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구조대 2001-12-11 22:43:41 read : 948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태복음 9:35-38
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하라 하시니라
지금부터 약 1세기전인 20세기 초에,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유태인을 마구 학살하고 있을 때, 독일에 한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남부러울 것 없는 중견사업가로서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유태인 학살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사업가는 그 장면을 목격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태인은 마땅히 죽어야 할 민족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는 노인, 아이, 남자, 여자, 부모와 자식 가릴 것 없이 가스실로 들어가 울부짖으며 죽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말이 600만 명이지, 부산 전체 인구가 대략 400만 명 정도 되는데, 부산에 있는 모든 어른과 어린아이를 합한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 것입니다.
독일인들은 유태인의 시체를 태우기 위해 시체 태우는 큰 공장을 몇 채씩 지어놓고, 그 공장을 24시간 가동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은 감옥에서 가스실로 들어가 죽기 위해 1년, 2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독일인들이 온 유태인 가족을 벌거벗겨 가스실에 넣어 죽입니다. 그는, 유태인 어머니와 어린아이가 꼭 껴안고 죽어 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참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비참한 장면을 보고 유태인을 구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 당시 독일인 관리들이 타락해 있었기 때문에, 돈을 주면 가스실로 갈 유태인들을 구해 내어 다른 곳으로 피신시킬 수 있었습니다.
몇 년 동안 그가 구해낸 유태인 숫자만 해도 수백 명이 넘습니다. 그러나 그 수백 명을 구해낸 후, 그는 마침내 무일푼이 됩니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그의 모든 재산을 다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지막 돈을 다 털어 유태인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기 위해 기차를 태워서 떠나 보낸 후, 그는 선로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로를 터벅터벅 걸어오다가 무심코 자기의 손가락에 끼어진 금반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소리 칩니다. "내가 이것을 왜 끼고 있지? 이 금반지를 팔았더라면 한사람의 생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이것을 내가 왜 끼고 있지?" 하며 앉아서 통곡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쉰들러(Schindler)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 (Schindler's List)'는 이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쉰들러가 구해준 유태인들이 현재 약 6000명이 되어서, 자신들을 'Schindler's Jews(쉰들러의 유태인들)이라고 부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이야기입니까? 한 사람의 헌신이 수백 수천의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중요한 사명을 주셨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 가는 저 영혼들을 사망의 길에서 구해 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는 평화스런 나라입니다. 그 누구도 어느 지방 사람을 학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 가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보는 시각일 뿐, 한 사람만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분은 우리 나라,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바라보며, 히틀러 당시에 죽어갔던 유태인처럼 사망의 길로 다가가고 있는 이들을 안타까이 여기십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사망의 길에서 벗어난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살리는 일을 부탁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의 쉰들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저의 설교를 들으며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한 번 해 보세요. 당신은 당신의 '쉰들러 리스트'를 가지고 계십니까? 당신이 대가를 지불하고 구해낸 영혼의 명단을 가지고 계십니까? 쉰들러는 자기 재산을 다 없애며 구해낸 수백 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그 후손들은 수천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당신의 리스트에 과연 누가 쓰여 있습니까? 몇 명이나 쓰여 있습니까? 당신으로 인해 하나님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십니까? 오늘 이것이 우리가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어떻게 영혼의 구조대가 되어, 쉰들러처럼 죽어 가는 영혼을 구원해 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삶을 통해, 당신의 삶을 통해, 몇 가지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먼저 죽어져 가는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정확히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1. 그들을 정확히 보라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일생을 요약한 구절입니다. 9장 35절에 예수님의 공생애가 요약되어 있다고 성경학자들은 얘기합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전부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세 가지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1)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 2)가르침 3)수많은 병자들을 고친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나 오늘의 성경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를 고치십니다. 예수님이 어느 한 동네를 들어가시자, 눈먼 소경 두 명이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그리고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시오!" 하며 계속 따라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가시자 그 집에까지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이 묻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수 있는 줄을 너희가 믿느냐!" 소경들이 대답하기를 "예수님, 저희는 믿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십니다. 그러자 그 즉시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예수님이 부탁하십니다. "이 집에서 나가거든 아무에게도 이 일을 얘기하지 말라!" 성경에서 종종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이 병을 고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영혼을 구원하고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기에, 이 소문이 퍼지면 수많은 병자들이 찾아와서 당신의 사역에 방해가 될까 하여 이렇게 부탁하셨던 겁니다.
