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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나라 함께가자/마26:36-46
    2009-06-23 11:53:25   read : 6120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높은뜻숭의교회 김동호 목사 설교 6월 21일

    공부를 잘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무엇일까요? 지적인 능력의 차이가 사람마다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부를 잘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차이가 지적 능력의 차이는 아닙니다. 물론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적 능력의 차이보다는 학습태도와 자세의 차이가 더 큽니다.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집중력입니다.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능력이 공부를 잘 하는 사람들은 대개 탁월합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 오락프로그램에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개발의 선구자인 안철수씨가 나왔습니다. 군대 가기 전날 새벽까지 미켈란제로라는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어 완성하고 입대를 하였답니다. 그런데 군대에 입대한 후에 생각해 보니 집에 자기가 군대에 입대한다는 이야기를 못하고 왔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이미 결혼하여 아내와 아이들도 있었다는데 말입니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그 밖의 다른 일은 전혀 생각할 줄 모르는 그 탁월한 집중력이 탁월한 성과를 가져 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집중력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성취동기입니다. 공부하는데 있어서 성취동기가 강하다는 것은 공부하는 목적이 분명한 것을 의미합니다. 왜 공부하는지 그 목적과 목표가 분명한 사람이 공부를 잘 한다는 것입니다. 성취동기가 강해지면 따라서 집중력도 강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취동기가 약하게 되면 집중력도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 사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잘 산다는 말은 돈 많은 부자로 산다는 말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돈 많은 부자로 사는 것도 좋지만 한번 왔다 가는 인생 정말로 사람답게 잘 살다 가는 것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중요합니다.

    우리는 정말 잘 사는 것에 대한 욕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부자로 사는 것에는 욕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보다 중요한 정말로 잘 사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욕심이 없습니다. 행복은 부자로 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잘 사는데 있는데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 사는 것에 대한 욕심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잘 사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왜 살아야만 하는지 삶의 목적에 대한 생각이 분명해야 합니다. 삶의 목적에 따라 우리의 삶의 자세와 모습이 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잘 사는 사람이 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그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소유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치를 높이는 것입니다. 소유가치가 높은 사람은 잘 사는 사람이 아니고 부자입니다. 존재가치가 높은 사람이 잘 사는 사람입니다. 존재가치는 존재목적에서부터 옵니다. 목적대로 존재할 때 그 존재는 비로소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잘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강대상의 마이크는 특별한 존재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작은 목소리를 크게 확성하는 목적입니다. 이 마이크가 그 목적대로 존재할 때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이크가 그 목적을 상실하게 될 때 다시 말해서 고장 나게 될 때 마이크는 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컴퓨터 바이러스는 컴퓨터를 파괴합니다. 본래의 기능과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만듭니다. 사탄은 우리 인간을 파괴하기 위하여 죄라고 하는 바이러스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만든 죄라고 하는 바이러스의 핵심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삶과 인생의 목적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존재의 목적을 상실하게 함으로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게 하려는 것이 사탄의 의도입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할 때 선악과를 먹으면 네가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삶의 목적을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삶의 목적은 바뀔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삶의 목적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인간은 목적을 상실한 존재가 되었고, 목적을 상실함으로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고장 난 마이크는 쓰레기 통에 버려야 하듯 우리 인생들도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 지옥에 버려져야 할 존재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에게는 12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제자는 그냥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마저도 엄밀히 말하면 제자들
    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무척이나 외롭고 고통스러우셨습니다.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제자들과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한 시간도 예수님을 위하여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깨어 있지 못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고민이 자신의 고민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고민과 자신의 고민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과 자신의 삶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도 엄밀히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제자였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오순절날 성령을 받고 비로소 제자가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제자들에게 있어서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제자들의 삶의 목적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해 졌다는 것입니다. 성령 받고 거듭난 제자들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았습니다. 누가 더 높으냐를 가지고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주를 위하여 살았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아니 주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산 것이 아니라 주와 복음을 위하여 죽었습니다. 참 삶은 역설적입니다. 저들은 죽음으로 살았습니다. 죽음으로 비로소 잘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목적을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자신이 자신의 삶에 주인이었던 것을 끊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삶의 목적을 되찾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높은 뜻 교회는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려고 하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교회의 목적이 되지 않으려고 부족하지만 발버둥질 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교회를 해체까지 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요즘 집중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의 자활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우리 교회의 목적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예배당부터 짓지 않고 재단부터 세운 것입니다. 탈북자를 위한 공장부터 세운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2006년 8월 열매나눔재단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일 년을 준비하여 2007년 7월 서울시로부터 재단설립 인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5억 원 정도면 재단을 설립할 줄 알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결국은 70억 원을 투자하게 되었습니다. 5억 원 인 줄 알고 도전하였다가 그것이 70억 원이 되면 포기해야 하는데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준비 된 현찰이 없어서 20억 원은 현찰로 내고 50억 원은 매년 10억 원씩 5년 동안 내기로 공증을 하고 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또 일 년 가까이를 준비하여 2008년 5월 드디어 무모한 도전이라고 모두 생각했던 희망공장 1호 즉 파주의 박스 공장 메자닌 아이팩을 설립하였습니다. 매달 몇 천 만 원 씩 적자를 보았습니다. 공장에 위기가 닥치기도 하였습니다. 그 위기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사업에 경험이 없는 저와 재단 식구들이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힘든 것은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누구에게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수 천 명의 교인들이 있지만 그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제게는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 함께 걱정해 주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발 벗고 나서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위기를 나름대로 빨리 발견하고 대처하여 아슬아슬하게 그 위기를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적과 같이 아무도 믿지 못했던 공장의 흑자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2 공장과 제 3 공장을 설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흑자를 내기 시작한 제 1 공장을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400 여 평 적지 않은 공장이 좁아서 마당에 천막까지 치고 물건을 쌓아놓은 공장을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박스를 커팅하는 기계와 프린팅하는 기계를 보여드리고 싶고 이제는 그와 같은 기계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박스를 만들어내는 새터민 우리 식구들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공장들은 우리나라에서 새터민들이 직원이 되어 움직이는 기업 중에 이미 대표가 되었습니다. 특히 새터민들을 고용하여 만든 사회적 1호 기업이 되었습니다. 특히 성공모델을 제시한 1호 기업이 되었습니다.

