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에 도망자라는 영화가 시리즈로 연속적으로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주인공 킴볼은 의사로서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호송도중 우연한 사고로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지명 수배가된 주인공 킴볼 박사는 끈질긴 형사와 시간에 쫒기며 아슬아슬하게 도망다니
는 생활을 합니다.
그는 도망자로서 항상 불안과 초조, 슬픔과 외로움을 맛보면서도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
들의 사랑을 받고 정을 나누지만 그의 정체가 드러나면 또 다시 헤어져야 하는 참으로 현
대인의 삶에 한 단면을 보여주는 영화엿습니다.
그는 도망자로서 몸과 마음이 극도의 피곤함과 고독을 느끼지만 그러나 이 영화에서 항
상 강조하는 주제가 하나있는데 그것은 그가 의사로서 자기가 감당해야 하는 일을 만나게
되면 설령 형사가 문 앞에 까지 왔어도 자기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 한다는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인간적인 휴머니즘을 결코 잊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붙잡히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픈 사람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돌보는 그의 모습은
요즘 우리 주변에 의약 분업으로 인하여 일부 의사들이 죽어가는 암환자를 팽개처 버리
고 이권에 매달리는 모습을 비교할 때에
참으로 비록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도망자의 신세지만 그의 모습은 차리 숭고하였으며
시청자로 하여금 그가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의사 킴볼은 도망자로서 쫒기는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의사라는 직업의 정체를 잊
지를 잊지 않는 모습을 볼 때에
우리도 어디에 가든지 자신의 정체가 예수 믿는 크리스천이라는 신분을 잊어버리지 말아
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 정체를 물어 볼 때에 우리는 담대하게 "나는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
로 모신 크리스천입니다" 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회사의 회사원과 전무는 서로 같은 교회에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크리스천이
라는 신분을 밝히지 않음으로서 한 회사에 10년을 넘게 함께 근무하면서도 서로 한 교회
에 다니는 줄을 몰랐다가 우연히 서로 정체를 알았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제목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여러분의 신앙에 정체를 밝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는 것으로서 만족하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인 성경을 일주일 동안 방안 한 구석에서 모셔두었다가 겨우 주일
날 교회 갈 때에 옆구리에 차고 가는 장식품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식사기도 마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기도하는 신앙은 아닌가?
우리는 본문에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당당히 밝힐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배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4천명을 먹이신 후 수많은 사
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엇습니다.
오랫동안 이방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아온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꿈은 메시야가 나타나 자
신들을 구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렛에 태어난 예수가 등장하여서 여러가지 이적을 베푸니 그들은 혹시 그가
메시야가 아닌가 아니면 위대한 선지자중에 하나인가?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유대인들 간
에 큰 논쟁이 벌어 졌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이스라엘 북부 지방에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한적한 곳을
찾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싶고 또한 제자들의 견해를 듣고도 싶으신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처음 질문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드냐?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망설임이 없이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
기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셧습니다.
제자들은 당황햇습니다. 그때 용감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
들입니다" 라고 말했으며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기다렸던 대답이 나오자 만족하시고 베
드로를 칭찬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간도 주님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이집사 김집사야 너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의 신앙에 정체를 밝혀라"
우리는 세례받을 때에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고 받았으며
또한 예배 때마 형식적으로 신앙고백을 외우고 있지만 정말로 마음속에서 나오는 신앙고
백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기를 워하는 것은 입술로 머리로 하는 신앙 고백 보다 우리의 삶속에서 나타
나는 신앙 고백과 신앙인의 태도를 주님은 보시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간에 예수님에 대한 정의와 태도를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신앙의 고백이 있을 때에 우리는 든든한 믿음을 가질 수가 있으며
든든한 믿음위에 있을 때에 아무리 어려운 고난과 역경이 몰려 와도
우리는 능히 감당할 수 있으며 더 큰 소망 가운데 승리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신이 믿는 예수가 누구인지 자기의 믿는 상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모르고 신
앙 생활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신앙에 대한 태도와 자세가 분명하지 않으면 우리는 삶에 위기를 만나고
힘들 때에 실족하기 쉬우며 심지어는 유다처럼 예수를 등질수도 있는 것입니다.
1) 먼저 13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기 전에 세상 사람들의 신앙에 대하여 먼저 질문하신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신이 나서 자신있게 대답을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하고 상관없는 이야기요 자기와 책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의 이야기는 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자신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14절에서 말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더러는 세례요한이라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중에 하나라고 하나이다"
사람마다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각기 다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의사로 믿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인정이 많으신 은행장 쯤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입학 시험장에서 인심이 후한 체점관이나 심판관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세상의 출세와 성공의 수호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범 답안은 아닌것입니다.
