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2025년 05월 02일 (금요일)      로그인      회원가입
Home     목사를 막아라, 텅빈본당 /목사 연금 1,600억으로 '돈 장사'한 집사 구속/ 캄보디아 박율 목사 체포 충격               최태민 구국선교단 참여 목사들 / 십일조 하지 말라는 목사 /한우갈비’외치는 기감목사들               기독교사회복지엑스포’ 서울광장서 개막 / 여호와의 증인 병역거부 무죄               선교사들 위한 안식관 두 곳/ '노트북이 뭐라고' 소송 총동원한 사랑의교회               언더우드 후손 28명 우리 고향은 South Korea/ 군종장교 범죄               박수홍, 하나님께 대한 최소한 예의/ 죽음의 질(Well dying) 중요               목사님이 운영하는 중고자동차 매매센터               예장통합 ‘제2의 세습방지법안’ 총회 통과/ 예수님처럼 교회도 하늘에서 내려와야               서울대 인권 가이드라인,적극 반대 /목회자의 고백 7가지 실수               총회장 2명을 배출한 여인의 힘! /복음화율 10% 안 되는데 주일학교만 1천 명              

  홈     이삼규     강문호.     고신일     곽선희.     김광일.     김기석.     김명혁     김병삼     김삼환     김상복     김성광.     김성수     김은호     김정호.     김홍도.     류영모.     명설교     박봉수.     오주철.     옥한흠     유기성     이동원     이성희.     이양덕.     이영무     이윤재     이재철.박영선     이정익     조봉희.     조용기.     주준태     지용수     피영민     하용조     한경직.     홍정길.임영수     해외목사님     관     괄사치유     기도문     (1)새벽     새벽.금언     인물설교     상식/주일     장례,추도.심방     가정설교     영문설교     목회자료/이단     교회규약     예화     성구자료     강해설교     절기설교     창립,전도,헌신,세례     어린이.중고등부     << 창세기>>     출     레     민     신     수     삿     룻     삼상     삼하     왕상     왕하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시     잠     전도     아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마태복음>>     막     눅     요한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요한계시록>>     말씀별설교     제목별설교     A)행사,심방     B)행사심방     예수님행적설교     성구단어찾기     이야기성경     설교(틀)구성하기     자주사용하는본문     사건별설교(구약)     사건별설교(신약)  

:: 로그인 ::
 ID   
 PASS   
로그인  회원가입
Home
  설교작성법(여기누르면 다나옴)
  설교잘하는 방법(여기누르면 다나옴)
  동영상.간증자료(여기누르면 다나옴)
  교계 뉴스 ------- (전체보기)
  생활전도(여기누르면 다나옴)
  전도편지
  참고 설교(성구)
  장례식 샘플설교
  오래된 설교(왕)
  카드,핸드폰결제

설교내용검색

네이버.다음.구글


시작페이지 설정


호산나 자동차


교회인쇄주보디자인


밀알.현수막.주보


제주2박3일210.000원


(방송)설교 교회

해외교회사이트

예배와 찬양


목회자 컬럼
  • 교회와신앙칼럼
  • 뉴스미션칼럼
  • 뉴스엔조이칼럼
  • 당당칼럼
  • 남학매일성경
  • 기독공보칼럼
  • 기독목회칼럼
  • 베리타스칼럼
  • 강남신앙간증
  • 아멘넷칼럼
  • 크리스천칼럼
  • 타임즈칼럼
  • 강문호목사
  • 고신일목사
  • 김기석목사
  • 김대동목사
  • 김명혁목사
  • 김성광목사
  • 김승욱목사
  • 김형준목사
  • 김흥규목사
  • 명성훈목사
  • 박광철목사
  • 박건목사
  • 소강석목사
  • 이동원목사
  • 이성희목사
  • 이한규목사
  • 정근두목사
  • 정태기목사
  • 조태환목사
  • 조현삼목사
  • 밤중소리

  • 교단 사이트

    말씀,QT

    사전.지도사이트

    성화,주보그림자료

    성경연구공부자료

    성경신학 자료

    Home

    인생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2001-12-11 22:29:27   read : 964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시편 27:1-14



