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한 신앙생활 2001-12-11 22:28:27 read : 1096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데살로니가전서 5:16-28
16항상 기뻐하라 17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9성령을 소멸치 말며 20예언을 멸시치 말고 21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靈)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25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26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27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28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이따금씩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으면서도 오랜 세월 후에 신앙생활에서 패배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곤 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5년, 10년이 지나서 그들은 무력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세월이 흘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느 순간 권태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내가 도대체 지금까지 해 온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낙담하고 좌절합니다. 마음에 전혀 생명력이 없는 것처럼 느끼기 시작합니다. 왜 그럴까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그럴까요?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살아있다면 마땅히 자라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 계속 자라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점점 뜨거워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권태감과 무력감에 빠져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커다란 이유를 든다면, 아마도 그들의 신앙의 본질과 핵심에 문제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들은 분명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잘못된 방향을 잡아서 본질을 비껴나간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들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핵심을 놓쳐버린 거예요.
여러분, 신앙생활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시는 그 신앙생활의 본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로, 아니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한 단어로 신앙생활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생활을 오래하고, 열심히 교회 다녀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립되어 있지 않고, 그분과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무르익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아무 것도 아니고, 어느 날인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우리는 허무감과 권태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에 교회생활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교회생활의 핵심이 지도자와 성도간의 관계에 놓여있다고 한다면, 신앙생활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놀라운 신앙생활의 핵심이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유지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명확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세 가지를 여러분 마음속에 입력시킨 후에 오늘 말씀을 따라오시면, 오늘 본문이 환하게 해석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비결 세 가지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환경 속에서 올바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환경 속에서 올바로 반응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인도 가운데 하나님께 올바로 반응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자원 속에서 하나님께 올바로 반응해야 합니다. 말은 길지만 아주 쉽습니다. 환경과 인도와 자원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이 세 가지 가운데 우리가 올바로 반응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올바로 될 것이고, 우리의 신앙생활은 일취월장 자라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 하나님이 주시는 환경 가운데 올바로 반응하라
먼저 오늘 본문은 첫 번째 것을 강조합니다. 16절에서 18절까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환경에 대해서 우리는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만 바람직한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환경을 초월할 수 없는 제한적인 존재입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우리는 다양한 환경을 만나게 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다양한 삶의 여건들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우리의 삶은 일정하지가 않습니다. 때로 순탄하고 때로 어렵습니다. 고요한 때가 있는가 하면 풍랑의 때가 있고, 따뜻한 봄날이 있는가 하면 혹독한 겨울 같은 시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누구라서 항상 잔잔한 호수 같은 곳을 항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누구나 다 겉으로 보기에는 잔잔한 것 같아도 마음속으론 풍랑의 순간이 있기 마련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삶의 카테고리, 환경 속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까?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친히 허락하신 다양한 삶의 환경, 기쁨의 순간과 괴로움의 순간, 건강할 때와 아플 때, 성공과 실패의 순간 등등 이 모든 환경 속에서 세 가지 태도를 가질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7,18절의 가장 짧은 절로 설명되어 있어요.
1) 항상 기뻐하라.
