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쪽 베냐민 게바에 진치고 있었고,
블레셋 군사는 북쪽 믹마스에 진치고 있었습니다.
비록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군사력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13장5절에 보니까
블레셋의 군사력은 병거(전차)가 삼만이었고, 마병(기병)이 육천이었으며,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았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형편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을 표현할 때 '병사'라는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백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규군이 아니라 민병대라는 말입니다.
* 최후까지 남은 육백 명
처음에 사울에 의해 선택된 이스라엘 사람이 삼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군사력이 엄청나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3천명 중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굴에 숨고 수풀에 숨었으며 바위틈, 은밀한 곳, 웅덩이를 가릴 것 없이 숨을 곳을 찾아 다녔습니다(13:6).
13장 7절에 보니까 어떤 사람은 요단강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피신했습니다.
이제 사울과 함께 끝까지 남은 백성은 그 3천명 중에서 6백 명밖에 없었습니다.
6백 명 중에도 칼이나 창을 가지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직 사울과 요나단에게만 칼이나 창이 있었습니다
* 요나단의 은밀한 계획
이렇게 형편없는 전력으로 대치하던 어느날 요나단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기 병기든 자에게 자기 계획을 말했습니다.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의 부대로 건너 가자(1절)"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사울에게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사울이 그를 만류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말씀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나단이 무기를 든 소년과 함께 아무도 모르게 블레셋 진영을 향해 갈 때에
그 중간에는 깊고 험한 계곡이 있었습니다. 이곳을 통과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과 무기를 든 소년은 귀한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생명을 내걸고 나아갔습니다.
먼저 요나단의 고백을 들어 봅시다.
6절에 보면 무기를 든 소년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첫째로, 할례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을 정복하기 위하여 싸우러 가자고 했습니다.
전쟁에 목적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믿음과 용기가 있었기에 비록 두 사람이었지만 큰 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요나단은 만용을 부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후원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말에서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면 일은 끝난다는 사실입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십니까.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믿는 것이요, 또 하나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 승패는 '사람이 많다, 적다'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많아도 하나님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외형은 그럴듯해도 알맹이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현재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정신이 올바르지 못하고 흥청만청 쓰는 사람이라면 얼마후 그는 거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열심히 개미처럼 일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미래는 밝은 것입니다.
현재라는 눈에 보이는 환경이 안좋아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는 존재가 된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보상이 있습니다.
믿음과 용기가 있었기에 비록 두 사람이었지만 큰 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영국 해군에 소속되어 있는 두 병사가 프랑스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들은 탈옥을 결심하고 치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무사히 감옥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해안까지 뛰러갔으나 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뗏목을 만들어 그 위에 올라탔습니다. 그러나 해안을 경비중이던 프랑스군인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이튿날 나폴레옹이 직접 와서 그들을 심문하였습니다. "너희 둘이서 그 뗏목을 만들었느냐?" "예, 그렇습니다" "너희는 그 뗏목을 타고 해협을 건너 영국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예, 그렇습니다" 그들의 자신만만하고 진지한 대답에 나폴레옹은 부하에게 명령하기를 "이들을 영국으로 보내주어라 아무리 적군이라도 이렇듯 큰 믿음과 용기가 있는 자들은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나는 이들의 용기에 감탄하였다"고 했습니다.
8절 이후를 보면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적진을 향해 나아가는 요나단의 작전은 기상천외였습니다.
요나단은 수만명의 적진 앞에 바로 정면으로 나타나 중면 돌파전을 편 것입니다.(8-10)
여러분 우리는 어려움에 처했을때에 요나단 처럼 정면으로 부딪처야 합니다.
비겁하게 숨거나 피하는 것은 임시방편입니다.
