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죽음의 의미 2001-12-10 15:29:20 read : 1048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딤후4:6-8 성경본문보기
미국의 부자 가운데 윌리암 할스트 라는 이름을 가진 부호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나이가 자기 나이 60세가 되었을 때 자기 자녀들 친척 친구들을 불러놓고 앞으로 내 앞에서는 농담이라도 절대로 죽음이라는 단어는 입 밖에도 꺼내지도 말아라! 이렇게 엄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지 모르지요.
그런데 로마 역사를 읽으면 로마의 한 황제는 신하들이 아침마다 자기를 알현할 때 마다 "폐하 이시여 죽음을 기억하시요" 이렇게 인사를 하도록 자기가 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윌리암 할스트라는 부자는 죽을 때 무지무지하게 고생을 하면서 고통 속에 몸부림하다가 갔는데 이 로마의 황제는 아주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죽음은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만 승리를 그리고 안식과 평안을 줄 수 있다는 하나의 레슨이요, 교훈일 것입니다.
아무도 이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죽음에서 예외인 인생은 없습니다. 좀더 빨리, 좀 더 늦게의 차이만 존재할 따름입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한번은 세상을 반드시 떠나
야 합니다.
충청도 사람을 만나서 충청도 사람은 천당도, 죽는 것도 천천히 가겠다고 좋겠다고 그랬더니 그분이 절대로 그렇지 않대요. 죽음에 관한한 충청도 말이 제일 급하답니다.
사실 표준어로 "돌아가셨습니다."이렇게 말을 하는데 아마 경상도 사람은"운명하셨다 아입니꺼?" 뭐 이렇게 말하겠죠? 뭐 전라도 사람이면 모르겠어요 "이세상 버렸어라우" 버
렸당께, 뭐 이렇게 할지 모르지요. 그런데 충청도가 제일 급하대요 "갔시유" 하하하 녜,
이번 추석 명절에도 이 땅에서는 수많은 우리의 이웃들이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을 위해서 고향으로 갈 것입니다. 또 지금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은 조만간 여러분
에게도 저에게도 반드시 찾아올 죽음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다가올 죽음을 준비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죽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준비는 무엇보다 죽음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함께 읽었던 이 본문을 바울 사도가 이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 AD 67년경에 로마의 감옥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기록한 서신입니다.
자, 오늘 본문은 어떤 말씀으로 시작했습니까? 6절에 보시면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라는 말로 시작 했습니다.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고.
우리가 구약시대의 제사 규례들을 좀 연구해 보면 여러가지 제사가 있죠. 번제 뭐 속죄제 서헌제 낙헌제 이런 제물을 드릴 때 일반적으로 보통 제물을 준비하고 양이나 염소를
이렇게 각을 뜹니다. 그 다음에 깨끗이 씻고 여러가지 그 의례 가운데 마지막 절차가 뭐냐하면 포도주를 붓는 것 이에요. 다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관제에요. 전제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마는 다 부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서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자기의 마지막 숨결을 하나님 앞에 드릴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지금 예감하면서 지금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면서 죽음을 바라봅니다. 바울이 바라보고
있었던 죽음은 어떤 것이 였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의 의미를 좀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저는 첫째로 죽음은 떠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떠남입니다.
오늘 6절에 보시면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이렇게 바울 사도가 고백합니다.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이 왔다.
그렇습니다. 죽음이란 떠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혹은 우리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육체를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연구해 보시면
성경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이 떠남이라는 단어는 결코 어떤 의미에서도 허무나 종말을 뜻하지 않습니다. 소멸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의 죽음은 결코 비극적 종말을 가르치
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 구절에 사용된 떠남이라는 단어, 나의 떠날 것이 가까이 왔다, 이 떠남이라는 단어가 영어에서는 그냥 "de-par-tur" departur, 출발, 이런 단어로 쓰여져 있습니
다마는 희랍어에는 "아날루시스" 라는 단어가 쓰여집니다. 그런데 본래 이 희랍어는 두가지 용도로 쓰여졌던 단어라고 합니다. 한가지 경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 천막을 가지고 다녔어요, 장막을. 그래서 한 장소에 도착하면 장막을 칩니다. 천막을 칩니다. 그러다가 다시 일정한 기간이 지난다음에 다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하게 되면
천막을 매고 있었던 줄을 풀 때, 푼다는 것이 바로 이 떠난다는 단어의 어원입니다, 어근입니다. 또 하나, 이 떠난다는 단어가 사용된 다른 용례는 이런 것입니다. 배가 항구에
매여있다가 이제 출발을 하게 되면은 닻줄을 풀어요. 닻을 올리고 닻줄을 풀 때 바로 이 떠난다는, 배가 떠날 때 이 단어가 쓰여집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 출발이라는
떠난다는 이 단어는 그 의미가 종말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여행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여행의 출발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도 죽음은 결코 소멸의 뜻으로 사용된 일이 없습니다.