예수님을 내가 필요할 때만 찾아가는 병원이나 은행으로 생각하고
내 사업의 방패막이로 생각하면서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는 때로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결국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을 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필요할 때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예수와 함께 한몸이 되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배의 밑바닥 외부에는 조개삿갓이라는 조개류가 붙어 있는데 얼마나 단단히 붙어 있는지
마치 본드로 붙여 놓을 것과 같아서 사람의 손으로는 절대로 뗄수가 없으며 시속 3백 마
일의 폭풍속에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조개 삿갓이 배로부터 떨어져서 혼자 바다를 가르며 항구로 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조개 삿갓이 배 밑바닥에 붙어만 있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쉽게 갈 수가 있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에게 붙어서 한 몸이 될 때에 아무리 험하고 먼 인생길이라도 쉽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직접 질문을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물음에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정답이 될것인가?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 중에는 신앙의 태도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으며
어떤 제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정치 지도자로 생각하고 구테타를 통하여 예수님이 왕이
된다면 자기는 장관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특히 가룟유다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돈을 챙기는데 혈안이 되었고 심지어
는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배척을 당하고 상황이 불리해지자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은 사람
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항상 용감한 베드로가 먼저 입을 엽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말에 예수님은 기뻣습니다.
베드로가 솔직하게 자신의 태도를 고백하는 모습에서 기뻣을 것이며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말하기 전에 베드로가 대신 증언함으로서 기뻐하였을 것
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으로 하고 머리로 외워서 고백하고 있지만
베드로는 당시 사회 상황으로는 증언하기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
님의 아들이심을 당당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당당하게 증언 할수 있었던 것은 성경에 보면 그것은 베드로의 머리에
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 하심에 따라서 증언 한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도 후일에 증언을 번복함으로서 예수님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이 체포당하셨을 때에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그래
도 베드로는 멀찌감치 예수님의 일행을 뒤따라 감니다.
예수님이 대 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에 한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
차리고 "당신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지요?" 라고 말하자 그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였
으며 잠시 뒤에 또 다른 여종이 나타나서 "당신도 예수를 따르던 사람"이라고 지목을 하
고 사람들이 의심의 눈으로 베드로를 바라 볼 때에 상황이 불리해 짐을 느낀 베드로가 마
태복음 26:27에서 "예수를 저주하면서 자기는 결코 예수를 모른다고 선언하였던 것입니
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베드로의 비겁한 행위를 이해하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의 행동을 역시 바라보고 계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주님이 그리스도 라는 말은 주님은 기름을 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기름을 부음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요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는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
는 선지자와 같은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기름받은 분이라는 표현을 한 것입니
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엿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계신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확실히 믿고 신앙 고백하는 것이 믿음이 성도들에겐 꼭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잃고 사막을 걸어 가게 되었습니다.
물 한모금 먹지 못함으로서 갈증으로 목마른 고통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 참을 걷다보니 오아시스가 보였고 단숨에 달려가서 오아시스 바닥을 보니 물이 하나
도 없었고 대신 옆에 우물이 있어서 펌프질을 해 보았지만 물은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마침 한쪽에 작은 통이 있어서 통안을 보니 물은 있는데 오래되서 썩은 물이 었습니다.
그런데 통 옆에 이렇게 씌여저 있습니다.
"이 통 안에 물을 모두 우물에 붙고 열심히 펌프질을 하시오 그러면 물이 나올 것입니
다" 이 나그네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통안의 물이 비록 섞은 물이지만 그냥 물을 먹고 갈증을 해소할 것인가 "
아니면 저 글자대로 이 물을 우물에 넣고 펌질을 할 것인가?
만약에 물을 넣고 펌프질을 해서도 물이 안나온다면 이 나그네는 갈증으로 가다가 기절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글자를 믿고 물을 넣고 펌프질을 해서 물이 나온다면 신선하고
많은 양의 물을 먹을수 있으며 또다시 물을 받아 놓음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
을 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이 나그네는 글자의 내용을 믿고 물을 우물에 넣고 펌프질을 함으로서 신선한 물을
먹고 살아날 수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믿음을 견주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어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행동한다면 하나님은
성경에 씌인대로 우리에게 큰 은총과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외는 사도신경을 진정 마음으로 믿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입술로는 아무리 외워도 마음에 믿음이 안 간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이여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간절히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또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말씀을 듣지만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경우는 들은 내용을 실천하지 않기 때
문인 것입니다.
귀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속애서 실천 할 때에 우리는 온전한 믿음을 발견하게 되
는 것입니다.
가정 주부가 아무리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요리법을 보고 듣고 읽어도 실제로 만들어 보
지 않으면 그 요리에 대한 실뢰감이 즉 그 요리에 대한 믿음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듣고 본대로 음식을 만들어서 맛이 있을 때에 강사의 말에 신뢰감이 가고
믿음이 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를 요구한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끌고 와서 사형에 처해 달라고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으로 보면 예수는 아무 죄가 없으며 풀어 주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제 빌라도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신앙 고백을 하여야 하지만 불리한 신앙을 속이고
대신 관례에 따라서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서 죄인 중에
한 명을 특사로 풀어 주게 되었음을 알고 오히려 유대인들이 스스로 선택을 하게 만듭니
다.