    1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晏然)하리로다 4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 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7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10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12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13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14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삶을 마비시키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아마도 두려움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영역 가운데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미지의 세계를 만날 때, 낯선 사람들을 만날 때 등 우리는 수많은 환경 속에서 때때로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어린 아이 때는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 당연한 것 같아요. 아이가 태어나서 어느 정도 사물을 파악하게 되면, 처음 보는 사람을 보면 웁니다. 그것을 우리가 "낯가림한다" 혹은 "낯을 가린다"라고 얘기하는데, 왜 어린 아이가 우는가하면 두려워서 우는 거예요. 처음 만난 사람이기 때문에 두려워서 울어 버립니다. 또한 아이를 아주 시끄러운 소리에 노출시키면 두렵고 무서워서 웁니다. 그 반대로 지나치게 고요한 정적 가운데 아이를 버려 두어서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또 울어요. 왜 그럴까요?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두려움이란 것은 본능적인 감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영역이 이렇게 육체적인 영역으로만 제한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고 자라나면서 두려움은 점점 더 세분화되고, 더 많은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해 옵니다. 철이 들고 성인이 되면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생깁니다. 조금만 가슴이 이상해도, 혹시 내 심장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닐까? 소화가 되지 않으면 혹시 위암에 걸린 것은 아닐까? 수많은 질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고, 사람에 대해 두려워하고, 직장을 갖게 되면 이 직장을 잃지는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사업을 하면 부도를 내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혹은, 저 사람이 나를 오해하면 어떻게 할까? 실패하면 어떻게 할까? 우리는 사실 표현하지 않지만 많은 두려운 감정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들이 우리의 생을 붙잡고 마비시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패하는 사람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크나큰 행복이 찾아왔을 때, 사람들은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왜요?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에, 이 행복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할까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평안할 때도 두려워합니다. 왜요? 사고를 만나면 어떻게 할까? 내가 실수를 저지르면 어떻게 할까하는 많은 두려움 속에서 우리는 하루하루의 생(生)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은 사람 가운데 뉘라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누구라서 무서워 해 보지 않았겠습니까? 누구라서 마음 속에 공포심이 없겠습니까? 때로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고 반론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 증거로 사람들이 공포영화를 좋아한다는 거예요. 사실, 오늘날의 세태가 가면 갈수록 이상하게 공포영화를 좋아합니다. 무서워서 비명을 지르면서도 공포 영화를 상영하는 그 영화관은 꽉꽉 메워져요. 옛날에 영화가 없을 때도 그랬어요. 자기 전에 어른들에게 옛날 얘기를 듣는데, 주로 어떤 얘기를 듣습니까? 귀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그 귀신 얘기를 듣고 나면 행복해집디까? 우리가 두려움이 좋아서 그런 얘기를 듣고, 공포영화를 좋아할까요? 아닙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들이 공포영화를 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두려움이 좋아서가 아니라 가상 세계에서 두려움을 먼저 만나고 나면, 현실 세계에서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죠. 저는 귀신 얘기를 듣고 잔 날 밤이면 꼭 머리 푼 여자가 저를 쫓아오더라고요. 그래서 지금도 머리 푼 여자만 보면 섬뜩해 집니다. 두려움을 이기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두려운 공포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공포에 대해서 민감하다는 증거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두려움" 하면 생각나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군대에서 유격훈련을 받는데 마지막날 가장 어려운 코스가 하나 있었습니다. 저 산꼭대기에서 도르래 밧줄을 타고 "유격!" 외치면서 건너편으로 건너가다가 중간에 줄을 딱 놓아야 됩니다. 그러면 강물로 빠지는 거예요. 조교가 그것을 계속 붙들고 있으면 건너편 절벽에 가서 "쾅!" 부딪혀서 죽는다고 겁을 주었습니다. 아직 그렇게 해서 죽은 사람은 못 보았는데 정말 거기까지 가는지 안 가는지 는 모르겠어요. 아마 못 가도록 장치를 해 놓았겠죠. 그러나 그 때는 겁이 많았어요. 제 동료 가운데 굉장히 덩치가 좋은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나는 겁이 나지만 저 친구는 쉽게 건너가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친구가 조교를 딱 붙들더니 "못 간다!"고 버티는 겁니다. 조교가 "앉아! 일어서"'를 시키고 몇 번을 두들겨 패도 악을 쓰며 못 간다는 겁니다. 저는 거짓으로 그렇게 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 큰 친구가 오줌을 싸서 바지가 다 젖어 버렸어요. 겁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어요. 공포증 때문에 "죽어도 못 간다"고 했어요. 조교 서너 명이 아무리 손을 비틀어도 막무가내였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조교들이 밧줄을 잡도록 하고 "이놈의 자식아! 차라리 죽어라!" 고 하면서 발로 "뻥" 차서 보냈어요. "유격!" 하고 건너야 되는데, 이 친구가 건너가면서 "엄마아아~~" 하고 갔어요. 저는 아직도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다음은 제 차례였습니다. 저는 수영을 잘 했기 때문에 좀 나은 편인데도, 그곳에 올라서니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그 친구가 엄마를 부른 게 이해가 가더라고요. 저도 버티고 싶었지만 버텨봐야 저렇게 터지는구나 싶어서 부들부들 떨면서 "유격"이라고 외치며 마지막 코스를 통과했습니다.

