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 14일 삼상2:34-3:9 두 종류의 사람 2001-08-20 00:51:05 read : 1004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극명하게 대조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1) 육적인 삶을 추구하는 엘리의 아들과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무엘입니다.
두 종류의 삶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육신의 소욕은 베불리 먹고 즐기고 놀고 싶고 쾌락을 즐기고 싶은 것입니다.
육신은 영의 지배를 받아 절재되고 금지되고 조정을 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영보다 육의 소욕이 강하여서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엘리의 두 아들들은 육신의 소욕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의 자식 사무엘은 영의 지배를 받아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세상이 제 것인양 활개를 치고 육신의 소욕에 따라서 제물을 마음대로 제 것으로 취하고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는 죄악을 저지릅니다.
그처럼 마음대로 활개를 치고 다녀도 뚜렷이 제지하는 사람이 없으니 겉으로 보면 화려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미래는 암담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얼마 후에 그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습니다(33절).
육적인 사람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살다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들의 영혼은 지옥에 빠져 신음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사무엘이 추구하는 것은 하늘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로 가게 됩니다.
육적인 사람의 촛점은 자기 자신이지만 영적인 사람의 촛점은 하나님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죄의 길로 가지만 영적인 사람은 거룩한 길로 방향을 잡습니다.
사람은 삶에 방향을 잘 잡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속도도 중요한 것이지만 속도보다는 방향이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나 빨리 출세하고 성공하느냐'보다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에 더 관심을 가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빨리 빨리 출세하고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방향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자동차를 몰고 가는데 가는 방향이 합당해야지 엉뚱한 길로 가는 것은 아무리 빨리 달려야 소용이 없는 것이다.
엘리의 두 아들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그리로 가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사무엘은 영적인 사람인고로 하나님을 자신의 삶을 방향으로 정한 것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은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전혀 다릅니다.
육적인 사람은 성공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때로 거짖을 행합니다. 그리고 원한을 쉽게 품으며 생활이 추합니다. 바로 생각이 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항상 거룩한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거룩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가난해도 마음은 항상 따뜻합니다.
사람들은 엘리의 두 아들들과 같은 육적인 면과 사무엘과 같은 영적인 면을 함께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계속해서 육적인 것만 추구하면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앞 세우고 사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무엘은 영적인 삶에 표시로 흰 세마포 에봇을 입고 하나님을 섬겻습니다.
사무엘의 인들 왜 즐기고 싶고 놀고 싶고 먹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무엘의 육신은 영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은총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육적인 사람은 유신의 소욕에 따라서 현재라는 시간을 즐기며 편하게 살지만 그의 미래는 암담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의 육신은 영의 지배에 다라서 삶으로 비록 현재가 고통이 있을 지라도 미래에 그에게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첫 번재 두종류의 사람은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재 종류의 사람은 드릴줄 아는 사람과 드릴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엘리의 두자녀는 불량자가 되었고 한나의 자녀 사무엘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까?
여러 가지를 예를 들을 수가 있지만 거두절미하고 딱하나로 말하라면
하나님께 감사로 드린 자식과 그렇치 않고 하나님께 감사가 없이 기르는 자식에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한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서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을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감사로 드리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축복을 받으려면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신앙이 좋고 하나님의 복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드리라는 말씀이 너무나 많습니다.
롬12:1"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몸을 드릴뿐 아니라 기도도, 찬양도, 감사도 예배도 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이 신실한 사람들은 언제나 감사로 드리는 일에 익숙합니다.
없지만 있는 대로 드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드릴 것이 없는지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드리면 망하고 받아야 승리한다고 합니다만 신앙에 원리는 반대입니다.
드리면 망할 것 같지만 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잘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풍성한 복을 경험하며 간증하며 삽니다.
잠3:9-10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포도즙이 넘치리라" 고 말씀했습니다.
드리라는 것입니다. 드려야 복이 있고
드려야 비로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드리는 삶이 중요한가? 드림은 믿음의 증거입니다.
감사는 자신의 믿음에 분량만큼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감사에는 정성도 중요하지만 정성으로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에는 언제나 순종하고 실천하겠다는 신앙의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드림에 대해 오해하지 마십시오. 드림은 헌금을 많이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정말로 감사하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것은 항상 적은 것이지만 드리는 가운데 이미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 생활을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대하여 소유의식이 생겨서 지금까지 하나님을 양아버지로 여겼던 마음이 친아버지로 바뀌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추상적인 하나님이 구체적인 내 하나님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조롱을 받고 한나가 하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식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자식으로 노년에 효도받으려고 자식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자식을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하나님께 다시 드리겠습니다." 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많은 것을 받기만 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드릴줄 아는 신앙을 가지 사람입니다.
너무 드릴줄 모르고 달라고만 하는 신앙생활을 하니 초라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한나의 소원은 자식을 얻는 것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자식을 하나님게 드림으로서 하나님게 영광을 드리는 신앙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어머니입니까?
