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살리는 세 가지 말 2001-12-11 22:36:10 read : 974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고린도전서 15:1-4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
주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울다가도 일어나서 춤을 추고 싶은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나 기쁜 날입니까? 저는 오늘, 이 부활의 사건을 더 인상깊게 설명하기 위해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하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죽음일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작가 마크 트웨인은, "이 세상에서 확실한 것은 두 가지밖에 없다. 바로 세금과 죽음이다"라고 얘기했어요. 그런데 미국은 어떤지 몰라도 한국에 와 보니까, 세금은 피할 길이 있더라고요. 뒷돈 거래를 좀 하면 피할 길이 있는 것 같아요. 세금은 피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죽음은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점점 늙어 결국 죽게 되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피해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의 나이와 주름을 덜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남자들이 다 아는 사실은, 여자들이 자신의 주름을 덮어보려고 30분, 1시간 거울 앞에 앉아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화장이라는 것은 20대 여자가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생김새를 약간 더 정리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30대가 하는 것은 '치장'이고, 40대는 '분장'을 하고, 50대는 '가장'을 하고, 60대는 '환장'을 한다고 합니다.
여인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늙어 가는 모습을 덮고 싶은 것이 우리의 바램일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늙음의 손길은 우리의 뺨에서 아름다움을 훔쳐가고, 걸음을 흐트러지게 만듭니다. 명철했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듭니다. 수많은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이런 경험들을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기쁨과 욕구들을 하나둘 빼앗아 가버립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가장 피하고 싶지만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우리의 비극인 죽음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인류의 피할 수 없는 비극을 얘기하면서, 이것을 극복할 방법이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줍니다.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의 메시지가 아니겠습니까? 이 죽음의 비극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겁니다. 저는 오늘 고린도전서 15장을 다 강의하지 않고, 1절부터 4절을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죽음을 피해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소개하기 위하여 고리도전서 15장 전체를 썼는데, 여기에 기초가 되는 말씀이 1절부터 4절 말씀입니다. 이 네 구절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설명하고 있어요. 하나는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죽음을 피해 가는 것인지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고, 또 하나의 큰 기둥은, 이 복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는가 즉,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1. 복음은 무엇인가?
1)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세 가지 요소를 말씀합니다. 첫 번째 요소는 3절에 기록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날 저는, 어릴 때부터 읽어온 이 말씀을 다시 읽으며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굉장히 놀랐어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복음의 말씀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삶을 전혀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의 삶도 생략했고, 이스라엘을 수없이 다니며 문둥병자와 소경을 고치고, 물위를 걸어가신 사건을 비롯한, 모든 기적들을 다 생략해 버렸어요. 산상수훈의 놀라운 도덕적인 가르침조차도 한마디 꺼내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그리고 복음을 설명하면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것이 저에게 굉장한 충격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의 교훈이 좋다고 얘기합니다. 도덕적으로 그분의 가르침이 너무나 탁월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고, 그것이 신앙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어요.
여러분, 무엇이 복음입니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복음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사건! 그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건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 쓴 책을 보십시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만든 예수님에 관한 영화를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부인합니까? 아닙니다. 모두가 인정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고통 받으셨다는 이 모든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참 복음의 첫 번째 요소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실 때 어떤 일을 행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하시면서, 그저 때가 되어서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큰 일을 거기서 행하셨다는 겁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행하신 가장 위대한 것은,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 속하신 일 인줄 믿습니다.
이 말씀을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라고 하였고, 이사야 선지자는 다가 올 미래를 내다보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아! 불쌍하구나! 그 착한 분이 왜 돌아가셨는가!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곳에 당신의 이름이 들어가야 돼요.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는가?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엄청난 일을 하셨는데, 바로 당신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것입니다.
