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8월 15일 설교제목: 희생과 부활 본문: 요 12:24 2001-08-19 22:01:19 read : 1025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저깨 신문과 텔레비 뉴스에 동시에 미국에 캔자스주 교육 위원회에서 결정한 사항이
커다랗게 기사가 나오고 방송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용은 앞으로 캔자스주에서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까지 진화론을 가르칠수 없도록 결
정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다시피 진화론은 찰스 다원이라는 사람이 인간이란 원숭이가 진화돼서 인간
이 되었다는 추정이론입니다.
그런데 캔자스주 교육 위원회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 이유는 진화
론이란 입증되지 않은 찰수 다윈의 독단적이고 개인적인 이론에 불과한 것으로 검증되지
않은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서는 안된다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우리 주일 학교 학생들이 중학교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부딪히는 혼란은 교회에서는 하
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였다는 창조론을 가르치는데 학교에서는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는
진화론을 가르침으로 여기서 많은 학생들이 신앙에 회의가 오고 질문해 오는 것을 보았는
데
한국에 교과 내용이 대부분 미국에서 건너온 내용이므로 이제 우리나라 학교에서도 진화
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며 형편만 된다면 저라도 정부를 상대로 한국 학
교에서도 진화론 패기 운동을 벌이고 싶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읽은 요 12:24의 내용에서 "내가 사는 길"을 찾아 보고자 합니다
저는 지난주 목요일 밤에 저희 교회 주일 예배에 자주 나오시고 지병으로 고생하시던 남
자 성도 분의 임종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분을 위하여 마지막 임종 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오늘 본문에 내용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
라"
바로 희생을 통한 부활을 상징하는 내용입니다
바다에는 연어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본래 산계곡 하천에서 태어난 연어라는 이 물고기는 하천을 따라서 바다로 내려가 태평
양과 같은 큰 바다에서 3-4년 동안을 살다가 가을날 산란기가 찾아오면 자기가 태어난 계
곡 하천을 찾아서 죽음의 항해를 시작합니다
넓은 바닷가에서 3-4년을 살다가 자기가 태어난 계곡을 정확히 찾아 간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더구나 내려오는 물살을 거슬려 올라가는 것도 힘든데 웬만한 폭포를
만나도 그 폭포 물살을 거슬려 올라가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결국 자신이 태어난 계곡
을 찾은 연어는 계곡 하천 바닥을 가로세로1M, 깊이 30센치미터 정도로 바닥을 파고 그곳
에 알을 낳습니다,
연어는 자신의 고향을 찾는 동안 물살을 거슬려 올라오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는 답니다.
고향에 찾아 와서도 죽을 힘을 다하여 1M 이상 구덩이를 파면서 연어는 자신의 단백질의
30% 이상을 다 소모하고 결국 힘을 다뻰 연어는 알을 낳은 후 자갈로 그 자리를 덮고 기
진한 연어는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 합니다.
그 때가 날씨가 쌀쌀하고 쓸쓸한 가을이 끝나가는 때 입니다.
이때가 되면 대지에서는 울굿 불굿한 가을 나뭇잎이 떨어지고 여름날 아름다웟던 대자연
의 모습이 힘을 잃고 차가운 공기와 쓸쓸한 날씨가 옷깃을 여미고 따뜻한 햇빛을 아쉬워
할 때에
농부는 밀알의 씨앗을 대지에 뿌리게 됩니다.
뿌려진 밀알은 적당한 토양속에서 음산한 비를 맞으며 서서히 썩어가면서 밀알에 배유가
분해되고 뿌리는 아래로 어린 싻은 위로 올라가면서 밀알은 죽고 그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됩니다.
우리는 연어와 밀알의 죽음을 통하여서 죽음이라는 희생을 통하여만 새로운 생명이 탄생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생명이란 죽음이라는 희생을 통하여 새롭게 탄생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역설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낮아져야 높아진다는 말씀 말석에 앉음으로서 상석에 앉는다는 말씀 죽어야 산다는 진
리가 바로 그러한 내용들입니다
본문에 보면 죽지 않으면 밀알이 그대로 있고 밀알이 죽어야 많은 열매를 얻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이라는 희생은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생물에게 내린 가장 기본적인 탄생 윈리며 기
본적인 생명 질서의 법칙인 것입니다.
