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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롬14:1- 2/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2001-12-10 12:33:13   read : 1292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리차드 칼슨이 지은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우리는 너무나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경우가 많습니다.

    몇일전 중국에 조선족이 코리안 드림을 찾아서 목숨을 걸고 한국에 밀항하다가 무려 25명이 배밑에서 질식사 했는데 선원들이 25명을 모두 바다에 버렸습니다.

    그저께 신문에 보니까 잠실에 어느 아파트에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과 여학생이 부모가 사귀는 것을 반대한다고 15층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했습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까 남북 이산가족 면회가 좌절됐다고 어느노인이 자살을 했습니다.

    요즘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변에 보면 우리는 중요한 것은 단데 있고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교회는 예배 시간에 복음성가를 불러도 되나 안되나로 목사님과 장로님이 핏대를 내고 싸우더니 역시 교회가 갈라 젔습니다.

    우리는 본질의 문제는 놔두고 엉뚱하게 비본질적인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마치 생명을 걸고 분쟁과 다툼이 있는 경우를 종종 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로마 교회도 제단에 바첬던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문제를 갖고 심각하게 갈등을 빚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성도들 간에 이교도의 신전에 바쳤던 좋은 고기가 싼값으로 시장에 나왔을 때 어떤 사람은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먹었고, 또 어떤 사람은 먹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고기가 신전에 바친 것인지 바치지 않은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아예 채식만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많이 생겼습니다. 무엇을 먹어야 하고, 안 먹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커다란 갈등이 있었습니다.

    오늘 대부분의 교회들이 무엇 때문에 화목이 깨어지고 부흥을 가로막고 있습니까? 진리문제로 인하여 열을 내고 싸운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진리문제가 아니고 이렇게 하여도 좋고 저렇게 하여도 좋은 일을 가지고

    서로가 내 주장 내 생각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강하게 주장을 하기 때문에 여기서 마찰이 생기고 화목이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와의 갈등도 먹는 문제와 절기를 지키는 문제로 서로 비판하고 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 즉 유대인 신자들이
    믿음이 약한 자인 이방인 신자를 용납하여 주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믿음이 강한 자라는 것입니다.

    나의 수준에서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수준에서 이해하고 수용할 줄 아는 자가 믿음이 강한 자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이 약한 자를 비판하고 정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견을 포용하고 격려를 하고 사랑하는 것이 믿음 강한 자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음식을 먹었든지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신앙 양심상 얼마나 "주님을 위하여" 살았는가 하는 것이 주요한 것입니다.

    제사음식을 먹어야 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
    주일날 음식을 사먹어야 하느냐? 사먹지 말아야 하느냐?
    주일날 테레비를 보아야 하느냐? 보지 말아야 할 것이냐?
    주일날 밤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냐? 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냐?

    이러한 사소한 것에 생명을 걸고 싸움으로서 중요한 사랑과 화목이 깨지고 교회가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다면 큰 죄를 낳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허락"과 "금지"에 관한 자세한 목록을 적어 보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모든 것을 포함하는 양심의 원리에 따라서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규칙을 제시하였습니다.

    바울은 양심을 사용하는 중요한 원리로
    1)) 첫 번째 서로 용납하고 판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4:1에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3절에 보면 너희가 떠드는 문제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롬14:3)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사소한 문제에 대하여서는 판단하지 않으시고 용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하셨다면 우리도 당연히 용납해야 합니다.

    2))) 두 번째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 관점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 원리는 로마서 14:17-19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14:17-19)

    사도 바울은 이 원칙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0:31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원칙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용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만찬석상이나 회식하는 자리에 가 보면 서로 잔을 부딪히면서 외치는 소리가 있습니다. "위하여!"라고 하는 구호입니다.