    박스 공장은 이제 미국으로부터도 주문을 받는 기업이 되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연간 18억 원의 계약을 따냈습니다. 며칠 후 우리 사장이 계약을 하러 미국으로 갑니다. 제 2호 공장인 메자닌 에코원은 블라인드 커튼을 만드는 공장인데 지난 주 복지부 장관실 커튼을 우리 공장에서 생산한 우드 블라이드 커튼으로 바꾸어 달았습니다. 복지부와 노동부 그리고 통일부가 우리 재단과 공장을 적극 지지해 주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적자이지만 제 2 공장도 곧 좋은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 주리라 믿습니다. 우리 재단과 공장의 기업이미지가 너무 좋기 때문에 우리에게 점점 더 많은 기회들이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쯤 되면 제 마음 고생은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흑자도 내고, 주문도 늘어나니 이제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인 줄 알았습니다. 저는 지난 주 사회연대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으면서 연대보증을 서야만 했습니다. 공장이 주문을 많이 받아 그것을 생산하려니 예산에 없던 비용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대출을 받았습니다. 우선 1 억 원을 대출 받았습니다. 은행은 제가 재단의 대표이기 때문에 연대보증을 해야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공장이 갚지 못하면 재단이 갚고 재단이 갚지 못하면 제가 갚아야 한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재단의 사무처장은 그것이 미안하여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저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사인을 하였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하였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말 재단까지도 그 돈을 갚지 못해 내가 갚게 되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사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생각도 들었습니다. 공장과 재단에서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닌데, 공장이 잘 된다고 내게 어떤 유익과 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공장이 잘못되면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니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솔직히 들었습니다.

