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 10일, 히12:1-2 내 앞에 당한 경주 2001-08-20 00:41:21 read : 1569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저는 마라톤선수 이봉주의 팬입니다.
이봉주 선수의 외모는 뛰어 나지 못합니다,
작은키 짭은 다리 뜨다만 눈 그것도 수술한게 그정도 라고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못생겼나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는 선한 모습이 마음씨 좋은 착하고 평범한 형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경주자입니다.
이봉주 선수가 이번 시드니 올림픽에서 넘어저서 25등 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의심하고 비웃었습니다.
이제 그는 끝났다. 그리고 미안하니까 거짖말로 넘어젔다고 한 것이다.
사람들이 거짖말이 아니냐 라고 의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봉주 선수는 그 것이 너무나 분하고 억울했습니다.
12장 1절에 말씀대로 경주에는 허다한 증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착해 빠진 이봉주 선수
가 어찌 넘어지지 않고도 넘어 젔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오기로 이번 오사까 마라톤 대회에 출전을 한 것입니다.
불과 올림픽이 끝난지 두달 밖에 안됐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마라톤 대회에 출전을 하였
습니다.
그리고 당당히 2등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말은
"일본에 후지다 선수는 나를 이겼다고 기뻐했지만
나는 나를 이긴 것을 기뻐한다" 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나는 나를 이긴 것을 기뻐하노라"
여러분 인생도 알고 보면 옆사람과 비교하며 달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의 싸움에서
자기 스스로와의 경주에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생 경주에서 어떤 사람은 실패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성공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마라톤은 무조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비장의 비법을 세워
놓고 달리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 인생에 경주도 무조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몇가지 원칙과 비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 인생에 달리는 비법을 성경에 본문을 통하여 배우고저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마치 마라톤 경주가 42.195㎞의 먼길에 달리듯이 우리의 인생도 장거리를
달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거리를 달리다 보면 때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갈등하고 긴장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좌절도 하고, 넘어지고 절망하고 다시 새로운 각오로 출발
하지만, 또 다시 넘어지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경주입니다.
그리나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한 그 순간 즉, 거듭난 순간부터 시작
되었기 때문에 내 앞에 당한 믿음의 경주가 성공적으로 마쳐지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본문을 통해서 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1. 첫 번째 인생에 경주자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 보느냐 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에 판도가 달라집니다.
술꾼은 항상 퇴근후에 술집만 바라 봅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항상 책만 바랍보니다.
그러나 공부하지 않는 학생은 맨날 게임만 바라봅니다.
노름꾼은 노름하는 것만 바라봅니다.
우리는 누구를 바라봐야 합니까?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초점을 예수님께 맞추고 예수님의 영광
스런 형상을 우리의 삶에서 나타내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을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나 탤런트의 모습을 닮기 위해 외모에서부터 걸음걸이
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흉내내는 것을 봅니다.
세상에서 좋아하는 인물을 닮기 위해서도 이렇게 노력하는데 하물며 우리의 모든 것 되
시는 주님을 닮기 위해 우리가 어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 예수님을 목표로 삼아 힘써 뛸 때 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성공적으로
될 것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인생 믿음의 경주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독바로 바라보고 달려야
합니다.
일편 단심 예수만 바라보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예화> 옛날에, 어떤 한 젊은이가 어려운 과거시험에 응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그 시험공부를 하기전에, 먼저 매우 지혜있고 덕망이 높다는 지혜로운
한 노인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는 노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하면, 과거시험에 합격할 수가 있겠습니까? 무슨 좋은 비결이나 방도가
없습니까? 있다면, 그것을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질문을 받은 노인은, 엉뚱한 이색적인 지시를 하였습니다.
" 자네, 여기 바가지에 가득 물을 담고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동네를 한바퀴 돌고 올수
있겠나" 자 이제 어디 한번 다녀 오도록 해 보게나!
바가지에 물을 손에 든 청년은, 영문을 알지 못한체, 그러나 한방울의 물이라도 떨어뜨
려서는 않된다는 노인의 말을 생각하고는,온 신경과 정성을 다써서, 동네를 한바퀴 돌
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때에 노인은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젊은이, 자네가 동네를 한바퀴 도는 동안 어여뿐 여자를 보았는가? 아니요! 술집을
보았는가? 아니요! 길거리에 사람은 많이 나와 있던가? 아니요! 저는 전혀 아무 것도
본것이 없습니다. 다만 오로지 이 물컵만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자 노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바로 그걸세 젊은이, 자네가 물었던
과거시험 합격하는 비결과 방법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일세. 오직, 자네가 목표한 과거
시험의 관문을 통과하기까지는 그시험외에 그 어떠한 것을 바라 보거나 마음을 주거나,
한눈 팔아서는 안된다고 하는 말일세.