    여러분, 누구라서 공포심이 없겠습니까? 누구라서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공포심 뿐 아니라, 우리 성인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마음속 깊이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마음을 한 번 쭉 훑어보았습니다. 목사인 저에게도 생각 밖으로 많은 두려움이 있더라고요. 우리 교회가 이렇게 부흥하는데 내가 이 교회를 잘 이끌 수 있을까? 계속해서 우리 교회가 부흥할까? 내가 잘못 이끌면 어떻게 할까? 이런 두려움이 제게 있더라고요. 어떤 교인과의 관계에서, 내가 좀 더 전화하고 심방해야 되는데, 그 교인이 나를 오해하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도 제 마음에 있더라고요. 그 외에도 많은 두려움이 제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그 두려움이 제 삶을 압박하고 마비시키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아니, 이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일 거예요.

    우리가 밝히기를 꺼려해서 그렇지 우리 모두에게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수많은 종류의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얽어매고 있습니다. 만일 두려움이, 당신의 삶에 진정한 문제라고 한다면, 오늘 여러분이 읽은 이 본문은 당신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이 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시편 27편은 무서운 두려움의 고통 속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영감으로 쓰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은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는 구체적인 말씀을 저와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몇 가지를 관찰해 보겠습니다.

    대부분의 시편이 그렇지만 시편 27편에 있어서도 1절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1절은 두 개의 문장으로 끝나는데, 독특하게 한 문장, 한 문장마다 마지막에 질문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어떻게 끝납니까? 내가 누구를 뭐 하리요? "두려워하리요" 두 번째 문장은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로 끝납니다. 형식이 의문문이지 내용은 전혀 질문이 아니에요. 내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나는 절대 어떤 사건도, 어떤 사람도, 내 생애에 있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시편 기자는 얘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이 말씀을 잘 보면서 시편을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이 시편 27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몇 절과 몇 절이 나누어지나요? 스스로 관찰해 보세요. 1절에서 6절과 7절부터 14절까지 큰 계곡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시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한꺼번에 전할 것입니다.