    교회가 적지 않은 투자를 하였지만 공장이 성공적이 되어 늘어나다 보니 그 한정된 예산으로 이런 일들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미처 예상 하지 못했던 변수들 즉 어려움이 생기면 그것을 해결할 재정적인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 우리 공장에 노벨평화상을 받으셨던 무하마드 유누스 총재께서 다녀가셨습니다. 3년 전에도 우리나라에 서울평화상을 받기 위하여 오셨다가 우리 교회가 운영하고 있는 자활기관이 김밥천국을 방문하신 적이 있으셨는데 이번에 이화여자대학교의 초청으로 오셨다가 우리 재단 소식을 들으시고는 정말 바쁘신 시간을 쪼개어 제 1공장과 제 2 공장을 방문해 주셨습니다.

    우리 공장 방문을 마치시고는 귀국을 하셨는데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시는 동안 통역을 하였던 제 큰 아이에게 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간단하게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열매나눔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을 방문했던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열매나눔재단에서 이해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 컨셉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열매나눔재단처럼 사회적 기업의 컨셉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중략) 열매나눔재단의 사례를 제가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올려서 다른 사람들이 열매나눔을 알게 되고, 열매나눔재단의 조언을 듣게 되기를 원합니다. (중략) 사회적 기업과 관련하여 투자가 필요하다면 알려주세요. 도울 수 있는 친구들에게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격려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빈민자활의 세계적인 대부요 그 때문에 노벨평화상을 받으신 분이 그렇게까지 감동하는 것을 보고 그 동안 우리 교회가 한 일이 헛된 일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감사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비단 유누스라고 하는 한 사람의 격려가 아니라 그를 통한 하나님의 격려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 일을 도와주시고 밀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이루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유누스 총재는 제 1공장에서 잠깐 연설을 하시면서 30명이 성공했다면 3천 만 명도 성공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름이 끼쳤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시작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이 일에 동참하고 헌신하는 사람을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저들에게 축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 일에 참여하고 헌신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은 영육간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복으로 축복해 주실 줄 저는 믿습니다. 제 말을 흘려듣지 마시고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 동역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뭐라고해도 열매나눔재단과 탈북자들과 빈민들의 자활을 위한 공장들은 우리 교회 교인들의 헌신과 헌금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상을 우리 교회 교인들이 일 등으로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일을 시작한 주체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저는 우리 교회 교인들이 모두 다 능동적인 참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여자이기는 하지만 능동적이라기 보다는 수동적입니다.

    우리가 이 일에 보다 적극적이지 못하고 능동적이지 못한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는 까닭은 아직도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회연대은행에 연대보증인으로 사인을 하면서 느꼈던 외로움을 어떻게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외로움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그 조그마한 외로움을 느끼면서 감히 예수님의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게 너무 힘들고 어려우셔서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으신 제자들에게 그동안은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기도했지만 이번만큼은 너희들이 나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탈북하여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여 사회적인 빈민과 약자로 전락하게 된 새터민들을 구하기 위하여 예배당 건축을 우선 포기하고 교회까지 해체하면서 나름 작은 십자가를 지려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겁습니다. 힘듭니다. 외롭습니다. 구경하지 마시고, 판단만 하지 마시고,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함께 이 짐을 져 주시기를 바랍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재단과 우리 재단이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인 희망공장에 대한 소문이 나면서부터 우리를 돕고 함께 하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좋은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다가 정작 이 일을 시작한 우리 높은 뜻 교회의 교인들은 점점 소극적이 되고 방관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염려가 인간적으로 듭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여러분 이 일에 방관자가 되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일어나 함께 이 귀한 사역을 감당하자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면서 엉뚱하게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하였던 말이 생각납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음이 이 때를 위함인지 누가 아느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건강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이런 저런 능력을 주심이 이와 같은 일을 하라고 하심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자신을 위하여 쓰지 말고 하나님을 위하여 쓸 줄 앎으로 정말로 잘 사는 사람의 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바람처럼 임하소서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본문 - 사도행전 2장 1 ~ 4절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기준을 잡아주는 성경은 저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기록했고, 성경의 말씀이 이해되고 믿어지는 것도 성령의 역사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중생할 수 없고 영적인 승리생활도 불가능합니다. 이 시대는 성령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성령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성령님에 대한 지식이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님이 어떤 분인지 안다면 성령의 충만을 받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어떤 분이라고 한 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님을 보다 잘 표현하기 위하여 은유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본문은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120문도에게 성령께서 임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렸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였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바람처럼 불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바람처럼 임하신 성령님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세상에 바람의 종류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좋지 않은 것을 설명할 때 바람을 사용합니다. 기혼자가 배우자 외에 다른 사람과 이성적인 교제를 하면 바람 났다고 말합니다. 주부가 살림에 관심이 없이 춤만 추로 다니면 춤바람 났다고 말합니다.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망상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에게는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하는 일마다 안 되고 망하면 시련의 바람이 분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말한 그런 바람은 많이 불면 나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망하게 하는 바람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을 바람으로 묘사할 때는 그렇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바람은 불면 불수록 좋은 바람입니다.

