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밝히는 순례자 2001-12-11 22:33:20 read : 894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시편 120:1-7
1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2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에서 내 생명을 건지소서 3너 궤사한 혀여 무엇으로 네게 주며 무엇으로 네게 더할꼬 4장사의 날카로운 살과 로뎀나무 숯불이리로다 5메섹에 유하며 게달의 장막 중에 거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 6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와 함께 오래 거하였도다 7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저희는 싸우려 하는도다
사도행전을 읽어내려 가다 보면 한 가지 사실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곳에 나타난 그리스도인들이 오늘의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때는 그리스도인의 수도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훌륭한 예배당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돈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좋은 프로그램이나 화려한 액정화면 같은 시설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접한 지 불과 30년 후네, 그 당시에 세계에서 유명했던 도시들- 고린도, 에베소, 로마 등- 이 복음으로 정복당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오늘의 우리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소유하고 살아갔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보다 더 철저한 신분의식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살아갔어요. 그것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분을 '순례자'라고 망설이지 않고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봐도 그렇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그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아브라함은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세요. 그는 평생동안 땅 한 평 소유하지 못하고 살아갔어요. 왜요? 순례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33년 동안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하루는 제자들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 8:2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그야말로 순례자, 나그네의 삶을 철저하게 사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분이 나그네 인생이라고 하는 것, 순례자라는 것을 각인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 엄청난 영향력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순례자! 그것이 우리의 신분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 땅의 정착자가 아니요, 지나가는 순례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세상의 정착자가 아닌 순례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순례자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 것입니까? 앞으로 몇 주간에 걸쳐서 이 주제를 가지고 설교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특별히 한 곳을 정할 것입니다. 시편을 가지고 약 2달간 설교할 예정인데, 이 땅에서 순례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주제로 다룰 것입니다. 모든 시편을 다 다루지 않고, 특별한 제목이 붙여진 시편을 사용할 것입니다. 바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붙여진 시편들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위를 보십시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지요? 다음 장을 넘겨보면 계속 이 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이 시편들 중 몇 개를 뽑아서 사용할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는 시편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짧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짧은 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1년에 세 번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노래하던 시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1년에 세 번, 유월절과 오순절과 '로쉬하샤나'라는 새해, 우리 나라로 치면 새해 첫날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예배해야만 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그냥 올라가지 않았어요. 이런 시편들을 외우며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 자신들의 마음을 점검하고 준비하기 위해서, 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을 노래하며 올라갔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례자로서 저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천성을 향해 올라가는 여정을, 어떻게 하면 순례자의 삶을 올바로 살 수 있을까? 이 주제에 대해서 하나님은 다루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순례자라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그 자세 중 중요한 삶의 자세 하나를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시편에 나타난 순례자는,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며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잠간이 아니라 일생을 더불어 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이 순례자는 그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파했어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전할 메시지가 뭡니까? 바로'샬롬'입니다. 평화를 전했어요. 하나님의 평안을 전했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 정직하게 살며, 어떤 사업에서든 무엇을 하든지 평화롭게 대인관계를 맺기를 원해서, 이 순례자는 '샬롬!' 평화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니, 이 순례자의 평화의 메시지는 철저하게 거부되고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는 사람들과 평화를 원했건만, 사람들은 그를 속이고 핍박할 뿐만 아니라, 그의 생명까지 위협했다고 본문은 소개해 줍니다. 이 고통을 못 견뎌 너무나 괴로워서 이 순례자는 드디어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습니다. "오! 하나님!" 하고 부르짖습니다. 이것이 시편의 내용입니다. 일곱 절의 짧은 내용입니다. 이 시편은 3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요, 두 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요, 세 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탄식입니다. Lament! 탄식입니다.
이 시편의 배경을 좀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후반부부터 강해할 것입니다. 5절에서 7절까지를 여러분이 이해한다면, 이 시편의 분위기가 어떠한가를 잘 알게 될 겁니다. 5절을 보세요.
메섹에 유하며 게달의 장막 중에 거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
우리말로는 "내게 화로다" 정도로 번역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 원어에 보면 아주 강조되어 "화로다! 나여!"로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메섹과 게달의 장막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화로다! 나여!"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저주받은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너무 힘든 인생을 살고 있다. 아! 내 인생이 저주받았구나! 왜? 내가 메섹의 장막과 게달의 장막에 거하기 때문에. 이 순례자는 왜 자신의 인생을 화와 저주라고 얘기했습니까? 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잘못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왔다는 겁니다. 자신은 평화를 얘기하고 정직하게 살기를 원했지만,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그를 속입니다. 잘못된 사람들을 평생 만나며 살아왔어요. 그래서 자신의 인생은 저주받았다고 탄식하는 겁니다.
