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 15일 호세아13:9-14 너를 도와주는 나 2001-08-20 01:01:20 read : 1079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1885년 부활절 날 아펜셀러 부부와 언더우드 박사가 인천항에 예수 복음을 듣고 첫발을 디딘 날이기도 합니다
본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였을 때에 인간에게 죽음이란 없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류의 조상이요
첫번째 사람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하나님에게 불순종의 죄를 짖고 결과적으로 생노병사가 없는 낙원에서 쫓겨나 사단마귀가 권세를 잡고 있는 이 땅에 살게 됨으로서 인간은 육체의 죽음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2000년전에
두 번째 아담이면서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나타나셔서 인간의 사망에 죄를 대신 지시고 부활하셨음으로 이제 우리는 예수만 믿으면 우리가 죽었다 하여도 예수님처럼 우리는 모두 부활의 영광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영광의 부활이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의 부활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년전에 타임스에 실린 내용입니다
울리암 제닝스 브라이이언 이라는 사람이 3000년전에 이집트에 미이라를 조사하다가 미이라 옆에 완두콩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 사람이 완두콩을 한웅큼 집어 다가 집안에 심었습니다.
그랬더니 3000년된 완두콩에서 싹이 돋아 나는 것입니다.
아 ! 완두콩 안에 생명도 3000년을 살아 있는데 어찌 인간의 생명이 영원하지 않겠는가? 라고 부활을 의심했던 믿음을 회개하고 이후로 전도자가 되었답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뭐하러 세례를 받고 뭐하러 위험을 무릅쓰고 수고의 전도를 하겠느냐 부활이 없다면 내가 뭐하러 맹수 즉 악한 사람들과 죽기 살기로 대적하겠느냐 차라리 먹고 마시자라고 여러분에게 말하였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에게 부활에 확신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반쪽의 신앙이요 불행한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고 소망하여야 합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 신앙인은 삶에 어려움과 핍박이 닥쳐왔을 때에 곧 좌절하고 실망을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의 최대의 소망이 부활과 영생에 있음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에 삶에 어떠한 고난이 와도 믿음을 잃지 않게 되고 담대하게 어려움을 견뎌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부활의 승리란 무엇인가
첫째 인간 관계에서 영적으로 부활 승리하는 삶입니다
즉 사랑의 승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 관계를 맺는 것으로 삶에 곤란과 어려움이란
결국 잘못된 인간 관계로 인하여 발생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가족간에 형제간에 부부간에 친구간에 이웃간에 잘못된 인간 관계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에 근본은 서로 도와주는 사람이 사랑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과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는 먼저 사랑과의 전쟁을 벌이고 사랑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없다고 하여도 그곳 에 나를 도와 주는 사람이 많다면 그곳은 행복이요 천국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 사람을 인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모든 일이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수월하게 잘 될 수 있지만,
전혀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고생을 하고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도와주는 자가 있었다. 그 분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애굽에서 구원받았고,
광야 40년을 무사히 마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도움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가 있었으며 모든 대적을 물리치고 강성한 나라를 이룰 수가 있었다.
역대하14:11 -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믿음입니다.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이며 얼마나 좋은 믿음입니까?
이스라엘민족은 이 믿음으로 승리하였고, 이 믿음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도와줄 이가 주 밖에 없다"고 하나님을 의지하던 이스라엘이 오늘 본문을 보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9절 -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주는 나를 대적함이라"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을 도와주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와주셨는데, 그 은혜에 감사하지는 못할 망정,
하나님을 대적하다니, 얼마나 기가 막힐 일입니까?
우리가 가장 분노할 때는 도와주었던 사람이 배신할 때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도와주고 그렇게 잘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모르는 체하고 심지어는 배신을 할 때 얼마나 마음이 쓰라립니까?
내가 사랑을 주고 있는 것, 없는 것, 아낌없이 다 주고,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도와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를 비방하고 대적할 때...