    어떤 목적을 향하여 함께 나아가기 위해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이끌어내기 위한 구호로 이만큼 좋은 구호도 드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위하여!
    이 말속에는 그 모임의 분명한 목적이나 대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개인을 위한 말일 수도 있고 집단이나 크게는 한 나라를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대한 일을 앞두고 단합을 꾀하거나 무슨 소원이나 계획이 잘 풀려지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또는 무슨 일을 해결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다짐하고 결의하고 분발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자주 사용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7-9절 사이에 "위하여" 라는 말이 무려 다섯 번에 걸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
    도 없도다"
    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9절 말씀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우리는 무언가를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위하여 권세를 위하여 쾌락을 위하여 부귀 영화를 위하여 무언가를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바치게 마련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위하여 사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삶의 목적과 방향을 정해놓고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가 항상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본문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이라는 죽으나 사나 주의 뜻을 위하여 산다는 사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일수록 이 삶의 목적과 방향이 더 뚜렷하고 확실해야 합니다.
    이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을 경우 우리의 삶은 늘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목적과 방향이 확고하게 정해져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의 내용과 방향이 전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33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다가 가셨습니다만 그의 인생이 그토록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삶의 목적이 분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자기를 보내신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잊어 본적
    이 없었으며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초개같이 불살라 바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을 걸어가시든지, 집에 머물러 계시든지, 전도여행을 하실 때든지, 일을 하실 때든지 그 어느 때라도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목적을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라"
    하시며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가 모든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한 것임을 언제나 분명히 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도 그 목적을 한 번도 바꾸신 적이 없습니다.
    상황이 불리해졌다고 해서 자신의 삶의 목표를 철회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내가 이 일을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시고 묵묵히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나가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중요시 하는 것은 '예수를 위하여'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라는 큰 목적을 가지고 모든 문제를 풀어 가자는 말씀입니다.

    1) 그러므로 먼저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7절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갈지라도
    성도는 하나님 중심으로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 여러분이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는 결정된 사항입니다.

    불신자는 태어날 때부터 '나' 중심의 이기적인 생각을 갖고 사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예수를 믿고 난 후에는 모든 삶에 중심이 삶에 목적이 '주님'을 위해서라는 목적 의식을 가저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려면 먼저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위해 살라는 말씀은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자유는 하나님을 떠날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예속되고, 그분 안에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니라" 고 하였습니다.

    나무가 답답하다고 땅에서 떠나면 그 나무는 죽게 됩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고 싶은 자유가 있을지 몰라도 물고기의 진정한 자유란 물 속에 있을 때입니다.

    성도의 진정한 자유란 내 육신적인 욕구와 욕망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고 주님의 뜻안에 거할 때 오는 것입니다.

    내 의가 내 욕심이 내 자존심이 내 우월감이 살아 있으면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사는 하나님 중심의 살미 아닙니다.

    내 고집 내 교만 내 우월감이 아직도 살아 있으면 진정한 평안이 없습니다.
    나의 고집과 욕심과 허영이 살아 있는 한 참된 하늘의 만족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자신의 자랑 탐심 세상 성공 이기중의 모든 것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사는 참된 신자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소유 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본문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닙니다. 또한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것이기에 이미 우리는 벌써 주님께 위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20절은
    성도의 소유권과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사야 43장 1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이미 예수님께서 값을 지불하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소유권 이양을 하셨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나는 이제 주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요 주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보다도 자기 자신을 더 생각하고, 집착하는 사람은 성도라 말할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분명한 소유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소유주를 위해 기꺼이 생명도 드렸습니다.

    "'가이사'가 우리의 주인" 이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사자에게 찢겨 죽지 않을 수 있는데도
    그들은 짐승에게 찢겨 죽으면서도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저들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은 종이요 자신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종의 신분을 깨달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내가 어디에 소속이 되었는가 하는 것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소속된 회사에서 충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소속된 직장에서 일하지 않고 다른 회사에 가서 일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생계를 책임지는 회사에서 충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에 백성이라는 천국 백성에 대한 믿음이 강한 사람일수록 예수를 위해서 살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은 주님 것이라는, 종의 신분을 깨닫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소유의식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라
    삶의 목적이 분명하게 세워져 있는 사람들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선을 그어놓고 살게 됩니다.
    별로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는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생명을 거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순위가 달라지면 그 인생의 방향도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치도 없는 일에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게 되면 그 인생 역시 별로 가치없는 인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합니다. 항상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그것이 분명해야 자신의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먼저인가
    본문에 보면 '주를 위하여' 라고 하는 말씀이 거듭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우선 순위는 바로 "주를 위하여" 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주님이 먼저여야 합니다.
    세상의 그 무엇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앞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선순위를 돈이나 권력에 두고 살아가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1)돈을 자신의 삶의 제일 우선순위로 두고 살아가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증권을 하다가 돈을 날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의 가장 중요한 돈을 잃었음으로 이제 돈을 벌 가망이 없다고 생각이 들자 스스로 생명을 끊었습니다.

    2)어느 학생이 반에서 1등하여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일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성적이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일류대학에 들어갈 가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 역시 인생을 귾었습니다.

