 다음 세대의 행복만이 아니라 인류의 생존 자체가 걸린 이 환경위기를 가장 근원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들이 소비의 절대적 수준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신학은 인간의 물질적인 욕망과 소비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조장한다는 점에서 다음 세대의 행복과 인류의 생존 자체를 더욱 위협하는 파괴적인 신학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총에너지 사용량 중에서 화석연료 의존도는 현재 약 83%로서 일본의 73%에 비해서도 상당히 높은 현실에서, 경제적 성공과 물질적 번영의 신학은 화석연료를 많이 소비하는 환경파괴적인 소비와 충동적 구매를 통한 낭비성 소비, 그리고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과시적 소비를 조장한다는 점에서 생명파괴적인 신학이다.

    비록 경쟁에서 낙오되어 돈이 없으며 생존 자체가 문제된다 하더라도 노동의 신성함과 검소한 생활, 가족의 소중함과 사랑의 기쁨, 그리고 무엇보다 끝 모를 우주 안에서 지금 살아 숨쉬고 있는 생명체로서의 감격과 타인들을 돌보고 섬기는 활동을 통한 공동체의 아름다움 등에 목말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성공/번영 신학은 더욱 큰 자괴감과 절망감만을 안겨주는 신학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중들에게는 오히려 올무가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가는 말: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씩 부인했던 이유

    이런 이유들 때문에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 신학이 교회성장신학으로서 이미 파산했으며, 그 때문에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쇠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신뢰성마저 상실하게 된 것이라면, 이 신학과 설교 패러다임을 대체할 다른 대안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지난 5년 동안 예수 아카데미와 한국기독교연구소가 주최한 "예수목회세미나"는 그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점만 밝히겠다.

    예수와 생사를 같이 하겠다고 장담했던 베드로(막 14:31)가 예수가 체포된 후에 예수를 세 번씩 "모른다"고 부인한 것은(막 14:66 이하 및 병행구절) 무력하게 체포된 예수는 베드로가 기대했던 군사적인 승리자 메시아와 너무나 달랐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가 알고 있던 예수, 곧 신적인 기적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던 예수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회적 성공과 물질적 번영을 도와주며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푸는 신적인 능력의 예수만 믿고 환호했지, 가난하고 병들어서 사람 대접조차 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편이 된 예언자 예수, 그들에게 하나님의 무차별적인 사랑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느라 예루살렘 성전의 권력자들을 비판하고 그 체제에 저항하여 미움을 받은 저항자 예수, 체포되면서도 폭력을 거절한 비폭력 평화주의자 예수에 대해서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모습이 오늘날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 신학을 선포하는 설교자들의 모습은 아닐까?

    *이번 여름 갈릴리신학대학원 박사과정 집중강의에 참석해서 들은 홍 박사님의 강의를 기초로 해서 서둘러 제 나름대로 살을 붙여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대안으로 제시할 예수목회의 내용과 방법론을 발전시키는 것은 좀 더 고민한 후에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김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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