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2001-12-11 22:25:28 read : 994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데살로니가전서 4:1-12
1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5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6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7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8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9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을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10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11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2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삶의 요소 요소에서 본질과 핵심을 파악하는 일일 것입니다. 인생을 굉장히 열심히 살았는데,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가만히 관찰해보면 열심히는 살았지만, 모든 일에 있어서 본질과 핵심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곁다리에서, 주변에서 열심을 내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효도만 해도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가 설날을 지냈습니다만, 외국 사람들이 우리 한국 사람들을 바라보면 우리가 굉장히 효도를 잘 하는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유교에서 그것을 수백년 동안이나 배웠으니까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효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는 걸까요? 외국 사람들이 10년 정도 살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한국에는 죽은 다음에 효자가 많다고 합니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있는 효자는 없고, 부모님 돌아가신 다음에 효자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이런 얘기를 하고 떠나요. 왜 그래요? 명절- 추석, 설날- 때가 되면 성묘하러 온 나라가 난립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통 체증을 겪어가며 무덤에 다녀옵니까? 얼마나 많은 돈을 제사 드리기 위해 씁니까? 요즘 제사상을 제대로 차리려고 하면 30만원에서 50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그것을 1년에 10번씩 드리는 사람이 있어요. 굉장한 효자죠.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어떻습니까? 효도라는 것이 제가 봐도 돌아가신 부모에게 하는 것은 참 쉬워요. 그러나 살아 계신 부모님께 효도를 해 보세요. 정말 어려워요.
저도 최근 몇 주간동안 저희 집에, 저희 아버님이 와 계신데 효자 노릇하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효(孝)란 뭘까요? 도대체 무엇을 해 드리는 것이 효입니까? 무덤에 가서 경배하는 것입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은 어쩌면 본질을 잘못 파악하고 살아가는지 모르겠어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신앙이란 뭡니까? 어떻게 해야 믿음 생활을 잘 하는 것입니까? 기도 많이 하는 겁니까? 주일 성수하는 겁니까? 헌금하는 겁니까? 교회에 와서 봉사하는 것인가요? 다 맞아요. 그러나 핵심은 아니에요.
성경에서 말할 때, 신앙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체적인 그림으로 볼 때, 신앙 생활이란 무엇인가? 참 믿음 생활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거예요. 효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무리 좋은 옷에 많은 용돈을 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해 드려도,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못 해드리면 그것은 불효예요.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쉽게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 그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오늘 설교 전에 저와 여러분이 불렀던 이 찬양,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스바냐 3장17절 말씀을 그대로 따 온 것입니다. 우리가 스바냐서를 읽어보면 1장부터 3장 7절까지는 여호와의 심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심판이 그 곳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런데 3장 9절부터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회복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에 모든 죄를 없이 하시고, 교회에 죄를 없이 하시고, 백성들의 마음에 나쁜 것들을 다 제거하신 다음에 하나님이 그 사랑하는 백성들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회복시키신 다음에 스바냐 3장17절 말씀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핵심은 무엇인가? 우리 가운데 죄를 다 없이 하고 나서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키고 난 이후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즐거워 하시더라는 거예요. 기뻐하시더라는 거예요. 이것이 신앙 생활이에요.
젊은이들이 요즘 많이 부르는 찬송이 있죠.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얼마나 놀라운 찬송입니까?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하나님이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이 지난 일주일 동안의 삶을 바라보실 때마다, 여러분을 떠올리실 때마다, 즐거워하시고 웃으시며 기뻐하시는 그것이 신앙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은 4장1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말씀합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오늘 본문의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참으로 놀라운 교회였어요. 주님과 동역하는 교회예요.