요나단은 적군 앞에 정면으로 몸을 나타내고 나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너에게 갈테니 기다려라"하면 그들에게 올라가지 않고,
그들이 "너 이리 와라"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들의 손에 넘기신 것으로 알고 올라가 싸우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그들 앞에 정면으로 나타나자 블레셋 사람들이 12절에 보면
"우리에게로 와라"(12)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요나단의 손에 넘기셨다는 표징이었습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땅이 진동하고 히브리 사람들이 도와주고 숨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와서 대승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요나단은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 할수 있었느냐의 중요한 3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항상 문제 해결에는 요나단과 같이 앞장서서 희생하는 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적은 수만명에 병사들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은 모두 숨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자기가 희생정신을 가지고 앞장서서 나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요나단은 왕자이니까 자기가 제일로 먼저 도망갈수 있고 가장 안전한 곳으로 피신을 할 수가 있습에도 불구하고 희생정신을 가지고 가장 먼저 앞장서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회사도 교회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에서 희생하는 사람이 있어야만이 그 공동체가 발전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이 앞에는 믿음이라는 배경이 있었습니다.
요나단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요나단이 무엇이라고 말을 합니까.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게 바로 귀한 믿음입니다.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구원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오늘 성경말씀 14장 6절에 보면은 요나단이 자기 병기든 소년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아니하노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말씀은 참으로 귀중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앞에는 현재 상황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믿는 자들은 사람의 숫자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상황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대로 되리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이해할수 없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요나단처럼 생명을 걸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불가능은 없는 것입니다.
진정 문제를 해결하려면 요나단처럼 생명을 걸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적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적은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담기에 너무나도 적은 우리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벌레의 눈을 가진 사람은 벌레처럼 삽니다.
새의 눈을 가진 사람은 새처럼 많은 것을 보고 삽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새의 눈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크게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 손에 붇이 신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건강도 여러분 손에 붇이셨습니다. 축복도 평안도 여러분 손에 붇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늘 축복하실 때마다 응답하실 때마다 물어 보십니다.
네가 믿음을 믿는냐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믿습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앉은뱅이가 일어섰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요나단은 병사나 병기의 숫자를 믿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지 둘이 었지만은 적진으로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그는 환경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의 환경을 바라보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반드시 비관론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환경을 너무 분석하고 너무 오래 바라다 보지 마십시오.
자기자신의 처지를 너무 깊이 생각하면 어떻게 됩니가?
열등감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특별이 어려울 때 우리는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냐면 하나님을 바라다 보아야 하는 것을 믿습니다.
새의 눈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의 눈으로 높은 우주에서 바라 보면 엄청난 것도 티끌만하게 작아지게 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바라다 보게 되면은 그 문제가 작아지게 보입니다.
아무리 이세상에 어려운 문제도 꼬인 문제도 길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바라보면 길이 보입니다. 그리고 문도 보입니다.
물론 아무것이나 무조건 믿습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이 이일을 기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대답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나와 함께 한다면 어떤 일이든 승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하나님이 일을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을 제가 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가정에 요나단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먼저 편하고 내가 먼저 피해야 안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려울때에 내가 먼저 앞장서고 내가 먼저 희생하는 남편, 아내, 자식, 형제가 될 때 그곳에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모두가 희생정신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해내는 우리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었던 것은
둘째로, 뒤에서 따라주는 병기든자 가있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앞장서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따라가고 순종하는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요나단의 제ㅇ나에 대해서 14장 7절에 보면은 병기든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리이다(7절)."
죽음의 위협이 에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병기든 소년은 사울의 계획에 전적으로 동조해 주었습니다.
병기든 소년 그도 역시 대단한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후원자의 격려야말로 정말로 보이지 않는 큰 힘입니다.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한다! 그 사실 하나 때문에 세상 살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네!"
우리는 남을 위해서도 기도를 많이 하지만 또한 기도의 후원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될 때에 살기가 힘들지 않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세상살이가 쉬워집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나를 후원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나의 생각을, 나의 가치관을, 나의 결정을, 그리고 나의 계획을 후원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큰 격려가 됩니다.
그것 때문에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뒤편에는 한 사람의 충성된 후원자가 꼭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링컨과 와싱턴과 록펠러의 어머니가 있었기에 그들이 훌륭한 사람이 된것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 실라, 디모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반려자 동역자의 협력이 있어야 합니다.
현대는 리더쉽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리더쉽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리더쉽이란 영적인 권위로 상대방의 영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유교적인 권의주의로 통솔을 하고 리더쉽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가정의 부모도 자식에게 귄위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리더쉽을 발위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식이 따르지 않습니다.
영적 세계는 원칙이 있습니다. 물과 불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가? 강한쪽이 이깁니다 영적으로 강한 사람이 되어서 지배하고 장악해야 합니다.