그 말 뜻을 알아들은 그 청년은 오직 과거 시험을 치루는 동안 한눈 팔지않고 공에만 전
념함으로서 과거 시험에 합격을 하였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얻은 가장 소중한 축복은 바라 볼데가 있다면 아울러 우리는 갈 데
가 있다는 축복입니다.
롯데 백화점 앞에 가면 갈데를 몰라 힘없이 걸어가는 노인이나 실업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갈데가 바쁜 사람이 있습니다.
"갈 데"를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은 항상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 데를 모르는 인생은 힘없이 걷게 되고 가지 말아야 할 데를 기웃거리게 됩니
다.
사람은 가야될 향방을 모르면 연약한 모습이 됩니다.
사람들이 나약해지는 이유는 갈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갈 데가 있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
니다. 만약 우리에게 주님이 없다면 우리는 갈 데 없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갈 데를 정하시고 우리는 그 트랙을 따라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경주자는 언제나 주님이 정해 놓으신 경주로 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 경주로를 이탈해서
제멋대로 돌아다니거나 다른 선을 침범하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순간 실격패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주님의 나라요 주님의 영광입니다.
2. 두 번재 인생 경주는 가볍게 출발해야 합니다
경주를 하려면 경주에 방해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장애물이 무엇입니까?
1절 중반에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등에 무엇을 지거나, 긴 옷을 입고 뛰지 않습니다.
경기에 참여한 선수들은 자기 몸에서 짐되는 것을 모두 벗어버리고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고 뜁니다.
수영선수들은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 버린 선수도 있습니다.
머리가 치렁치렁 해서는 경기하는데 커다란 장애물이 될 것입니다.
신앙의 경주를 멋지게 완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
려야 합니다.
우리를 달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세상의 집착에서 속히 벗어나십시오.
믿음의 경주를 가로막는 마귀의 유혹을 담대히 물리 처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죄는 죄인데 어떤 죄라고 그랬어요?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꼼짝 못하도록 얽어 매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아무리 신앙의 경주를 잘 달리다가
도 죄라는 올 무에 걸리기 시작하면 제대로 달릴 수가 없게 됩니다.
죄라는 장애물에 걸리면 가다가 넘어지기 일쑤이고 제대로 달리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무거운 것'이란 욕심을 말하고 "얽매이기 쉬운 죄'는 '세상 죄를 말하는 것입
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힘차게 달리도록 하지만
불신앙의 죄는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잘하기 위해 죄악의 옷을 벗고 온전히 믿
음의 옷만 입고 뛰는 것입니다.
욕심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엡4:22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얽매이기 쉬운 죄는 물질, 오락, 명예, 권세, 염려 근심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중에서 가시밭에 떨어진 씨는 자라기는 하지만 결국 세상 염려 때문에 열
매를 맺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신앙인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기보다 어떻게 해서 하나 님의 뜻을 이
룰것인가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 입니다
잠8:21에 보면 "나 를 사랑하는 자는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신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경주를 하는 사람은 숭리할수 있지만 욕심의 경주를 하는 사람들은 곧 실망하
고 넘어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형제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스위스 알프스 산간 마을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제의 성품이 정반대입니다.
형은 사랑이 많고 주변 사람들을 많이 도와 주는 착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욕심이 많고 이기적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알프스 산에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누군가 사람들을 구조하러 가야하는데 험한 눈덥힌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그 형재들 뿐
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제가 산을 오르기로 하고 등산을 합니다.
그러나 목적이 달랐습니다.
형은 사람을 들을 구하려는 목적이고 동생은 비행기 속에 죽은 사람들의 재물이 탐이 나
서 올라간 것입니다.
어렵게 눈속에 파뭍힌 비행기를 찾앗지만 모든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한명 발견된 것입니다.
형은 그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 비행기 문으로 눈 설매를 만들며 애를 씁니다.
그러나 동생은 사람들의 지갑을 뒤지고 카메라를 모으고 재물을 모으기에 혈안이 되었습
니다. 형이 말렸지만 막무가네입니다.
신음하는 사람을 임시로 만든 눈 설매에 싣고 형은 출발을 하자고 하지만 돈에 눈이 먼
동생은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안습니다.