    1절에서 6절을 보면, 찬양과 확신과 승리와 노래로 가득 차 있어요.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승리한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7절부터 14절은 요구사항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이러한 것을 들어주시오" 라고 마치 누구에게 청구서를 보내는 것과 같아요. 예를 들어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요구합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 명령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음성과 기도를 들으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응답하소서!" 9절,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십시오!" 11절, "여호와여! 나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십시오!"하나님께 올리는 요구사항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27편은 쉽게 단락이 나누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뚜렷한 것 외에 한 가지를 첨가해서 세 개의 단락으로 이 시편을 나누겠습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찬양의 선포입니다. 7절부터 13절까지는 필요의 간구입니다. 마지막 14절은 기다림의 권면입니다. 성경책에 적어도 됩니다. 무디가 말씀하시기를 "더러운 성경은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깨끗한 성경은 우리의 영혼을 더럽게 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책에 기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움이 엄습할 때 당신은 무엇을 하십니까?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을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오늘 이 다윗의 경험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상상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추측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그의 생애 가운데 체험에서 우러난 겁니다. 우리는, 다윗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왜냐 하면 그는 모두가 무서워하는 골리앗을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그 용감한 다윗도 두려움을 느꼈다고 오늘 시편에서 고백합니다.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 자녀들이 그를 왕위에서 쫓아내고 죽이려고 추격할 때, 그는 동굴 속에서 한없이 울었으며, 무서움에 떨었다고 간증합니다. 오늘 이 시편은 하나의 소설이 아니고, 상상에서 나온 시(詩)가 아니라, 그의 삶 속에서 쏟아져 나온 간증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 다윗의 간증을 통해 세 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아주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여러분, 두려움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십니까? 남은 생애에 있을 실패에 대한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 자녀가 비뚤어질까 근심하는 두려움 등 이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살기를 원하시면 오늘 이 하나님의 지침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두려움에서 해방되기 원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첫 번째 하나님의 부탁의 말씀은, 주님을 개인적으로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1. 주님을 개인적으로 찬양하라

    1절을 보세요. 1절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인데 몇 가지 단어가 눈에 뜁니다. 그것은 그는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겠다"고 하며,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간증합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그에게는 빛이 있고, 구원이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이에요. 어두운데 가서도 무서워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 하면, 그에게는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들어도 그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요. 그에게는 구원이 있기 때문이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공격해도 그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요. 그에게는 생명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말씀은 이 빛과 구원과 능력이 누구로 말미암아 옵니까? 여호와라고 얘기합니다.

    즉, 이 시편 기자에게는 하나님이 하신 사역보다 하나님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얘기합니다. 히브리어에 보면 이 말씀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배열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일을 그에게 해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손을 뻗어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자신에게 빛과 구원과 능력이시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아무 것도 해 주시지 않아도,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하나님 그 분 자체가 다윗에게 빛과 구원과 능력이기 때문에, 그는 조금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개인적인 분이셨고 항상 그와 함께 하시는 친구요, 그를 돕는 자이셨습니다. 그의 하나님은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신학적인 하나님도 아니었습니다. 저 멀리 계시는 하나님도 아니었고, 예배당에서만 만날 수 있는 형식적인 하나님이 아니셨던 겁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너무나도 개인적인 분이셨어요. 눈을 뜨자마자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었고,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고, 물을 건널 때 그의 손을 붙잡으시며, 괴로울 때에 친절히 다가오셔서 말씀하시는 동료였기에,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의 친밀성 때문에 그는 누구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이 시편에서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 23편 1절을 기억하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6편에서 "나는 요동치 아니하리라" 오늘 27편에서 "나는 누구도 무서워하지 아니하리라"라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빛이시고, 구원이시고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에 나는 부족함이 없고, 하나님 때문에 나는 요동치 아니하고, 하나님 때문에 나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그는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가요? 당신의 직장 때문입니까? 당신의 예금 통장 때문입니까? 당신의 능력 때문입니까? 당신의 사업 때문인가요? 당신의 그 든든한 자녀 때문에 두렵지 않은가요? 오늘 여러분 마음을 한 번 Searching 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얼마나 가까우십니까? 만일 그 분이 당신과 멀리 떨어져 계시다면, 그 분과의 관계가 서먹서먹하고 어색하다고 한다면,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남은 생을 비참하게 살 것입니다. 겉으로는 태연해도 마음속 깊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채로 이 땅을 살아갈 것입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믿지 않는 자와 아무런 차이 없이 두려워하며 패배하는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2절, 3절 말씀을 좀더 들여다보겠습니다. 여기에서 구체적인 두려움의 환경들이 등장합니다. 잘 관찰해 보십시오. 어떤 단어가 두려움의 단어들입니까? 대적, 원수, 행악자, 군대, 전쟁 등 이 모든 것은 다윗이 겪었던 일이에요. 다윗에게는 원수가 있었다고 간증합니다. 대적이 있었습니다. 행악자가 있었어요. 자기가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 무고히 자기를 해치려고 하는 행악자들이 주위에 수없이 많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뿐이 아닙니다. 몇몇 개인이 다윗을 공격한 게 아니라 군대가 진을 쳤어요. 영화에서 군대가 진치는 것 보면 멋있어 보이죠. 그러나 그 수만 명의 사람들이 당신을 공격하기 위해 진을 쳤다고 상상해 보세요. 진만 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돌격 앞으로!" 당신을 공격하기 위해서! 다윗의 삶은 이러한 삶이었습니다. 현실적인 두려움이었어요. 사탄은 지금도 우리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수많은 행악자들, 수많은 여러분의 원수들이 여러분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두려운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말씀 2절, 3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관찰하고 지나가야 합니다. 하나는 이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가 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단어가 이것을 말해 주는데, 2절을 보면, 그들이 일어나서 내 살을 먹으려고 한다는 거예요. 다윗의 대적들이 식인종이 아니라는 것은 아시죠?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얼마나 그들이 거세었으면, 다윗이 얼마나 공포 가운데 떨었으면, 마치 식인종 또는 사자 앞에 선 자기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을까요? 히브리어에 보면 그들이 이빨을 들이대고 내 살을 막 먹으려고 한다는 거예요. 얼마나 무섭겠어요?