기독교 주변 그 교파 가운데 흔히 이단이라고 불러워지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혹은 안식교 가운데서는 죽음을 소멸로, 없어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은 결코 소멸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새로운 출발입니다. 여기에 성도의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어렸을 때 그 피크닉을 갈 때 소풍을 갈 때는 어떤 그 소풍에 대한 피크닉에 대한 흥분 같은 것이 우리 마음 속에 가득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성인이 된 어
른이 된 지금도 어떤 낯선 미지의 장소를 향해서 여행할 때 우리의 마음 속에는 가벼운 흥분이 우리를 들뜨게 만듭니다. 저는 이것이 정상적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알고있는 그
리스도인이 죽음을 기다리는 죽음의 경험일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자요 지도자였던 "본 헤퍼"가 반 나치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죠? 그리고 이제 마지막 교수형을 받기 위한, 간수가 "나갑시다!"라는 신호를 주었
을 때 직감적으로 그것이 자기의 마지막인 것을 알았을 때 본 헤퍼는 감옥에 같이 있었던 동료 수인들에게 이런 인상 깊은 인사를 남겼습니다. "친구 여러분, 이제 저의 새로
운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결코 저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저는 새로운 여행을 위해서 출발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당당한 죽음 앞에서의 고백 이였는지요. 성경이 가르치는
죽음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죽음은 떠남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둘째로 죽음은 만남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죽음을 경험하는 과정에서의 어떤 고통, 그 고통에 대한 두려움때
문 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우리가 살아왔던 이 세상에 대한 어떤 집착이나 미련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죽음을 두려워하는 보다
깊숙한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단절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더 이상 저들을 볼 수 없다, 만날 수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부터 떠나야 합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떠나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육체에서 떠나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
들에게서부터 떠나야 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번 미국의 대 테러, 이 참사사건 때도 보면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가장 안타까운 사연들은 그들의 최후를 절감한 마지막 순간에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겼던 전
화의 멧세지들이 아니였습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셀루러폰, 핸드폰을 가지고 그들은 최후를 절감하며 전화한 사람들의 많은 사연들이 지금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그들은 애인이든 혹은 어머니든 또 사랑하는 자기의 남편이든 아내든 그들에게 마지막 사랑의 고백을 하고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여보 사
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연기가 차오르고 있어요 큰 일이 생긴 모양이에요 그러나 사랑했어요"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사랑의 인사를 남기고 싶어했습니다.
저는 그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하와이 코나의 열방대학에 목회자 부부 세미나를 위해서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같이 있었던 목사님 가운데 뉴욕에서 오신 목사님이 있
는데 이제 계속 전화로 접촉을 시도한 끝에 이런 소식을 알려왔어요. 자기 교회 교인 한 사람이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있다가 자기의 죽음을 예견한 그 순간에 전화를 걸었습
니다.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아무도 안받는 거에요. 교회로 전화했어요. 그래서 교회 부목사님이 받았답니다. "목사님 죽을 것 같아요. 우리 식구들에게 전해 주세요 제가 정말
사랑했다고, 그리고 교우들에게 전해주세요 정말 사랑했다구요 감사하다구요. 그러나 저는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떠난다고 꼭 전해주세요" 그리고 전화는 끊겼다고 합니다. 이
런 가슴 아프나 감동적인 사연들이 지금도 우리를 울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슬픔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결코 마지막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다시 만남의 약속이 확인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
울 사도의 확신이요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의 확신이 아니였습니까?
