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 설교를 위한 ‘힌트’ 2008-11-14 06:02:22 read : 4051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추수감사 설교를 위한 ‘힌트’
장운철 kofkings@amennews.com
전 세계가 금융위기 속에 놓여있습니다. 실물경제가 불안하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지갑의 문을 닫고 있습니다. 기업들이 힘들어합니다. 벌써 도산했다는 기업체 소식이 들려오기도 합니다.
금년 가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평, 불만, 불안이 심할 때입니다. 이럴 때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감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가능합니다. 금년(2008년) 추수감사설교 4편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감사를 맛보시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1. 제목: 영원한 수확을 감사하자
성구: 마가복음 13:24-37
세상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동그라미의 역사관으로 영원회귀설이나 윤회사상인데, 다람쥐 쳇바퀴 굴림을 연상케 합니다. 둘째는 일직선의 역사관으로 처음과 나중이 있는, 알파와 오메가의 역사관입니다. 셋째는 나선형의 역사관으로 주기적인 원을 그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역사학자 ‘딜타이’의 역사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간역사의 계보는 항상 선과 악,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복 받을 자와 저주 받을 자로 평행선을 그으며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렇게 나란히 나가지는 못하는데, 역사는 무엇이나 때와 기한이 있고(전 3:1) 시작이 있으면 종말이 있는 일직선 위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히브리 민족의 위대한 역사관이 있는데 이것은 곧 기독교의 역사관입니다.
그러나 이 사회에는 아직 반 기독교적이요, 무속적인 전생과 환생신드롬이 사람들을 현혹하여 운명론과 영원회귀론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일례로 “당신의 전생을 알려준다”는 테이프와 책에 심취한 일들은 무력감에 빠져 현실에 적응할 능력을 상실해 버린다고 뜻있는 크리스천들은 우려합니다(국민일보 96. 9. 7).
이럴 때에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하여, 기독교의 바른 역사관을 성경에서 재확인합시다. 그리고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풍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1) 곤고한 중에 수확 거둠을 감사합시다.
1620년 신대륙, 미국 플리머스 항에 도착한 102명의 청교도는 그해 겨울을 나는 동안 절반이나 희생될 정도로 환난과 곤고함이 있었으나, 이듬해 첫 수확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환난과 곤고함의 양태가 다를 뿐입니다.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는 본문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할지라도 긍정할 수밖에 없는 징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같은 중에 우리는 다시 추수감사절을 맞이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가 주를 송축하리이다”(시 145:9)라고 시편 기자는 찬양하였습니다.
2) 재림신앙, 곧 영원한 수확 거둠을 감사합시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다시 오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재림을 확신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는 재림 전 일월성신의 변화와 이상한 징조에 대하여, 일부 천문학자와 환경학자와 종교인 외에 대개의 사람들의 관심이 직접 피부에 와 닿는 시장바구니 속의 생필품보다도 적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역시, 어떻게 보통 사람이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심지어는 신앙인 중에도 재림신앙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등 이 모든 사건의 핵심적인 문제도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과 계획과 약속에 대한 인간의 무지와 무관심과 불신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네가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16:16) 하셨습니다.
징조가 있는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설 자리를 굳게 지킵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정신없이 돌아가기에 어렵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제 자리에 서서 굳건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어렵습니다. 각종 학설과 사상에 흔들립니다. 세상의 가시적인 유혹에 흔들립니다.
예수는 세 가지 시험을 마귀에게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생존(경제적) 욕구, 정치적 야망, 그리고 종교적 권위 등으로 압축되는 세 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물리쳤고 마침내 마귀는 떠나고 천사가 수종들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운 것은 모두 세상 것에 유혹받아 흔들이는 소리입니다. 그릇이 비면 시끄럽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재림신앙, 곧 영원한 수확을 추수하는 감사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 재림 때 소망 있음을 감사합시다.
“지금부터 약 60년 전 지구촌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활조건이 72가지였고, 절대 필요한 것은 18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필요한 것은 500가지이며, 절대 필요한 것은 50가지라고 사회학자들은 분석한다. 필요한 것과 절대 필요한 것을 더 많이 누리며 사는 현대인들이 과연 60년 전보다 더 행복할까? 오히려 감사할 줄 모르며 불행하게 사는 것이 아닐까? 파핀은 고백하기를 ‘나는 세 가지로 인해 늘 감사한다. 첫째는 일용할 양식이요, 둘째는 몸의 건강이요, 셋째는 소망이라’하였다”(국민일보 96. 10. 1).