    사자에게 물려보신 분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사자는 고사하고 개한테라도 한 번 물려보십시오. 지금도 제 종아리에는 흉터가 있습니다. 제가 개를 신나게 놀렸거든요. 작대기로 머리를 톡톡 치며 놀렸는데, 그 때 개 끈이 풀어졌어요. 세 명이 합심해서 놀리다가 도망을 갔는데, 이 개가 다른 친구를 한참 따라가다가 얼굴을 보니까 옆집에 사는 아이거든요. 그러니까 안 물고 방향을 돌려서 저를 따라오더니 저를 물고 늘어졌어요. 저는 한 다섯 집 건너 살았거든요. 어릴 때니까 제 종아리가 개입에 들어갔어요. 그 뒤의 일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어코 보신탕을 배웠습니다.

    그 다음엔 군대가 진을 치고 전쟁이 막 일어났다고 얘기합니다. 이것은 결코 작은 환란이 아니었어요. 다윗은 심한 공포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관찰할 것이 있어요. 3절에 보세요. "내가 오히려 안연(晏然) 하리로다" 이 말씀을 영어 성경에는 제대로 번역을 했는데, in spite of라고 되어 있어요. 적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하고, 군대가 일어나고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히려 안연 하리로다" '안연 하다'라는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단어가 아니에요. 용기를 냈다, 스스로 용감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간이 큰 사람이 있어요. 간이 배 밖에 나온 사람도 있죠. 아무리 높은데 올라가도 겁을 내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3층 높이만 가도 다리를 후들후들 떠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다윗이 왜 안연 했는가? 왜 두려워하지 않았는가? 그가 스스로 용감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태생이 용감한 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안연 하다"라는 단어는 직역하면 "의지하다" "누군가로 인하여 확신을 가지다"라는 뜻입니다. 아람어에 보면 이와 비슷한 단어를 제대로 번역해 주고 있는데, "누구누구의 얼굴을 바라보며 안심하다"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이 "안연 하다"의 뜻입니다. 어머니 품에 안긴 갓난아이를 관찰해 보신 적이 있나요? 어머니 품에 안겨 있기만 하면 바깥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세상에 아무리 근심이 많아도,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져 내리건, 누가 병들었든 상관없이, 어머니를 바라보는 그 순간 아이는 평화롭고, 미소지으며 밝게 웃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안연함입니다.
    적들이 내 살을 뜯어먹으려 하는 그 두려움 속에서도, 군대가 일어나고 전쟁이 터진 그 가운데서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 다윗은 간증합니다. "내가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주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I'm Confident! 나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요동치 아니하였다고 얘기합니다.