첫 번째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항상 기뻐하라는 겁니다. 이 말씀을 지키기 어려운 이유는 앞에 있는 수식어 때문이에요. 누구든지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기뻐하기는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항상 기뻐하라니요? 이 말씀이 언제나 싱글벙글 웃으란 말입니까? 늘 감정적으로 흥분 상태에 있어서 슬픈 일 당할 때도 히죽히죽 웃으란 말입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에서 웃습니다. "왜 웃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이 이 자리에 계시다면 제가 특별히 보내 드릴 곳이 있습니다. 예배 후에 조용히 저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런 분은 정신과 의사를 반드시 만나셔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비정상적인 삶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항상 기뻐하라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알기 쉽게 얘기하면, 항상 마음을 즐겁게 하라는 말씀이에요. 더 직역하면, 이 세상의 어떤 환경이 우리의 마음을 끌어내리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수많은 사건이 생깁니다. 그러나 어떠한 사건과 환경도 우리의 마음을 끌어내리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것 같아요. 때로 상담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론 굉장히 편안해 보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 몇 시간 대화하고 나면, 몇 년간 사귀고 보면, 그는 아무도 모르는 아픔을 가지고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릴 때 받은 마음의 상처를 해결하지 못해서, 어릴 때 부모로부터 받은 마음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해서 홀로 울고 있는 이들! 수많은 이유 때문에 아파하는 이들을 저는 종종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생입니다. 누구라서 고통이 없겠습니까? 누구라서 괴로움이 없고, 누구라서 눈물이 없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러한 괴로움과 고통과 한숨과 눈물을 가지고 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구원받은 우리이지만요.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너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러한 환경과 사건과 괴로운 기억들이 너희의 마음을 끌어내리지 못하게 하라! 여러분, 이것이 오늘 이 아침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요구요, 기대입니다.
괴로운 일들이 일어나도 우리는 왜 항상 기뻐해야 합니까? 왜 우리의 마음을 낙담시키지 말아야 합니까? 일반적으로 괴로움이 올 때, 보통 사람들이 나타내는 반응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한 가지는 낙심이요, 또 하나는 원망이에요. 다른 많은 반응을 나타내지만 결국 이 두 가지로 귀착됩니다. 여러분도 가만히 살펴보세요. 어려운 일을 당하면 누군가를 원망합니다. 부모를 원망하고 아내와 남편을 원망하거나, 사장과 고용주를 원망하거나, 밑에 있는 사람을 원망하거나, 누군가를 원망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 제가 무슨 일을 했다고 이런 고난을 저에게 주시나요?" 하면서 낙담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올 때, 여러분의 마음을 잃지 말고 오늘 주의 명령에 순종해서 항상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놀라운 말씀이에요. 어떤 시험이요? 여러 가지 시험이요. 구체적으로 말씀해 볼까요? 건강의 시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녀의 시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 사업, 관계에 시험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 이미 제가 야고보서 강의할 때 이 본문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만, 헬라어에는 네 가지 if, 조건절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내일 아침에 비가 온다면"이라고 했을 때, 비가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지요. 그러나 "내일 아침에 해가 뜬다면", 이 말은 반드시 해가 뜬다는 말이죠. 이 조건절은 언제 쓰느냐 하면, 내일 해가 뜨거든 9시에 만나자 라고 할 때 씁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시험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시험은 반드시 찾아온다는 겁니다. 우리의 철야 기도와 상관없이, 우리의 깨끗한 삶과 상관없이, 우리가 착한 일을 아무리 많이 했던 것과는 상관없이, 기도하는 것에 상관없이, 날마다 해가 뜨는 것처럼 시험은 우리에게 반드시 찾아 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시험은 반드시 찾아올 것인데, 너희에게 고난과 어려움과 시험이 찾아오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요. 1장 3절에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여러분, 구원받은 우리에게 왜 때로 풍랑과 어려움을 주십니까? 하나님은 목적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인격을 온전하게 성장시키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항상 기뻐하십시오.
2) 쉬지 말고 기도하라
두 번째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환경 가운데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기도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운 이유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이에요. 가끔씩 한 번 기도하는 것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뜻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잘 때도 기도하고, 24시간 내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까? 어떤 분은 운전하면서 기도하고 가다가 전봇대를 받아서 300만원을 날렸다고 합니다. 과연 그런 말씀입니까? 그건 잘못된 해석이에요.