2) 장사(葬事) 지낸 바 되었다
복음의 두 번째 요소는, "장사(葬事) 지낸 바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질문이 생겼어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것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왜 복음을 얘기하면서 장사(葬事)를 얘기했을까? 많은 묵상을 했어요. 저는 장사(葬事)가 필요 없는 줄 알았거든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날 성령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거예요. 침례가 그것을 뜻합니다. 내가 물에 들어갔을 때 주님과 함께 장사되고, 물에서 올라올 때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거예요.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지셨을 뿐 아니라, 땅에 묻히셨어요. 이 말은 주님께서 짊어지신, 저와 여러분의 죄가 땅에 매장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왜 복음인줄 아세요?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해도- 사기, 간음, 살인...등- 수많은 죄를 지었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제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제가 죽겠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그 순간, 주님은 내 죄를 용서해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그 죄를 땅에 매장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장사지내 버린 겁니다.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어찌할 수 없어요. 그래서 로마서 8장 1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당신의 죄를 가슴에 품으시고 땅속에 들어가 장사를 지내셨기 때문입니다. 죄만 파묻은 게 아닙니다. 죄가 다시 살아날까 봐 예수님이 죄를 부둥켜안고 장사되어서, 죄도 장사되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누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나요? 이 세상의 어떤 유명한 철학자가 우리의 죄를 조금이라도 탕감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장사 되셨습니다.
3)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세 번째 복음의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살아나심'을 올바로 이해해야 됩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정도로만 압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살아 난 사람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나사로도 살아났어요. 여기서 '살아나심'은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에요. 나사로는 다시 살아났지만 몇 년 후에 다시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다시 사심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영원히 죽지 않으시고, 지금도 살아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靈)으로만 살아 계신 것이 아니라 몸도 사셨습니다. 분명히 십자가에 박힌 몸이었어요. 손에 구멍이 났고,옆구리에 창 자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들지 않는 몸, 고난에 끄떡도 하지 않는 몸, 영원히 살아있는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사신 것입니다. 과거에는 없었던 생명으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가르치는 세 가지 기쁜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복음의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무엇이 복음인가? 예수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셨다. 이것이 복음의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이 무엇을 얘기합니까? 죽음과 장사와 부활이 예수님에게만 일어났다고 얘기합니까? 그렇게 믿는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겁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 죽음과 장사와 부활은 예수님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일어났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믿으십니까?
무엇이 예수 믿는 건가요? 무엇이 정말 복음을 받아들인 건가요? 누가 침례 받을 수 있나요? 내가 예수 믿을 때, 성경은 무엇을 얘기해 줍니까? 내 안에 그 무엇이 죽었다고 얘기합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옛사람이라고 얘기합니다. "너희 옛사람이 죽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 2:20)" 사도 바울은 내가 죽었다고 얘기합니다. 여러분 죽으셨나요? 예수 믿는다는 것의 의미와 복음에는 이것을 포함합니다. "아~ 저기에 예수님이 돌아가셨구나!" 세상 사람도 다 알아요. "그분 참 착하신 분인데 안 됐구나!" 객관적인 사실로만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겁니다.
복음을 아는 것,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바로 동일시입니다. 예수님만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나는 감히 죄를 위해 죽을 수 없지만, 나도 같이 죽음 당했고, 하나님도 그렇게 여기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은 거예요. 내가 장사되었어요. 구원받은 자들은 과거에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나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를 죽이는 것이 어떻게 쉽겠어요? 과거의 나를 죽입니다. 내 생각을 죽입니다. 내 취미도 예수 믿는데 방해가 된다면 버립니다. 내가 이전에 가졌던 가치관도 다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와 함께 죽고 장사 지냈습니다.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에요. 그러나 이 일을 진심으로 행한다면 거기에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놀라운 생명을 가지고 부활하셨던 것처럼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줄로 믿습니다. 세상이 어찌하지 못하는 생명이요, 질병이 어찌 할 수 없는 생명입니다. 그런 생명이 우리 안에 창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것의 참 의미입니다.
2. 복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는가?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나도 같이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같이 부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주님의 죽음과 장사함과 부활하심, 뿐만 아니라 나의 죽음과 장사됨과 나의 부활, 그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마음을 열고 나의 인격을 다해 복음을 받아들이면, 이 복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나요? 두 가지를 해 줄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은 얘기합니다. 첫 번째, 복음은 우리를 굳게 세웁니다.
1) 복음은 우리를 굳게 세운다
1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나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무슨 뜻일까요? 복음이 우리를 세운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이 말은,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초를 복음이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어떤 고통과 질병, 환난, 문제가 와도 끄떡없이 설 수 있는 안전한 반석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는 겁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의사 앞에 왔습니다. "당신, 암입니다. 3개월 남았어요" 라고 진단을 내렸다고 합시다. 그는 그 날부터 지옥입니다. 모든 것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기쁨도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원망스럽고, 그저 얼마 남지 않은 생애를 안타까워 할 뿐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암을 선고받으면 즐겁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그런 고난조차도 이길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병이 찾아오고, 부도가 찾아오고, 고난이 찾아올 때 믿지 않는 사람과 같이, 똑같이 좌절하고 낙심하고 슬퍼하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여러분이 복음을 재대로 믿지 않은 증거입니다. 복음이 뭔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당신의 죄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사망이 어디서 왔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아담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시고, 우리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셨습니다. 거기서 복음은 끝나는 거예요.