데살로니가와 고린도는 굉장히 비슷한 도시입니다. 둘 다 부자도시였고, 무역도시였고, 그 당시에 없어서는 안 될 아주 강력한 도시였어요. 부산과 서울 정도 되겠죠? 이 두 도시의 특성은 똑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어땠습니까? 사회를 닮아 교회 안에 문제가 많았어요. 성도끼리 고소를 하고 간음이 있고, 우상의 제물에 대한 문제(음식에 대한 문제)가 있는 등, 아무튼 문제가 많았던 교회가 고린도 교회예요. 그러나 똑같은 조건 가운데서도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세계에 모본(模本)이 되는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였어요.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가 알았다. 너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를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행하고 있다. 그러나 더 많이 행하거라" 여러분, 오늘 말씀은 굉장히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고, 신앙생활이라고 하며 기도와 예배와 성경공부 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은 전혀 그러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접근하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 몇 가지를 주고 계십니다.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마음으로 와 닿아, 우리의 생활이 변화되는 구체적인 적용의 말씀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1. 정결한 삶을 살라
먼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그의 요구사항을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거룩함이라고 되어 있는데, 왜 제가 그 단어를 바꾸어서 정결한 삶이라고 합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거룩' 이란 말은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들어왔어요. 거룩! 거룩! 거룩!
그러나 이렇게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신자들, 한국 교인들 같이 거룩에 대한 오해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도 드물어요. 저도 그렇게 오해하며 자라났어요.
그래서 저는 어릴 때부터 거룩한 사람을 참 싫어했어요. 왜냐하면 '거룩한 사람' 하면, 제 머리에 먼저 떠오르는 게, 그는 농담도 안 하고, 웃지도 않고, 웃겨도 코만 웃고 절대 이를 안 보이는 사람, 그 사람은 목소리도 항상 낮게 깔아서 얘기해요. 그리고 말만 나오면 "주여!" 무슨 일을 해도 "주여!", 길을 가다가 돌을 차도 "주여!", 밥 먹다가 돌을 씹어도 "주여!" 저는 그 말이 아주 지겹더라고요. 전화를 하면 "여보세요" 해야 하는데 "할렐루야!" 하면서 받아요. 설교하면 목소리는 아주 낮게 깔면서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사람'이라고 하면 아주 지긋지긋 했어요. '어쨌든 나는 커서 절대 거룩한 사람은 안 되어야지!' 라고 결심했어요. 검은 성경책 끼고, 고개를 들고 다니는 것, 이것이 거룩의 그림이었어요. 아마 한국 교회의 그림일 거예요.
그러나 제가 성경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이 무엇인줄 압니까? 거룩은 절대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겉으로 드러나는 바깥 모양이 아닙디다. 형식적인 것이 아닙디다. 옷차림에 상관없습디다. 제가 미국에 가보니 거룩한 사람이 농담을 얼마나 잘 하는지 몰라요. 얼마나 잘 웃는지 몰라요.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은 아름다움이에요. 아름다움이라고 번역할 수 있어요. 거룩한 사람 =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거룩한 사람 = 온전한 사람(Wholly)이에요. 여러분, 온전한 사람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옷차림도 온전하고, 화장도 온전하고, 마음도 온전하고,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에요.
오늘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기뻐하시는가?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인데, 이 말을 오해할까봐 하나님은 이 말씀의 뜻을, 이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을 이렇게 번역해 주고 있습니다. 3절을 다시 보세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곧'은 뭐예요? 'equal(=)'이에요. '내가 말하는 그 뜻이 무엇인 줄 아느냐? 음란을 버리는 거야." 이 말은 정결한 성(性)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성(性)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사람, 성적 부도덕이 그 생활에 없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볼 때 기뻐하신다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거룩한 삶, 정결한 삶, 음란하지 않은 삶은 어떤 삶인가? 여러분이 알기 쉬운 말로 말하면, 성적으로 잘못된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결혼한 사람 이외의 사람과 성생활을 하지 않는 거예요. 결혼 전에는 사귀더라도 육체를 가까이 하지 않는 삶이에요. 구체적으로 혼전 성교를 하지 않는 거예요. 결혼하고 나서는 결혼 이외의, 아내와 남편 이외에는 다른 사람과 성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의미하는 말씀이에요. 도색잡지나 음란 비디오물이나, 음란 인터넷에 들어가서 그것을 즐기지 않는 구체적인 삶을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날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예배드리고 성수 주일하는 사람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사회에 나가 잘못된 성생활을 은밀하게 즐기는지 몰라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내가 너를 볼 때 도저히 즐거워 할 수가 없어!" 이런 삶은 잘못된 거룩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바라볼 때마다, 당신을 연상할 때마다, 즐거워하시는 신앙의 본질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정결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단순하게 우리를 거룩하게 살아라, 정결하게 살아라, 그렇게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정결하게 살수 있는 방법 두 가지를 오늘 본문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긍정적으로 표시되어 있고, 하나는 부정적으로 표시되어 있어요. 긍정적인 말씀 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이 말씀은 굉장히 쉬운 말씀 같지만, 해석학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말씀이에요. 얼마나 어려운지 수많은 신학 박사들이 이 본문을 연구했지만 지금까지 결판이 나지 않았어요. 도저히 결판이 안 나서,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해석하자 해서, 성경을 아예 두 가지로 해석했어요. 한국말 성경 해석은 그 한편을 따른 거예요. 다른 한편은 영어의 많은 성경이 이 번역을 따르고 있는데,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몸을 다스릴 줄 알고" '아내' 대신에 '몸'으로 번역했어요.