여기에 나타난 '메섹'과 '게달'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메섹은 이스라엘 북쪽, 오늘날 카스피해 둘레에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 당시 메섹 사람들은 두 가지 큰 특징을 가지고있었어요. 군사력과 경제력입니다. 그들의 군사력은 막강했어요. 그 당시 기록을 보면 세계 최강의 앗시라아가 메섹이라는 작은 도시를 함락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어요. 앗시리아가 이겼어요. 그러나 이기긴 했는데 그때 파병한 군사의 3분의 2를 잃고서 이겼습니다. 굉장히 비싼 대가를 치르고 겨우 이겼어요. 메섹은 그렇게 군사력이 강했습니다.
경제력은 얼마나 강했는가? 철과 무기를 수출했어요. 에스겔 선지자는 두로라는 도시를 칭찬하며 두로가 왜 부자가 됐는지에 대해 메섹과 무역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도시가 오늘날 미국의 뉴욕 증권시장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굉장히 강한 군사력을 가졌고, 굉장히 강한 경제력을 가진 이 메섹의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을 학대했습니다.
게달은 이스라엘의 남방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스마엘의 후손입니다.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공격하고 괴롭혔어요. 잔인한 군사력을 가진 러시아와 우리를 침략했던 세계의 경제대국인 일본 사이에 끼어서 신음한 우리 나라처럼, 6.25를 겪고 한일합방을 겪은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스마엘의 후손들에게 어려움을 당했어요.
바로 이 표현을 한 것입니다. 여기 나타난 이 시편기자는 자신의 인생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람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핍박하고 대적하는 자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샬롬!" 하고 하나님의 평화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미움과 증오뿐이었어요. 어쩌다 찾아오는 미움과 증오가 아니라, 그의 평생 찾아오는 것은 대적들의 핍박과 증오뿐이었습니다.
이 순례자는, 평화를 말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늘 손해를 본다는 사실 앞에 당황해 합니다. "하나님, 어찌 된 일입니까? 나는 정직하게 살기 원하고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기 원하는데 왜 저들은 나를 속이고 나는 피해를 보아야만 합니까? 왜 제가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바가지를 써야 합니까?" 그는 이런 사실 앞에 당황해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 이것은 어쩌면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전쟁을 해야지 평화를 말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세상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지, 정직하게 사업을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 시편기자의 탄식은 바로 우리의 탄식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사회를 돌아보십시오. 한국 사회를 풍자한 재미있는 얘기가 하나 등장했습니다. 개와 닭 얘기입니다. 하루는 개가 닭에게 얘기합니다. "야, 너는 요새 왜 안 우냐? 새벽이 되면 울어서 새벽을 알려야지, 그것이 너의 사명이거늘 왜 새벽에 울지 않느냐?" 요즘 닭들이 새벽에 안 운답니다. 닭이 대답합니다. "야, 옛날에는 잘 때가 있었고 일어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울었지. 요새는 자는 시간도 일정하게 없고 사람들이 밤도 새기가 일쑤야. 그리고 내가 깨울 필요도 없이 자명종이 때르릉 울리니 내가 왜 울겠냐?" 그러니까 이제 닭이 개에게 얘기합니다. "그건 그렇고 너는 왜 안 짖느냐? 너의 사명이 도둑놈이 오면 짖어서 도둑이 온걸 알려줘야 하는데, 넌 왜 안 짖냐? 도둑이 이렇게 득실거리는데 짖어야지. 왜 안 짖어?" 이젠 개가 대답합니다. "야, 나도 고민이 많다. 도둑이 오면 짖어야 되는 것을 내가 왜 모르겠느냐. 그런데 우리 주인이 도둑놈인데 내가 어디다 대고 짖어야 되냐?"
