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한 믿음' 1월 7일 2001-12-10 18:25:29 read : 843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이 만한 믿음'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마태복음 8:5-13)
새해 첫 주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벽두에는 모두 무엇인가 잘해 보려고 하고, 또 기대도 가지고 시작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로부터 칭찬을 듣는 일이라면 그것이 제일 귀한 일이라고 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으로부터 최대의 칭찬을 들은 사람의 얘기입니다.
'내가 이만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칭찬을 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이름은 안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로마군대의 100부장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로부터 칭찬을 들은 사람들이 몇 사람이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서도 이름은 없습니다.
마치 우리 나라에서도 옛날에 마산 댁, 진주 댁, 그렇게 부른 것처럼 가나안 여인, 또는 스로보니게 여인 등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 했더니 들은 척도 아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따라 오면서 간구 하기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가 저렇게 계속 따라오며 귀찮게 합니다' 할 때, "자녀의 손에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이 여자가 하는 말이 "주여, 옳소이다. 그러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할 때 예수님이 놀랐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구나,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주님께로부터 칭찬 받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개야! 네 믿음이 크구나, 네 믿음대로 되라!"
"내가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구나"라는 칭찬 듣는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로부터 칭찬을 들은 이 백부장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습니까? 우리도 백부장이 가졌던 그런 믿음을 가지고 이 한해를 살아갈 때 소원대로 되라는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1. 백부장의 믿음은 사회적 신분을 초월한 믿음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적 형편으로 볼 때 로마의 군인이 다른 민족의 신을 믿는다는 것은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유대인들도 배척하는 나사렛 예수를 찾아 나온다는 것은 상식밖에 일이었습니다. 100부장은 그 자신의 신분으로 볼 때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100부장은 당당한 일등국민인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복 국의 장교이었습니다.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었던 삶이었습니다.
예수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어쩌면 도리어 자신의 진급과 출세 길에 지장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찾아 나섰습니다.
오늘도 사회적 신분 때문에 예수 앞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출세>와 <성공이라는 것> 때문에 예수 앞에 나오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젊은이들 중에서도 보면 이런 경험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하기 어렵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왜냐하면 주일날도, 그리고 다른 날도 직장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겠는데, 그것을 멀리하고 주님 앞에 나오는 일은 진급하는 일에 지장이 될까봐 못나오는 경우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특히 상층지위에 있을수록 그렇습니다.
이 100부장은 그것을 극복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환경을 믿음으로 극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도 환경으로 인하여 예수 앞에 못나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환경이 좋지 못해서 예수 앞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전도를 해 보면, "다 먹고 살기가 바빠서 나중에 나가겠습니다. 내가 아들 딸 대학 마칠 때까지 뒷바라지 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나가지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가하면 그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환경 때문에 도리어 예수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① 좋은 집에서 사는 환경 때문에, ② 돈을 많이 소유하고 사는 환경 때문에, ③ 지식을 많이 소유한 환경 때문에, 그런 것으로 인하여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100부장은 로마의 장교로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도 아니었고, 성공 못한 사람도 아니었고, 100명이나 되는 부하를 거느리고 명령만 하면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는 신분의 사람이었습니다.
군인 얘기가 나왔으니 6.25 전쟁 때 보니, 국회위원도, 법관도, 교수도, 문화예술인도, 학자들도 다 쓸 데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제가 논산 훈련소에 들어가 푸른 제복으로 갈아입고 군인의 신분이 되어 보니 육군 소위, 대위가 그렇게 높아 보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군인들이기에 직속 상관이 하늘같이 보였습니다. 별이 떴다 하면 모든 산천이 벌벌 떨 지경이었습니다.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그런 높은 신분이 장교임을 알았습니다.
지금은 돌아간 저의 매형 되는 분이 6.25 당시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하여 중령으로 제대하였는데, 6.25 당시 대위 계급장을 달고 지프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볼 때 그렇게 당당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보입니다.