은혜를 배반으로 갚고, 도와준 사람을 원수처럼 대적한다면, 그때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하여 강대한 나라를 이루기까지 수많은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대적으로 인하여 침략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거꾸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대적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칠 때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어서 승리할 수가 있었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서야 어떻게 승리할 수가 있겠는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한 이스라엘은 한마디로 패망하게 되었습니다.
본문15절 - 16절 말씀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패망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①근원과 샘이 바른다.
저가 비록 형제 중에 결실하나 - 동풍 =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
②저장해 두었던 보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고 빼았김
③형벌을 당하여 어린아이들까지도 칼에 엎드려저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말로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모두 패망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이길 자가 하나도 없으며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하였는가?
10절 -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방백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이야기는 사무엘 시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살게 되고 선지자를 세워서 신정국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
그 사사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사사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그 어머니 한나가 아기를 낳지 못해서 고민하며 괴로움 당하던 끝에,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리고 낳은 아들이다. 사무엘은 젖을 떼자마자 하나님께 받쳐져 성전에서 자랐습니다.
사무엘은 사사요, 선지자요, 제사장으로 직분을 휼륭하게 감당한 사람입니다.
사무엘이 늙자, 사무엘은 그 아들 요엘과 아비야를 사사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였다.
그러자,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이 모여 사무엘을 찾아가서 말합니다.
"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이방나라와 같이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무엘의 통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대적하는 반역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사무엘은 결코 승낙할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가 끈질기므로 사무엘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삼상8:7 -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이 왕이 되지 못하기 함이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요구는 사무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요구는 사무엘을 버림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는 행동이요,
하나님을 왕으로 삼기를 거부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의 요구가 간절하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한대로 왕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들은 하나도 선한 왕이 없었다. 한결같이 이방 강대국을 의지하고 우상을 섬기며, 온 백성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고 범죄하는 왕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사람을 따르면 결국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와 범죄로 패망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을 바라보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네 왕이 이제 어디 있느냐?"
0절 말씀은 잘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너희가 왜 이렇게 못산단 말이냐?" 그런 뜻입니다.
자기 백성이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하나님의 감정을 건드렸어도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무엇인가를 내려줄 때에는 진심으로 잘 살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내려 주셨던 것이지, 왕을 너희에게 세워서 너희는 망하라 하고 주신 적이 없다 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부모들은 떼를 쓰며 부당한 자식의 요구를 들어 주면서 그래도 자식이 잘 되길 진실로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진노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냐?
"왜 이다지도 너희가 어렵게 사느냐 너희가 잘 살지 못하는 것이 내가 화가 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이 잘 살지 못하므로써
백성의 장래가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 때문에 화가 나서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왕들이 어디 갔느냐? 각료가 어디 있느냐? 재판장이 어디 있느냐? 너희 지금 꼴이 무엇이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의 최대의 효도는 자식이 잘되는 것을 부모에게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역시
복을 받아 건강하게 잘 살아드리는 것을 하나님 앞에 보여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성공은 여러분의 생활 자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보여드리는 겁니다.
생활 자체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드려야지.
우리가 성공한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하고 남의 종이나 되어 있다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상심하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사람을 믿고 따르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로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사람의 말을 따르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이 아닌가?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 마음을 생각을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을 다스리시고, 교회를 다스리시고, 나라를 다스리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자기가 왕이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다면 우리는 역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결국 패망하는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는 자기의 죄를 봉함하는 행위입니다.
12절 - "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두 번째 부활 승리는 자기의 봉합된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왕을 세우고, 그 악한 왕들로 말미암아 우상을 숭배하며, 수많은 불의와 죄를 지었고 그 모든죄를 버리지 아니하고 봉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불의를 행하고 죄를 짓는가?
우리 인간은 아담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본성이 타락한 죄인인데 어떻게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은 이렇게 죄 지으며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봉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물건이 잘 간수되도록 다발로 묶어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불의와 죄를 가죽부대에 포도주를 담아 봉해 두듯이 불의와 죄를 봉해 두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죄를 마음에 봉해놓고 회개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범한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불의와 죄를 하나님 앞에 쏟아 놓기를 바라는데,
사람들은 죄를 꽉 봉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봉합된 자기 고집을 풀어 버리는 것입니다.