지금의 우리 사회를 일컬어 '총체적 위기'라고 하죠? 한국 사회를 보세요. 경제만 위기입니까? 아닙니다. 도덕의 위기요, 가정의 위기요, 교육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사회 전체가 위기로 빠져들고 있어요. 서민들이 범죄 전선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위기의 사회입니다. 정직이 통하지 않는 사회, 하나님의 평화를 말하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사회가 바로 이 사회입니다. 여러분, 정직하게 살아보십시오. 여러분에게 무엇이 돌아옵니까? 순진하게 살아보십시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양보하고 평화롭게 살려고 해 보세요.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대합니까? 이것이 이 시편기자의 고민이요, 아픔이었어요. 오죽했으면 그가 "화로다! 나여! 내 저주받은 인생이여!" 라고 하나님 앞에 외쳤겠습니까? 이 시편기자의 고민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어쩌면 우리의 고민인지도 모릅니다.
이 시간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가운데, 개인적으로 이 시편기자의 아픔을 가진 자가 있을 것입니다. 불신자와 결혼해 수년, 수십 년 살아왔습니다. 그를 전도하기 위해 할 수 있으면 평화롭게 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습니다. 성질도 죽이고, 말도 줄이고, 대꾸도 안하고, 술 주정도 참아주고, 밤새 고도리 치고 와도 밥 다 해주는 등 참을 것 다 참았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 "여보, 평화롭게 삽시다" "샬롬"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평화는커녕 전쟁뿐입니다. 어떤 분들은 직장에서 평화롭게 살기 원하여서 늘 양보하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조소와 냉대뿐입니다. 어떤 분들은 옳은 방법으로 사업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만나는 것은 부도와 사기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사회입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 순례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러한 냉대와 핍박이 찾아올 때, 내가 "샬롬!"의 메시지를 선포하는데, 그 반대로 사람들이 나에게 전쟁을 선포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오늘 우리가 이러한 사회를 살아가면서 잘못된 반응을 나타내는데, 두 가지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평화를 선포하다가, 세상 사람들이 전쟁을 선포할 때 잘못된 반응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첫 번째 반응은 수도원식 반응입니다. (명칭은 제가 그냥 붙인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등지는 겁니다. "에이그~ 상종 못할 것들!" 하면서 세상을 끊어버리고 홀로 살아가는 겁니다. 남편하고 등을 맞대고 살긴 살지만, 너는 너, 나는 나로 살아갑니다. 상관을 않고 사는 거예요. 한국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아십니까? 세상이 너무 악하니까 세상 사람과 친구도 하지 않고, 세상에 나가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요. 누구와 교제하는가? 그리스도인들과만 교제하려고 해요. 교인들만 만나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빠지기 쉬운 첫 번째 함정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인들은 교회에서만 삽니다. 아침에도 교회, 저녁에도 교회, 월요일도, 화요일도 교회에서만 지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매일 새벽기도, 화요일 성경공부, 수요예배, 목요일 봉사, 금요일 구역예배, 금요일 철야, 토요일 교회 주일 준비, 주일날 하루 종일 교회에서 삽니다. 교인들만 만나기도 바빠요. 속세를 떠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우리에게 신분을 가르쳐 주셨는데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왜 등경 위에 둡니까? 주변을 밝게 비추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구원하셨는가? 교회 안에 우리를 가두어 두기 위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에서 '말(斗)'이란 것은 뛰어 다니는 말(馬)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곡식을 재는 용기였습니다. 커다란 물동이를 연상해 보세요. 물동이를 엎어놓고 그 안에 촛불을 켜 놓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물동이 안쪽은 환해도 밖으로는 빛이 새지 않으니까 깜깜합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이렇게 살려고 합니다. 교회에 와서만 시간을 보내려고 하고, 교인들만 만나려고 해요. 직장에 가서는 아주 소극적으로 삽니다. "시간이나 때우고 봉급이나 받자" 대충 그렇게 살다가 교회에 오면 확 살아납니다. "이 집사님!" "이 장로님!" 하며 비호같이 날아다닙니다. 집에 가면 아버지 노릇도 싫어요. "타락한 놈들, 그렇게 교육시켰는데 저럴 수가 있어?"하며 자녀교육도 포기해 버립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도 포기해 버립니다. 직장에 가서 다 포기해 버리고 교회에 와서만 눈이 말똥말똥한 사람들! 수도원에서 사는 것처럼 사는 겁니다. 이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두 번째 형은 조세형식 반응입니다. 조세형을 다 아시죠? "네가 나를 속여? 그~래? 난 너보다 열 배 속인다!" "네가 나에게 손해를 입혀? 그래, 내가 훔쳐주마!"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서 막 훔쳐대는 겁니다. 상대가 악을 저질렀어요. 뺨을 한 대 치면 왼 뺨을 돌려대는 것이 아니라, 한 대 치면 양쪽 뺨을 다 때려요. 그리고 남의 것을 막 훔치고 돌아다니다 보니 그것이 삶의 스타일이 된 겁니다. 그런 행동이 몸에 배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변화 받고, TV에 나와서 간증까지 다 했는데, 일본 가서 또 이전의 습관이 발동해서 훔쳤어요. 이런 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세상이 너무 완악하니까 자기의 지혜로 세상을 속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지혜에다가 하나님의 능력을 플러스해서 사람들을 속이려고 작정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큰 사기 사건에는 다 장로, 집사가 연루되어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세상에 나가 살다보니,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정직하게 살려고 애를 썼어요. 그런데 하다가 안 되니까 "오냐!" 하고 팔 걷어붙이고, 세상 사람들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악해 지는 겁니다. 밖에 나가서는 온갖 일을 다 저지르고 죄를 많이 지었으니, 교회에 와서는 "주여!~" 하고 회개합니다. 이것도 잘못된 태도입니다.