여러분! 소경의 눈이 멀었다가 눈이 떠졌어요. 누구도 고칠 수 없는 병을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자 그 즉시 보게 되었어요. 그들이 어떻게 이 일을 자기들만 알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들은 집밖에 나가자마자 온 동네에 다니며 "내가 나았다! 내가 눈을 떴다! 예수님이 나를 낫게 하셨다!" 하고 전파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수많은 환자들이 찾아옵니다. 벙어리가 찾아왔는데, 예수님이 고치셨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피곤하셨겠습니까? 기적을 일으키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날이면 날마다 수백 수천 명이 고쳐달라고 찾아옵니다. 그들에게 안수해야 되고, 복음을 전해야 하고, 얼마나 피곤한 나날이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한번도 거절하지 않고, 그들을 친절하게 대하시며, 그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35절은 그 사역을 요약한 것입니다.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은 이 일을 예수님은 도대체 어떻게 행하실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3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셨어요. 무엇을 보셨는가?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것을 보셨어요. '고생'이란 단어는 '추운 겨울에 발가벗겨진 나무'를 뜻했어요. 그리고 '동강동강 나버린 것' 예를 들면, 정육점에 가면 고기를 썰어서 다져진, 완전히 토막 나버린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이것이 수백 년 동안 내려오면서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이 초조한 상태' 즉 사람의 마음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이 바짝 말라버린 상태, 그것을 '고생'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셨어요. 겉모습은 음식을 잘먹어 윤기가 나고, 옷을 잘 입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영혼을 바라보신 겁니다. 수많은 근심, 걱정, 잘못된 가치관으로 인해 영혼이 완전히 시들어서 바짝 말라버린 그들의 상태를 예수님은 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유리함'을 보셨어요. 이 단어는 양들이 푸른 초장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입니다. 얼마나 적절하고 합당한 표현입니까? 양들이 너무나 배가 고파 푸른 초장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결국 찾지 못하고, 오아시스도 찾지 못하고 너무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 이 상태가 곧 유리함입니다.
이것이 당신 주위에 있는 어떤 사람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들은 행복의 푸른 초장을 찾아 온갖 곳을 헤매고 다닙니다. 화려한 경력을 쌓으면 자기 인생에 초장이 이루어질 것 같아서, 목숨을 다 바쳐 경력을 쌓습니다. 그러나 경력을 쌓으면 쌓을수록 그들의 마음에 공허함이 있습니다. 교육, 쾌락, 지위, 돈, 이런 것들을 많이 쌓으면 내 영혼이 행복해지고 풍부해 질 것이라고, 잘못된 신기루를 좇아 푸른 초장을 찾아 헤매다가, 그것을 손에 넣고 난 다음에 더 많은 것, 더 큰 것을 추구하다가 끝없이 마음이 공허한 자들! 때로 어떤 이들은 한 잔의 술과 마약을 통해 푸른 초장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항상 발견하는 것은 초장이 아니라, 다 말라버린 사막일 뿐입니다.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을 기억합니까?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그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쾌락의 푸른 초장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과거에 다섯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 남자들을 다 버리고 지금의 남자도 남편이 아닌데,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늘 공허했습니다. 메말랐습니다. 멋있는 남자를 만나면 그것이 내 인생의 푸른 초장이 될 줄 알았지만 아닙니다. 목은 점점 더 타 들어가고, 영혼은 점점 더 갈증이 나는 겁니다. 인생이 허무한 겁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녀를 찾아 가셨습니다. 그녀에게 있는 것은 고생과 유리함, 정처 없는 방황뿐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피곤하심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역을 하게 한 이유였던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매일 스치는 당신 주위의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보십니까? 멋진 몸매와 좋은 차와 아름다운 양복과 멋있는 헤어 스타일만을 보십니까? 만일 당신이 사람들에게서 그런 것들만 본다면, 당신은 쉰들러처럼 사람들을 구해 낼 수 없습니다. 영혼의 구조대가 될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 이면을 보셔야 합니다. 멋있는 직장과 양복 뒤에 감춰져 있는 그들의 고생과 번민, 웃음 띤 얼굴 뒤에 감춰진 그들의 방황과 유리함, 사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그들의 실체를 보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사망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소개하지 않습니까? 