봉합된 자기 욕심을 풀어 버리는 것입니다.
봉합된 자기 자존심을 풀어 버리는 것입니다.
봉합된 자기 죄를 풀어 버리는 것입니다.
봉합된 내안에 원한을 풀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용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용서를 받아야 할 자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톨스토이에 부활이라는 영화를 보았거나 소설을 읽었을 것입니다.
러시아에 네프류도프 라는 젊은 공작이 있었습니다 이 공작이 재판에 배심원으로 앉아 있는데 한 매춘부가 돈 많은 남자를 독살하였다는 협의로 재판정에 끌려 나왔습니다. 그런데 네프류도프 공작은 그녀를 바라 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는 예전에 자기 집에 하녀였던 카투사였으며 그가 그녀를 유혹하여 범한 뒤에 백루불리의 돈을 주고 내보낸 여자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 공작의 아기를 베고 먹고 살기가 힘들고 자포자기 상태에서 타락하여 매춘부로 일을 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것입니다.
네프류도프공작은 그녀를 구출하기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유산도 약혼도 파기하고 그녀를 구출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고 끝가지 따라 감니다 결국 네프류도프의 헌신과 희생적인 사랑이 결국 그녀로 하여금 매춘의 죄악된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부활이라고 톨스토이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부활은 우리가 죄악에서 벗어 나는 길입니다
공작은 심판하고 죄를 용서해야 할 자리에 앉아 있지만
사실은 자기가 심판 받아야 할 자리에 카투사가 앉아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용서 받아야 할 자리에 카투사가 앉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남을 용서해야 한다지만 사실은 우리가 용서 받아야 할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땅에 살동안 참된 부활은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을 했지만
사실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듣습니다
"나하나 참으면 편안한데"
고전 9:27절 "나를 쳐서 복종케 하라는 말처럼 우리는 매일 자기를 쳐서 자기를 예수의 자녀로 복종시켜야 합니다
나를 매일 쳐서 자고하지 않게 교만하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일 봉함된 고집과 욕심과 이기심을 쳐서 자기를 죽입시다
내 자존심을 죽입시다 내 욕심을 죽입시다 내 교만을 죽입시다 내 게으름을 죽입시다 그래서 솔선수범을합시다.
그 길이 내가 사는 길이요 내 가정이 사는 길이요 내 회사가 사는 길이요
내가 진정 영적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죽을 때에 진정한 나의 부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의 옛사람을 죽이고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합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매일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 길이 내가 진정 사는 길이요 부활의 길이요 예수가 내안에서 사는 길입니다.
13절 -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저에게 임하리라 저는 어리석은 자식이로다 때가 임하였나니 산문에서 지체할 것이 아니니라"
해산하는 여인이 해산할 때에 아기를 낳아야 한다.
만약에 해산할 때 아기를 낳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아기의 생명과 아기 엄마의 생명이 위험하다.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 해산하는 여인과 같습니다.
산모가 몸을 풀 듯이, 불의와 죄를 봉해 둔 것을 풀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속에 숨겨두고 봉해둔 죄악을 산모가 애를 낳듯이 다 내어놓고 회개하기만 하면,
죄가 용서받고 새 생명을 얻고, 잘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는데,
끝까지 내 속에 꽉 봉하고 있는 것은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해 보겠다는 것이다.
14절에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백성을 사랑하셔서 복을 주었더니
복 때문에 죄를 저축하고 저장한 그 백성들, 그 죄가 열 달이 되어 이제는 산일이 되었으니 그 죄가 생산되면 사망이 보여야 하는데 그런데 사망이 보이지를 않아요.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딨느냐?"
이 사망과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망을 찾아내어 목을 치려는데 사망이 보이지 않아요.