사람들은 세상만사 무엇이든, 큰 관심을 가지고 시작했다가 곧 흥미를 잃고 뒤로 밀어놓기가 십상입니다. “세상 일이 다 그것이 그것이야”라고 핑계를 댑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 이렇게 쉽게 볼 수 없는 것, 마치 사람이 아무도 밟아보지 아니한 처녀림 같은, 너무 크고 엄청난, 그래서 아예 생각도 못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사건이 그것이요, 유월절 장자의 재앙사건이 그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아들의 세상 구속을 위한 초림 사건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일어날 초유의 사건이 하나 남아 있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세계적인 불후의 명작일수록 사람들은 잘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태초에서부터 지금까지 온 인류 역사에서 앞으로 한 번 일어날 엄청난 사건, 재림에 대하여는 사람들은 매일 변동이 있는 주식가격보다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는 곧 종말의식이 없다는 뜻입니다. 노아의 홍수사건은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생활의 윤리적인 차원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영생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의 죄를 가리킵니다. 종말의식이 없을 때 세상은 무질서하고, 성도의 신앙생활은 태만해지고 더 나아가서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는 자는 비록 불구덩이 속에 들어갈(혹은 이미 들어간) 운명이라도 담대하고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다만 문제는 소망의 대상이 무엇이며 소망의 근거가 누구며 무엇인가 함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이 참 지혜인데, 그 지혜는 첫째, 예수께서 다시 오리라(재림) 하심입니다. 다니엘 7장 13-14절 말씀은, 다시 오시는 메시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라를 받음을 말합니다. 이는 곧 그날 밤 계시의 절정으로서 모든 역사의 최후 목표를 보여줍니다.
둘째,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천사들을 보내어 믿는 자들을 모으리라 하심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성도라 불러주는 것은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자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소망과 용기를 가지게 합니다. 우리로 나약함에 묻혀 계속 죄 가운데 있게 하지 않고, 현재의 상황을 극복할 힘을 줍니다. 셋째, 이 일이 다 이루리라 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시리라는 재림 신앙에는 소망이 있고, 어떤 환경에서도 나약해 지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는 백성은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전진하는 신앙의 삶을 삽니다. 모세의 위대성이 어디 있습니까?
모세는 히브리 민족에게 새 희망을 향해 출애굽 할 동기를 부여했고 또한 430년간 종살이에 젖은 백성에게 출애굽 할 의지를 부여했습니다. 히브리 민족의 가슴속에 소망이 있는 백성이라는 자의식을 심었고, 그래서 전진하는 신앙의 삶을 살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신앙으로 무장하고 소망을 갖고 영원한 수확 추수함을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아멘.
* 기독교대한감리회본부 선교국, 목회정보자료집 강단과 목회 1997, 신앙과 지성사, 1996, pp.600-603
2. 제목: 신앙은 감사이며 기대이다
성구: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
1) 서론: 행복은 교류에 있다.
행복한 사람은 언제나 교류하는 사람이다. 어떤 모임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제일 높은 지위에 있거나 가장 많은 보수를 받는 사람이 아니다. 그 모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인사할 대상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누구를 만나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교류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행복은 교류에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불행한 사람은 언제나 혼자 살아간다. 혼자 산다는 것은 자취한다는 뜻이 아니다. 혼자 산다는 것은 고립과 단절 가운데 산다는 것이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도 낯선 사람이며, 이곳저곳을 다녀도 낯선 자리일 때 우리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불행한 사람은 혼자만의 동굴에서 살아간다. 다른 사람과 한 자리에 있어도 혼자 고민하며, 혼자 질문하고 혼자 답변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귐을 갖기를 원하시며, 또한 피조물들 사이에서 교류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이웃들 사이에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교류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사건들과도 교류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쁨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기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뻐한다는 것은 얼굴에 좋은 기색(氣色)이 드러나도록 마음과 즐거운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기쁨의 사람은 마음의 즐거움을 얼굴과 표정의 분위기로 드러낸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항상 기뻐하며 사는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지 무슨 상황에 처하든지 기쁨의 이유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항상 기뻐한다는 것은 순진한 이야기가 아닌가?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장례식에 가서도 기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타당하다. 만일 상황으로 인하여 기뻐한다면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없다. 만일 슬픈 상황을 당한 사람 앞에 기뻐한다면 그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기뻐한다는 것은 기쁨의 이유가 “항상 바뀔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라 “항상 변치 않으신 하나님”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비록 무화가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의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사람은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체험하기 때문이다. 스데반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았고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그는 내면의 기쁨을 잃지 않았으며, 스데반의 기쁨은 천사의 얼굴빛(기색)으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찬양 속에서 우리는 기쁨을 회복한다. 여기에 목사의 영광이 있다. 목사는 회중을 보며 말씀을 선포한다. 주일 아침에 예배당에 나올 때 별 표정 없이 나왔던 사람들이 말씀과 찬양 속에서 기쁨을 회복하는 것을 보는 것은 목사의 영광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볼 때 상심하게 되며, 상황을 볼 때 낙담하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롬 4:17)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때 기쁨을 회복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기뻐할 때 이 기쁨은 우리 소원을 이루어준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I(시 37:4). 또한 이 기쁨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따스함을 안겨주며 그의 삶을 빛나게 하고 따뜻하게 한다. 오늘도 세상은 기쁨의 사람을 찾고 있다. 상황을 초월하여 하늘의 기쁨을 전파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반사한다.