빌립보서1장23절에 보시면 바울은 이런 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두 사이에 끼였다는 것은 삶과 죽음사이에 끼였다는 말이죠 "내가 그 두 사
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니라"
다시 들어보세요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의 고백은 "떠나서" 그 다음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니라"
그렇습니다. 떠나는 것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만남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떠남은 이와 같은 만남을 전제로 한 것이요 따라서 떠남은 곧
만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과 더불어 만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임제를 경험합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경험이에요. 지금 이 땅에서 우리는 주님의 임제를 부분적으로만 경험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마치 그것은 거울을 통해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죽음을 통해 주님 앞에 서는 날 거울을 통해 봄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온전하신 주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죽음의 경험
이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찬양하던, 사모했던 그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살아왔던 모든 이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들에게 있어서는 결코Good bye~ 라는 인사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에 어떤 아버지가 자기 자녀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네 자녀가 있었는데 세 자녀에게는 꼭 같은 인사를 주었다고 그래요. "다시 만나자! 천국에서, see you
again in Heaven" 다시 천국에서 만나자! 그런데 한 아들에게 만은 "쟈니 굿 바이, 굿바이".
"아버지 저에게는 다시 만나자고 왜 그러지 않아요?" "쟈니야! 너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잖니? 우리에게는 다시 만남의 소망이 없지않니? 쟈니야 이 아버지
가 너에게 다시 만나자고 얘기할 수 있도록 해 줄 수는 없겠니?"
그때 비로소 아버지 앞에 터지고 울면서 이 아들은 "아버지 저도 아버지가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저의 구세주로 믿어요" 힘없는 손이지만 아빠는 전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아들의 손과 몸을 끌어 안으면서 "그래 아들아,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그래서 죽음은 만남인 것입니다. 죽음은 떠남이요, 동시에 죽음은 만남입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죽음은 상급입니다. 오늘 본문을 그렇게 가르칩니다. 죽음은 상급입니다.
여러분 죽음의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어떤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 입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지 라는 어떤 감정 말입니다. 그러나 이때에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면 그와 같은 무력감을 하나님께 대한 의존감으로 바꿀 수가 있어야 하겠다는 사실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우리가 죽음을 준비할 때 가장 좋은 태도는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태도는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다" 저는
이것이 매우 성경적 교훈이라고 생각해요.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그랬는데 그 천국에 들어갈 때 가장 좋은 자세는 어린아이
처럼 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아기로서 출행할 때 또 아기로서 방금 태어나 자라날 때 우리는 무력하지요. 어쩔수 없어요.우리는 다만 우리를 돌보는 그 부모님을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존하면 기껍게 우리를 안아주시는 바로 그분들의 임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저는 죽음의 경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심지어 우리 예수님도 그런 태도
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주님을, 하나님을 의존하는 태도입니다. 의존하는 태도.
사랑하시는 여러분 삶이란 무엇일까요? 삶이라는 것은 어떤 우리의 욕망을 위해서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를 쥐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는 몸부림의 순간순간을 이땅에서 살아갑니다. 죽음은 이 몸부림을 마지막으로 포기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이 몸부림을 주 앞에서 깨끗이
포기하고 자신의 전 존재를 창조주 앞에 마지막 내어드리는 바로 그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죽음의 순간이죠.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몸부림을 치면 부모도 편히 안아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기가 자기의 존재를 그냥 내어 놓을 때, 그냥 내어 놓을 때
아빠와 엄마는 자기의 전 존재로 사랑하는 자녀를 끌어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말 그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았던 마지막 내 존재를 주앞에 내어놓는 그 순간 하나
님 아버지의 완벽한 임제 안에서 우리를 끌어안아주시는 경험, 바로 그것이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이란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고 그는 고백합니다.
저는 본문을 기록하던 바울사도의 심정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감옥에서 지금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번째 감옥에 들어가서 이번에는 마지막이다 하는 예
감을 갖고 있었어요. 그때 바울 사도에게 할 일이란 별로 없었습니다. 할 일이 없었어요.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이제 기다림이 였습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말하면 바울은 아직도
억울한 감정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맡기고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심정으로 서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는 이것이 바울 사도의
수동적인 포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차라리 그것은 희망적인 신뢰요 기다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 8절에 본문의 고백을 다시 한번 읽어보시지요. 자, 8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
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제 후는 나를 위하여 의로우신 재판장이. 자, 그의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습
니까? "의로우신 재판장"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을 여러분 놓치지 마십시요.
