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있는 삶 ” 2001-12-13 15:29:19 read : 833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창 13:1~13 / 마 6:25~33 설교자 : 임영수
아브라함은 우리 기독교인에게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진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그가 살고 있는 땅과, 그가 태어난 곳, 그의 아버지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주시는 곳으로 모험의 길을 떠날 때 그의 나이 일흔 다섯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아내 사라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으로 떠났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지형의 이름이 잘 표시된 지도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행적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이르러, 세겜 땅 곧 모레의 상수리 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그 땅을 그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다시 떠나 베델의 동쪽에 있는 산간 지방으로 옮겨 가서, 장막을 쳤습니다.서쪽은 베델이고 동쪽은 아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또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은 줄곧 남쪽으로 가서 네겝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그곳에 기근이 너무 심하게 들어 아브라함은 이집트에서 얼마동안 몸붙여 살려고 그리로 내려 갔습니다. 이집트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아브라함은 거대한 권력을 쥔 바로 앞에 자신이 무방비 상태임을 깨닫고, 살아남기 위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연극을 꾸미게 되었습니다.
거짓말로 아브라함은 물질적인 덕을 보게 됩니다. 바로는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하고 그 댓가로 아브라함에게 양떼, 소떼, 암나귀와 숫나귀, 남녀종과 낙타까지 줍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자기의 인생은 자기가 책임을 지고 자기가 연출자가 되어 연극을 꾸미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롭다는 거짓된 확신을 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러한 확신을 깨트리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건에 개입하시어 바로에게 나타나 그가 취한 여인이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리고, 돌려줄 것을 명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창피와 수치를 당하고 이집트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집트에서 얻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네겝으로 올라 갔습니다. 그의 조카 롯도 그와 함께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집짐승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양과 가축은 매우 중요한 재산 목록이었습니다. 이러한 동물들은 그 시대에 음식, 옷, 천막 재료,희생제사를 위해 매우 중요한 화폐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네겝에서 얼마살지 않고 그곳을 떠나,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베델 부근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은 베델과 아이 사이에 있는 아브라함이 예전에 장막을 치고 살던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다니던 롯에게도 그의 몫의 양 떼와 소 떼와 장막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그들이 함께 머물기에 너무 좁았습니다. 그들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 함께 머물수가 없었습니다. 가끔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때에 그들 주변에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적대적인 이방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으면서, 조카 롯과 갈등 가운데서 지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불러 그들은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고 했습니다.
그때 롯이 멀리 바라보이는 물이 넉넉하고 아름다운 동산과도 같은 요단의 동쪽을 택했습니다. 그곳은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와 아주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살고, 롯은 평지의 여러 성읍들을 돌아다니다가 소돔 가까이에 이르러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때 소돔 사람들은 매우 악하였으며, 하나님을 거슬러서, 온갖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기사를 읽는 독자들은 누구나 롯의 선택이 매우 지혜로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저자는 롯의 선택이 표면상으로는 매우 지혜로운 선택이었을지 몰라도 그의 선택은 나중에 그의 가정을 파멸로 가져오게 되는 매우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롯은 초원과 물이 있는 비옥한 땅은 보았지만 그 뒤에 나타나지 않은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는 보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비옥한 땅만으로 잘 살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비옥한 땅이라 해도 거기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가 실현되지 않을 때 비옥한 땅은 저주의 땅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는 롯의 선택에서 롯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매우 현실적이며, 이해타산에 밝은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거나 배려하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그는 무엇을 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롯의 성격은 나중에 자기자신은 물론 그의 가정까지 파멸로 이끌어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롯은 좀더 먼데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좀더 깊이있게 생각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자기와 가정의 행복은 오직 비옥한 땅을 소유하는데서 얻어질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행복을 위해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현실의 여건에 그의 미래의 운명을 맡겼습니다.