3) 하나님의 뜻은 쉬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성령을 호흡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다. 인생의 행복은 교류에 있다. 행복한 가정의 특징은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데 있다. 학교생활을 즐기는 학생은 학교에서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직장 생활이 유쾌하려면 마음이 통하고 말이 통해야 한다.
직장생활의 성공이 곧바로 가정생활의 화평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가정생활의 화평이 곧바로 영적 생활의 평안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각각의 장소에서 구성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그곳에 계신 분이 있는데, 그분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그분과 마음이 통하고 말이 통해야 한다. 하나님과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고 성령의 호흡을 할 때 그 상황 속에서 형통하게 하신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변하며 상황은 언제나 위태로다. 그 사람의 하나님과 대화하며, 그 상황의 창조자와 구원자 되신 하나님과 상담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형통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비록 막히는 상황이 있고 원수가 앞길을 막을 지라도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고 말이 통한다면 능히 극복하게 된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인생의 문제는 우리 앞에 막히는 상황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상황을 극복할 힘이 내 안에 없는 것이 문제이다. 이제 기도 가운데 그 힘을 공급받는다면 시련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생의 문제는 우리가 미움 받음에 있지 않다. 그 미움을 극복할 만한 사랑의 자원이 없다는 데 있다. 이제 기도 가운데 그 사랑의 자원을 공급받는다면 시련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4)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받은 것을 받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공을 돌린다.
신앙인은 감사하되 범사에 감사한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삶의 보든 영역에서 감사한다는 것이다. 가정, 교회, 직장생황에서 모두 감사한다.
둘째,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일의 과정 가운데 감사한다는 것이다. 신앙인은 일의 결국을 보면 누구나 감사하게 된다. 욥은 자신의 결말을 볼 때 마지막에 감사할 수 있다. 재앙이 사라지고, 저주가 복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감사한다. 하지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일의 결국을 보기 전에도 감사하는 사람이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므로 보지 않고도 미리 감사한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감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맞아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린다. 하지만 진정으로 감사하는 사람은 추수감사절에도 감사하지만, 감사하기 위하여 감사절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감사의 사람에게는 모든 시간과 공간, 모든 사건과 환경이 감사의 계기가 된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결국 존재에 있어서 감사하는 자가 된다.
5) 결론: 신앙이란 감사이며 기대이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감사와 기대이다. 신앙인은 지금까지의 사건에 대해서 감사하며, 앞으로의 사건에 대해서 기대한다. 감사란 이미 받은 것을 받았다고 인정하는 것이며, 기대란 앞으로 받을 것을 받으리라 희망하며 바라보는 것이다.
신앙인은 상황을 바라보지 않는다. 신앙인은 감사하더라도 상황 때문에 감사하지 않으며 모든 상황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는 이유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기뻐하시기 때문이다(습 3:17).
하나님이 영원토록 살아계셔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기뻐하신다면, 신앙인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그분과 대화해야 한다. 신앙인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언제나 감사와 기대이다.
* 김종렬, 1998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강단, 대한기독교서회, 1997, pp. 470-475
3. 제목: 감사하라
성구: 하박국서 3:17-18, 고린도후서 9:11-15, 누가복음 17:11-19
<석의적 접근>
구약의 말씀: 하박국은 3장으로 구성된 짧은 소 선지서다. 1장은 하박국의 질문이 들어있고, 2장은 하나님의 응답이 그리고 3장은 하박국의 기도와 감사가 들어 있다. 하박국은 느브갓네살 왕이 유다를 침공하기 전에 요시아 왕이 죽고 여호야김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예언활동을 하였다. 그 당사의 여호야김 왕은 “탐람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강포를 행하였던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1장에서 하박국은 선량한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에 관하여, 또한 유다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바벨론을 사용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듣고 놀라며 항의를 하였다.