한나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을 도로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먹든지, 고기를, 김치를 먹든지, 먹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먹으면 그것이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기 반찬을 먹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나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듯이 하나님이 주신 자식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게서 2장 21절에 세아들과 두 딸을 주셨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더니 갑절의 축복을 주엇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하나 뿐인 것을 마저 드렸더니 다섯 갑절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드리는 신앙의 원리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드릴 때 더욱 성숙하고 온전하고 위대해 지는 것입니다.
드리는 생활은 복 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가난하고 힘든 미망인을 찾아와 요구했습니다.
"오늘 먹을 것 없어도 네것을 내놓아라"
이 말을 들은 믿음 좋은 미망인이 종을 신뢰하고 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더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아랍은 엄청난 석유로 많은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이므로 아랍 사람들은 건달에 게으름뱅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황무지 같은 땅이지만 하나님게 드리는 생활을 했더니 오히려 아랍 사람들 보다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어느 청년에게 믿음 좋은 아버지가 계셨다.
그런데 그 청년의 아버지는 살아 생전 보물처럼 노트를 쓰곤 하셨습니다.
다른 일엔 일체 비밀이 없으셨지만 오직 노트에 대해서는 함구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이 되서야 비로서 그 청년은 아버지의 노트를 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노트에 적힌 것은 가족들의 이름과 친구들의 이름이었으며 리고 하나님이라는 글자와 낯선 사람들의 리름이 기록된 노트었습니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생각했던 그는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아버지의 노트를 보고 있구나."
그의 모습을 본 어머니가 그에게 다가와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청년은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이 노트를 아세요?"
어머니는 그 노트를 들고 한장 한장씩 넘기면서 추억에 잠기시는 듯 했습니다.
"이건 너희 아버지의 기도 노트란다. 매일 밤 한사람씩 이름을 불러가며 조용히 감사의 기도를 올리곤 하셨지."
청년은 다시 낯선 이름들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분들은 누구신가요?"
"아버지가 감사하는 사람과 용서하는 사람들 이름이란다 아버지는 매일 그들을 위해서 하루도 배놓지 않고 기도 하셨단다" 라고 말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자식을 드리는 마음이 아니라 자식을 멋대로 키움으로서 가문에 불행을 초래했지만 한나는 자식을 드리는 생활을 함으로서 가문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드린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입니다.
두 번재 두종류의 사람은 드리는 사람과 드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두종류의 사람은
영이 열려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과 하나님을 못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가지가 둥치에서 떨어지고는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도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로 맺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이 있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여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라면 예수를 믿지만 기쁨이 없고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 가는 구원이 취소되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영광의 상급을 이루어 가는 이 땅의 삶에서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젊어서는 영이 맑아 하나님 대화를 나누며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지만 늙어가면서 하나님과 단절이 되고 버림을 받아 불행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두 아들과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므로 아들들의 죄를 바르게 징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입니다.
아무리 택함 받았다 하더라도 영이 깨어있지 않고, 세속 욕심에 영이 어두워지면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는 증표로 제일 먼저 그 사람에게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다고 교회나왔지만 하나님과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 않고 말씀이 이해가 안가고 믿기지 않으면 그는 이미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는 말씀이 엘리 제사장에게는 들리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엘리 제사장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두 사람이 성막 안에 있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노련한 일꾼인 엘리 제사장을 두시고 어린 사무엘을 부르셨겠습니까?
영적으로 오염되고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나이가 많아서 눈이 어두워져 갔다고 했습니다.
물론 나이가 많아지면 눈이 어두워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의 영적인 상태가 어두워 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겉사람은 늙으면 약하고 후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은 오히려 나이가 들어도
영적으로 깨어있으며 오히려 영적인 분별력이 확실해지고 믿음과 소망이 더욱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야곱은 나이가 들어서 앞이 보이지 않고, 육신이 약해져서 침상머리를 의지하여 그 몸을 가눌 정도로 쇠하여 졌지만, 그 믿음과 소망은 쇠하여지지 않고 더 밝아졌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엘리와 같이 노경에 가서 점점 영이 어두워지고 결국은 버림받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날마다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매일 새로워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녀를 위하여 매일 같이 기도하고 세심하게 보살피며 잘 양육하면 하나님이 주신 상급이 되지만
오늘 엘리 제사장 처럼 자식의 소행에 방심하고 잘못 다스리면 오히려 자식이 부모에게 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엘리 제사장이 그런 케이스인 것입니다.