당시에 바울사도는 네로 황제에 의해서 그 당시를 지배하던 로마의 황제에게서 그는 불의하게 체포되었고 로마의 법정은 그를 불의하게 단죄 하였지만,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
서 의로우신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은 나를 아시고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상급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이순간의 바울의 고백이 아닙
니까?
다시 한번 읽어보시면 이 8절에서 계속 강조되는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어요. 어떤 단어입니까? "의의"라는 단어죠.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
신 재판장이" 여기 "의"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지않습니까? 그는 불의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세상에 의해서, 또 불의한 판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순간 바울은
자기를 정당하게 판단해 주실 의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오히려 그를 의의 면류관으로 상주실 것을 기대한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통해서 주
앞에 설 때 받을 수 있는 상급, 면류관이 성경에 여러가지 다양한 표현으로 나와요.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이 특별히 의의 면류관을 강조합니다. 의의 면류관.
세상은 불의하게 나를 단죄했지만 세상은 불공평하게 나를 대접했지만 의로우신 하나님 의의 면류관으로 나를 상주실 주님을 바라본다고. 바로 이 믿음 때문에 바울은 이 불공
평해 보이는 죽음 앞에 서서도 당당할 수 있었고 담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비단 바울사도의 고백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우리의 고백 우리의 경험이 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죽음을 바라볼 때 혹은 우리가
사랑했던 어떤 사람들의 죽음을 바라볼 때 이건 정말 불공평하다, 이렇게 죽어가다니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얼마나 많은 삶의 불공평함을 경험하면서 이땅에 살고있습니
까?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마지막 순간에 시선을 들어 역사를 주장하시는 아직도 의로우신 하나님, 그리고 마지막 의롭게 온 역사를 판단하실 의의 하나님을 바
라보며 의의 재판장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내게만 아니라 나와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주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로 상주실 주님
을 바라보라고 고백하고있는 이 당당한 바울 사도의 고백,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죽음은 승리였으며 죽음은 안식이였으며 그리고 그 죽음은 상급일 수
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일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상급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녕, 정녕 말이지요 이 마지막 우리를 찾아올,
다가올 죽음이 우리의 당당한 승리로 처리되기 위해서는 남아있는 인생을 어떻게 살까요?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자, 다시 한번 본문의 7절에서 대답을 찾아보겠습니다. 그 대답은 7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 다같이 7절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 믿음을 지켰
다. 그 다음 8절에 이제 후로는, 그러므로 이제 후로는.
만약 여러분과 저에게 7절이 없다면 8절은 기대할 수 없는 것 이에요. 그렇죠?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었다면, 달려갈 길을 마칠 수 있었다면,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면
바울처럼 이제 후로는 의의 하나님 의의 면류관으로 저를 상급주실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 이 당당한 고백, 마지막 당당한 승리를 주님 앞에 누리기 위해서 여러분과 저는 다
시 한번 7절의 고백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아있는 인생, 선한 싸움을 싸우시겠습니까? 달려갈 길을 정말 완주하시겠습니까? 이 선한 싸움이나 달려갈 길은 모두가 경기
장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 그래서 전쟁터 상상하시면 안돼요. 바울은 전쟁터라는 의미가 아니라 경기장이라는 의미로 지금 이 표현을 써고 있는 것입니다.
복싱 경기장, 그런데서 경기지만 싸움을 하잖아요.
자, 경기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완주하는 것입니다. 물론 챔피언을 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경기자의 미덕은 끝까지 완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완주
의 경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믿음을 지켰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히브리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케 하는 이이신 누구? "예수를" 어떻게 바라보자? 그런데 그 말은 이런 뜻이에요. 믿음의 주요
라는 말은 믿음을 시작하게 만들어주는 사람, 믿음의 장본인, 믿음의 저작자, 믿음의 출발자, 그리고 믿음을 완성시켜 주실 분.