본서의 첫 부분에는 감사가 위치할 자리가 없다. ‘어찌하여’라는 단어가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유의하라. 3장에 소개되는 기도의 핵심은 데만에 있는 바람 산으로부터 하나님이 나오시는 장면이다. 데만과 바란 산에 관해서는 에돔 족속이 살던 사막 지대로 지목되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하박국의 첫 번째 반응은 무서워 떠는 감정이다. 그러나 곧 그의 영혼은 환란의 날을 조용히 기다리기를 결심하면서 가라앉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날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서신서의 말씀: 오늘의 본문은 성도를 섬기는 일에 관한 바울의 권면으로서 특별히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헌금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헌금이 하나님에 대한 감사로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바울이 말하는 ‘부요하여’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것으로 물질적인 헌물의 양의 크고 적은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본문에 나타나는 이 일은 단순히 남을 도와주는 계속적인 차원의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교회를 돕기 위한 것으로서, 그 목적이 충분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어떤 주석가는 한편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초대교회에서 드리던 성만찬 때 드리는 감사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13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헌금에 대하여 고린도교회가 받아들이고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예루살렘교회는 이방 지역의 교회들로부터 들어오는 선물들과 구제금을 감사하며 받아들였다.
복음서의 말씀: 오늘 본문의 목적은 예수님의 치유 능력보다는 ‘은혜에 대한 감사의 정신’을 강조하는 데 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다. 여기서 ‘예루살렘’이란 장소는 단순히 지역적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도리어 ‘모든 인간들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 가시는 길’이라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열 명의 문둥병자에게 똑같은 치유의 은혜가 주어졌듯이 하나님의 자비는 예수님을 통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구별이 없다. 더 나아가서 감사는 사마리아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다. 9명의 문둥병자는 육체적인 병만을 고치게 되었지만 돌아와 감사한 1명의 문둥병자는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의 병도 고치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 대한 작은 감사가 결국 한 사마리아 문둥병자를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이다.
<설교>
서론: 감사란 말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의 단어이다. 동물이나 식물에게 감사라는 단어나 개념은 없다. 감사란 하나의 응답의 행위로서 자기를 도와준 어떤 것이나 대상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감사하는 마음과 표현은 양심과 언어를 소유한 인간만이 가지는 독특한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 감사는 기뻐하는 마음을 동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사의 반대말로는 불평과 불만과 원망이 있을 수 있다. 이 또한 인간이 가진 독특한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원망하며 살 수도 있고, 또한 감사하며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환경에 영향을 받지만 환경에 지배되지 않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좋은 환경에서도 불만과 불평을 하는 사람도 있다.
동기부여: 하나님께서는 시편 기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명령하셨다. 소요리문답의 제 1번에도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감사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인 것이다.
방법론: 인간의 상황은 언제나 변하며 때론 어려운 일을 만날 경우도 많이 있을 것이다. 감사의 조건을 찾는 사람은 어려움과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해 낸다. 하박국 선지자는 ‘어찌하여’라고 외치며 세상 속에서 정의를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던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정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결국 정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게 된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감사에는 추수에 대한 감사, 출세에 대한 감사, 건강에 대한 감사 등의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감사의 뿌리는 사죄의 은총을 누리는 데 있다.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도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사죄의 은총에 대한 감사야말로, 가장 중요한 감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죄의 감사를 통하여서 그리스도인은 건강에 대하여, 추수에 대하여 그리고 여타의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과: 감사는 관계를 맺어 주는 역할을 한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감사는 그 관계를 더욱 힘 있게 하며, 강하게 하고, 밀접하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생활은 우리를 하나님과 더욱 밀접하게 연결시켜 준다. 더욱 강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감사가 없는 세대를 살아가고 있다. 잃은 사람은 억울해서 감사가 없고, 얻은 사람은 더 얻지 못해서 감사가 없다. 구원의 하나님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즐거운 목소리로 주님께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 정장복, 97 예배와 설교 핸드북, 홍성사, 1997, pp.406-408
4. 제목: 진정한 감사
성구: 합 3:16-19, 시 126, 딤전 2:1-7, 마 6:25-33)
<석의적 접근>
구약의 말씀(합 3:16-19): 본문은 남왕국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도외시하고 우상숭배에 탐닉해 있을 때에,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왜 그들의 죄악을 벌하지 않으시는가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징계를 유보시킨 것은 그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하박국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고, 노를 발하였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그러한 놀라운 섭리와 계획을 깨달은 하박국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제는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인하여 오히려 즐거워하며 감사하겠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서신서의 말씀(딤전 2:1-7):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사랑하는 동역자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이다. 그는 이곳에서 디모데에게 구체적인 교회 조직 및 목회의 원리 등을 설명해 준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2장은 공중예배에 대해 권면하고 있는 부분이다. 바울은 이곳에서 제일 먼저 공중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1-7). 오늘 분문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그는 이곳에서 특별히 성도들이 기도를 통해서 속죄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구체적으로 몇 가지 기도의 종류를 말한다.