    그럼 바람을 통해서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성령님은 어떤 분인지 알아봅시다.

    1. 성령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지구상에 바람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바람은 있습니다. 한국에도 있고 미국에도 아프리카에 가도 바람은 있습니다. 바람은 교회에도 있고 가정에도 있고 직장에도 있고 학교에도 있습니다.

    바람이 어디든지 있는 것처럼 성령님도 어디든지 계십니다. 다윗은 시139:6-10에 보면 성령님의 편재성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아마 다윗이 하나님의 성령님을 피해 살아보려고 시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성소를 떠나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있으면 성령님이 안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서 자신의 시도가 얼마나 미련한 일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유태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하시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어머니가 자기의 아들을 랍비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랍비가 아이에게 질문을 합니다. “얘야, 하나님은 어디 계시니? 네가 나에게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말을 해 준다면 동전 한 개를 주겠어.” 이 랍비는 아이가 설마 이처럼 어려운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 대답합니다. “선생님, 제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해 주시면 저는 선생님께 동전을 두 개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하나님이 어디에 안 계신가를 말해줄 수 있습니까?” 이 아이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어디에건 다 계십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임재의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임재의식이 가득한 사람은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함부로 생각하고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요셉은 임재의식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보디발의 아내를 뿌리쳤습니다. 그가 가진 임재의식이 그를 경건하게 살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임재의식이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예배당에 계시는 것처럼 우리의 가정과 삶의 현장에 분명하게 존재하시며 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성령님이 여기 계신다"라는 신앙으로 행하십시오.

    임재의식이 충만하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헬라의 알렉산더는 헬라,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전쟁 중에도 잠자리에 눕기만 하면 코를 골며 잠을 자곤 했습니다. 어느 날 신하가 물었습니다. “대왕은 어떻게 그런 위험 속에서도 그처럼 편하게 마음 놓고 깊은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그의 대답은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는 파르메니온 장군이 있기 때문이다”였습니다. 파르메니온 장군은 알렉산더의 수행명장이었습니다.

    시편 4:8에서 다윗은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파르메니온 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하므로 평안할 수 있습니다.

    2. 성령님은 자신의 임의대로 모든 것을 하십니다.