우리는 주님 때문에 믿음이 시작되었습니다 놀라운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는 믿음.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했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했고 죽음 건너편에 영원한 소망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주께서 이 믿음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믿음의 완성을 향해서 달려가는 인생의 길, 그리스도
인들의 여정은 믿음의 레이스요 믿음의 여정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우리 주님이 주신 가장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물질적 자산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어떤 재산이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가 있단 말입니까? 믿음은 자산 보
다도 귀한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 레이스를 완주하고 하나님 앞에 서서 상급을 기대 할 수가 있습니까? 두 가지에요. 오늘 본
문을 보시면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이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바울은 믿음을 지켰다! 이렇게 말합니다. "지켰다" 그런데 이 "지켰다"라는 표현은 본래 아주 보물을 관리할 때 써여지던 단어라고 그래요. 믿음은 보물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
다. 그렇다면 믿음을 잘 관리해야지요. 여러분, 가정에 보물 다이야몬드가 있다고 하십시다. 여러분은 정성을 다해서 관리할거에요 보험도 들고, 뭐 굉장히 관리를 할꺼에요. 믿
음은 이 모든 보물보다도 더 존귀한 것, 그렇다면 믿음을 잘 지키셔야 돼요. 저는 여러분이 믿음 지키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여정에는 종종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는 어떤 유혹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적이 아닌 다른 교훈, 이단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바울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말
합니다.
3절을 보시면 자, 디모데 후서 4장 3절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우리 인간에게는 호기심이 있어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날 귀가 가려워 져요. 무슨 신가한 소리 없나? 그러다가 이단에 빠질 때 우리는 이 존귀한 믿음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잘 지키라고. 그러나 지키는 수세에서 끝나면 안돼요. 더구나 나는 이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고 이 믿음으로 이 존귀
한 인생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떻게 이 믿음을 나만 간직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믿음을 나누십시요. 그것이 전도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다음절 5절에 보시면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이 믿음의 전하는 삶을 살라고. 이 보배로운 믿음 이 믿음으로 새로운
삶을 얻었고 이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고 이 믿음으로 오늘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았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믿음을 나누는 것이 합당하지 않습니
까?
자, 우리가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교했는데,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24절에서 꼭 같이 신앙생활을 경주로 표현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사람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 상을 얻도록 달음질 하라. 상을 얻도록 달음질 하라.
그런데 바로 그 직전22절에 보면 상 얻는 방법을 말해요. 그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내가 구원코자 함이라. 내가 이 존귀한 믿음을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어 그들이 믿음으
로 구원을 받을 때 그들은 나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의 믿음을 지켰고 이 영광스런 복음에 믿음을 전하는 일에 그의 생애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는 당당하게 이
제 이렇게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저는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금요일 아침에 우리 서선옥 집사님의 영결예배가 천국환송예배가 있었습니다. 제가 마지막 발인예배 병원에, 세브란스 병원에 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많이 오셨어요 너무
많이 오셨어요. 왜이렇게 우리 교인들이 많이 왔나? 조금 생각해 보니까 그 분이 뿌린 씨았이였어요. 우리 서집사님 전도폭발 훈련 받고 열심히 전도하던 분이 아니였습니까?
뿐만 아니라 그분은 참 이런 상을 당한 어려운 가정을 위로하기 위해서 경조 성가대로 상을 당한 사람들의 집에 늘 그 분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제 그 분이 떠나가시는 날,
그 분의 사랑과 그 분의 복음을 받았던 사람들이 와서 그 분을 전송하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사건 이였습니다. 좀 빨리 가셨지만, 저는 그날 아침에 나오면서 정말 서 집사님
의 출발은 아름다운 떠남이군요, 이렇게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은 많이 남지않았습니다. 남은 세월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이번 추석절에 주께서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신 보배로운 믿음을 이웃들과 가족들과 나눌 수 있다면,
그리고 다가오는 우리 이웃사랑 축제에 우리가 이웃들에게 이 복음을 나누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될 수가 있을까요?