왜 무기력하게 앉아 있습니까? 왜 그들을 강권해서 하나님의 집으로 데리고 오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의 고생과 방황과 유리함을 우리가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혼의 구조대가 될 수 있을까요? 먼저 그들을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이런 눈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에 비유하고 있어요. 양은 자기 본능으로 길을 찾아 올 수 없는 동물이기 때문에, 목자를 잃은 즉시 그 양은 죽습니다. 온 데를 헤매다가 저녁이 되면 하이에나나 늑대가 나타납니다. 두려워서 숲 속에 숨어 목자와 동료를 찾으며 우는 양!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에게서 이 양의 울음소리를 듣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 그들의 아픔을 깊이 느껴라
그들을 정확히 볼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같이 느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십니다. 여기서 '민망히 여기다 ('스플랑크 니조마이' 라고 하는 헬라어) '라는 단어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원래 내장(內臟)을 뜻했습니다. 우리 몸 안의 내장을 말합니다. 고대 헬라 사람들은 인간의 감정이 내장에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로 쓰여졌습니다.
'민망히 여기다'라는 단어가 특이하게 성경에 몇 군데 쓰였는데, 사람들에게 쓰이지 않고 예수님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에서만 쓰여졌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이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강도 만난 사람이 찾아간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어요. 민족 간에 서로 원수된 사람끼리인데,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에게 '불쌍히 여겼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로 이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또한 탕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효를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유산을 얻어서 먼 나라에 가서 그 돈을 다 써버리고,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와 함께 지내다가 거지가 되어 아버지에게 찾아옵니다. "내가 이제 아들이라 칭함을 감당치 못하겠으니, 아버지여! 나를 종으로 보십시오!" 이렇게 얘기하리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성경은 말합니다.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이 말씀 중에 '측은히 여겨'라는 구절에서도 바로 이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불쌍하게 여긴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를 보시고, 예수님의 마음이 굉장히 아팠다는 겁니다. 아픔을 느꼈어요. 그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같이 느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어린 자녀를 병원에 입원시켜본 적이 있습니까? 그럴 때 어떻습니까? 저도 결혼해서 처음으로, 우리 큰아들이 6살 때 탈장 수술을 했어요. 달라스의 어린이 전문병원에서 수술을 했어요. 의사가 얼마나 친절한지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어떻게 수술할 것인지, 수술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낫는데 걸리는 시간 등을 한 15분에 걸쳐 설명해 주는 겁니다. 그렇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는데도, 아이가 전신마취를 해서 뻣뻣하게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나오는데, 제 마음이 어느 정도 아팠는지, 정말 속이 쓰리더라고요. 제가 대신 아프고 싶었어요. 이런 마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내 속에서 그 사람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전도하지 않습니까? 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데려오지 않습니까? 왜 형제에게 하나님을 소개하지 않을까요? 왜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의 고통을 깊이 느끼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의 고통을 똑같은 깊이로 느껴보셨습니까? 하루라도 술에 취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자의 마음을 헤아려 본 적이 있습니까? 술주정뱅이라고 그에게 손가락질하기 이전에 말입니다. 만일 당신의 배우자가 당신을 이 땅에 남겨두고 먼저 떠났다면 당신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당신 주위에 이런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들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마음으로, 그들을 깊이 느끼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같이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겁니다.