    요 3:8을 보면 바람이 임의대로 분다고 말합니다. 임의대로 라는 말의 의미는 '마음대로' 혹은 '의지하는 바를 따라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람의 방향을 사람이 조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선풍기 바람 같은 작은 바람은 방향을 조정할 수 있지만 태풍처럼 큰바람의 방향을 인간이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령님을 바람으로 묘사한 것은 성령님께서는 인간에 의해서 조정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임의대로 움직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보면 생각지 않았던 방법으로 역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히브리민족이라는 구별된 특별한 백성들에게만 역사하신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만 역사하시지 않았습니다. 요나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인 니느웨성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요나에게 폭풍을 만나게 하시고 그를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게 만드셨습니다. 요나와 같은 고정관념이 오순절을 통해 성령 받은 예루살렘 교회 안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는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되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태풍의 방향을 바꾸려고 하는 시도처럼 성령님의 방향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계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성령께서는 핍박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셔서 예루살렘 교회를 두들기셨습니다. 핍박을 받은 교회는 성령의 방향성을 따라 흩어져 복음을 이방인에게도 전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와 동일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방향은 교회 안에서 교회 밖으로 부는데 신자들은 성령의 방향을 교회 안에 묶어두려고 합니다. 흐르는 물을 막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물이 쌓이게 되고 댐을 넘어 물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흐르듯이 성령의 방향을 막을 수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미국에는 강력한 바람인 토네이도가 있습니다. 1953년 6월 미국 매사츄세츠 주에 불어닥쳐 철강으로 만든 송신탑을 부러뜨린 토네이도는 시속 550km에 이른 것으로 추정됐고 일부 학자들은 음속과 같은 시속 1,220km의 초토네이도도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바람을 막기 위하여 나무판자 하나 들고 서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바람을 막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성령의 방향을 바꾸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돛단배는 돛을 바람에 맞기고 바람을 타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성령의 바람을 타는 돛단배와 같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대로 자신을 맡기고 성령의 인도와 지도를 따라 사십시오. 그러면 성령님은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항구로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3. 성령님은 보이지 않지만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람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는 있습니다. 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이 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에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은 인간처럼 몸으로 존재하지 않으시고 영으로 존재하십니다.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통해서 성령님을 체험하고 성령님의 하시는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전기를 볼 수 없지만 감전이나 전등의 빛 혹은 기계가 돌아가는 것들을 통해서 전기를 체험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을 체험하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그분을 인격적으로 믿고 인정해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기도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해보십시오. 성령을 볼 수는 없지만 그분이 일하시는 것을 보며 그분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기도에 관한 예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미국의 달라스 신학교는 1924년에 설립되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학교가 거의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학교는 재정난으로 파산 선고를 내려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어느 날 정오에 채권자들이 와서 차압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날 아침 그 학교를 설립한 사람들이 총장실에 모여 하나님이 해결해주실 것을 믿고 기도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임에서 [해리 아이언사이드] 박사가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신선하고 솔직한 그의 성격대로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저희는 수많은 언덕 위의 소 떼도 다 당신의 것임을 압니다. 그것들을 좀 팔아서 저희에게 돈을 보내주십시오" 바로 그 때에 부츠를 신고 목과 가슴을 드러낸 셔츠를 입은 키가 크고 전형적인 택사스 사람이 학교 재정 당당 사무실 안으로 천천히 걸어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차 두 대 분의 소를 막 대다 팔았습니다. 그것으로 사업을 할까 생각해보았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돈을 달라스 신학교에 기부하기를 원하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돈이 필요한지 어떤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기 수표가 있습니다." 비서는 그 수표를 받아 가지고 총장실로 들어갔습니다. 총장이신 [루이스 스패리 췌이퍼] 박사는 수표의 액수를 보니 이 학교가 빚지고 있는 정확한 그 금액이었습니다. 총장님은 외쳤습니다. "해리 박사, 하나님께서 그 소들을 파셨네!"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성령님을 체험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부족하고 적극적으로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체험하지 못합니다. 수련회를 가거나 부흥회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합니다. 모임 자체가 영적 분위기가 충만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마음을 닫고 있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다보면 성령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수련회나 부흥회가 끝나면 받은 은혜를 상실해 버리고 성령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수련회나 부흥회 때처럼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고 또 그 때처럼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수련회나 부흥회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성령님을 인정하고 기도를 쉬지 않는다면 성령체험은 계속 될 것입니다.

    4. 성령님은 생명을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 부모를 통해서 부모의 생을 이어 받아서 출생하듯이 영적인 출생은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부모 없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없는 것처럼 성령 없이 영혼의 생명을 소유하거나 유지할 수 없습니다.

