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믿음의 의미 2001-12-10 15:45:14 read : 1090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시편 62:1-12 성경본문보기
실패한 선교사였던 “존 웨슬리” 라는 사람이 런던의 길을 지나가다가 올더스게잇 스트리트 라는 길을 지나가다가 초라한 모습으로 들어섰던 작은 채플에 그날의 설교자는 자기 설교를 선포할 수 있는, 아마 그런 자격이 갖추어 지지도 않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로마서 1장, 마르틴 루터가 쓴 설교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1장의 말씀을 듣다가 이 실패한 선교사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로마서가 마침내 그의 인생을 변화 시켰고, 영국 교회를 변화 시켰고, 영국 국가를 변화 시킨 일에 결정적 영향력을 끼치는 놀라운 불꽃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갈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로마서 주석을 썼을 때 신학자들은 그것이 신학의 운동장에 떨어진, 그것은 원자폭탄과 같다 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로마서가 그리스도인 들이나 신학자들에게 이토록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로마서라는 책이 성경의 모든 책 가운데서 믿음의 본질을 가장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에는 두가지의 중요한 초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서만, “믿음으로서만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
두번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의인들이 또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이 두가지의 초점에 맞추어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로마서가 쓰여지기 훨씬 오래 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약 1000년 전에 시편 기자인 다윗에 의해서 쓰여진 오늘의 본문은 그 옛날의 믿음의 의미를, 로마서가 강조하는 믿음의 의미를 이렇게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폭풍우가 계속되는 인생의 여정에서 우리가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오늘의 시편은 다윗의 생애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 그 아들 압살롬에 의해서 친히 반란을 경험하며 패해 다니던 시절에 쓰여졌던 시편입니다. 그의 인생이 어두운 밤이 였을 때 그가 가지고 있었던 믿음, 그 믿음은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그의 믿음을 통해서 이 어두운 폭풍의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는 의미를 생각해 보고싶습니다.
믿음의 의미, 무엇일까요?
첫째로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만 구원의 소망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만 구원의 소망을 갖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아들마저 나에게 등을 돌린 세상, 얼마나 비참한 일이에요? 아들마저, 이 아들의 이름도 압살롬이 아닙니까? 압살롬! 네, 아들마저 나에게 등을 돌린 세상, 이런 세상에서 다윗은 누구를 믿을 수가 있겠으며 또 누구에게 자기의 구원을 호소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의 1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누구만? “하나님 만!” 바람이여. 2절을 보겠습니다. 2절에 보시면, 오직 “저만이” 누구에요? “하나님 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자, 또 5절을 보겠습니다. 5절에 보시면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하나님만 바라라.
어떤 단어가 강조되어있습니까? 하나님, 하고도 만! 녜, 하나님 만! 그 단어가 강조 된,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만!, 영어로 읽어보시면 God alone, God alone , God only, He alone, 그분 만! 하나님 만!.
우리가 히브리어 성경으로 이 부분을 보시면 이 짤막한 그 처음 여섯 절에 다섯번이나 이 단어가 강조됩니다. 그것이 히브리어로는 아주 독특한 그 발성을 가진 단어인데 “악카!, 악카!” 라는 단어가 무려 여섯번이나 나와요. “하나님 만! , 하나님 만!” 이 단어가 강조됩니다.
우리가 많은 경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도 믿고 뭐 돈도 믿고, 하나님도 믿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도 믿고, 우리는 항상 인생을 살면서 어쩌면 우리는 양다리 걸치기 작전을 하면서 인생을 살고있는지도 모르죠.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꿈을 꾸었어요. 꿈을 꾸었는데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마 한창 자라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에요. 자라날 때 우리는 떨어지는 꿈을 잘 꾸잖아요. 절벽에서 떨어지다가 나뭇가지를 잡았어요 다행히.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지금 힘이 자꾸 쳐지니까 나뭇가지를 잡고 소리를 칩니다.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누구 없어요?” 그런데 작은 소리가 들리더래요.
“나 여기 있다”
“누구세요?”
“나 하나님, 네가 믿고있는 하나님”
“살려주세요!”
“그래? 그럼 염려말고 손을 놓아! 내가 구원하마 손을 놓아!”
그러니까 자기가 한참 있다가 하는 소리가
“누구 다른 분 없어요?” 하하하~,
그러다가 자기도 웃겨 가지고, 웃다가 깨었대요 하하하~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그런 식으로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참된 믿음이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또 그 무엇도 나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 만! 하나님 만!