굼뱅이가 죽어야 매미가 나오고 구더기가 죽어야 파리가 나오고 장구벌래가 죽어야 모기
가 나오고 번대기가 죽어야 나방이가 나오고 듯이
모든 생물은 죽음이라는 희생이 있어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르지 않는다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누구를 향하여 희생하는가?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을 향하여 희생을 하는것입니다. (divinity)
두 번째 목적은 사람을 하여하여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humanity)
오늘은 8.15 광복절날입니다.
비록 이 나라에 해방이 미국에 의하여 이루어 졌다 할 지라도 이 나라에는 조국에 광복
을 위하여 희생한 선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만주 하얼삔 역에서 이등박문이라는 전쟁을 이끌어가는 일본 최고 지도자를
죽인 안중근 의사의 피값은 조국을 구원한 값진 희생양입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희생의 본을 보인신 분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
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정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우리에게 영생의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희생으로 부활의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5장 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나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
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옯겼느니라"
이 말씀은 주님의 유언입니다.
유언이 효력을 발생하려면 유언자가 죽어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유언에 말씀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먼저 희생의 본을 보여 주었듯이 기독교는 철저히 자기 희생을 통하여 신
자가 되고 자기가 죽는 희생을 통하여 부화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 정신은 철저히 자기를 희생시킬 때에 참 신앙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랬으며 스데반도 그래고 사도 바울 역시 자기 희생을 통하여 위대한 신앙인
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위대한 영적 예배란?
로마서 12장 1절에 의하면 "자신의 몸을 선한 일을 위하여 땀흘려 희생할 때에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일이며 그것이 가장 거룩한 영적 예배라고 한 것입니다.
사랑은 마음이고 희생은 행동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면 그를 위하여 희생의 대가를 치
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남편을 사랑하시나요 그렇다면 남편을 위하여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루
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자녀를 사랑하시나요 그렇다면 자녀를 위하여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루
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시나요 그렇다면 주님을 위하여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루
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시나요 그렇다면 교회를 위하여 희생의 대가
를 치뤄야 합니다.
만약에 희생의 대가가 없이 상대를 사랑하였노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짖입니다.
희생의 대가 없이 성공하기를 바라고 얻기를 바란다면 그것을 세상 사람들은 도독 십보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13절에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바꾼다면
"남편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한다면 목숨을 버리듯이
희생을 치뤄야 한다는 것입니다"
희생이란 상대방은 흥하여 가는 것이요 나는 쇠하여 가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의 관계를 물어보자
요한복음 4장 30절에서 세례 요한이 대답하기를
"예수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 말하면서 희생에 본을 보여 주었
습니다.
가정에서도 참된 희생이란 상대방은 흥하는 것이요 나는 쇠하여 지는 것이 참다운 사랑
의 희생 정신인 것입니다.
자식들의 키가 쑥쑥 자라는 것을 보면서 세례 요한 처럼 "너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겠
구나" 라고 작아지는 자신을 인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함으로서 스스로 자신이 작아지는 것은 현명한 희
생 정신인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큰자가 되기 위하여 서로 목소리를 높인다면 그곳엔 희생과 사랑은 존재하
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그리스도인중에는 자신은 죽지 않고 예수를 믿으려고 합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많은 교회 지도자중에도 예수님 보다 자신을 더 크게 부각시키는 경우가 있습
니다.
목회자 세미나 모임에 가보면 어느 목회자는 그랜져보다 더큰 오육천 만원짜리 그라나다
를 뻔적뻔쩍 거리면서 타고 옵니다
가난한 성도들이 시장에서 미나리 좌판을 벌리고 팔아서 남은 돈 중에서 십일조를 드리
고 늙은 노인이 자식이 보내준 용돈중에서 쪼개어 감사 헌금을 드린 돈인데 그 돈으로 수
천만원 짜리 자동차를 몰고 다니고 호텔에서 모임을 갖고 마음에 드는 목회자에겐 선교비
를 조금씩 보내주곤 회의 때는 그들을 부하처럼 몰고 다녀요
김수환 추기경이 프라이드를 타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
다.