형이 할수 없이 출발을 하자 동생도 뒤에서 허겁지겁 뒤따라 옵니다.
그런데 아주 깊은 계곡이 있습니다. 형은 조심해서 건넙니다.
그러나 헐레 벌떡 스키를 타고 뒤따라 오던 동생은 계곡과 계곡 사이를 살짝 덮었던 눈
을 위를 지날 때에 무거운 짐으로 인하여 결국 수십 밑에 계곡 사이로 떨어저 죽는 것입
니다.
인간이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면 결국 낭떨어지에 떨어지 질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욕심 많아서 무거운 짐을 지고 달리니 것은 아닌가요?
어떤 사람이 욕심이 많아서 무리해서 큰집을 샀습니다. 그리고는 또 사업도 크게 벌였습
니다. 욕심껏 벌린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듬니까? 결국 무거운 짐으로 인하여 회사
도 파산하서 집도 날라가고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뛰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장애물과 같은 세상 욕심,명예,물질,권세,세상염려의 짐을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죄는 인생 경주에서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우리는 죄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려야 합니다.
3. 세 번째 비결은 믿음의 경주자는 인내로써 경주해야 합니다
12장 1절 후반에 있는 것처럼 내 앞에 당한 경주를 힘으로 경주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
경주하는 것입니다.
어떤 전도사님이 외국인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야 해외에 선교사로 나갈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나서 추천을 부탁하기 위하여 전화로 찾아 뵙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외국인 선교사가 그에게 만나자고 한 시간은 새벽 4시 였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4시에 사무실로 갔습니다.
그런데 사무실 문은 잠겨 있었고 무려 다섯 시간을 기다려서 아홉 시가 되어서야 외국인
선교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질문하기를 '일 더하기 일은 몇입니까? 사람의
팔은 몇 개입니까?' 등등. 뻔한 문제가 적힌 시험지를 내놓고 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전도사님은 성실히 다 기록하고 제출하자 이제 시험이 끝났으니 돌아가도 좋습니
다." 라고 말하고는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몇일후에 이란 답장이 왔습니다.
당신을 추천합니다 이유는 당신은 시간 관념이 뚜렸하고 기다리는 인내심과 무시당함을
참는 인내심에 합격했기에 추천을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할 때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경주해야 합니다.
마라톤 선수가 달리는 동안 평지도 뛰지만 오르막길이나 내리막길도 뜁니다.
마라톤 코스를 선수들이 달리다 보면 세 번의 고비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고비는 11∼15km를 달릴 때 제일 힘이 든다고 합니다.
그 고비를 넘기면 30km 가까워 지면 두 번째 고비가 온다고 합니다.
온 전신에 피로가 몰려오고 그냥 주저앉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30km의 두 번째 고비를 넘기면 세 번째 고비가 오는데 세 번째 고비는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에는 육신의 힘으로 뛰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으로 뛰는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마라톤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달리는 인생에 경주도 힘으로나 능력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인내로써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하였을 때 마지막 그 순간 우리는
찬란한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는 감격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인생에 경주는 빨리 달려도 소용없습니다.
바르게 달리고 정의롭게 달려야 합니다.
인내(휘포모네)란 말은 소극적으로는 해석하면 견디는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말하면 앞으로 전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 경주장에는 예기치 않는 고난과 시련이 부딛혀 오기도 하며 눈물과 슬픔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인내하고 고난이 와도 믿음으로 시련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어느 집에는 9가족이 한집에서 화목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친구가 화목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광으로 안내했습니다. 항아리 속에는 참을 "忍"으로 쓰여진 종이로 가
득 차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마음이 상할 때마다 먹물로 "忍"을 써서 참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나 불평과 불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 보고 참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행동 다 있습니다. 그러나 참아야 합니다.
인내는 믿음을 보존하고 평화를 만들며 사랑을 유지하고 겸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많이 참는 자가 성숙한 인격자요,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매사에 참고 나면 모든 일이 잘되고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참지 못해서 싸움이
나고, 갈등이 생기고, 헤어지고,
온갖 삶의 비극은 참지 못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참으심을 나타내신 표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참고 살아야 합니다. 가정, 직장, 교회에서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고 하셨습
니다.
신앙생활에서 십자가나 고통은 인내로 지는 것입니다.
마10:22에는 나중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인내로 경주해야 합니다.
4) 네 번째 믿음의 경주는 혼자만 잘 달리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와 함께
달려야 합니다.
마라톤 경주에는 허다한 증인들이 달리는 것을 지켜 봄니다.