수많은 교회들이 기복 신앙을 얘기합니다. 예수 믿으면 병에 안 걸린다고요. 십일조 잘 바치면 복 받는다고요. 예, 그럴 수 있습니다. 성경이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신앙의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복음은 거기서 Period를 찍어야 돼요. 그것으로 족한 겁니다. 새생명 얻은 것으로, Enough! 족한 줄로 믿습니다. 복음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능히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이길 수 있어야 됩니다.
제가 아는 한 집사님이 얘기했습니다. 간증을 했어요. "목사님, 제가 복음을 믿는 줄 알았는데, 여태까지 돈을 믿은 것 같아요." "왜요?" 남들은 잘 모르지만 자기의 재산이 15억이나 되는데, 은행에 현금으로 15억을 넣어 놨대요. IMF 때에는 한 달에 이자만 천 몇 백만원이 나오는데 정말 세상에서 부러울 게 없었어요. 직장생활, 사업에서 생기는 수익은 빼고, 이자만 한 달에 몇 백 만원씩 들어와 보세요.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세상에 무서울 게 없더래요. "이제는 무슨 풍파가 와도 나는 괜찮다. 돈만 있으면 되니까!" 이렇게 생각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부터 이자가 싸지면서 자꾸 내려가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이자가 6% 정도 밖에 안 된대요. 요즘 실제 이자는 얼마나 되는가? 1% 입니다. 왜냐하면 1년에 물가가 5% 올라가기 때문이죠. 은행에서 7%를 받고 나서 세금 떼고 나면 여러분에게 돌아오는 것은 1%도 안 돼요. 15억 넣어 놓아도 한 달에 이자가 100만원도 안 돼요. "목사님, 제가 요즘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그래서 제가 깨달은 건데, 예수님 믿는다고 큰소리 쳤는데 돈을 믿었던 것 같아요. 이 깨달음도 다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냥 이 돈을 하나님 앞에 다 드릴까 싶습니다" 제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아멘!"
복음은 우리를 굳게 세우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신앙을 가지고서도 흔들립니까? 왜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좌절합니까? 생활 속에서 왜 세상 사람과 전혀 구별됨이 없습니까? 복음 위에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와 장사 지냄과 부활의 의미, 그리고 내가 거기에 동참했다는 복음의 의미를 정말 안다면, 그 복음은 우리를 세웁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그런 분들을 많이 봅니다. 사업이 망해도 즐거워해요. 억지로가 아닙니다. 마음속에서 기쁨이 흘러나오는 것을 간증하고 얘기합니다. 저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봅니다. 가능한 일입니다. 왜요? 복음이 우리를 세우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무엇을 하는가? 복음은 우리를 세웁니다. 두 번째 복음이 하는 일을 성경은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2) 복음은 우리를 구원한다
2절.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이 구원은 어떤 구원일까요?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구원'의 시제를 자세히 보면 현재형으로 쓰였어요. 지금 구원받는 것을 얘기하는 겁니다. 나중에 죽고 나서 천국 가는 구원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세 가지 시제를 알지요? '과거의 구원', '현재의 구원', '미래의 구원'이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이 구원이 우리의 존재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를 살펴보면 더 확실하게 마음에 와 닿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과 혼과 몸입니다. 과거적인 구원은 내 영이 살아나는 겁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은 다 죽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임을 아십니까? 몸이 있으니까 물질적인, 형이하학적인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엄연히 영이 존재하고 있어요. 저의 영이 있고 여러분의 영이 있어요. 이 영은 서로 볼 수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영이 보인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사기꾼입니다. 사람은 영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이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그 영이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죽어 버렸어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야~ 그분 참 불쌍하다. 예수도 사대(四大) 성인(聖人) 중의 한 분이지. 그분의 가르침이 중요하지~" 이 정도로 알았다가, 어느 날 십자가 앞에 나와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지냄과 부활의 의미를 다시 깨달았어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죄로 말미암아 내 영이 죽었는데, 주님께서 내 영에 씌워진 죄의 능력과 사망의 능력을 품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 지낸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 내 안에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바로 죽었던 그 영이 살아납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셔서 내 영과 성령님의 영이 하나가 되어 교통합니다. 이것을 과거적인 구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가르쳐 주신 표현으로 '거듭나는' 겁니다.