저는 남아있는 여러분과 저의 인생의 그 길을 바라보면서 제가 좋아하는, 여러분 가운데 좋아할 분이 많을 미국의 시인 이였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그 "눈 내리는 저녁 호숫가
에 걸음을 멈추고" 라는 시의 마지막 문단을 여러분 앞에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내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
잠들기 전 몇 마일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내게는 지킬 약속이 있다
But 1 have promises to keep
내게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내가 잠들기 전 걸어야 할 몇 마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남아있는 그 걸음 속에 죽음을 준비하는 영광스럽고 당당한 인생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다 일어나서 같이 기도 드리겠습니다. 함께 일어나서 기도할 때 조용히 한번 기도하면서 여러분이 걸어왔던 인생을 좀 생각해 보시고 또 한번 다가온 추석절 우리가 얼마
나 추석절을 더 이땅에서 갖게 될까요 무한히 갖는 건 아니에요. 어느날 갑자기 우리는 이 땅의 마지막 추석절을 맞게 되고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사랑했던 사람이 없이 추
석절을 맞이해야 하는 분들이 여러분 있습니다. 그런 가정이 금주에도 여러 가정에서, 그렇게 죽음은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죽음이 찾아와도, 그 분 앞에 부
끄럽지 않는 당당한 인생의 결산, 그 아름다운 죽음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 내 인생의 남아있는 걸음을 정말 달려갈 길 다 달리고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믿음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믿음을 잘 지키고 믿음을 나눌 수 있는 인생 살아가도록 하나님 도와 주십시요.
우리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하십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으로 함께 복음의 말씀을 나누어야 할 이웃들과 가족들을 생각합니다. 주님이 이 보배로운
복음으로 저를 구원하시고 영생의 소망을 주셨기에 이제 이 소망을 나누어야 할 가족들을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우리 가운데 우리 주변에 이 복음을 받지 못한
이웃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이 놀라운 복음을 생명의 복음을 나눌 수 있도록 도우시고 내 사랑하는 이웃들이 가족들이 주앞에 돌아오는 감격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
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에 남아있는 날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달려갈 길, 다 달렸다고 이제 믿음을 지켰다고 그 마지막 승리로운 고백을 드릴 수 있
는 인생을 위하여 우리 믿음 잘 가꿀 수 있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십시요. 그리고 이 믿음이 새로운 생명을, 믿음이 그리고 새로운 가치를, 믿음이 나에게 영생을 줄 수가
있었기에 이 보배로운 믿음을 내 사랑하는 이들과 나눌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요. 아직도 우리 가족 가운데 주님 앞에 돌아오지 못한 식구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속히 창
조주 하나님을 알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의 감동 속에 주 앞에 돌아오게 도와 주십시요. 이 가을이 그들의 영혼에 돌아옴을 주앞에 추수로 드리는 감격의 계
절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마지막 찬양 "내 인생 여정 끝내어" 함께 찬양하시겠습니다.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 향해 말하리 예수 인도하셨네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이 가시밭길 인생을 허덕이면서 갈 때에
시험과 환란 많으나 예수 인도하셨네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내 밟은 발걸음 마다 주예수 보살피시사
승리의 개가 부르며 주를 찬송하리라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기도하십시다.
때로 인생이 회색처럼 보이시는 분 또 내 뛰어넘는 한걸음 한걸음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시는 분 혹시 천국의 소망이 영생의 소망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요? 교회는
이따금씩 왔다갔다 하지만 아직도 천국의 소망이 없는 분들,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마음속에 확신이 없는 분들, 그러나 나도 오늘 성경의 말씀처럼 바울의 고백처럼 그런
죽음 앞에서의 확신을 갖고 당당하게 담대하게 인생을 살고싶어요. 그런 분들 계시면 조용히 한번 가슴에 손을 얹어보세요. 그리고 이 시간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
세주와 주님으로 확인해 보세요.
조용히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 저 여기 왔어요 저를 받아주세요. 저에게도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나의 구세주요 주님이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피 흘리신
예수님 그 피로 저의 죄를 씻어주시고 저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나의 구주로 믿고 그 분을 의지하며 살겠습니다. 그 분 안에 소망을 두고
살겠습니다. 저를 인도해 주십시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 주님을 경배하고 내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리고 주께서 내게 주신 이 놀라운 은총을 인해서 구원의 선물을 인해 영생의 선물을 인해서 감
사하며 죽음 저 건너편의 소망을 내다볼 수 있는 고백을 가지고 나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리고 이 소망 없이 살있는 우리의 가족들에게 이 복음을 나누기로 결단하며 나
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과 화평케 하심이 이 추석절 복음을 나누는 모든 현장마다 성령의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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