더욱이 전쟁지역에서 100부장이란 대단한 지위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 앞에 나와 간구(懇求)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간구란 보통 구하는 것을 간구(懇求)라 하지 않습니다.
정성 간(懇), 구할 구(求)자 입니다.
정성을 다해 구했다는 뜻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믿음입니까?
이런 믿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2. 백부장의 믿음은 약자를 불쌍히 여기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 지위 높으신 로마의 장교가 그것도 자신의 문제가 아닌, 부하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도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보면 평소에 이 백부장의 사람됨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올라서면 자연히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부하를 생각하기 보다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어 출세의 길을 앞당기려는데 만 급급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 100부장은 자기의 문제도 아니었고, 자기 친 가족이 아픈 것도 아니라, 부하의 병을 고치려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간구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우리의 믿음이 나 하나만을 위하여 믿게 되기 쉽습니다.
자기 중심으로, 자기만을 위한 욕심으로 믿기 쉽습니다.
이웃을 모르는 자기들끼리의 사랑으로 믿음이 흘러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100부장은 부하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어진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까짓 부하 하나쯤 병이 들었건 말건 군인이 뭘 그런데 다 신경을 쓰는가' 라고 할 수 있겠지만, 100부장은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그의 사람됨이 남과 달랐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기도가 이기주의적이 되기 쉽습니다.
나 하나만의 위로와 평안과, 내 가정과 내 식구들만의 건강을 위한 기도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믿음이 평범한 믿음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눈길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웃이 없는 믿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들은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말라버린 신앙인들 때문에 전도의 문이 막히고 있지 아니합니까?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의 모든 계층간의 갈등과 집단 이기주의, 그리고 당리당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욱이 교회들까지도 내 교회 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데서 시작됩니다.
한동안 교회들끼리 한심하게 싸우던 때가 있었습니다.
60년대만 해도, 6.25의 상혼이 남아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이었습니다.
모두가 남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때였었는지는 몰라도, 교회들끼리도 서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었습니다. 그때 여름성경학교를 한다고 포스터를 어느 교회가 붙여 놓으면, 다음에 이웃교회가 바로 그 위에다 붙이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싸웠습니다. 또 교인들을 쟁탈하느라고 교패들을 바꾸어 붙이느라 싸웠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그것을 보는 예수님이 어떻게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앞으로 21세기는 서로 도우며, 이웃과 함께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웃을 생각하는 신앙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100부장은 바로 그런 면에서 우리의 신앙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3. 100부장의 믿음은 절대적 신뢰와 순종의 믿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100부장의 간구를 들으시고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할 때,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손수 왕림할 것까지 뭐 있겠습니까....' 이것은 보통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신뢰와 확신이 없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명령에 부하는 움직이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 순종으로 임하였습니다.
100부장은 자신의 신분에서 알고 있는 바를 그대로 믿음으로 적용시키었습니다.
오늘 여기에 우리들이 깊이 본 받아야 할 문제가있습니다.
① 직장 상사에게 하듯 내가 주님께 얼마나 하고 있는가?
② 내가 공직의 자리에서 내 부하직원이나 상사에게 하듯 그러한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의지하고 따르고 순종하고 있는가?
③ 더욱이 교회의 봉사 생활에서 얼마나 이 100부장과 같은 마음을 품고 하는가?
④ 주의 종들과 교회의 장로들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이 얼마나 있는가? 등등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회적 신분의 눈으로 보면 예수는 저만치 밀려 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는 로마의 장교이었고, 하나는 이름도 없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앞에 나아와 간구 하였다는 것은 보통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더욱이 가서 고쳐 주겠다는 데 올 필요 없이 다만 말씀으로만, 명령으로만 해 달라는 이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내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 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흡족하였으면 이렇게까지 칭찬을 하였겠습니까!
오늘 이런 믿음이 새해에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네 믿은 대로 될 찌어다'라는 주님의 선언대로 금년 한해동안 우리의 믿음대로 모든 일이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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