한편 이집트로 들어갈 때 그의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생의 위기 앞에서 자신의 부인까지 희생시켜가며 자신의 목숨을 유지시켜갈려고 했던 아브라함은, 그 때의 이기적인 모습과 조카 롯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갈등의 문제를 해결해가는 그의 태도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의 관계에서 생긴 문제해결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주도권을 가지고 얼마든지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의 기반을 넓히고 굳게 다져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주도권을 그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조카 롯에게 선택의 우선권을 주는 것으로 그의 주도권을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먼저 주어 그로하여금 그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게 한 것은, 조카 롯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후에 소돔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알고 소돔성을 위해 진지하게 중보의 기도를 드린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선택의 우선권을 준 것은 아브라함이 추구하는 생의 목표가 그전과는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우선되는 것은 내일을 염려하여 그 자신을 위해 먼저 무엇을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우선되는 것은 가정의 평화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평화 원칙을 제시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조카롯에게 먼저 선택하게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위해 먼저 그 어떤 선택과 결정을 내리지 않은 이면에는 이집트에서 깨달은 그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집트로 들어가면서 자신 앞에 닥친 생의 위기를 타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은 오히려 하나님이 그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데 큰 방해물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자신의 생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그리고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방해 받지 않게 하는 것임을 알게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전에 자기 중심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므로 하나님의 계획에 위기를 가져오게했을 때, 하나님은 그 사건에 즉시 개입하여 바로를 심판하고 아브라함에게는 수치와 모욕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그러나 전과는 달리 그 가정의 평화를 추구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 곧 바로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의 약속을 더하십니다. (14-17)
이상의 모든 사실에서 창세기 저자가 독자들의 시선을 이끌어 가는 초점의 방향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의 신앙, 불신앙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였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의 생에 개입하셨고,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였을 때에도 그의 생에 개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운명은 그의 믿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약속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었습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 인류와 관련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의 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 땅이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있었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르지방에서 신상을 만들어파는 장사를 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우르 땅에서 아버지의 업을 유산을 물려받아 신상을 만들어 파는 장인으로 그의 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는 오히려 그것이 더 편한 길이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로 부르심은 아브라함에게는 매우 어렵고 힘든 삶이었습니다. 그러한 생의 모험의 길에서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은 약속하신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를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목각을 하는 사람이 나무가 울창한 숲을 찾아갔습니다. 그 곳에는 곧바르게 자란 보기 좋은 나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잘 자라지 않는 구불구불하고 옹이가 많은 나무가 하나 있었습니다. 목공예가의 시선은 그 나무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나무를 베어다가 그가구상하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외부적인 조건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에게는 그러한 외적 요소들이선택을 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오직 한가지 필요로 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에게 순종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롯의 기사에서 자신의 약속에 충실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하나님은 한 개인의 믿음의 범주를 벗어나서 그의 약속에 신실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며 살으라고 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생은 끊임없는 선택입니다." 이러한 선택의 과정에서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의 불안과 염려에서 우리의 선택의 기준은 언제나 더 잘 사는 것, 나에게 좀더 이익이 되는 것에 선택의 기준을 둡니다. 그러한 선택이 일시적으로는 현명한 것 같고 우리 가정을 살리는 것 같지만 그러한 선택이 결국 소돔과 고모라의 문화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너무나 절실하게 경험해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이 우리에게 희망과 미래를 가져다 주기보다는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의 자녀까지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비참성을 보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문화는 차란한 인간의 문화가 아닌 사탄의 문화입니다. 모든 인간의 가치와 인간성을 파멸시키는 지옥의 문화입니다.
성서에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내일의 염려와 불안에서 당신의 선택이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우선 순위에 놓고 선택을 하느냐?" 고 묻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이익을 더 추구하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그 나라와 그 의입니다. 그것을 구하면 모든 것을 더 주시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지 못합니다. 그 약속에 우리의 생을 위탁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우리가 지금 까지 선택해온 그 열매입니다. 우리는 그 쓴 열매로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국가 공동체를 망하게 하는 요인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들었습니다.
0. 원칙이 없는 정치
0. 인성이 없는 교육
0. 윤리 의식이 결여된 경제 제도
0. 양심이 없는 쾌락추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에 맡기라"입니다.
우리의 삶의 원칙은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지 못할 때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어떤 것이며, 그렇지 않은 자가 받는 복이 무엇이라는 것을 오늘의 구약 본문의 이야기에서 분명히 보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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