봉함되어 있고 저장되어 있는 죄와 음부의 멸망이 보여야 할텐데,
그 봉함된 멸망과 그 재앙을 치려고 찾는데 안 보이는 것입니다.
왜 안보입니까?
뉘우침이 숨기어졌다 그겁니다.
즉 뉘우치는 회개가 있음으로 봉함된 모든 죄와 불의가 흔적도 없이 없어 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속에 영혼의 배속에 죄가 저장되지 않았습니까?
불의가 그대로 봉함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14절에 말씀대로
빨리 뉘우치시기 바랍니다.
뭔가 하나님 앞에 걸린 게 있으니까 일이 안 풀립니다 회개하십시오."
"회개하여야 합니다.
뭔가 봉합된게 안풀리니까 일이 안풀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뉘우칠 일 회개할 일을 더이상 하나님 앞에 숨기지 마시고 하나님의 목전에 드러내어 보시기 바랍니다.
드러내는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회개를 들으심과 동시에 우리 속에 있는 사망의 머리를,
회개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그를 칠 것이며
주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서 그 사망과 재앙을 단순간에 없애 버릴 것이며
아울러 부활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음부의 권세에서 구원해 줄 수가 있겠는가?
누가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해 줄 수가 있겠는가?
누가 우리를 재앙에서 구원해 줄 수가 있겠는가?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해 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해 주실 하나님은 외치신다.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재앙을 물리치시며, 멸망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가?
낙망하지 말고, 주저앉지 말고, 힘차게 일어나는 성도가 되자.
하나님께서 바로 나의 등뒤에서 도와주신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굳게 믿고,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힘차게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란다.
어느 성가대 지휘자 선생님이 부활절 칸타타 곡을 정하고 열심히 연습하였습니다.
먼저 합창이 소프라노가 독창을 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래가 다 끝나도 은혜가 없었습니다.
왜그럴까? 분명히 모두들 다 잘하였습니다.
음정과 벅자도 정확하였고 목소리도 좋았고 호홉도 완벽하게 맟추었습니다.
한참 고민을 하면서 전철을 타기 위하여 길가를 가는데 어느 거지가 길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기쁘게 찬양하면서 구걸을 하고 있었는데 그 노래가 마음에 큰 은혜로 다가 왔습니다.
그것은 성가대원들의 마음속에 진정한 부활의 소망이 없었기 때문이요 그 길가에 거지는 그 마음속에 진정한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인 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우리의 마음속에 부활의 확신과 소망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절반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먼저 진정한 부활의 확신이 없을 지라도 소망만은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서서히 부활의 확신이 다가 옵니다.
소망이 없이 확신이 올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기적을 인정하는데에서 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영어로 미라클이라고 합니다.
즉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의 기적을 믿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부활을 인정하는데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믿음의 눈으로 성경을 읽을 때에
말씀에 비밀이 깨달아지고 온전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활 신앙에 기초는 믿음 안에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9절에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제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모습을 미리 예고편과 같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먼저간 죽은 줄 알았던 부모가 남편이 자식이 죽은게 아닙니다.
이제 얼마있으면 우리가 이땅의 삶을 마칠 때에
하늘에서 황금마차가 내려오면 우리는 그 마차를 타야 합니다.
길에서 놀던 어린아이가 저녁이 되면 그 엄마가 부를 때에 정들었던 친구들과 헤어 싫어도 집으로 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이 부르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쓸데없는 근심과 걱정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으며
그 동안 모질게 느꼈던 고난과 슬픔이 얼마나 부질없었으며
그 동안 믿음 없이 다녔던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민망하였음을 부끄러워하면서
우리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그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죄악 가운데 삶으로 지옥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외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행 4:12).
여러분은 이미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여러분은 죽은 자로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부활을 믿고 다시 살기를 소망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이 구원받아 부활의 날개를 달게 될 것입니다.
바로 오늘이 그날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은 생애 부활의 기쁨,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시고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부활의 증인처럼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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