    저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 있었던 일입니다. 날마다 저녁에 어머니를 따라 예배당에 갔는데, 그 날은 제가 홍역에 걸려서 막 나으려 할 때쯤이지만 열이 좀 남아 있었기 때문에 혼자 집에 있으라고 했습니다. 저 혼자 집을 보는데,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 소리가 자꾸 상상이 되면서 공포감이 얼마나 엄습해 오는지 견딜 수가 없었어요. 이불을 뒤집어써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 순간, 손을 꼭 모으고 어머니가 옆에 계신 것을 상상했어요. 내 손을 꼭 잡고 여기에 엄마가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가슴에 그 손을 딱 얹었더니, 놀랍게도 공포감이 싹 사라졌어요.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었어요.

    중국의 유명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이런 얘기를 남겼습니다. "삶의 문제는 환경이 얼마나 어려운가가 아니다. 삶의 진정한 문제는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이다. 당신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 그것이 진정한, 중요한 삶의 문제이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당신이 당한 환경이 얼마나 무서운가? 당신의 원수가 얼마나 흉악한가? 당신이 빠진 곤경이 얼마나 깊은가? 당신이 걸린 질병이 얼마나 독한가에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삶의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당한 환경의 심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여러분과의 관계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가까우십니까? 여러분이 두려워할 때, 질병이 여러분을 공격하고, 경제적인 위기가 여러분을 엄습해 올 때, 여러분은 누구를 향하고 계십니까? 누구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오늘 2, 3절에서 그는 과거의 간증을 얘기하며, 4, 6절에서 그의 다짐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4절을 보세요. 4절에서 6절까지도 반복되는 단어가 몇 가지 있어요. 비슷한 단어를 반복해 놓았는데 첫 번째는 "여호와의 집"입니다. "그의 전" "그의 초막" "그의 장막"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詩)적으로 표현한 거예요. 자신은 과거에도 하나님과 가깝고 친밀해서 그 흉악한 사람들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왔지만, 앞으로도 자신은 여호와의 집에서, 여호와의 전에서, 여호와의 초막과, 여호와의 장막에서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지겠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가 하나님과 깊은 개인적인 관계를 가질 때,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5절에 보세요. 하나님께서 그를 비밀히 지키실 것입니다. 그를 숨기시고, 그를 바위 위에 높이 둡니다. 그 결과 그는 6절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릴 것입니다.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6절에서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뭡니까? "나를" "나를" "내 머리가" "내가" 1인칭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었다는 거예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라" 개인적인 찬송을 얘기한 겁니다. "내가 여호와를 노래하리라"고 개인적인 노래를 얘기한 겁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노래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이 홀로 조용히 개인적인 하나님을 찬양해 본적이 언제이십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비극이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예배당 안에서만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수요예배 때 찬양하고, 구역예배 때 찬양하고, 모여서 찬양하는 사람은 있지만, 개인적으로, 홀로 조용한 시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교회 안에 적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해 보신 적이 있었나요?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놀라워서, 저 석양을 바라보며 인생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쏟아 부은 은혜가 너무나도 고맙고 놀라워서, 자동차를 세워 놓고 눈물을 흘리며 찬양해 보신 적이 있었던가요? 잠자리에 들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가 물밀 듯이 쏟아져서, 골방에 홀로 가서 목소리를 죽여가며 하나님을 찬양해 보신 적이 있었습니까? 오늘, 이러한 자에게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군대가 일어나고 전쟁이 발발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다가와도,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개인적으로 주님의 은혜를 묵상하는 자에게는 안연함이 찾아옵니다. 평화가 찾아옵니다.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마음이 찾아올 것이라고, 다윗은 자신의 간증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려움을 극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을 개인적으로 찬양하십시오. 개인적으로! 오늘 이 예배시간에 드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누군가와 함께 하는 찬양이 아닙니다. 저 산 속에 가서, 저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주님을 마음껏 찬양해 보십시오. 그 주님이 내 옆에서 내 손을 잡으십니다. 주님이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주님이 내 상처 난 마음을 싸매십니다. 주님이 나를 상담해 주십니다. 내가 실패할까 두려워할 때, 주님이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십니다. "정근아! 일어나라!"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라. 일어나 너 걸어라. 내가 도우리." 여러분, 이 음성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죽으면 다 천국에 갈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남아 있는 이 짧은 인생동안,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서 천국을 이루며 살 것인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이 슬퍼하고, 똑같이 낙담하고, 똑같이 좌절한다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다르게 살 수 있는가? 두려움을 극복하며 살기 원하시면 주님을 개인적으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방법을 다윗은 이렇게 소개해 줍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기 원하면, 주님께 당신의 필요를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2. 주님께 당신의 필요를 아뢰라