그래서 빌라도는 흉악한 죄인 바라바와 예수 중에서 "내가 어떻게 하랴" 라고 예수 그리
스도에 대하여 유대인의 신앙고백을 물어 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라고 아우성
을 치자 그들의 요청을 들어 주었으나 빌라도는 속으로 말합니다.
"나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 너희가 그의 피값을 치뤄라"
그래서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한 벌로 2천년 동안 나라가 없이 방황하였으며 2
차 대전때 독일의 희틀러에 의해서 600만명이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 잘못된 신앙고백은 이와같이 엄청난 징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붕 위에 바이올린" 이라는 영화가 이었습니다.
주인공은 딸들에게 철저하게 신앙을 통한 가정 교육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주인공은 딸들에게 신앙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믿음에서 떠나지 말라 기도하는 일도 우습게 여기지 마라
너희가 하나님을 떠나 믿음이 없이 세상을 살아 간다는 것은 마치 지붕위에서 바이올린
을 켜는 것과 같이 불안하고 위험한 것이다."
바이올린은 셤세한 악기여서 든든한 반석위에서 연주를 해야지 지붕위에서 연주한 다는
것은 불안하며 실패하기 쉬운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베드로처럼 분명하게 신앙 고백을 한다면 나는 너희의 삶과 신앙에 든든한 반석
이 돼어 줄것이니 음부와 같은 사단도 너희를 해치 못할 것이며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
다." 이 말씀은 오늘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항상 미리미리 은행에 저축을 해야지 평소에는 내 멋대로 살다가 돈이 떨어지면
찾아가서 사정을 하는 은행처럼
평소에 내 생각 내 고집 내 철학으로 살다가 어려운 일 당할 때 예수님을 찾는 신앙은
아닌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나는 내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너희에게 주었다 그런데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 인생에 목표요 삶에 이유요 삶에 동기라고 말
할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드니 올림픽에서 많은 스타가 탄생 되어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전국민의 인기를 받은 선수는 처음 사격에서 은매달을 딴 강초현 선수
를 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녀의 인기가 얼마나 좋은지 덩달아서 모 남자 인기 가수는 천만원을 일시에 주고 백
만원씩 4년동안 지원하겠으며 또 많은 회사가 서로 광고 모델이 되 달라고 출연제의가 왔
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금 매달을 딴 다른 선수도 많은데 은메달에 불과한 그 어린 선수에게 이렇
게 관심을 갖고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그 선수가 가난하고 비천한 환경속에서도 자족하고 최선을 다한 그녀의 인간
승리의 모습에 환호성을 올리는 것입니다. 만일 강초현 선수가 부잣집 딸이었으면 이렇게
인기가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문에 보니까 강초현 선수는 지하실 셋방에 살면서 그녀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불치의
병으로 고생 고생을 하다가 작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벌어서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강초현 선수는 가난하고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형편을 자족하고
최선을 다하여 은매달을 걸은 강초현 선수의 밝게 웃는 해 맑은 얼굴의 인간 승리의 모습
에 전국민이 박수를 보내는 것입니다.
너희가 비천한 환경에 처할지라도 그속에서 자족하고 최선을 다하여 승리하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기 보다 먼저 자신의 형편과 처지에 불평과 불
만을 품고 낙심하고 원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어린 강초현 선수가 어려운 형편속에서도 승리한 모습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부
끄러워 할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제일 어려운 형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매일 매일 삶에 자족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
다.
마지막으로 영어 한마디 배웁시다.
"Stick your bush" 넝쿨을 꼭 잡으라, 딸기나무 넝쿨을 꼭잡아라.
저는 어려서 인왕산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여름에는 산딸기를 따 먹으며 놀았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영어시간에 "Stick your bush" 산 딸기를 많이 따려면 한 넝쿨을 잡고
따야 많이 딸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왕산에서 산딸기를 딸 때 항상 제가 제일 많이 땋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자기것 따다가 남에 것을 보니까 딸기가 많이 열렸거든요
그래서 따던 나무를 놔두고 여기 저기 다른 나무를 돌아다니다 보면 나중에 별로 못땀니다.
"Stick your bush" 딸기나무 넝쿨을 꼭잡아야 열매를 많아 땀니다.
마찬 가지로
"Stick your god" 예수님을 꼭 잡으시기 바람니다. 그래야 삶에 열매가 많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형편과 다른 사람의 형편을 비교합니다. 꼭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비교
하니까 모든게 불평이요 불만입니다.
어떤때는 목사님 말씀이 맞는것 갖고 그랴서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야 겠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어떻때는 세상 사람말을 들어 보면 마음이 흔들려서 돈을 잡아야 행복할 것같고
그래서 세상을 잡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왔다 갔다 왕복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Stick your god" 예수님을 꼭 잡으시기 바람니다.
우리 인생은 때로 비천에 처할 수 있습니다. 풍부에도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천에 처하든 풍부에 처하든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
다. 그러므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함의 은혜 가운데 최선을 다 함으로서 승리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여러분의 삶에 동기가 되고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
주님이여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에 위로가 되고 새로운 힘과 용기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과 함께 남은 인생을 살겠노라고 분명하게 신앙고백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새사람이 되고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에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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