    창 2:7을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지만 마네킹처럼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되어 살아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생기는 하나님의 숨, 곧 성령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기(生氣)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의 문자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숨 바람'입니다. 마네킹처럼 죽은 것 같던 사람에게 하나님의 숨 바람이 들어가니 살아나게 된 것처럼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성령님을 받으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에는 마른 뼈들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 뼈들을 보게 하시고 그 뼈들에게 대언하게 하셨습니다. 에스겔은 순종하여 뼈들이 모이도록 명령했고 모인 뼈들에게 생기가 들어가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뼈들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그 사건 속에서 생기는 하나님의 성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른 뼈에 생기가 들어가서 지극히 큰 군대가 된 것처럼 마른 뼈와 같은 사람들 속에 성령께서 들어가시면 영적으로 살게 되고 하나님의 큰 군대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없는 사람은 살았다는 모양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육신이 아무리 건강하고 집안이 좋고 뛰어난 재능이 있다할지라도 그 속에 성령께서 거하시지 않는 사람은 영혼이 죽어 있는 사람입니다.

    요 3장에 보면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므로 율법에 능한 사람입니다. 그는 유대인이니 선민의식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는 관원이었으니 세상 권력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선생이었으니 성경 지식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영혼은 살아 있으며 다른 사람에 비해서 더 건강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 사람 속에 성령이 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인 사람으로 비춰졌고, 자신도 신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는 거듭남이 필요한 자연인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아무리 외적인 조건이 좋고 종교적이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 성령께서 계시지 않으면 그는 거듭남이 필요한 자연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자녀이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희생이라고 믿어지고 내 속에 예수님이 거하시는 것이 믿어진다면 성령의 생명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믿어진다면 생명의 충만함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물고기 중에 거의 죽어서 배가 뒤집어지는 물고기도 생명이 있는 것이고 잡으면 팔딱거리는 싱싱한 물고기도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빈약한 영적 생명이 있다면 성령님을 초청하시고 의지하시고 사랑하십시오.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분이 내게 말씀하시는 음성대로 순종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생명이 당신 안에 충만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중국에서 한 평생 선교사로 일했던 허드슨 테일러 목사님에게 하루는 한 젊은이가 찾아와서 묻기를 “내가 이렇게 교회를 들락거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세례도 받고 정식으로 믿고 싶습니다. 성경을 몇 번 읽어야 됩니까?”라고 했습니다. 이에 허드슨 테일러는 “자네 촛불이 언제부터 빛이 나나?”라고 묻자, 청년은 “심지에 불을 붙여야 빛이 나는 것이죠.”라고 답했습니다. “마찬가지네. 성령의 역사가 자네 마음속에 역사할 때에 그때부터 온전한 교인이 되는 것이네.”라고 했습니다. 참 옳은 말입니다. 수십 년을 다녀도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했으면 온전한 교인이 아닌 것입니다.

    영적인 생명이 들어가면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종교가 많지만 기독교만이 변화에 대해서 자신이 있습니다. 민영교도소운동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 민영교도소가 딱 한 곳 생겼는데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교도소가 생겼습니다. 다들 돈이 없어서 못 만드는 것 아닙니다. 200억 원 정도면 교도소를 시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 이외에도 불교, 원불교 등 여러 군데에서 시도하려고 했는데 돈 때문에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걸리는 조건이 있습니다.

    거기에 일단 사람이 들어가면 출소 후 재범률이 10% 이하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유지를 못 한다고 합니다. 다 돈들은 있는데 사람을 변화시킬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겁도 없이 오직 기독교만이 들고 나온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이 변화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하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난생 처음 백화점엘 가 본 시골 할아버지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신기한 듯 이것저것 구경을 하는데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할머니 한 분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쏙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문이 열리고서는 예쁜 아가씨가 내리니까 이 할아버지는 너무나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손자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니네 할머니도 저 기계 속에 넣었다가 끄집어내야겠다." 세상 어디에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기계는 없습니다. 사람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은 성령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변하고 싶습니까? 새로워지고 싶습니까? 자신의 지금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령님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충만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살아보십시오. 같은 환경에 살지만 다른 세계를 경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한 이유는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건전지의 힘으로 힘차게 움직이던 장난감이 멈추었습니다.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건전지의 수명이 다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장난감 때문도 아니고 환경이 변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장난감에 생기를 주던 건전지의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무기력한 원인은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다. 성령을 소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무기력에서 벗어나려면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십시오.