    7절부터 13절까지 관찰해 보겠습니다. 여기에도 반복되는 단어가 등장해요. 7절에, "들으시고 응답하소서" 하나님께 마치 명령하는 것 같아요. 9절에, "주의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11절에, "나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소서" 12절, "내 생명을 대적의 손에 맡기지 마소서"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하나님께 얼마나 담대한지 몰라요.
    다윗이 이런 기도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기도했다고 생각합니까? 하품하면서 "주여~ 들으소서~" "내 생명을 버리지 마이소~" 딴 곳을 쳐다보며 기도했을까요? 그런 연상이 되십니까? 아니요. 그는 담대하게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얘기하는 것 같아요. "주님! 내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내 기도에 응답하소서!" "주님,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 생명을 대적의 손에 맡기지 마십시오!"
    그의 마음속에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적극적인 자세로 주님께 나아간 거예요. 오늘 이 시편 기자는 아주 강한 요청으로 주님께 자신의 필요를 아뢰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의 자세인줄 믿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두렵게 하는가요? 질병입니까? 사업입니까? 인간관계입니까? 실패입니까? 그 필요를 주님께 담대하게 구체적으로 아뢰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기도는 담대히 해야 합니다. 어떤 자는 담대히 하고 어떤 자는 담대하지 못합니다. 담대히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을 관찰해보고 물어보면 지난 한 주간 동안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 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들어 주시겠어요?"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지난 한 주간 하나님 앞에 좀 제대로 살았어요. 헌금을 많이 했어요. 그런 자는 담대하게 기도합니다.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잘못된 태도입니다. 여러분의 행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율법주의자입니다. 복음을 모르는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습니다. 한 주간, 한 달 전의 삶과 상관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셔서 당신을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 때문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할 때 담대히 하십시오.

    다윗은 간음하고 살인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 하나님께 명령하듯이 담대히 기도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했고, 간절한 마음과 적극적인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구 했습니다. 오늘 특별히 우리가 주목해야할 한 구절이 있습니다. 10절입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이 구절을 두고 신학자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합니다.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한 부류는 다윗이 언젠가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명확한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아요. 또 한 부류는 다윗이 자신의 경험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험을 자기의 것으로 묘사하였다고 합니다.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합니다. 또한 어느 것으로 해석하든지 중요하지 않아요. 포인트는 같아요. 우리 모두는 부모조차도 나를 버릴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부모에게 버림받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부모에게 상처받은 적은 없습니까? 예! 이것이 우리의 약함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갓난아기와 부모의 사이, 어릴 때는 상처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라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줍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상처받고, 부모는 자식에게 상처받습니다. 제가 상담해보면 과거에 부모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해 고민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간증합니다. 누구의 경험이 어떻든 상관없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나에게 상처를 입혔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 가운데 이 말씀을 읽어 보셨는지요? 이사야 49장 15절과 16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여러분, 아이들에게 아주 귀한 것을 줘보세요. 아이들은 자기가 아끼는 귀한 것은 어떻게 합니까? 사탕이든, 장난감이든 잘 때 어디에 쥐고 잡니까? 손에 꼭 쥐고 잡니다. 귀한 것은 항상 손에 들고 다녀요. 주머니에 넣어도 믿음이 안 가는가 봐요.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In the hollow of my hand. hollow는 손의 우묵한 곳, 손금을 말합니다. 손금과 같이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아예 손에 들고 다니는 것도 불안해서 손바닥에 새겨 버렸어요. 더 이상 어떤 표현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확신을 가지고,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롬 8:35). 하늘에 있는 천사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확신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운 감정이 들 때마다, 어려운 환경이 여러분을 엄습할 때마다,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것들을 아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감정과 마음과 환경을 아뢸 때, 하나님이 대답해 주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다윗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14절에서 알려줍니다. "주님을 기다리라"