제가 극단적으로 표현했습니다만, 교회 안에 이런 잘못된 반응을 해 가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살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이런 태도로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속임과 핍박을 당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오늘 시편기자는 자신의 대처방법을 우리에게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순례자의 방법을 마음에 다 심고 돌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1.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심정을 쏟아 놓자
세상이 나를 속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먼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심정을 쏟아 놓아야 합니다. 이 시편의 5절에서 7절 말씀은 히브리어의 많은 시편 가운데, '탄식(Lament)'이라는 장르에 속합니다. '탄식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정서입니다.
시어머니가 나를 너무 핍박했어요. 너무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어요. 그럴 때 여인들이 장독대 뒤나, 들판에 나가 아무도 안보는 곳에 가서 고무신으로 땅을 치면서 "아이고~ 내 팔자야!"하고 탄식합니다. 기억납니까? 정확하게 바로 이런 감정의 표현입니다. 히브리 문화는 동양문화이기 때문에 성경을 우리 식으로 이해하면 훨씬 더 이해가 잘 됩니다.
"화로다! 나여!" 이것이 5절에서 7절까지 나타난 히브리 기자의 방법이었어요. 억울한 일을 당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기의 인생을 탄식합니다. 그러나 그냥 탄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 알아줄 사람이 없나하고 울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모든 사정을 이해하시고, 내 서러움을 이해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이 시편기자는 자기의 마음을 쏟아 놓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필요합니다.
굉장히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 억울한 일로 말미암아 마음에 원한이 되어서 내 몸이 병들게 되었어요. 그래서 밥맛이 없고, 잠이 안 와요. 의욕이 다 사라져 버렸어요. 정말 나를 깊이 이해해 줄만한 사람, 내 사정을 들어 줄만한 사람, 그에게 찾아가서 세 시간, 네 시간 울면서 땅을 치며 하소연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준 것도 아닙니다. 나를 핍박하는 시어머니가 그대로 살아 계십니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과 서너 시간 얘기하고 나면 마음이 어떻습니까? 시원하지요?
오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평화를 외치고,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데도 사람들이 나를 속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피해를 입고 손해를 봤습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억울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나에게 와서 그 마음을 쏟아 놓아라! 있는 그대로 쏟아 놓아라!"
'탄식'이라는 단어를 알스 와이즈라는 심리학자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아무 숨김없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감정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을 때, 우리의 상처들은 비로소 치유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방법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믿음으로 살기가 너무 힘드십니까? 남편을 전도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 본 후에 열매가 없어 낙심되십니까? 그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찾아와서 너의 마음을 쏟아 놓아라!" 라고요. 이것이 '탄식(Lament)'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권면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짐진 자들아"에서 죄의 짐만 말씀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 세상을 살기 원했지만 세상이 나를 속이고, 세상이 나를 핍박합니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내 정직을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악으로 이용합니다. 이런 모든 짐들, 마음에 생긴 원한들을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우리의 선배 중 한사람은 이런 찬송가를 지었습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면
근심에 쌓인 날 돌아 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리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이 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탄식하는 법을 아는 신자였습니다.