우리 교회 지도자들도 성도들이 모은 돈으로 교회 건축하는 일에 열을 올리기 보다 가난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찾아다니고 봉사하는 희생의 모습을 보일 때에 기독교가 불
신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들이 교회로 몰려오게 될 것입니다.
24절 본문에 보니까 죽는 것은 한 알의 밀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이 한 알의 밀이 누구 입니까?
바로 최초의 부활의 역사를 만드신 예수그리스도 그분이며
여러분의 가정에서 회사에선 여러분이 최초 희생의 밀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쥐들이 회의를 하였습니다. 저 고양이의 위협으로부터 우리가 살아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그때 한 새앙쥐가가 좋은 아이디어를 내 놓았습니다.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자 그러면 고양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마다 방울소리가 달랑 달
랑하고 날 테고 그러면 우리는 귀가 밝으니 그 소리를 듣고 미리 피하면 될것이 아니냐?
모두들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누가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것인가?
아무도 희생양이 되고자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희생양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쥐들은 아직도 고양이에게 잡혀죽는
것입니다.
어느나라에 나라에 도둑이 너무 많아서 골치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 임금이 엄하게 명령을 하였습니다
앞으로 남에 물건을 도적질하는 사람은 그의 두 눈을 빼서 장님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
다.
그래서 전국 각지에 방을 써붙혔습니다.
그런데 그 임금의 아들 왕자가 민가에 나갔다가 어느집에 물건중 탐나는게 있어서 자신
도 모르게 호주머에 슬적 훔치다가 주인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임금이나 신하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왕자가 첫 번째 남에 물건을 훔치는 죄를 범했으니 그렇다고 왕의 명령대로 그의 두눈을
빼버리수가 없고 그냥 놔두자니 나라에 기강이 안서고 큰일 이었습니다.
그때 임금이 신하드에게 명려을 하였습니다.
두눈을 빼어라 하나는 왕자의 눈을 빼고 하나는 내눈을 빼라
결국 왕자도 애꾸눈이 되었고 임금도 애꾸눈이 되었을 때에 그 모습을 본 백성들이 더
이상 도적질을 하지 않음으로서 그 나라에는 그 이후로 도적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
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같이 고위 공직자들 부터 부정 부패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오히려 고
위 공직자가 더큰 도적이니 지방 공무원들도 함께 도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 있습니다.
어느 고위 공직자가 집에 도적이 들어 올까봐 개를 한 마리 키웠답니다
그런데 어느날 도적인 들어와서 집안에 물건을 싹 움쳐 갔습니다.
그래서 화가난 고위 공직자가 개를 향하여
"너는 왜 도적이 들어오는데도 짖지를 않느냐고" 나무랐습니다.
다음날 집주인인 고위 공직자가 집에 들어오자 "야 어제보다 큰도적이 들어오는 구나"
라고 개가 막 짖었댔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희생에 솔선수범을 보여 주셨듯이 우리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형제간
에 내가 먼저 희생의 솔선수범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부가 매일 계모임이다 쇼핑이다 동창회다 바같으로만 돌아 다니고 남편과 자녀를 위하
여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주부로서 권리만 요구한다면 그의 말에는 위엄이 없고 오히려
없순 여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회사일이라는 핑계로 늦게 들어오고 술 담배에 쩌들어서 소
리만 지르고 이치에 맞지 않는 권위만 요구한다면 겉으로는 순종하여도 자녀들의 속마음
에 반항심만 심어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말하는 것에 권위가 붙으려면 먼저 자신의 행위가 그들을 향하여 헌신
과 희생이 있어야 말 한마디에 위엄이 있고 그들이 부모를 존경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솔선수범이 최고의 교육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밀알이 땅에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겸손한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희생은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모성애의 마음으로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희생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을 위하여 은혜를 베풀기도 어렵지만 은혜를 베푼후 보답을 바라지 않는 마
음을 갖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까 죽으면 살리라 하였습니다
밀알이 잘 썩으면 삯이 나오지만 잘 썩지 않으면 잘 자라지 못합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철저히 잘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였습니다
내 옛사람의 모습이 죽어야 하고 내 이기주의가 죽어야 하고 내 자존심이 죽어야 하고
궁극적으로 내 자신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을 먼저 죽이려고 합니다
내 남편에 독선을 죽여야 해, 내아내의 허영심을 죽여야 해, 내 자녀의 게으름을 죽여야
해
그러나 남에 것을 죽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남에 것 상관 말고 내가 철저히 잘 죽으면 상대방도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희생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분들이 고백합니다.