12장 1절에서도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허다한 증인들이 지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부모가 우리의 친척과 형제들이 우리의 경주를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시집 보낸 부모는 딸의 인생살이 경주가 궁금 할것입니다.
결혼은 했는데 인생길은 잘 달리고 있는가? 혹시 삐걱거리는 소리는 안들리는가?
증인들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
고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그들과 함께 뛰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느 선수나 자기만을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자기를 바라보는 증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경주는 혼자만 잘 달리면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는 혼자만 잘 달려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지 못합니다.
믿음의 경주는 함께 달리는 동반자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도 진정한 동반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옆에 동반자가 있다는 느낌은 우리의 마음을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은 가장 소중한 행복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행복한 가정도 간혹 단절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단절의 순간에 주어지는 고독감은 정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외롭습니다.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실직한 아버지를 위해서 배려 할 줄 아는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족간에 서로가 선물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또 내 가족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귀한것이며 은혜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눠주고, 주고받아야 진정한 은혜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고, 배고픈 자에게 밥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려워 하는 외로운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며 진정한 인생에 반려자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마라톤도 혼자 달리는 것 같지만 우승자를 위하여 한사람이 희생자 역할을 하는 파트너
가 있습니다.
35 키로미터 까지는 다른 사람이 달려들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이끌어 주면서 동반자로
달려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부간에 함께 달려주는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가 승자가 되겠다고 싸우면 안됩니다.
악한 사람들이 달려 들지 못하도록 견제해서 최후의 승자가 되도록 도와주는 반려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년말이 되면 선물을 주고 받는 시절입니다.
물질적 선물보다 따뜻한 눈빛, 다정한 언어를 주는 것도 선물이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불편을 덜어주려는 작은 실천도 선물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살면서 선물처럼 사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주신 교회에 선물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부담주는 선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서로 선물이 되려는 마음으로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들의 가정은 주님의 임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일본 오사카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한 거지 부부가 출석합니다.
그 거지 부부는 다리 밑에 움막을 치고 사는데, 자식도 있습니다.
부인은 하루 종일 동냥하고 돌아오는 남편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남편이 밥을 얻어 오면 절대로 찬밥을 주지 않고 따뜻하게 데워 줍니다.
그리고 두 부부는 거지지만 주일날 교회에는 정성스런 마음으로 꼭 나옵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그 교회 나오는 사람 중에 제일 행복해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서는 둘이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기도를 합니까? 아무 것도 없는데..."
그러니까 오사카 사람들이 다 구원받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오히려 있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누가 진짜로 부자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사막을 걷는 낙타의 눈썹이 길다고 합니다. 그래야 작열하는 태양과 바람에 날리는 모래
로부터 눈을 보호하고 멀리 보면서 걸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낙타의 등에는 불쑥 나온 혹이 있습니다. 이것이 물주머니입니다. 물없는 사막을
걸으면서 낙타는 선인장처럼 물을 몸 속에 저장했다가 목마름을 해결 합니다.
여러분 인생 사막길에 때로 목이 마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생명을 가져다
주는 믿음이라는 물 주머니가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체는 내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 영혼은 항상 패배감을 느끼고 살 것입니다.
어느 고등학생이 장래 희망 난에 <사람>이라고 적었습니다.
교사가 장난하는 줄 알고 그 학생을 불러서 야단을 쳤습니다.
이 시대는 사람다운 사람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리는 정말 겸손한 사람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농촌 교회 목사님 교통사고를 당함
내가 무엇을 품고 사는냐 에 따라서 내 인생이 달라짐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품고 사십니까? 돈, 저금통장, 땅문서를 품고 사십니까?
어떤 분은 학위를 품고, 어떤 분은 야망을 품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엉뚱하게도 복수심과 질투심을 품고 삽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뜻을 품고 삽니다.
무엇을 품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가치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릇은 물을 담으면 물병, 술을 담으면 술병, 약을 담으면 약병,
그런데 우리가 꼭 품고 살아야 할 분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꼭 붙잡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살다보면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피곤과 낙심이 찾아 옵니다.
열심히 살다가도 때로 모든 것 다 팽개쳐 버리고 주저앉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
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
리라."(갈 6:9)는 말씀처럼
피곤해도, 낙심이 들어도,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 가운데
인내하고 우리의 달려야 할 길을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약속을 굳게 붙잡고 인내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들의 것이
기 때문입니다.
이봉주 선수처럼 인생은 나와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싸움에서 이기려고 하지 말고
나와의 싸움에서 이김을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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