옛날 그 중세기의 수도사들이 늘 강조했던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것을 인용하죠? 저는 좋은 얘기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지만 신뢰할 대상은 아니다” 인간은 사랑할 대상이지만 신뢰할 대상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해야 돼요. 끊임없이 사랑 할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신뢰할 대상은 아니다. 하나님만, 하나님만 정말 믿을 수 있는 신뢰의 대상이라는 것. 때로 하나님깨서는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진리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붙들고 있는 거짓된 믿음의 근거, 그 근거를 때때로 하나님이 흔들어 놓으실 때가 있어요.
자, 믿었던 사람이 우리를 배신합니다. 믿었던 은행이 나를 배신합니다. 믿었던 증권이, 주(株)가 나를 배신합니다. 믿었던 회사가 나를 배신합니다. 그때야말로 뭐 할때에요? 하나님, 하나님? 뭐에요? “하나님 만!” 하나님만 신뢰할 때입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구원, 영원한 구원.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저 천국의 삶을 누리게 되는 영원한 구원, 그 구원도 우리가 심지어는 그 구원의 근거가 내가 될 수가 없죠. 내가 행하는 가장 좋은 일도, 거룩한 일도 보면 거기에는 잘못된 동기들이 섞여있어요. 어떤 행위도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또 그 누구도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날 하나님의 아들이신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하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 그분을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 만!”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땅에 살면서 또한 계속적인 폭풍우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그때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을 또 새롭게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고난 오늘의 폭풍우 속에서도 나를 도우시는, 나를 붙드시는 그 하나님의 구원케 하심을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오늘 본문에 보시면 이 시편기자는 정말 그 하나님을 신뢰했을 때 자기의 주변의 삶이 요동치고 있지마는 역사가, 현실이 요동하고 있지마는 자기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잠잠히 살아간다!
저는 이 고백이 최근에 묵상하면서 너무나 좋아요.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5절에도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랄지어다” 잠잠이! 이 잠잠이라는 것은 흔들림이 없는 고요한 침묵, 우리를 둘러싸고있는 요동하는 세상 속에서도.
우리 3절에 보십시요 3절에 보시면 “넘어지는 담과” 자, 담이 넘어질려고 그래요. 나를 보호하고 있는 담이 넘어집니다.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울타리, “흔들리는 울타리” 자 울타리는 우리를 보호합니다. 지금까지 나를 보호한다고 믿었던 그것들이 막 담이 흔들리기 시작해요.
네, 미국의 그 경제의 상징이였던 “월드 트레이드 센터”도 흔들리고 무너졌잖아요? 우리가 오늘 믿고 있었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요동하고 있습니다.
네, 보세요.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그런데 거기에서 내가 흔들리고있는 나를 그나마 죽일려고 공격해 들어오는 세상.
자, 그런데 이런 세상의 한복판 속에서도 이 당당한 고백을 보세요.
“내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자, 왜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이것은 그가 이 시편기자가 구원의 소망을, 구원의 소망을 누구에게만? 하나님 안에만, 하나님 안에만 둘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절에 이 고백이 가능했습니다. 5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 도다” 믿습니까 여러분?
담이 흔들리고 울타리가 흔들리고 우리가 믿었던 모든 것들이 흔들리지만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잠잠히 이런 세상에서 살 수가 있다는 것, 이것은 구원의 소망을 하나님 안에, 하나님 안에만 둘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견고한 평안의 축복이.
자, 세상은 흔들리는데 담은 무너지는데 내 맘에는 쉼이 있어요. 안정이 있어요. 흔들림이 없는 청정한 침묵이 있어요. 이 세월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그것은 내 구원의 소망을 하나님 안에만 두었기 때문에, 이 소망이 이 축복이 여러분과 저의 몫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만 구원의 소망을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번째로 믿음이란 “하나님 안에서만 관계의 자유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관계의 자유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그 하나님만이 나의 믿음의 대상이다, 그 하나님 만이 내 유일한 신뢰의 대상이다! 이렇게 우리가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그분에게만은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어야지요. 그 분에게만은 모든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지요. 또 그분과는 모든 것을 의논할 수 있어야지요. 그 분이 다 아시잖아요? 아시잖아요? 내 좌절도 알고 내 이중성도 알고, 내 속에 있는 그 거룩하지 못한 동기들도 알고, 내 좌절과 내 모든 약점도 알고, 열등감도 알고, 내 상처도 아시는 하나님. 그분이 이미 아신다면 감추는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다 내어 놓으셔야지요. 그리고 그분과 정말 내어놓고 내가 내 마음을 그분 앞에 열 수가 있다면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넉넉한 자유! 저는 이것이 신앙인이 향유할 수 있는, 신앙인이 누릴 수 있는 삶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시면 본문 8절에서 다윗이 이것을 경험하고 우리에게 무어라고 권면합니까? 우리 8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8절, 다같이 시작,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녜, “백성들아 시시로” 시시로라는 것은 언제나, 어느 때나, “at all times” 언제나, 낮에도 밤에도 황혼 녘에도 새벽에도. 내가 어디가 있든지 어디서나, 시시 때때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마음을 토하라” 그랬습니다. 토하라! 영어에는 fore - out, 다 꺼집어 내라! 이 말입니다. 다 끄집어 내라!