간구는 긴박한 상황에 놓인 개인이나 단체가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요, 기도는 일반적인 모든 기도를 말한다. 도고는 타인을 위한 중보기도 또는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자유롭고 친밀한 기도를 말하며 특별히 감사(유카리스티아)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말한다.
복음서의 말씀(마 6:25-33): 예수님께서는 분문에서 하나님의 성도가 물질의 필요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가르쳐 주고 있다. 본문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음을 가르치고 있는 말씀(19-34) 가운데 두 번째 부분에 해당한다. 19-34절은 참 신앙을 결여한 세속주의자들의 그릇된 물질관, 가치관 등에 대한 비판과 교훈을 담고 있다. 영혼이 하나인데 추구하는 최고 가치가 둘이면, 그 사람은 결국 자아 분열을 일으켜 비정상적인 영혼이 되고 만다.
따라서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1) 인생의 최고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2) 불필요한 것에 힘을 낭비하지 말고 온 힘을 모아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데 힘을 쏟고, (3) 그 외의 것들은 하나님께서 필요한 대로 주실 것을 믿고 행하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혼의 만족과 평안을 주시며, 또 인생의 필요조건을 충분히 채워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설교>
서론: 오늘은 감사주일이다. 모든 것이 풍성하게 주어진 결실의 계절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감사를 잃어버리고 있다. 모든 것이 풍성하게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마음에는 이상하게도 감사가 없다. 미시간 호수에서 한 대학생이 배가 뒤집힌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구출해 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제 그 대학생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런데 수십년이 지난 후 우연히 그의 행적이 알려지게 되어 기자들이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였다. “그때 그 사건에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랬더니 이제는 할아버지가 된 그 대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때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목숨을 걸고 수십명을 물속에서 구조해 주었는데 단 사람도 감사하다는 말을 남긴 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감사를 모르는 현대인들, 감사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 이야기다. 감사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다음의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본론:
1. 있으므로 감사하는 사람들
먼저 세상에는 있으므로 감사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다. 이는 세상의 모든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병을 낫게 해 주시니 감사하고, 물질을 주시니 감사하고, 시험을 잘 보게 해 주시니 감사하고, 직장을 허락해 주시니 감사하고 사랑하는 부모 형제들이 우애하며 지낼 수 있으니 감사하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감사하고....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가 자신들에게 주어졌기에 감사한다. 은혜와 축복을 받을 때에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행위,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감사의 표현이요, 감사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2. 있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그러나 사실 무엇인가가 있으므로 감사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낫다. 감사할 무엇인가가 있을 때에 그것에 대해서 감사를 느끼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은 그래도 그 양심과 영혼이 살아 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세상이 점점 혼탁해지고, 살벌해져 가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세상에는 있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실상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않는다. 사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가진 것이 훨씬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늘 부족하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이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무성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풍성하고, 감람나무의 소출이 많고, 우리에 소가 있고, 목작에 양들이 많은데도 그들은 감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항상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불평을 한다.
오늘 우리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감사할 이유와 조건이 많은데도 감사하지 않는 이런 사람들은 사실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기억하는가?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사 1:3) 주신 은혜도 모르고 깨닫지 못하는 자, 그는 바로 소만도, 나귀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말씀이다(롬1:21).
3. 없을지라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진정 감사하는 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없을지라도 감사하는 자의 모습이다. 없을지라도 기뻐하는 자이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감사요, 절대적인 감사요, 무에서의 감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감사하고 있다. 그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리로다”(17-18)
하박국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위의 여러 가지 것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있어야 할 것들이었다. 무화과는 먹을 양식의 일종이다. 포도는 음료수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양식이다. 감람나무 열매는 기름을 짜는 원료이다. 밭의 식물은 하루 세끼 먹어야 할 식량을 말한다. 양의 털로는 입을 옷을 만든다. 소는 밭을 갈고 일하는 수단이다. 다시 마하면 본문에 나오는 여섯 가지는 사치품이 아니라 생필품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최소한으로 필요한 생필품들조차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감사의 모습이다. 오늘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진정한 감사는 비록 내게 주어진 세상적인 복들이 아무것도 없다 하여도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내게 주신 구원의 은총 하나만으로도 감사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없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의 만족이 되시며,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심 하나만으로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성숙한 감사, 온전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자이다.
* 정장복, 2000년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 핸드북, 홍성사, 1999, pp.502-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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