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2001-12-08 15:30:56 read : 80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엡 5:1-7)
(엡 5: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엡 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엡 5: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엡 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엡 5: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엡 5:7)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 되지 말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새 사람이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변하는 것은 우리의 신분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한복음 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자녀들은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1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사랑을 입었습니까? 여기 2절 하반절을 보면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시기까지 하셨다는 것입니다.자신을 버리셔서 마치 자기를 향기로운 제물과 같이, 또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바쳐졌던 생축과 같이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자기 자신과 같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주시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조선시대에 그런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어떤 임금이 신하들의 충성 테스트를 위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과연 이 신하들이 얼마나 진실한 이야기를 하는가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질문은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더 슬프던가 자식이 죽었을 때 더 슬프던가"였습니다.그랬을 때 당시는 효를 충과 더불어 중시하던 때였기 때문에 신하들은 앞을 다투어 그거야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였다고 대답했습니다.어떤 신하는 자기는 부모가 돌아 가셨을 때 너무 슬퍼서 눈물이 앞을 가리어 앞을 볼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신하는 자기는 부모가 돌아가시자 너무 슬퍼서 3일 동안을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했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말했습니다.
그랬는데 임금이 평소에 신임하던 한 정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임금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내가 보니 부모도 여위었고 또 얼마 전에 자식도 잃어 보았으니 대답할 말이 있을 텐데 어쩐 연고로 아무 대답이 없는고?" 그러자 그 정승이 입을 열었습니다. "폐하, 폐하께서 말씀하셨듯이 신은 일전에 부모님도 여위었고 자식도 잃어 본 경험이 있사오나 어느 것이 더 슬픈지 말씀드리기 황송스럽습니다. 굳이 폐하께서 물으신다면 부모님을 여위었을 때에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남산이 보일락 말락 했었습니다. 그런데 자식을 잃고 보니 앞이 캄캄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식이란 이렇게 귀중한 것입니다. 부모도 귀하지만 자식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은 고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도 희생제물로 내어 주셨다는 것은 엄청난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여기 1절에 "사랑을 입은 자녀"라는 말은 그런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말씀은 바로 그것에 대해서 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고, 또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1절에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라고 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본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자식일수록 부모를 닮습니다.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라면 우리가 그 하나님 아버지를 본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어떤 점을 본 받으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속성 중에는 본받을 수 없는 것도 있지만 본받아야 할 많은 것이 있습니다.
여기 2절에 보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또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4장 11절에도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힘써 하나님을 본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어떤 것을 본 받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로서,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제자들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본받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한 가지만 마음 속에 깊이 생각한다면 성도들 사이의 많은 문제가 해결됩니다. 교회생활의 문제가 다 풀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추한 모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싸우는 일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싸울 수는 있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마음을 닫고 용서하지 못하며 서로 비방하거나 훼방하는 일은 전혀 우리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 그 하나님을 본 받아 산다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무얼 하든지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이고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인 것이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랑 가운데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더럽히는 일입니다.
여기 3절을 보십시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성도란 말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성도가 되었는데, 성도에게 마땅치 않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을 들고 있습니다.
여기 '음행'은 성적으로 더러운 행위입니다. 부부관계를 떠나서 저지르는 모든 성적인 더러운 일들입니다. 그 다음 '온갖 더러운 것'은 성적인 것을 포함한 그 밖의 여러 가지 우리 몸으로 저지르는 더러운 행위들입니다. 또 '탐욕'은 마음으로 저지르는 더러운 것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예 거리를 두고 가까이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 곧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의 마땅한 바라고 했습니다.
또 그 다음 4절에 보면, 말로 저지르는 더러운 것들이 있습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도 마땅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더러운 말 대신에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요즈음 사극에 보면 임금의 사랑을 입은 사람이 자기를 가리켜 '성은을 입은 자'라는 표현을 씁니다. 성은을 입은 사람들은 성적으로 깨끗하고, 몸가짐도 조심하고 말도 조심하며 삽니다. 한 나라의 왕의 사랑을 입은 자도 그렇게 조심하는데,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들이야 얼마나 더 조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특별히 우리 성도들은 성적인 면에서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당시 에베소는 성적 문란이 심한 도시였습니다. 다이아나 여신을 숭배했는데 그 숭배 자체가 음란행위였습니다. 여사제와 성교하는 것이 제사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여사제들은 합법적인 창녀였습니다. 거기다가 당시 딸들은 의무적으로 성전에 나가 얼마동안은 여사제 노릇을 해야 했으니 그 당시 에베소의 성적 문란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만 합니다. 그런 시대에 사는 에베소 성도들이니 그들의 성적인 생활도 자연 문란하여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에베소 성도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음행은 성도의 마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음행은 어떤 시대에도 성도의 마땅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성적 타락이 난무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표현의 자유라는 허울아래 갖가지 음란한 행위들이 책을 통해서 잡지를 통해서 신문을 통해서 TV나 라디오를 통해서, 심지어 요즈음은 전화나 인터넷을 통해서 우리들 가까이에 있습니다. TV의 드라마들을 보면 불륜 관계를 얼마나 미화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다 넘어가서 나도 그런 연애 좀 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술집마다 여자들이 없으면 장사가 안 되고, 차를 파는 다방에서도 음란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발소 가운데에도 퇴폐영업을 하는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맛사지를 한다는 데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여행 중에 잠을 자는 여관들이 러브호텔이 되었고 그곳에서는 온갖 음란한 일들이 다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자기 딸 같은 아이들과 음란한 행위를 하는 소위 원조교제라는 것이 근절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우리들도 그 까짓 것 하면서 음행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것은 성도의 마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음행에 대해 특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15)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음행을 저지르면 우리 몸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몸인데 성적으로 창기와 같이 몸을 더럽힌다면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더럽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적으로 우리를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또 우리는 그 밖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도 우리를 구별하여야 합니다.