쉰들러가 유대인들의 아픔과 고통을 그들처럼 느꼈듯이 말입니다. 그는 독일 사람이었습니다. 유태인들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교육받았기에, 히틀러를 존경했기에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날, 자신의 민족보다 훨씬 열등하다고 생각했던 그 유태인의 엄마와 아들과 아버지가, 그 가스실에서 죽어가면서도 자기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가스를 덜 마시게 하려고, 아이를 품에 안고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그는 그들이 느끼는 아픔을 같이 느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행동하게 한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을 위한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의 간증을 여러분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제가 수요일 날 한 번 얘기를 해 드렸습니다. 이 분은 굉장한 베스트셀러 저자입니다. 이 분이 너무나 바쁜 시절에 뉴욕의 전철에서 책을 읽고 있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신문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조용히 묵상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한 정거장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탔어요. 마침 스티븐 코비의 옆자리가 비어서 그들이 앉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아이가 들어올 때부터 징징거리더니 막 울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버지의 옷을 잡아당기며 웁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아버지가 아이를 전혀 달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방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스티븐 코비가 너무나 화가 났어요.
그래서 조금 더 기다리다가 스티븐 코비가 꾸짖듯이 얘기합니다. "여보시오, 선생님! 당신 아이가 이렇게 징징대는 것을 당신은 모릅니까? 전철 안에서 다들 조용히 있는데,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하고 그를 심하게 꾸짖었어요. 그러자 이 아버지가 눈을 번쩍 뜨더니, 마치 이 아이가 보채는 것을 이제 막 발견했다는 듯이 "아! 미안합니다." 양식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우리가 방금 병원에서 나오는 길인데, 이 아이의 엄마가 1시간 전에 죽었습니다. 제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정신이 나갔습니다. 미안합니다" 이 얘길 들은 스티븐 코비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2,30분을 더 가며 아이가 우는 그 소리가 자기를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고요. 그를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요.
여러분! 왜 우리가 함부로 남을 판단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짓는 죄악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겁니다. 저 사람은 저래서 나쁘고, 나쁘고, 나쁘고... 우리는 앉아서 손가락질합니다. 내가 예수 믿었기 때문에 저 술 먹는 사람보다, 저 담배 피우는 사람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을 구해낼 생각을 하기보다, 그들과 같이 아파하기 보다, 그들을 손가락질하며 정죄하는 죄악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줄 아십니까?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의 죄악이었습니다. 나는 의롭고 저들은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식사하는 것도 참지 못하고 불평했던 그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전도하지 않습니까? 왜 이 교회를 꽉 채우지 못합니까? 왜 그들을 하나님 앞에 인도해 내지 못합니까? 왜 사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서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아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같이 하찮은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그의 마음을 동(動)하셨던 겁니다. 같이 아파하셨어요. 우는 자와 같이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우리의 아픔을 친히 체험하신 것입니다.
영안 성도 여러분! 영혼의 구조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이왕 이 땅에서 구원받았으니 보람 있는 일을 하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명단이 '쉰들러 리스트'같이 수백 명으로 차 있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그들의 눈 높이로 여러분을 낮추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느끼는 감정으로 이 세상을 보십시오. 정죄하지 마시고, 그들의 아픔을 여러분의 아픔으로 부둥켜안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영혼의 구조대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을 올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아픔을 깊이 느껴야 합니다.
3.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37절을 보세요.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하라 하시니라
구원받아야 할 영혼은 많고, 그들이 곧 익어 예수 믿을 준비가 다 되어서, 줄기에서 떨어지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생각에 예수님은 "얘들아, 서둘러라! 빨리 가야 돼! 바쁘게 움직여야지!" 하고 말씀하실 것 같지 않습니까? 농사가 잘 되어 추수할 때가 가까웠습니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과일이 다 땅으로 떨어져 버릴 그 농부의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급박한 상황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Prayer! 기도하여라!" 왜요? 한 영혼을 구하는 일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사망의 길에서 벗어나서, 영생하는 길로 돌아서는 이 길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아셨고, 그 뒤에는 엄청난 악의 세력[사탄]이 존재함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겁니다. "기도하여라!"