여기서, '쉬지 말고'라는 단어는 의학적인 용어예요. hanging cough! 이 말은 기침이 목에 딱 걸려있는 거예요. 목에 걸린 기침 있지요? 그래서 기침을 참는데 코로 조금만 숨을 쉬어도 기침이 막 나올 것 같아요. 이런 태도로 기도하라는 말씀이에요. 기쁜 일이 와도 기도합니다. 괴로운 일이 와도 기도합니다. 누가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만 봐도 기도합니다. 항상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언제나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대화하며, 주님 앞에 내 모든 것을 아뢸 준비와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지 안 하는지 알고 싶으시면 다음 테스트에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어려운 일이 올 때, 고민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 중에 어느 쪽에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올 때 고민합니다. 믿는 사람도 잠시 동안은 고민할 수 있어요. 그러나 문제는 어느 쪽에 더 많은 시간을 바치는가 하는 겁니다.
어려운 일이 닥쳐왔습니다. 예를 들어, 건강을 잃어 버렸어요. 의사가 암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불을 싸안고 식음을 전폐하고 불평과 원망을 하며 고민에 싸여 여러분의 삶을 허비하십니까? 아니면, 잠시 고민이 찾아오더라도 기도에 여러분의 시간을 더 많이 바칩니까? 여러분이 만일 고민에 더 많은 시간을 바친다면, 여러분은 교회에 와 앉아 있지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은 실제적인 거예요. 허공을 잡는 게 아니에요. 10년, 20년 믿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당신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십니다. 그 이유를 고린도후서 1장 8,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십니까? 그 어려운 순간을 통해서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평상시에 기도를 잘 할 것 같죠?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목사인 저도 그렇더라고요. 평상시에 기도합니다. 기쁨으로 기도하지만, 정말 간절한 기도, 마음이 끓는 기도는 언제 하는가? 어려움이 올 때입니다. 어려움이 올 때, 그 당시에는 싫지만 가만히 지나고 보면 그 어려움이 얼마나 큰 유익인지 몰라요. 정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찾아오면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돼요. 하나님만 의지하게 돼요. 왜냐하면 내 힘으로 안 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가운데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바라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찬양 같습니다. 문제는 이 찬송가의 작시자가 장님인 사실을 아십니까? 그는 생후 1년이 되지 않아서 시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가 이렇게 간증합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 사람이 바로 패니.J. 크로스비였습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삶의 태도입니다.
세상의 일 때문에 기도하기를 중단하지 않는 겁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는 겁니다. 어떤 풍랑과 고난이 찾아와도 구속한 주만 바라보는 것! 이러한 기도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경 가운데서 우리는 올바로 반응해야 바람직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항상 기뻐해야 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되고, 마지막 세 번째 5장 18절,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무슨 일을 만나던지 늘 감사함을 잃지 말라는 거예요. 이 말씀의 어려움도 앞의 수식어에 있어요. 한두 번 감사하는 게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에요.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을까요? 기쁜 일에 감사하기는 쉬워도 고난가운데에서도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단 한 가지 때문에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주의 선하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고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을 우리가 마음속에 의심치 않고 믿는다면, 고난의 순간에도 감사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8절에서 이렇게 간증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그렇습니다. 고난의 일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때로 질병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건강할 때 감사할 수 있지만, 병들 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선조 가운데 질병 가운데서 감사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파스칼은 어느 날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이 질병을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이 질병을 통해 제게 주실 축복을 제가 다 받기 전에는 제게서 이 병을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
하나님이 병을 주셨을 때는 반드시 어떤 축복을 주시기 위함인 것을 파스칼은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 병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실 축복을 자신이 다 받기 전에는 오히려 병을 머물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당신에게 이러한 신앙이 있으신가요?
당신은 범사에, 모든 일에, 어릴 적 받았던 상처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과, 억울하게 피해를 본 그 모든 상황 속에서, 당신은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신의 마음속에는 감사가 넘치나요? 아니면, 누구를 향한 원망과 짜증과 낙심 속에서 지내시는가요? 이것이 당신 신앙의 바로미터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환경 속에서 우리는 올바로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명령하셨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어떤 환경을 하나님이 주시든지, 이 세 가지를 잃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하나님이 주시는 인도 가운데 올바로 반응하라
우리가 바람직한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환경 속에서 올바로 반응해야 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인도 가운데 올바로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나서 "너희 마음대로 한 번 살아 봐라"하고 내버려두는 분입니까?