도대체 원어 성경에 어떻게 되어 있기에 결판을 못 내느냐? 원어 성경에는 아내도 없고 몸도 없어요. 원어 성경엔, ."각각 자기의 vessel (그릇) 을 취할 줄을 알고"라고 되어 있어요 '그릇' 이 단어를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분명히 성(性)생활에 대해서 이 본문이 가르치고 있는데, 이 그릇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많은 학자들이 고민하다가, 성경 다른 곳에 그릇이란 단어가 어떻게 해석되어 있는가를 보았습니다. 베드로 전서 3장 7절로 가 봅시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다 잘 아는 말씀 아닙니까? (여자는 연약한 그릇입니다. 깨지면 시끄러워요. 그러니까 조심해서 다루어야 됩니다.) "봐라! 여자는 그릇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오늘 여기에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라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 다른 곳에 그릇을 몸으로 해석한 구절이 있어요.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그리스도의 복음을 얘기한 거예요. 그리스도를 우리가 어디에 가졌느냐? 우리는 성령의 전(殿)입니다. 이 질그릇은 우리의 몸을 비유한 거예요. 둘 중 어느 것을 해석해도 상관없습니다. 사실 큰 의미는 바뀌지 않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몸으로 번역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결혼한 사람에게만 지시한 말씀이 아니고, 결혼하지 않은 젊은 청년들에게도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이 이렇게 번역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몸을 다스릴 줄 알고
어떻게 우리가 성적으로 음란한 삶을 버리고 정결한 삶,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가? 먼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주문하십니다. "너희의 몸을 다스리라. 몸의 소원을 다스리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얘기합니다. 성적 욕구는 자연적인 것이니까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성(性)에 관한 강의를 하면서, 함부로 그것을 쌓였을 때 풀어버리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분명히 성적인 욕구가 자연적인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된 것이긴 합니다. 예를 들어 식욕, 어떻습니까? 식욕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어요. 음식을 앞에 놓고 먹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해요. 맛있게 느껴져야 돼요. 그것은 축복이에요. 잠자는 욕구, 내가 피곤할 때 잠을 자고 싶어요. 그 욕구가 얼마나 좋은 겁니까? 그러나 성경은 식욕과 잠자는 욕구와 성욕, 이 모든 것을 좋게 얘기하지만, 이 모든 자연적인 욕구를 통해서 하나님은 한 가지를 우리에게 주문하십니다.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그 자연적인 욕구가 좋은 것이긴 하지만, 그 욕구들을 다스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식욕을 다스리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배가 고파서 이미 음식을 먹었어요. 그런데 밤 10시가 됐는데 또 먹고 싶어요. 저도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저에게 밥을 한 번 사 줘 보시면 압니다. 제가 얼마나 잘 먹는지... 열 아홉, 스무살 때는 자다가 일어나서 라면 두세 개를 간식으로 끓여 먹어도 괜찮았어요. 제가 먹기를 탐해서, 호진이 광진이가 밤에 라면 끓여 먹을 때 제가 낍니다. 그런데 요즘은 먹고 나면 속이 더부룩해요. 입은 당기지만 저녁 먹고 난 후에 라면 같은 건 먹지 않습니다. 왜요? 욕구를 절제할 줄 알아야 돼요. 다스릴 줄 알아야 돼요. 잠도 마찬가지죠. 자고 싶다고 아무 때나 자면 어떻게 합니까? 예배 시간에까지 자고 앉아 있으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건 잘못된 것 아닙니까?