지난번에 사슴이 벼랑길에서 마주 친 이야기를 했습니다.
서로 싸우면 둘다 죽습니다. 누군가 머리를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빨리 결말이 나야 합니다.
요나단은 영적인 리더싑이 있었기에 생명을 내 놓고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짝이 잘맞으면 놀라운 시너지 효과가 나타납니다.
말 두 마리로 하여금 물건을 끌게 하였는데 말두마리가 끌 수 있는 무게가 다르고 4마리를 끌게 하는데 힘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서로 협조하는 사이면 많은 더 많은 힘을 갖지만
그렇지 않고 처음 만난 사이여서 서로 화목한 사이가 아니면 오히려 더 적은 힘을 낸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은 하나 더하기 하나는 4가 되는 것이 아니라
3도 되고 4도 되고 심지어 12도 됩니다.
합해지면 상승효과가 나타내기도 하고 오히려 서로를 깍아 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요즘 정치판에 상생의 정치를 하자고 합니다. 윈 윈 작전이라도 합니다.
이것은 너도 이기고 나도 이겨야 진정한 승리가 온다는 것입니다.
남잘되는 것 배아픈 사람은 절대로 자기도 잘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남이 잘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남이 잘되어야 나도 잘됩니다.
설사 남이 나를 해치고 해코지를 할지라도 남 잘되기를 빌어준 사람이 승리합니다.
어떤 부부가 행복한 부부가 되는가?
부창 부수하는 부부입니다.
남편이 이치에 안맞고 사리에 안맞는 일을 하는데도 그것이 크게 정도에 벗어 나지 않으면 아내가 짝궁을 맞추어 주는 것입니다.
일일이 시비를 얼마든지 걸수있는데 잘맞추어주는 것이 그 가정의 성공 비결입니다.
여러분 잘된 가정을 보세요 편한한 가정을 보세요 모두 부창부수가 잘되는 가정입니다.
손발이 잘 맞으면 상승효과가 나타납니다.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손발을 잘 맞추면 서로가 잘 살수 있는 것입니다.
손발을 맞춘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고 상대방에게 맞추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훌륭한 아내는 여자가 똑똑한 것이 아니예요.
남편이 부족할지라도 온달의 부인인 평강공주처럼 맞추어 주는 아내가 똑똑한 아내입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훌륭한 남편은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남자입니다.
부부간에 기도 제목이 같아야 합니다. 서로 다른 기도를 하는 부부도 있을수 잇습니다.
함께 비젼을 나누고 함께 손발을 맞추어 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내 기준에 맞는 사람만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하고 맞지 않다고 협조안하고 거릴르 두는 사람은 이시대에 합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와 맞지 않아도 심지어 원수에게도 손을 내미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줄을 믿기를 바랍니다.
요나단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0절에서 적군에 자중지란이 일어났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각각 칼로 자기의 동무들을 치므로 크게 혼란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자중지란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막강한 블레셋과 싸워 어떻게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21절에서
블레셋에게 강제로 징발되었거나 용병으로 그 군대에 편입되어 한 때는 이스라엘 치는데도 가담했던 히브리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합하였습니다. 21절에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진영에 들어 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합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군이 공세로 나오고 블레셋 진내에 자중지란이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 돌이켜 이스라엘 군에게 합세한 것입니다.
22절에서
숨어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도 나와서 함께 싸웠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나와서 그들을 추격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한때 블레셋을 두려워 하여 동굴에 피신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전승의 소식을 듣고 나와서 블레셋 추격전에 가담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볼 때 오늘 이스라엘의 승리는
첫 번째 요나단의 희생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병기든자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사울은 특별한 대책이 없었지만
그의 아들 요나단은 귀한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블레셋 진영에 쳐들어가 그들을 물리치고 승리했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용기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과 용기의 사람을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승리케 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이러한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항상 승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눈 앞에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떻게 해서 든지 문제를 헤쳐나가려는 믿음으로
희생하는 사람 그리고 뒤따라주고 순종해주는 밀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서양속담에 [오늘날이라는 날은 지금부터의 인생에 있어서 첫날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는 여러분 인생에 첫날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하루 하루를 내 인생에 첫날로 삼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에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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