구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켰습니다. 애굽의 장자를 다 죽이신 후에 홍해를 가르시고 그들을 인도해 내셨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가 홍해 갈라서 여기까지 구원하느라고 고생했다. 이제부터 혼자 좀 서 보거라" 하시면서 "bye bye!" 하고 떠나셨습니까? 아니에요. 낮에는 구름기둥, 추운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줄 믿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어떻게 하십니까? "이제 너희 혼자 살아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아니요! 주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할 것이라(요 14:18)"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무엇을 통해 인도하십니까? 특별히 두 가지를 우리에게 지적해 주십니다. 하나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 두 가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마음을 열라고 말씀합니다.
1) 성령을 소멸치 말라
5장 19절을 보십시오.
성령을 소멸치 말며
이 단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 오해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하니까, 성령은 내 안에 오셨다가 내가 죄를 지으면 없어질 수도 있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어떤 분은 구원받았는데 성령 받았냐고 물으면, 못 받았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받았다고 하는데, 언제 받았냐고 하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제가 중학교 때 구원은 받았는데 미지근하게 신앙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원에 가서 부흥회에 참석하는 가운데, 강사가 내 머리에 안수를 하자마자 등에 식은땀이 쫙 흐르면서 가슴에 불이 흐르며, 상수도 하수도가 다 터져 버렸습니다. 눈물 콧물 다 흘렸어요. 제가 그때 성경책을 다 적셨습니다" 이렇게 30분, 한 시간동안 간증해요. 저는 그럴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져 옵니다. 답답해서 제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상수도 하수도가 다 터지려고 해요.
여러분, 성령은 그렇게 받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구원받을 때 성령을 함께 받는 줄 믿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와 계세요. 그러면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 문장은 좋은 번역은 아니에요. 이 단어의 뜻은 영어로 말하면 quench입니다. 이 말은 장작불이 활활 타고 있는데, 물 한바가지를 그 위에 뿌려버립니다. 그러면 불이 꺼집니까? 꺼지지 않아요. 다만 불길이 확 사그라집니다. 이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소멸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어떤 일을 하십니까? 여러분의 체험으로 볼 때, 크게 두 가지 일을 합니다. 한 가지는 나쁜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세요. 하나님과 여러분이 가장 가까이 있을 때, 성령 하나님이 얼마나 세밀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지 몰라요. "얘야! 이제 더 이상 그 나쁜 습관을 지속하지 마라" "너 그 사람과 화해해라. 네가 먼저 전화 해" "네 눈에 어려운 성도가 보이지 않니? 오늘 너의 돈을 찾아서 도와 줘!" 성령님은 여러 가지 부분에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 말씀을 한 번 거절하고, 두 번 거절하고, 세 번, 네 번 거절해 보세요.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날 그 말씀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아요. 잘 관찰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면 그 말씀이 뚜렷하게, 크게 들려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계속해서 여러분이 거절하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는 하지만, 성령님의 역사가 작아져요. 성령님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아요. 그 다음, 안 믿는 사람같이 죄를 지어도 가책을 별로 느끼지 않아요. 계속 그렇게 살다 보면 버림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말씀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나를 인도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내 생각을 인도하시고, 내 의지를 인도하시고, 내 환경 속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을 친히 하나하나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 성령님의 인도함에 민감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센스티브(sensitive)해 지셔야 돼요. 성령 하나님께 우리가 민감해지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예언을 통해 인도하신다고 얘기합니다.
2)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20절을 보세요.
예언을 멸시치 말고
"그래, 예언을 멸시하면 안되지! 어느 기도원 원장님을 만났더니, 내년 봄에 결혼하겠다 그랬어. 지금은 신랑감이 없어도 한 달 남았는데 멸시하지 말아야지!"