제가 설날 일 주일 전에 고향에 갔어요. 그곳에 유명한 집사님이 한 분 계셨어요. 제가 어릴 때 예배 시간에 조시는 걸 봤는데, 아직도 조시는 분이 있어요. 그분은 설교 딱 시작하면 좁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졸다가 의자 모서리에 이마를 찍어서 붕대를 붙이고 다녔어요. 그래도 그 다음 예배 시간에 또 졸아요. 설교 딱 끝나면 얼굴이 환해집니다. 한잠 자고 났으니 기분이 얼마나 상쾌하겠어요. 70세가 넘은 그분과 이번에 식사를 같이 했는데, "박 목사님, 신기한 소식이 하나 있어요" "뭡니까?" "내가 예배 시간에 잠을 안 자!" "어떻게 그렇게 됐습니까?" "나도 몰라. 내가 이제는 잠을 조절할 수 있어. 아~ 신기하더라고!" 나는 신기하게 안 들리는데 그분은 한 40년 졸다 보니 신기하던가봐요. 얼마나 얘기를 하던지, 밥 먹으면서 내내 예배 시간에 잠을 안자고 조절할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성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물을 비유로 들어보겠습니다. 비가 많이 내립니다. 그러면 댐이 홍수를 막아서 1년 내내 쓸 물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는 거예요. 한강 같은 강이 세계 어디에 있습니까? 1년 365일 물이 도도하게 흘러내립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댐이 있기 때문에, 홍수를 조절했기 때문입니다. 댐으로 홍수를 조절하지 않고 그것이 터져 나갈 때 그것은 우리를 해치는 것이 됩니다. 물과 불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그것은 우리를 해치고 맙니다. 식욕과 잠자는 욕구와 정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우리 마음 안에 성욕을 다스리라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줄 저는 압니다. 청년의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저는 알아요. 참으로 불행한 것은 과거 교회에서 이러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저는 이것이 얼마나 마음 아팠는지 몰라요. 교회에서 이러한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면 하나님 앞에 더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기뻐하는 젊은 시절을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이 구절보다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성생활에 대해서 가르쳐 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깨끗하고 정결한 성생활을 하는 것인데, 그 방법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몸을 다스려야 된다고 얘기합니다. 5절에서 또한 부정적으로 이렇게 가르칩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부정적으로 어떻게 하지 말라고요? 색욕을 좇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현대어로 번역하면, 정욕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겁니다. 오늘날 이 사회를 보십시오. 젊은이, 장년할 것 없이 성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욕심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어요.
제가 귀국해서 참으로 놀랐던 적이 있었어요. 미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목사님들과 한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목사님들이 많이 참석해서 방이 7개가 필요했어요. 세미나 장소 근처에 있는 멋있어 보이는 모텔에 들어갔습니다. 제 생각에는 방 7개를 한꺼번에 얻으면 할인 받을 줄 알고 흥정을 하려고 갔어요. "방이 몇 개 필요합니까?" "7개입니다" "며칠 있을 건데요?" 짐을 잔뜩 들고 "사흘 있을 겁니다" "방 없습니다" "아니, 방이 다 찼습니까?" "아니, 방을 못 드립니다" 왜 안 주냐고, 동시에 7개의 방을 사흘 쓰니까 수지 맞은 것 아니냐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았어요. 하루에 두 시간 짜리 손님을 다섯 번, 여섯 번 받아야 된데요. 그런데 우리가 들어가 있으면 그 방을 못쓰잖아요. 그러니까 안 주는 거예요. 그 설명을 듣고 "우리가 저녁 9시에 들어왔다가 아침 9시에 짐을 다 싸 가지고 나가면 사흘 동안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하니까 그건 가능하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과 저녁 9시까지는 보따리 들고 여기 저기 헤매고 다니다가, 9시 "땡!"하면 들어가서 자고, 아침 일찍 보따리를 싸서, 그 큰 보따리 들고 돌아다녔어요.