두 번째, 태어나는 거예요. 거듭나셨습니까? 내 영이 살아났어요. 그렇다면 미래적인 구원은 무엇인가? 신기하게도 몸에 관한 거예요. "목사님, 천한 몸을 가지고 구원을 얘기합니까?" 할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3절에서, 우리가 이 몸에서 탄식하며 무엇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내가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고 했습니다. 왜 몸의 구속을 기다립니까? 미래에 놀랄 일이 생깁니다. 우리가 영만 구원받는 줄 알면 여러분은 잘못 믿는 겁니다. 몸이 왜 중요한가? 이 몸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지셨던 몸! 전혀 병들지 않고, 늙지 않고, 영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 수 있는 몸! 그 몸으로 음식도 먹습니다. 그러나 안 먹어도 됩니다. 그곳에는 각종 과일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이 모습 이대로 영원히 살 영화로운 새생명, 새 몸을 받게 됩니다.
이 땅에서는 아무리 기도해도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40일 금식기도, 부흥회를 아무리 참석해도 여러분은 죽습니다. 이것을 잘못 생각해서, 기도만 하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해서, 아까운 목숨을 버린 사람들이 많아요.
꽤 오래 전에, 삼각산에서 부흥집회를 하고 오다가 어떤 여자들이 강을 건너는데, 그 날 홍수가 났거든요.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건넌다. 어떠한 악도 우리를 해할 수 없느니라. 주여!" 하면서 셋이 같이 강으로 들어갔어요. 어떻게 됐겠어요? 나중에 시체가 바다에 떠 있었어요. 몸의 구원이 무엇인지, 미래의 구원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지금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새 몸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미래의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구원은 무엇과 가장 상관이 많을까요? 혼(魂)입니다. 혼(魂)은 무엇인가? 우리의 삶입니다. 이 땅에서 판단하고 느끼고 결단하는 지(知).정(情).의(義)입니다. 이 구원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거라고 얘기합니다. 이 말은, 예수 안 믿는 사람과의 차이는 그저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겁니다. 세상에 나가서 똑같이 고민하고, 사업을 해도 수단방법 안 가리고, 그 사람이 욕하면 나도 욕하고, 오른뺨을 맞으면 양쪽 뺨을 때리는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내 가정 생활과, 내 직장 생활을 매일 다르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현재의 구원입니다.
여러분, 현재에 구원받고 싶으세요? 부활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나도 앞으로 부활할거다!" 이렇게 하고 부활절을 끝내버려요. 그것은 참 부활절의 의미가 아닙니다. 참 부활절의 의미는 오늘 나의 삶과 연관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매일 다르게 살아야 돼요. 5년 전의 부활절과 5년 후의 부활절의 내 모습이 달라야 됩니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내 인격적인 부분을 비롯해서 모든 면이 달라져야 되는 겁니다. 그것이 '현재의 구원'입니다.
'현재의 구원'을 얻는데는 한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2절을 보세요.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한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기는 믿되 헛되이 믿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다. 우리 가운데 헛되이 믿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교회도 나오고, 성경공부도 하고, 집사직분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헛되이 믿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 현재적 구원은 누구에게 이루어지는가? 아무에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구원받고 계십니까? 그렇게 되셔야만 합니다. 이것이 부활절의 의미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물밀듯한 기쁨이 있으세요? 이 부활절을 맞아 저는 너무 기뻤어요. 그래서 이 부활절을 어떻게 축하할까 하여 양복을 몇 번이나 바꿔 입었는지 몰라요. 예수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비극은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의 기쁨이, 예수 믿고 나서도 여전히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사업이 조금 잘되면 얼굴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사업이 조금 어려우면 교회 일도 다 그만 둡니다. 성가대 하다가도 안하고, 교사하다가도 안하고, 성경 공부도 안하고, 모든 신앙 생활이 다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헛되이 믿는 겁니다. 믿은 연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부활절에 주님이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 원하는, 현재의 구원을 다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것이 부활절의 의미입니다. 살아 있는 부활절! 주님이 내 안에서 역사 하시는 부활절! 오늘 정말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아서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 삶이 변화되는 귀한 부활절이, 우리 가운데 계속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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