여러분, 한국 교회는 "예언"을 앞일에 대해 미리 알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집안에도 그런 분이 한 분 오셨어요. 저희 누님이 25세 때에 오시더니, "내년 봄에 이 집에 꽃이 피겠구먼!" 이라고 했어요. 은유적으로 얘기해서 책임 안 지려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누님을 앞에 앉혀 놓고 얘기했으니까, 우리들은 다 내년 봄에 시집가나보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내년 봄에 이 집에 꽃이 피겠구먼!" 하고 5년 후에 시집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노처녀 다 되어서 겨우 갔어요. 여러분, 그것이 예언이 아니에요.
오늘 여기서 말씀하는 예언은 무엇인가? F. F. 프루스 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가 이 "예언"에 대해 너무 잘 정의해 주었어요. 여기에서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의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거예요. 예를 들면, 설교와 성경 공부를 가르치는 것 등입니다. 그러한 성경 말씀을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가르칠 때, 그 말씀을 멸시하지 말라는 겁니다. 멸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볍게 여기는 거예요.
설교할 때 표정을 보면, 웬만한 건 거의 다 알아요. 자기에게 맞는 설교하면 턱이 떨어져라 하고 들어요. "아멘!" 예를 들면, 부인의 습관이 아주 나쁘단 말입니다. 반찬을 잘 안 해줘요. "예수 잘 믿는 사람은 설거지 잘하고 반찬을 잘해 주어야 합니다" 라고 하면 남편이 "아멘!" 합니다. 그 다음, 남자에게 해당되는 설교를 하면 안 들어요. "고도리를 그만 둬야 되나?" "뭘~ 남자가 설거지를 해 줘? 목사님이 잘못 아는 거야! 양반집안에서 안 자랐구먼!" 하고 멸시하는 거예요. 계속 와서 성(姓)을 갈려고 조집사는 괜찮은데, 주집사가 되시는 분들! 이것이 바로 예언을 멸시하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우리가 그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신다고 믿고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처음 이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고 나면 많은 분들이 가끔 전화를 했어요. "목사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제 얘기를 공개석상에서 그렇게 하실 수가 있습니까?" 한 명이 전화하면 이해하겠는데, 어떤 때는 서너 분이 동시에 전화를 해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저는 5년 반 동안 우리 성도 가운데 개인을 염두에 두고 설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거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되는데 "나를 치는구나. 내 얘기를 하는구나" 하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말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받으라고 말씀하지 않아요. 21절 보세요.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이것은 20절과 연관된 말씀인데 절을 잘못 나눈 것입니다. 범사에 잘 헤아려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한다고, 성경 공부를 한다고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예요. 많은 이단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동기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헤아리라고 말씀합니다. 멸시하지도 말아야 하겠지만 예언의 말씀을 헤아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배운 대로 사도행전 17장 11절에 베뢰아 사람들을 이렇게 칭찬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러한가 하여" 성경과 대조해 본다고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성경을 한 번도 공부하지 않고 설교만 듣고 몇 년 동안 신앙생활 하는 분들은 오늘 이 말씀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헤아릴 능력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것은 예언의 말씀을 멸시하는 거예요. 여러분 스스로 이 박목사가 올바른 말씀을 전하는가 집에서 연구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한가 하고 여러분 스스로 묵상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거예요. 오늘 여기에 있는 우리 사랑하는 영안 성도들은, 남은 생을 주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시고, 예언의 말씀에 민감하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바람직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나요? 두 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경 속에서 올바로 반응할 줄 알아야 됩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돼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올바로 반응해야 돼요. 성령의 역사와 예언의 말씀에 올바로 반응해야 돼요.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원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됩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자원 가운데 올바로 반응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원에 대해서 올바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23절에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靈)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원 중에 가장 고귀하고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자원을 거룩하게 보전하라고 얘기합니다. 몸이 거룩하게 보존하고, 혼(魂)도 거룩하게 보존하고, 영(靈)도 거룩하게 보존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물질, 시간을 비롯한 모든 자원을 거룩하게 주님 오실 때까지 보존하라고 말씀합니다.