여러분, 인터넷만 해도 그렇습니다. 한 번 들어가 보세요. 음란물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백지영 파일인가? 그게 CD로 제작되어서 수만 개가 돌아다닙니다. 제가 이발하러 갔더니 이발사 아저씨가(제가 전도한 이발사 아저씬데), 자기가 그걸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더라고요. 뉘앙스가 "목사님, 한 번 보시겠습니까?" 라는 투였어요. 기가 막혔어요. 이것이 우리 사회예요.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것이 사회만의 문제인가? 오늘날 교회 안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 안의 성적 타락이다" 성도와 성도간의 성적인 타락이 교회 안에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현실입니다.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이 교회 안에 있는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은 비로소 기뻐하신다고요.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예배에 빠지지 않고,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해도 우리의 성생활이 문란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이 성적 문란이 심각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성적 문란은 자기만 해칠 뿐 아니라, 두 가지 관계를 파괴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여러분, 성적인 관계는 반드시 누군가를 해하게 되어 있어요. 내가 결혼 전에 성관계를 가졌는데, 결혼하고 나서 남편이 그것을 알아보세요. 얼마나 그 영혼을 파괴합니까?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들을 파괴합니까? 형제를 해하는 거예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6절 下)
다른 죄는 몰라도 성적인 죄는 하나님이 반드시 신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를 기억하십니까? 이렇게 말씀하고도 모자라서 하나님은 7절과 8절에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더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다른 죄는 몰라도 성적인 죄는 우리 안에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죄라고 경고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기뻐하실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말씀은 너무나도 구체적인 말씀이에요. 여러분,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문제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잘 다스리고, 우리의 이 몸으로 성적인 죄를 범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신앙의 본질을 파악하고 살아가는 참 그리스도인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말씀을 들으며 마음이 뜨거워지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누구라서 이 말씀 앞에 깨끗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오늘 이 사회의 죄악인 것을, 우리의 약함인 것을요. 이 말씀을 들으며 자기의 가슴을 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거예요. 내가 과거에 왜 그랬던가? 내가 깨끗하게 살 것을! 하나님이 나를 보고 낙심하시면 어떻게 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마음은 옳은 거예요.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왜요? 감사하게도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은, "절대 이렇게 하지 말라!"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런 투로 말씀한 적이 없으세요. 성경은 우리에게 오히려 이렇게 권면합니다. "얘들아! 더 이상 (무엇 무엇) 하지 말라!"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말라!"
여러분, 복음이 왜 우리에게 기쁜 소식입니까? 우리가 과거에 어떤 죄를 범했다고 해도, 아무리 하나님 앞에 심각한 성적인 죄를 범했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제가 이러한 부분에 잘못했습니다. 제 잘못을 뉘우칩니다. 제가 몰라서 그랬습니다. 약해서 그랬습니다. 제가 제 마음을 잘못 썼습니다. 주여! 이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하고 자백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 과거를 깨끗이 씻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잊어버리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중요한 단어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그 죄가 어떤 것이든, 어떤 성적인 죄를 범했든, 모든 불의에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깨끗하게 씻기실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성경을 읽다가 이 성적인 문제를 연구하며 굉장히 충격적인 구절을 하나 읽게 되었습니다. 우리 다같이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히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내가 너희를"에서 이 너희가 누구입니까? 고린도 교인들을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한다는 거예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고린도 교인들이 어떤 교인들인데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려요? 음란이 가득했던 교인들이었어요. 어느 정도로요? 고린도 교인 중 어떤 아들이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살았어요. 성경에 그대로 나와요. 물론 자기 친어머니는 아니죠. 아버지가 데리고 살던 첩을 아들이 데리고 살던 교인이 있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어떻게 말씀합니까? 그 엄청난 성적인 범죄를 저질렀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예! 가능합니다. 우리의 과거가 씻겨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죄악이라도 하나님은 용서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주의 보혈을 의지하며 "하나님! 내가 이 성적인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 줄 몰랐습니다. 몰라서 이웃의, 형제의 아내를 눈짓했습니다. 내가 성적인 잘못을 범했나이다!"하고 고백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깨끗이 씻으시고, 우리가 그 날 이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정결한 처녀로 보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에요.