성경에 욥은 부요하여서 날마다 자식들이 돌아가며 잔치를 벌리지만, 혹 부지중에라도 자녀들이 범죄하지 않았는가 해서 그 다음 날 아침이면 욥은 혹시 어저께 자식들의 죄를 범하지 않았나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욥은 참으로 훌륭한 부모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일부 부모들은 어저께 자녀가 밤늦게 들어 왔는지 안들어 왔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이 엘리 제사장같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으려면 항상 욥처럼 매일같이 속제제사를 드리지는 못하여도 자녀를 위하여 항상 깨어 기도하는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1의 말씀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다"는 것은
사람들이 신앙은 있으나 욕심과 죄악에 빠젔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 젔다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의 시대가 그런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사역자든 평신도든 말씀은 참으로 많이 알고 말씀은 범람하고 있는데 진정한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가 되엇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말씀은 바르게 증거되어도 받는 사람들의 마음 밭이 오염되어 있으니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설교를 들어도 마음에 감동이 없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의심해 보아야합니다.
먹을 물과 양식이 없어서 우리의 심령이 갈급한 것이 아니라, 받을 그릇이 오염되엇으니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암흑시대가 있습니다.
사사시대가 그러했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 400년 동안에 그러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로마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오히려 교회가 오히려 타락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교회를 개혁하기 까지 근 1300년 이상의 세월이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때를 만났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말씀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이 있고, 성경공부가 있습니다. 각종 유익한 신앙서적들, 방송매체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좋고 많은 말씀을 듣다 보니 웬만한 설교는 시시한 잔소리로 들려지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읽혀지지 않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하나님 음성을 듣지 않고 제 구미에 맞는 설교를 찾아서 돌아 다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훌륭한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하기 보다 먼저 욕심과 죄악으로 물든 우리의 심령이 먼저 깨긋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시간에 잠이 오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둔해지고 온갖 세상 욕심과 세상의 문화와 세상의 열광이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 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예배전에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예배를 준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감격과 감사와 기쁨이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전에 경건한 시간을 갖는 것은 당여한 것입니다.
만약에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마음에 은혜와 회개와 새로운 기쁨이 없다면 바루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때"가 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영적으로 암흑기가 온 것입니다.
오늘 사무엘 상을 읽으면서 엘리 제사장의 아들의 모습을 볼 때에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 멸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힘쓰지 않고, 나태하고 영적으로 둔감하여 사리사욕을 취하고, 죄를 범하고, 타락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고 엘리와 그 가정을 버린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온갖 욕심과 죄악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나님의 성령이 임할 수 없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영적으로 어두워졌을 때는 그 직책에 있었으나 사명을 발휘 못했습니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은혜의 자리도 뺏기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사무엘이 잘 때에 세 번을 불었으나 그는 엘리가 부르는 줄 알았습니다.
세 번이나 엘리에게 나아간 것을 보면 사무엘의 진실함을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처음과 두 번 째 까지 엘 리가 내가 부르지 않았다 했으니 세 번째 또 음성이 들렸을때에는 신경질을 낼 법도 한데 그러나 사무엘은 세 번째도 엘리에게 달려가서 부르셨습니까 하고 묻는 것은 사무엘의 하나님에 대한 경건하고 진실한 마음 때문인 것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영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는 것은 하나님을 마나기 위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실물이 없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나와서 사람만 만나고 돌아간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나와서 하나님을 영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1) 내 기도가 잘 나가고 2)내 옆에 하나님이 계신 것은 임재를 느끼고
3)기도 후에 한나의 고백처럼 수심이 없어지고 마음이 가벼워지며
4)예배후 감사가 있고 4)얼굴이 펴진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증표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알아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인 체험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은 문제가 잇는 것입니다.
오늘도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사무엘에게 엘리가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부르시는 것이다. 다시 하나님께서 너를 부르시면,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말하라.
엘리는 사무엘에게 듣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 바로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우리들은 엘리 제사장의 말대로 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따라합시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우리는 부모, 선배, 선생님, 어른들의 말씀하실 때에도 같은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선생님이여 말씀하옵소서. 제가 듣겠나이다"
얼마나 보기 좋은 태도입니까? 분명히 그런 자세라면 순조할 것입니다.
제대로 들을 줄을 모르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자녀 앞에 부모의 마음은 아픕니다.
그런 자녀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누구도 공경하지 않는 버릇없는 아이입니다.
우리의 신앙 자세 역시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는 다면 우리들 역시 하나님께 버릇없는 자녀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 시대는 패역한 시대입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때요, 선생님들을 업신여기는 때입니다. 사랑이 없는 때입니다. 지도자에게 순종하지 않는 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모습을 귀감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자세로 들어야합니까? 종의 자세입니다.
말씀하시면, 듣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무엘이 자라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선지자로 세웠음을 온 이스라엘이 알게 됩니다.
한 사람은 멸망하여 사라져가고, 한 사람은 세우심을 입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날마다 세우시고 계십니까? 점점 하나님은 떠나가고 계십니까?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죄악속에 사는 사람은 말씀 듣기를 싫어합니다. 빛으로 나오기도 싫어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면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시고 존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대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에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 만이 하나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