내 모든 괴로움 닥치는 환란 주 예수 앞에 아뢰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 주사 넓으신 사랑 베푸시네
저는 종종 하나님 앞에 나아가 탄식합니다. 영안 성도들은 착해서 제 속을 썩이는 분이 한 분도 없어요. 그런데 저기 있는 교인들이 제 속을 썩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 갈수록 얼굴이 좋아집니다. 목사님 목회에 전혀 문제가 없는 모양입니다" 라고 합니다.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제 속도 썩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저는 사람 붙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짐을 내려놓습니다. 사람의 위로도 중요합니다. 친구가 내 사정 들어주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여러분 사정을 아뢰어 본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위로를 하늘에서부터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사람의 위로와 비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짐을 내려놓아 보세요. 놀라운 하늘의 위로가 우리의 것이 될 줄 믿습니다. 주께 아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훌륭한 상담자십니다. 세상이 나를 속이고 하나님의 믿음의 방법이 이 세상에서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심정을 쏟아놓아야 합니다.
2. 하나님 앞에 기도하자
두 번째 방법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1,2절입니다. 제가 순서를 바꾸어서 해석했습니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에서 내 생명을 건지소서
기도하긴 기도하는데, 분명한 것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느냐 입니다. 그것이 2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에서 내 생명을 건지소서
히브리 원어에 보면 '생명'은 '영혼'입니다. 그래서 "내 영혼을 건지소서"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정직하게 사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 정직을 이용했어요. 내가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하나님! 저 사람이 날 속였습니다!" 비가 오면 하늘을 쳐다보며, 벼락이 안 떨어지나~ 자동차 사고가 나서 당하지 않나,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 환경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내 영혼을 구원해 주소서!"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또 사람들에게 이용당했습니다. 한번 두 번이 아닙니다. 내가 또 속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이용하고 핍박합니다. 그럴 때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 내가 이용당했기 때문에 내 영혼이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낙심해서, 역시 하나님의 방법은 안 통하는구나 하고 세상에 나아가 믿음의 방법을 다 저버리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타협하고 포기해 버리고, 세상의 방법대로 살까 두렵사오니, 주여! 내 영혼을 그런 유혹에서 건지시옵소서!" 이것이 우리가 해야할 기도입니다.
여러분, 저는 압니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믿음을 지키며 살기 힘든 사회인지요. 미국은 천국과 지옥이 같이 있어요. 그래도 그곳은 올바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주님의 축복을 받는지 모르겠어요. 거기는 거짓말하지 않고도 살 수 있어요. 우리 나라에서는 거짓말하지 않고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요. 그래서 한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도 세상과 다 타협해 버렸어요. 교회에 와서 예배는 열심히 드리지만, 나가서 사업할 때는 잊어버리고 거짓과 술수를 같이 씁니다. 저는 그것을 지난 주간에도 경험했습니다.
지난 주간에 평생을 농촌에서 목회 하시던 분이 몸이 편찮으셔서 오셨어요. 저에게 진료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분은 이전에 부동산 사업으로 굉장히 성공했던 분이에요. 재산이 많았습니다. 280평 저택에 살았으니까 짐작이 가죠. 그 집의 시가가 17억 정도 된답니다. 적지 않은 부자 아닙니까? 그런데 나이 50에 소명을 받았어요. 3년 간 공부를 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 농촌의 아무도 없는 다 헐어빠진 교회에 가서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자기의 재산을 다 내어 도왔어요. 저는 그분이 그렇게 선행한 것을 잘 몰랐어요. 하루는 어떤 목회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제가 저 목사님 돌아가실 때 꼭 관을 메고 나갈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농촌 목회를 할 때, 아들이 의과대학을 갔답니다. 그 비싼 의대 학비를 사모님도 모르게 매 학기마다 도와준 분이 바로 그 박 목사님이라고 울면서 저에게 얘기했어요.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며 목회를 했던지, 그 농촌교회의 교인이 100명이나 되었어요. 그리고 교회도 다 지었어요. 그래서 그 분이 은퇴했을 땐 재산 하나 남아 있지 않았어요. 교회에서 퇴직금 1원도 받지 않았어요. 그 사실을 알고, 동사무소의 믿지 않는 직원들이 그분에게 1종 의료보험증을 내어 주었어요. 그것은 정말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그 분이 와서 진료를 받았습니다. 기독교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심장에 약간 이상이 있어서 약을 먹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병원 아래 있는 약국에 갔어요. 