누가 완벽합니까?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과거에 어떻게 사셨든 상관없이 오늘 이 시간부터 결심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제 몸을 지키겠습니다. 성적인 죄를 범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제 몸을 깨끗한 처녀의 몸으로, 제 영혼을 깨끗한 처녀와 같이 하나님께 바쳐 드리겠나이다!" 우리가 이러한 결심을 하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를 보고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에요.
오늘날 성적인 타락이 난무한 이 한국 사회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자가 필요합니다. 저는 젊은이를 볼 때마다 너무나 안타까워요. 젊은이들이 성적으로 깨끗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저는 압니다. 이 사회가 그렇게 타락해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왜 삽니까? 죽었던 목숨 아닙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시고 우리를 속량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을 샀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 이후 깨끗하게 살 수 있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이웃 간에 사랑하며 살라
두 번째, 9절과 10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주문하십니다. "이웃 간에 사랑하며 살라!" 우리가 이웃 간에 사랑하며 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원리 같아요. 효도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부모님께 60평 짜리 아파트를 사 드리고, 그랜저를 뽑아 드리고, 한 달 용돈을 300만원씩 드리고, 음식을 잘 해 드리는데, 형제끼리 모이면 싸워요. 제사 드리고 싸웁디다. 나는 비싼 조기 사 왔는데 너는 왜 갈치 사왔냐! 하면서 싸워요. 나는 10만원 냈는데 너는 왜 7만원 냈느냐고 싸워요. 부모님 환갑 잔치 하고도 싸웁디다. 생일잔치 해놓고 뒤에 가서 입이 다 부어 가지고 와요. 효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임무열 선교사님이 선교 나가 있는 몽골을 세운 사람은 징기스칸입니다. 몽골의 박물관에 징기스칸의 실물을 그대로 본 뜬 것이 있어요. 그가 얼마나 거구였는지, 그가 사용했던 활이 어마어마해요. 저는 그 활을 도저히 당길 수 없을 것처럼 보였어요. 그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유언을 해야 되는데, 유언을 하지 않는 거예요. 유언을 하라고 해도 말을 안 해요. 그러더니 임종 때가 되어서 자녀 셋을 불렀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일화죠. 아들들에게 화살을 잔뜩 가지고 오라고 했어요. 그리고 화살을 하나씩 주고 부러뜨리라고 합니다. 아들들이 모두 장정들이니까 화살을 "뚝" 하고 부러뜨렸어요. 그 다음 두 개씩 주고 부러뜨리라고 합니다. "뚝!" 세 개, 네 개, 다섯 개... 그리고 열 개가 되었을 때, 그 세 아들 중 누구도 부러뜨리지 못했어요. 그리고 징기스칸은 죽었어요. 훌륭한 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까? 열심히 봉사하는 것, 중요합니다. 십일조 드리는 것, 중요합니다. 성수주일 하는 것 중요해요. 그런데 교회도 똑 같더라고요. 교회에 와서 봉사하고 싸워요. 여선교회를 보면 그렇게 싸워요. 크리스마스때 누가 밥하라 고 했어요? 교회에 나와서 김장하고 싸우고, 크리스마스 트리 만들고 싸워요. 입으로는 안 싸워도 마음이 상해서 입이 부어 있어요. 그런 봉사 아무리 많이 해도, 여러분이 아무리 성전 마당을 많이 밟아도, 하나님께는 덕이 되지 않아요.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어떻게 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는가? 오늘 구체적인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겁니다. 오늘 여기 있는 단어는 '필레오'라는 단어예요. 이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친구간의 사랑이에요. 가족과 가족 간에, 남편과 아내간에, 성도와 성도간에 서로 사랑하라는 겁니다.