목사님 우리는 남을 위하여 솔직히 그렇게 사랑을 베풀기가 쉽지 않아요 나도 하루 하루
먹고 살기 어려운데 어떻게 남을 위하여 그렇게 사랑을 베풀수 있나요?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마음으로는 그렇게 사랑을 더구나 희생적인 사랑을 하기란
쉬운게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의 마음으로 사랑을 하나요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희생적인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만이 진정으로 할수 있는 것이지
우리의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며 타산적인 마음으로는 절대로 남을 위하여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배워서 예수를 복사판 처럼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저깨 교회에는 중고지만 아주 좋은 팩시 및 복사기를 설치하였습니다
설치하러 온 사람이 복사한 것을 보여 주면서 "복사판이 원판보다 낫지요?" 라고 말하였습
니다.
아무렴 원판보다 낳을 수야 없겠습니까? 그정도로 원판과 가깝다는 이야기겠지요
우리도 그 세일즈맨 표현처럼 복사판이 원판보다 낳을 만큼 예수 닮기를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먼저 섬기는 마음입니다
영국 황태자가 교육을 받을 때에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남을 섬기는 정신입니다
그래서 황태자의 좌우명은 "나는 섬긴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조국을 섬기고 백성을 섬기는 것이 황태자의 섬김에 정신입니다
바로 우리 크리스천도 삶에 목적은 섬기는 데 있는 것입니다.
첫 번쩨 주님을 잘 섬기는 것이 크리스천이 할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섬기는 생활을 통하여서 예수님이 계신곳에 갈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를 잘 섬기는 생활을 통하여 우리 스스로가 높아 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내가 훌륭하게 성결하게 예수 믿는 모습이 보여 질 때에 내 자녀가 내 남편이 내 직
장 동료가 나를 높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이기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조금만 손해를 보면 가정이든 직장이든 상대가 누구든지 해명을 요구하고 보상을 요구하
고 책임을 추궁합니다
우리는 조금 너그럽게 여유있게 내가 손해를 보는 쪽이 편합니다
우리나라 어린이 TV 프로에 이름은 "누가 누가 잘하나"입니다
그러나 일본 어린이 TV 프로에 이름은 "모두 모두 잘하자" 입니다
숙제도 우리나라는 혼자서 해오도록 하지만 일본은 함께 해오도록 함으로서 이웃과 더불
어 사는 것을 가르칩니다
고등학생들은 내신 성적 때문에 반 친구들이 모두 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동네에서도 옆집이 냉장고를 큰 것으로 들여오면 우리도 바꿔야 합니다
왜 자존심이 상하니까?
제가 4단지에 이사와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집집마다 아파트 평수가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폼 잡아봐야 똑같은 평순데 자랑할게 뭐있겠습니까?
이제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내가 사는 길은
가정 주부로서 남편으로서 간호원으로서 선생님으로서 상인으로서 학생으로서 내가 사는
길은 나를 철저히 죽이는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죽는 길이 내가 사는 길이요 예수가 승리하는 길입니다.
한알의 밀알이 죽을 때에 비로서 많은 열매가 있듯이 내가 먼저 죽을 때에 우리 가정에
내 직장에서 많은 열매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죽는 모범을 보여 주시면서 영원히 사는 부활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내가 살려면 내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그길이 내가 사는 길이요 내 가정이 사는길이요 내가 부활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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