기도의 용사 조지 뮬러를 잘 아시지요? 그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응답 받은 기도 제목만 5만 가지가 넘었다고 합니다. 대단하지요.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기도 제목은, 어릴 적 같이 자랐던 다섯 명의 친구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었어요. 그는 이 일을 위해 매일 아침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드디어 세 명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마지막 두 명은 조지 뮬러가 50년이 넘게 기도했는데도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52년의 기도 사역을 다 마치고 병석에 누워 자기의 죽음을 안 조지 뮬러는, 마지막으로 교회에 설교를 하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 날 강단에 섰습니다. 그런데 그 날, 믿지 않는 두 명의 친구 중 한 명이 우연히 그 교회에 참석했다가, 조지 뮬러의 마지막 설교를 듣고 주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 명은 여전히 믿지 않았어요. 조지 뮬러는 52년을 기도했건만, 마지막 한 친구가 주님 앞에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이 땅을 떠납니다. 그 친구는 외국에 가 있었어요. 조지 뮬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와 그의 묘소를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를 그 묘지에 데려간 친구로부터, 조지 뮬러가 자신을 위해 52년 동안 기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친구는 거기서 무릎을 꿇고 조지 뮬러가 죽은 지 꼭 1년 만에, 뮬러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응답됨을 믿으십니까? 모든 기도가 다 응답됩니다만, 다른 기도는 몰라도 영혼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기도한 그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고, 비록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 땅을 떠난 후에라도 반드시 주님 앞에 그 영혼이 돌아올 것을 믿으십시오.
저는 여기 앉아 계신 몇몇 분의 아픔을 압니다. 수십 년 동안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도했지만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두고, 마음에 한이 맺혀 기도하는 분들이 이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드린 그 눈물의 기도가 반드시 응답될 것을 믿으시며, 오늘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녁에 모시고 올 영혼들을 위해 여러분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하십시오. 여러분 주위에서 고통과 고생과 아픔으로 방황하는 그 영혼들을 위해, 오늘부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영혼의 구조대가 될 수 있습니까? 그들을 올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아픔을 깊이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은 그들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4. 그들을 향해 나아가라
성경에 원래 '장'과 '절'이 없었다고 제가 이전에 말씀드렸습니다. 9장과 10장이 그렇습니다. 10장의 단락이 잘못 나뉘어져 있습니다. 9장과 그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하라 하시니라
그리고 나서 바로 예수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권능을 주십니다. 그리고 2절부터 예수님이 출석을 부릅니다. 열두 명이 다 왔나 하고요. "베드로!" "예!" "요한!" "예!" ...
"다 왔구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기도하라고 하셔 놓고 왜 출석 부르시는 것일까요? 출석을 다 부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0장 1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명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權能)을 주시니라
예수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필요한 권능은 내가 다 줄 터이니, 너희는 가기만 하여라! 내가 너희를 보내나니 가라! 가라! 가서 저 죽어 가는 영혼들, 가스실에서 처형을 기다리는 저 영혼들, 죽음의 길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도 못하는 저 불쌍한 영혼들을 향해 가거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영혼의 구조대로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당신이 알든 모르든 그것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많은 교인과 구원받은 자들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자신이 이 땅에 살면서 우선 순위 1번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도 돈 몇 푼을 더 벌기 위해, 불신자들과 똑같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런 것으로 결코 행복을 찾을 수 없고, 그것은 푸른 초장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신 그것들을 위해 동일하게 뛰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새생명 축제 기간에 우리에게 회개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나를 영혼의 구조대로 삼아 주옵소서!" 이것이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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