    삶에 우선 순위를 세상에 두면 세상 것을 잃어 버렸을 때에 인생을 마감할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로 많은 사람들이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일 우선 순위라고 생각하고 있는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인기도 그 모든 것이 사라질 때 아무리 슬피 울며 이를 갈며 후회해 본들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삶의 우선 순위가 무었인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우리의 삶의 제일 우선 순위는 우리의 구세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 분만이 우리 삶의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고
    그 분만이 우리 삶의 가치를 부여해 줄로 믿고
    그 분만을 앞에 모시고 살아갈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3) 세 번째 우리는 목적 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9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목적은 우리의 삶에 목적을 바꾸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의 목적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사람이 어디에 목적을 두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똑같은 물건이라도 목적이 달라지면 다른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칼이 강도에게 붙잡히면 사람을 죽이는 목적을 사용되지만,
    칼이 의사에게 주어지면 사람을 살리는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예수 믿었다고 없던 돈이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현실은 똑같은데 목적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세상을 위해 살았고,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주님 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릇이나 연필이나 촛불이나 소금이나 사용되어져야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릇은 주인을 위하여 식탁에 올려 지는 것입니다.
    연필은 주인의 손에 붙잡혀서 글씨를 스기 위하야 존재하는 것입니다.
    촛불은 주변을 밝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소금 역시 주변을 썩지 않토록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사람도 역시 내가 목적일 수가 없고,
    피조물을 만드신 이를 위하여 내가 쓰여져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삶에 목적이 바뀌지 않았으면 그 사람은 아직 성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위해 산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사람만이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도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해질 때 생사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득 바득 살기 위하여 메달렸습니다만
    이제 천국 백성이 되었으니 살아도 하늘 나라요 죽어도 하늘 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주고 사는 생사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본문 8절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반대로 살고 죽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저 적당히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는 것이 참된 의미를 가지고 주님께 상급을 샇기 위하여 각자 맡은 일에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고 죽는 것이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살고 죽는 문제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비굴해지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믿음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천국 백성에 확신이 없는 의심의 믿음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은 세상 것 때문에 너무 울고 불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은 살고 죽는 것에 비겁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헛된 것을 위하여 주님을 욕되게 하고 자신의 인격을 파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루를 살아도 주님을 위한 삶이어야 하고 지금 당장 죽는다 하더라도 주님을 위한 죽음이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생사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미 살고 죽는 문제는 주님께서 십자가 부활로 다 해결해 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9절에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주님께서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님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생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죽고 살고 하는 문제는 다 주님께 맡겨 버리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크게 나타내고 인정 받으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대하게 보이려고 자기를 그럴듯한 존재로 내 보이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명예도, 돈도, 인기도 얻어보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 받아 봐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인정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영웅들이 칭찬을 받는 이유는
    자기를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조국과 민족과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과감히 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안중군 의사 윤봉길 의사 얼마전에 일본 전철역에서 사람을 구하고 죽은 이수현씨 모두가 남을 위해서 살았기에 위대한 인물로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를 위해 사는 자도 아니요,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구별된 자들입니다.
    예수만을 위해 살아야 하는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철저히 자신을 부정하고, 나의 전부가 주님의 것임을 확인하면서 날마다 날마다 예수를 위해 사는 믿음의 생활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무한 경쟁사회에서 남을 누르고 승리한다는 것은 잘못 양심을 팔고 죄를 짖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 꼭 이겨야 된다는 경쟁심과 욕심을 버리고

    작은 자가 되어도 나누는 자가 되며,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작은 것을 사랑하고 꼴찌와 함께 하며, 약한 자들을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소망을 하나님께 둔 사람들의 삶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든지 내가 서야 할 자리, 내가 앉아야 할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내 할 본분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쟁 시대에 길들여져 있어서 패배하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치관이 삶에 목적의식이 없는 사람의 생각입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에게서 오는 소망을 발견하게 되면,
    새로운 삶이 열리며, 새로운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지나친 물질적이 것을 추구하며 경쟁이라는 거품 속에서 살다보니 때로 경쟁 서회에 익숙치 못하고 때로 모질지 못함으로
    잘못 실수로 사업에 망하면 마치 모든 것에 실패자 패배자가 된것처럼 생각하고
    실의에 빠져서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는 세상을 포기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사업에 실패를 마치 인생에 실패자로 몰아가고
    심지어는 주님곁을 떠나가고 남편을 멸시하고 아내를 미워하며 살아갑니다.
    지방에 갔더니 아주 고급 외제 승용차에서 내려서 식당에 들어 옵니다.
    눅군줄 아십니가 조폭입니다.
    그들은 돈이 많으니까 성공한 사람들입니까?
    신안그룹이 회장은 매일같이 골프장에 다니며 놀음만 했답니다.
    출세한 사람입니까?

    우리가 지나친 세상 욕심을 버리고 물질에 초연함으로서
    세상을 향한 헛된 꿈으로 가득찬 우리의 생각의 거품을 걷어 내고

    우리는 가난한 자를 위하여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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