내 속에 숨어있는 저 깊은 의식, 무의식 속에까지 잠겨져 있는 내 열등감과 좌절과 눈물과 갈등과 다 내어 놓으세요. 좀 다 내어 놓아보세요. 하나님 앞에 다 내어 놓으세요. 그때 자유하게 되요. 여러분 자유한 관계란 것은 뭐에요? 투명한 관계, 숨길 것이 없는 관계. 하나님이 아시는데 그분 앞에 숨겨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다 내어놓으세요. 그리고 그 분 앞에서 위로 받고, 그 분 앞에서 치료 받고, 그 분 앞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 이것이 신앙이란 말이지요. 이것이 신앙이에요.
금세기 아마 평신도로서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을 끼친 사람, 전 세계에 흩어진 크리스챤들에게 아마 투표하면 틀림없이 “C.S 루이스”라는 사람이 뽑힐 것입니다. 저가 종종 인용하죠? C.S 루이스.그는 옥스포드의 교수였습니다. 그는 본래 무신론자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였습니다. “하나님이 있는 것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그 문학도 가르치고, 역사도 가르치고, 르네상스를 가르치고 문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였어요.
그 칠드런 스토리서부터, 어린아이 이야기서부터 어른들의 사상적인 저작까지, 영향 있는 많은 책들을 썼잖아요. 그런데 이 분이 문학적 관심 때문에 그래도 성경을 좀 알아야 하지 않느냐? 그래서 신앙을 위해서가 아니라 문학적 관심 때문에 어느날 성경을 열었어요. 그런데 성경 중에서도 내가 시편을 좀 읽어보자 시편, 시에 관심이 많은 분이니까, 또 성경을 아주 가운데를 딱 열면 시편이 나오니까, 네. 그래서 시편을 C.S 루이스가 읽기 시작했어요. 시편 1편을 읽어면서 이분의 소감이 영어로 “not bad” 나쁘지 않다! 시편 1편이 좋다! 2편? 괜찮다! 3편, 4편, 5편, 그런데 10편을 넘어서면서 이 분이 고개를 흔들기 시작했어요. 야 좀 이상하다! 이 시편에는, 성경시편에는, 시는 아름다워야 되는데 이 시편 안에 정제되지 못한 언어들이 이 거친 언어들이 이렇게 많이 나올까? 왜 이 시편기자는 웬수가 이렇게 많을까? 하나님이 웬수들을 언제까지 두시겠습니까? 그 웬수들을 죽일 기계를 준비했다가 작살을 내시옵소서, 이런 험한 말이 나온단 말이지요. “에이, 이건 아름다운 시가 아니야!” 던져버렸어요. 성경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던지고 나서 그 다음 생각을 하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래요. “그렇지만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살다 보면 원수도 생기고 막 죽이고 싶은 사람도 생기도, 그런 좌절이 생기고.
적어도 성경은 인간의 감정 앞에 솔직하구나! 그것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투명하게 내어놓을 수 있는 성경, 그래서 그는 성경을 계속 읽고 그러다가 그분이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비교적 일찍 쓴 책 가운데 하나가 Reflection on the sun,“시편에 대한 묵상” 이라는 책이 있어요.
거기 보면 시편의 하나님을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의 하나님은 우리가 뭘 쏟아놓든지 무슨 얘기를 하든지 내가 어떤 절망과 어떤 불평과 좌절을 말하든지 심지어는 그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 당신 믿을 수 없어요 왜 그랬습니까? 너무 잔인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런 소리를 해도 그 모든 푸념과 독백과 절망의 언어들까지 다 받을 수 있는 큰 가슴을 지니신 하나님, 그것이 시편의 하나님입니다. 시편의 하나님.