제가 그 분을 도와 1종 의료보험증을 내밀었어요. 그 보험증을 제시하면 약을 공짜로 줘야 돼요. 약국에서 1종 의료보험증을 싫어합니다. 왜요? 약을 주고 나서 정부에서 1~2년 후에 약값을 받게 되니까 약국에선 손해거든요. 제가 그 부분은 이해가 갑니다. 그분의 따님이 오셨기에 제가 얘기를 했습니다. 그 따님도 얼마든지 돈을 낼 수 있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자랑스런 1종이니까 쓰라고 얘기했습니다. 약국에 가서, "이 분은 한국 교단에서 보호하시는 은퇴 교역자입니다. 평생을 농촌 교회에서 수고하신 분이니, 어렵겠지만 약을 좀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저는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목사님이 안 나오세요. 나중에 나오시긴 했는데 약을 못타왔어요. 다른 약국에 가 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약국은 집사님이 경영하는 약국이었는데, 그 얘길 듣고 제가 다시 갔습니다. 아가씨에게 물었더니 약이 없답니다. "그래요? 약을 처방해 준 과장이 잘못 처방한 모양입니다. 그
과장님이 우리교회 집사님인데, 전화해서 처방을 바꿔달라고 할 테니까, 어떤 약이 없습니까? 동그라미를 쳐주세요" 이 직원이 저를 힐끗 쳐다보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주인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같은 얘기를 하더니 저에게 "약 배달하는 차가 2시에 오는데 곧 도착할 때가 되었으니 기다리십시오" 하더군요. 그때가 2시 3분이었어요. 과장에게 전화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거예요. 그래서 5분을 기다렸어요. 그 사이에 쏜살같이 약 차가 왔는지 약을 들고 나왔습니다. 운전하고 오면서 너무 슬펐어요. 그분은 제가 영안 교회 목사인 것을 모를 겁니다.
그리스도인, 그것도 신분이 목사고 집사입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제 마음이 아팠어요. 설교 시간에 그분을 비난할 의도가 조금도 없습니다. 그것이 제 모습인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타협하며 희생하며 살아 왔어요. 다 포기하고 살 수밖에 없는 힘든 사회 속에 저와 여러분은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이런 힘든 사회 속에서 제 영혼을 건져 주옵소서! 제가 메시지를 타협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의(義)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타협하지 않고 올바로 정직하게 살도록 제 영혼을 붙들어 주옵소서!"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나를 속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보여 주는 성경의 방법은 하나님을 의뢰하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의뢰하자
3, 4절은 해석하기 쉬운 절이 아닙니다. 3절을 이렇게 해석해 보세요.
너 궤사한 혀여 무엇으로 네게 주며 무엇으로 네게 더할꼬
"무엇으로 네게 주며" 이것은 고대 근동의 사람들이 맹세할 때, 사용했던 구절이었다는 것입니다. 신 앞에 맹세할 때 이렇게 맹세했어요. "우리 중에 이 맹세를 누가 어기면 신이 네게 무엇을 주며 무엇으로 네게 더할꼬. 이러이러한 것으로 더할 것이다"
오늘 시편기자는 이 말을 사용해서 "궤사한 혀여 무엇으로 네게 주며 무엇으로 네게 더할꼬"무엇이 더해질까요? 4절을 보겠습니다. 궤사한 혀를 말하는 자들에게 두 가지가 더해집니다.
장사의 날카로운 살과 로뎀나무 숯불이리로다
장사의 손에서 화살이 쏟아져 들어와 거짓말하고 속이는 자들의 가슴을 언젠가는 파헤칠 것입니다. 그 당시에 가장 단단했던 로뎀나무 숯불로 그의 머리를 지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뢰하라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사기를 칠 때, 내가 맞서 사기 치지 않아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반드시 장사의 화살과 같이, 로뎀나무 숯불과 같이, 그 잘못된 자들의 속임수를 징벌할 날이 올 것이니, 하나님을 의뢰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우리가 이 땅에서 진정한 순례자로 살기 원한다면 한 가지는 각오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는 결코 평안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요? 우리는 이 땅의 정착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요한 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33절)
환난 가운데서도 평안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의 신분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의 이 순례자는 평안을 갈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안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만 발견합니다. 그 속에서도 이 순례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등불로서의 영향력을 잃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께 예배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실망을 하나님께 솔직히 아뢰고, 그의 마음을 잃지 않고, 이미 약속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꿋꿋이 살아가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권리를 위해 스스로 싸우기보다 모든 심판을 하나님 앞에 맡깁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의 자세이면 좋겠습니다.
이 시대는 갈수록 어두워집니다. 누군가는 이 시대를 밝혀 주어야 합니다. 누가 밝히겠습니까? 우리 순례자가, 저와 여러분이 이 시대를 밝혀야 합니다. 이 순례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는 영안 성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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