    3. 주님을 기다리라

    14절.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고 했는데, 누구에게 하는 명령입니까? 다윗 자신에게 한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명령했어요. 왜요? 삶의 고통으로 너무나 힘들었거든요. 자신이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고백했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간구 하겠다고 간증했지만, 그에게 다가오는 문제는 여전히 두려움이었어요. 왜 그랬어요?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즉시 응답치 않는 거예요. 이것이 삶의 현장 아닙니까? 기도했다고 고통이 즉시 물러가던가요? 내가 하나님 앞에 아뢰었다고 나의 적들이 즉시 물러갑디까? 내 질병이 금방 낫습디까? 그렇게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영혼에게 이렇게 스스로 명령합니다. "내 영혼아 하나님을 바랄지어다!" 이 말씀을 NIB 성경에는 "Wait!"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번역해 주고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란다" "기다린다"라는 뜻은 히브리어로 "카와"라는 단어입니다. 제가 이 단어 연구를 해 보고 아주 놀랐어요. "줄을 꼰다"라는 뜻입니다. 명사형으로 되면 큰 밧줄을 상징하는 거예요. 밧줄은 어떻게 만듭니까? 실을 두 가닥을 꼽니다. 다 꼬아지면 다시 두 가닥 두 가닥씩 꼬인 것을 또 꼬아요. 꼬인 것을 또 꼬아요. 계속 꼽니다. 그래서 큰 밧줄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을 바란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기도했는데도 불구하고 내 고통이 즉시 물러가지 않아요. 두려움이 내 마음속에 여전히 있어요. 내 약함이 내 마음에 남아 있어요. 그럴 때 그 약함을 하나님의 마음과 꼬아라는 겁니다. 그리고 기다리라는 거예요. 두려울 때 "하나님, 당신의 마음을 내게 주시옵소서! 당신의 성령을 내게 부어 주옵소서!" 그리고 하나님과 연합하여 내 인격과 내 생각과 내 의지를 하나님의 것과 꼽니다. 그럴 때 무엇이 생깁니까? 튼튼한 밧줄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깨달은 이사야는, 이사야 40장 31절에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려움 속에 거하십니까? 하나님을 바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그저 멍하니 기다리지 마시고, 원망하며 기다리지 마시고, 짜증내며 기다리지 마시고, 두려워하며 기다리지 마시고, 하나님 안에서 안연히 거하여 초조한 기다림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격과 내 약점을 같이 섞어, 하나님 마음을 내 마음속에 품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 구체적인 방법을 우리의 생활에 적용한다면, 우리의 남은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폭풍이 불든, 사업이 흔들리든, 내 건강이 약간 위험해지든, 내 자녀가 곁길로 나가든, 어떤 일이 내게 일어나도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이 모든 두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내가 안연히 거하리로다! 이것이 여러분의 간증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독자 설교

    설교작성하기 (3년 후에는 자동삭제됩니다.)
    이 름 E-mail
    제 목



    프린트하기 기사메일보내기 독자설교


    이전으로
    아름다운 변화를 위하여
    신앙의 모델하우스
    편견을 극복하기 위하여
    축복의 전령
    참 구원에 따르는 변화의 모습
    거룩한 추적
    생명의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천국에서 환영받는 사람
    죄를 품은 거룩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사는 법
    문제의 언덕을 넘어
    마음의 종양-쓴뿌리
    짐짓 죄를 짓는 병
    미성숙의 병
    마음을 강퍅케 하는 병
     | Home | 사이트맵 | 설교검색 | 설교전체보기 | 설교쓰기 |개인정보취급방침 | ___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   Contact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