한국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 때문에 잘못 살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지성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큰 잘못이에요. 믿음은 지성의 반대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몸을 학대하는 금욕이 아닙니다. 전인격적인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균형 잡힌 삶을 말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자들 중에 이런 면에서 잘못된 자가 너무 많아요. 이원론을 가지고 사는 겁니다. 교회에서는 1등이에요. 그러나 친구 사이에서는 꼴등입니다. 교회에서는 환영을 받지만 직장에 가면 골칫거리예요. 믿음을 외치고 다니지만, 세상에서의 예의 범절은 전혀 없어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해도 남을 전혀 배려할 줄 몰라요. 고기가 반도 안 익어서 혼자 다 먹어치워요. 소리를 내면서 막 씹어먹어요. "믿음 좋은 사람" 이라고 하면 세상 예의와 반대되는 사람, 몸을 학대하는 사람, 영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한국 교회엔 인식되어 있어요. 여러분 전혀 그렇지 않아요. 우리에게 있는 모든 자원은 모두 주께로부터 온 것임을 믿습니다.
한국 교회의 잘못된 믿음 좋은 사람을 보십니까? 역전에 가면 확성기를 들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외쳐요. 그것도 멀리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면 얼마나 좋아요? 지나가는데 고막에다 대고 "예수 천당!"이라고 합니다. 저도 한 번 당했는데 기분이 나쁘더라고요. 제가 속으로 '저놈의 xx가 목사도 몰라보는 놈이 전도한다고!' 제 속으로 정말 그랬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믿음 좋은 겁니까? 십자가 들고 다니면 믿음 좋은 겁니까? 잘못된 거예요.
가장 믿음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가장 온전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에요. 만나면 편안한 사람, 만나면 즐거운 사람, 또 만나고 싶은 사람,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향기라고 했어요.
여러분, 믿음 좋은 사람은 유머를 안 하는 사람입니까? 한국 교회에서 거룩한 목사는 어떤 사람이에요? 저도 거룩할 수 있어요. (성경책 옆에 끼고 고개를 쳐들고) "이 집사니임~", 전화가 오면 (목소리 깔고) "할렐루야~" "내가 기도했는데 내일 아침에 나을 거야~" 이렇게 하는 것이 거룩한 겁니까? 이것은 뭔가 잘못됐어요.
몸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영(靈)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온전한 인격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거룩하게 보존해야 되요. 예수 믿으면서도, 선천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고, 질병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운동을 게을리 해서, 배가 남산같이 나온 사람은,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몸도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열심히 노력해서 잘 보존해야 됩니다. 온전하게 유지해야 돼요.
여러분, 성경을 읽어보세요. 한국말 성경이 점잖게 번역됐지만 공동 번역을 가끔 읽어 보십시오. 천주교 문 동화 목사님께서 고생고생하며 번역한 성경입니다. 읽어보면 아주 리얼하게 번역을 해 놓았어요.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유머가 많은 분인지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의 웃음'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그 당시의 문화적인 배경으로 보면 그냥 해도 될 말씀을 굉장히 재치 있게, 유머 있게 하셨어요. 그분은 지성적으로 날카로우셨고, 감성이 풍부하셔서 눈물도 잘 흘리셨으며, 그는 판단력에도 부족함이 없었고, 위트와 재치와 유머가 있으셨던 분이에요. 인격적으로 온전하셨던 분이에요. 여러분, 이것이 바람직한 신앙생활이라고 말씀합니다. 당신은 어떠십니까? 당신의 신앙생활은 하나님 보시기에 바람직합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경 속에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시나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sensitive 하신가요? 여러분의 인격은 균형 잡혀 있습니까? 모두에게 향기가 될 만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 데살로니가전서를 마치며, 이 세 가지 질문으로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무기력하고 권태감에 빠지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우리에게 부탁하신 이 중요하고도 귀한 말씀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져서, 날이 가면 갈수록 성숙하는 신앙생활, 바람직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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