    5. 성령님은 능력이 충만하십니다.

    바람의 능력은 대단합니다. 부산 태종대에 가면 촛대바위는 절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 사라호라는 태풍이 올라올 때 바람에 바위가 부서진 것입니다. 바람의 능력은 대단합니다. 성경은 바람의 능력을 통해서 성령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람의 능력이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어떤 경우에는 피해를 줍니다. 태풍이 올라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강력한 바람의 능력 앞에 모든 농작물은 쓰러지고 맙니다. 1년 농사를 한 번의 태풍으로 망쳐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다에는 어떻습니까? 그 강력한 바람의 능력이 바다를 뒤집어놓습니다. 그 바람에 바다가 정화되는 것입니다. 같은 바람 앞에 농작물은 피해를 입지만 바다는 살아나는 것처럼 성령님의 능력도 사람에 따라서 다른 각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능력의 성령님은 믿는 자에게는 유익을 주시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는 심판을 주십니다. 출애굽 당시 홍해가 갈라진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람이 불어 홍해가 갈라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라진 틈으로 홍해를 건너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를 따라오는 애굽 군대는 갈라진 틈으로 들어가다가 바람에 의해서 빠져 죽게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사십시오. 그것이 인생 승리의 비결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 때문에 더 강력한 도움을 받기 위하여 종교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말 못하는 우상에게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태평양 어느 작은 섬에 가면 ‘볼기 맞는 신’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냥을 나갈 때나 혹은 물고기를 잡으러 나갈 때에 신전에 들어가서 기도합니다. “내가 지금 바다에 나가는데 풍랑을 잔잔케 해 주십시오. 고기를 많이 잡게 해 주십시오. 내가 지금 산에 사냥을 하러 나가는데 사냥감이 많이 걸려들게 해 주십시오” 사람들은 고기를 많이 잡거나 사냥을 많이 했다면 다시 신전에 와서 감사의 제물을 드립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풍랑을 만나서 고기를 잡지 못하거나 맹수를 만나 아무것도 사냥하지 못하고 돌아온다면 사람들은 신전에 들어가서 이 신을 엎어놓고 두들겨 팹니다. “이 못된 신아! 내가 바다에 나갔는데 풍랑을 일으켜! 내가 산에 사냥을 하러 갔는데 맹수를 보내! 그것도 못 막아! 한 번 더 이런 일 있다면 네 궁뎅이 찟어지도록 맞을 줄 알아라.”라고 말하며 두들겨 팹니다. 그래서 이 신 이름이 ‘볼기 맞는 신’입니다.

    한 선교사님이 어떤 우상 숭배자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아무리 전해도 그 우상 숭배자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선교사님이 그 우상 숭배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섬기는 신상을 강아지와 함께 강물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강아지는 헤엄쳐서 올라와도 자네가 섬기는 우상은 올라오지도 못하네. 물에 던져 버리면 거기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우상이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고 복을 준단 말인가?” 그 말에 우상 숭배자가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몇 백 미터가 넘는 우상이라도, 금으로 되었든 돌로 되었든 우상은 넘어뜨리면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강아지보다 못한 것이 우상입니다.

    성령님은 우상과 다릅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님은 급하고 강한 바람 보다 더 강력한 능력으로 우리를 도와주시는 보혜사이십니다. 보혜사는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을 말합니다. 성령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바람처럼 임하신 성령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성령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2. 성령님은 자신의 임의대로 모든 것을 하십니다.

    3. 성령님은 보이지 않지만 체험할 수 있습니다.

    4. 성령님은 생명을 주십니다.

    5. 성령님은 능력이 충만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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