꼭 성적으로 깨끗하다고 해서 다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그밖에도 우리가 깨끗해야 할 영역들이 있습니다.
금전생활에도 깨끗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왜 그렇게 금전생활이 지저분합니까? 아무에게나 돈을 꿉니다. 꾸고서는 잊어버리고 갚지 않습니다. 갚을 때는 셈이 흐립니다. 물론 우리가 경제시대에 살기 때문에 남에게 돈을 빌리는 일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돈 거래에 있어서는 아주 깨끗해야 합니다. 이런 것도 성적으로 지저분한 것이나 다름없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금전 생활이 지저분한 사람 보면 얼마나 사람이 추해 보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들이 돈 몇 푼 때문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추해보인다면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욕보이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대인관계에서도 깨끗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지조가 있어야 합니다.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의리를 지키지 못하고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신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는 것도 더러운 것입니다. 성적인 더러운 것 밖에도 이런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법적인 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불법적인 일을 하면 추해 보입니다. 우리는 법적으로도 깨끗하고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질서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새치기를 한다든지, 아무데나 휴지를 버리고 침을 뱉고 하면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으면 추해 보입니다.
우리 한국 성도들, 기도드릴 때는 경건합니다. 전도할 때도 보면 믿음이 굉장히 좋습니다.
그런데 예배당에 들어오고 나갈 때, 너무 질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인데, 줄을 잘 서고 체면을 지킬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그 앉았다 가는 자리를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자리에 쓰레기가 가득 있고, 또 예배드리고 나간 자리에도 주보가 떨어져 있지 않나, 자리에 껌이 붙어서 다음 사람이 앉았다가 껌이 붙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의 목사님이 하소연하시기를 교회 구석진 데에다가 어떤 부모가 예배드리다가자기 아이 오줌을 뉘고 들어가더랍니다. 왜냐하면 화장실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그 시간 하나님 말씀 놓칠까봐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믿는 사람들의 모습니다. 아무리 은혜받는 것도 좋지만 성도가 그렇게 해서는 되겠습니까? 안믿는 사람들이 보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면에 깨끗해야 합니다.
특별히 말이 깨끗해야 합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의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기기도 번듯하고 정말 예수 믿는 사람답게 생겼으며 거룩해 보이고, 성적인 면에서도 깨끗하고 물질적인 면에서도 깨끗합니다. 그런데 입만 열면 독한 말이 나오고, 남 비방하는 말과 더러운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 예수믿는다고 하고 믿음이 좋다고 해도 직분이 있다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교회에 BMW 때문에 문제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압니까? "Big Mouth Woman"입니다. 여자만 그렇겠습니까? 그런데 교회 안에 이 말 많은 여자들 때문에 큰 문제입니다. 요즈음은 그런 말이 있어요.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백설공주랍니다. 백설공주란 '백주에 설치는 공포의 주둥아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적으로 깨끗해야 하지만 그 외의 말이나 삶이나 행동 등에서 모두 깨끗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마음도 깨끗해야 합니다.
마음을 더럽히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탐욕이라고 했습니다.
탐욕이 무엇입니까? 과도하게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일 수도 있습니다. 이성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명예나 권세일 수도 있으며 또 세상 즐거움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과도하게 욕심을 부리면 우상숭배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보다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우상숭배는 우리의 마음과 영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도 우리를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요즈음 우리들에게 이런 탐욕, 우상숭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운동 좋아하는 사람들, 운동 좋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적당히 하면 유익이 되는데, 너무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서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좋아지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 마저도 빼먹고 운동에 빠지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면 지나친 탐욕이 되어 우상숭배가 됩니다. 취미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적당하면 좋겠건만 그 좋은 취미생활을 과도하게 욕심을 부림으로 하나님마저도 저버리고 우상숭배에까지 나아가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건전한 가정생활까지도 그렇습니다. 가족끼리 단란한 생활을 가지고, 여행하고 여가를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가정에 치우쳐 내 남편, 내 자식만 생각하니 가족이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 보다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든지 자기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가정을 무시하고 파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는 언제나 가족을 위하고 가정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가정과 가족들의 시간도 하나님보다 중요하게 되면 안됩니다.
요즘 이런 경향이 만연합니다. 예전에는 성도들이 가정을 팽개치고 교회나와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봉사한다고 교회에만 살아서 목사님들이 하는 일이 가정에 돌아가 집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가정을 너무 좋아해서 가족과 같이 여행하면 교회에 주일 예배 안가도 된다고 생각하고, 가정일이 거룩한 일이라 교회 봉사는 안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자식들 입시 때가 되면 교회에 안나가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남편 일이면 모임 안나가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칫하면 가정생활이 이런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고 우리의 생각과 영적 생활을 더럽히는 것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5절 이하에 보면, 우리가 성도로서,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우리의 거룩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리라는 엄중한 경고가 있습니다.
(5)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6)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7)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 되지 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영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우리를 음행에, 이 세상의 더러운 것에, 또 탐욕 곧 우상숭배에 버려두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헛된 말로 우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더럽히는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성도입니다. 우리가 거룩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아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하면서 하나님 앞에 영광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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