오늘 여러분의 절망이 뭐에요? 여러분의 눈물이 뭐에요? 좌절이 뭐에요? 아픔이 뭐에요? 다 내어 놓으세요. 상담은 매우 유익하지만 우리가 사람과 사람에게 내 마음을 오픈(open) 하는 데는 언제나 한계를 느낍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을 안심하고 내어놓을 수 있는 분, 그 분 앞에 왜 안 내어 놓어세요?
자, 다시 읽어보세요? 무어라고 말씀을 했는가? 하나님 앞에, 그분 앞에,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분 앞에 네 마음을 어떻게? “토하라!” 그분이 피난처시라고.
이제 말 하십시요. 절망을 말 하십시요. 좌절을 말 하십시요. 당신의 갈등을 말 하십시요. 상처를 말 하십시요.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내 속에 있는 그 내적인 억압을 그분 앞에 말하세요. 너무 괴롭다고, 답답하다고.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받으시고 나를 안아주시고 그리고 내 상처를 치유하시는 그 하나님을 경험할 때 여러분은 거기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유, 자유.
내 모든 것을 내어놓고 틀어 놓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
이따금씩 상담을 하다가 보면 상담 끝나고 나서 얼굴이 확 피어요. 해결이 되어서가 아니에요.
끄집어 내었기 때문에, 다 끄집어 내었기 때문에. 자유! 이제 내어 놓으세요. 내어놓으세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로 이 하나님 안에서 관계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자유가 여러분과 저의 몫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안에서만 가치의 변화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가치의 변화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믿음을 이해할 때 믿음이란 것은 예수 믿고 구원 받고 그 다음에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사는 것, 거기서 믿음에 대한 이해가 끝날 때가 많이 있어요. 그것은 물론 본질적인 것입니다.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이지만 우리의 믿음이 그 정도에서 이해가 끝난다면 우리의 믿음은 보험수준밖에 않되는 믿음 이에요. 보험.
여러분 우리가 생명보험 들잖아요? 그러니까 천국보험. 내가 예수 믿어두면 이다음에 천국이 있으면 천국 가겠지, 저 곳을 향한 투자, 저 멀리 있는 천국을 향한 투자, 그러나 여기에는 어떻게 살거에요? 여기에서, 이곳에서, 오늘은 어떻게 살 것 입니까?
오늘의 세상에서 여러분의 신앙은 얼마나 유용하십니까? 만약에 우리가 신앙을 저 미래를 향한 투자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한복판에서 오늘 현실의 한 복판 속에서 바람이, 파도가 불어오고 있는 세상의 한 복판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무력한, 무기력한 신앙이 되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내 존재의 근거로 믿는다면, 존재의 근거로 믿는다면 이 얘기가 그 얘기 아닙니까? 오늘 시편기자가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요” 내 삶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 그리고 내 삶의 진정한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그가 나의 반석이요 산성이심을 믿는다면 내가 그를 만났다면 그를 믿었다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가치의 변화에요. 가치의 변화. 변화된 가치를 갖고 살아갈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오늘 11절 12절에 보시면 시편기자는 그 가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이런 고백을 드립니다. 우리가 11절 12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게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여기 11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한 두번 하신 말씀을” 이게 어떤 의미로 썼느냐? 그 성경 학자들 가운데 좀 논란이 있습니다. “한 두번의 하신 말씀” 어떤 의미가 있느냐?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이 한번 말씀하셔도 진리인데 두번째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확고한 것이다. 확고한 하나님의 의지의 측면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여기서는 듣는다는 것이 더 강조된 것이다.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두번 새겨서 들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분들은 이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이 한번 말씀 하셨지만 이 한번 말씀하신 오늘의 맥락 안에서 그는 두가지의 중요한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두 가지.
저는 이 부분이 그 문맥의 맥락 속에서는 합당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을 해요. 그 두 가지가 뭐냐하면 11절 을 가만히 보시면 두가지, 권능과 인자. “power와 love” 능력과 사랑에 대한 얘기를 고백하고 있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 모든 Value 라는 것은 두가지 단어와 반드시 관련되어 있어요. 하나는 Power, 권능. 또 하나는 Love, 사랑. 능력과 사랑.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을 생각해 보세요. 이 두가지 아닌 것이 있는지, 모든 가치는 power, 권능과 인자, love. 사랑, 이 두가지 단어와 다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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