저는 이번 설날을 참 감격스럽게 보냈어요. 요즘 목회 하면서 제 마음에 아주 기쁨이 많아요. 교회가 수적으로 커져서 그런 게 아니에요. 수(數)는 중요하지 않아요. 제가 끊임없이 묻는 질문은 우리 교회가 변해가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예! 우리 교회는 변하고 있어요. 소그룹에서, 목장에서, 서로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정말 우리 교회같이 말이 없는 교회도 드물 거예요. 불평이 없는 교회도 드물 거예요. 여러분이 다 느끼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옛날 모습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가 5년 전 이 교회에 올 때만 해도 표정들이 어두웠어요. 상처가 많았어요. 한 2년이 지나서 새 가족들이 등록할 때, "왜 등록했습니까?" "우리 교회 분위기가 좋아서요" 라고 말하면 기존 신자들이 "야~ 우리보고 분위기 좋단다" 라고 했어요. 그 말이 안 믿어져서. 요사이 우리는 정말 많이 변했어요.
이번 설날 때에 한 성도가 저에게 얘기했습니다. 지나가는 말로 얘기하는데, 저는 그 날 집에 와서 기도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어떤 목장의 한 목자가 카드를 주었는데, 저에게도 주었어요. 저만 받은 줄 알았더니 목원들에게 다 카드를 주었답니다. 그런데 그냥 주지 아니하고 빳빳한 새 돈 2만원을 넣었다고 합니다. 저에게는 5만원을 넣었어요. 저만 준 줄 알았는데... 그것을 계산해보니 작은 돈이 아니에요. 제가 감동을 받은 이유는 그 목자의 경제적인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목자는 그런 돈을 줄 수 있는 형편이 못 되거든요. 그런데 부자, 가난한 사람할 것 없이 다 카드를 쓰고 정성스럽게 2만원을 넣었대요. 제가 그 성도를 위하여 무릎 꿇고 기도하는데, 눈물이 콱 났어요. "하나님,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축복해 주십시오!" 저는 제 기도를 하나님이 틀림없이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이런 일들이 우리 교회에 무수히 일어나고 있어요. 사랑의 헌금으로, 어떤 사람은 적금을 깨서 1000만원을 들고 와서 "목사님, 이거 이웃 돕는데 좀 써 주세요. 교회에 헌금하면 제 이름이 나타나니까 목사님이 직접 좀 써 주세요" 이런 분들이 많아요. 선교사들을 위해 작년 한해 1000만원을 가지고 와서 "써 주세요" 이런 일들이 많아요. 우리 교회가 변하고 있어요.
오늘 본문의 데살로니가 교회도 그러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예! 우리 교회도 데살로니가 교회 같이 이미 서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에 의지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더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더 사랑하십시오. 더 아끼십시오. 요즘 중보기도실에 가 보면 뜨거워요. 그 바쁘고 추운 가운데서도 교회에 나와서 자기를 위해 기도하지 아니하고,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더 많이 하십시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 내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비로소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형제간에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가르쳐 주신 방법은, 경제적으로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3. 경제적으로 책임 있는 삶을 살라
11절을 보세요.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에요. 이 말씀의 뜻이 뭘까요? '종용하고' 다음다음 주에 제가 설교하겠습니다만, 이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문제는 주님이 곧 오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멀쩡한 직장을 다 내버려두고 교회에 와서 기도만 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사람들에게 '종용하라' 조용하게 신앙 생활 하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만 와서 살려고 해요. 전 그런 사람 좋아하지 않아요. 월요일도 보면 교회에 있고, 화요일도 복도에서 만나면 "목사님, 안녕하세요", 수요일도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니에요. 물론 하나님이 그렇게 불러 주신 자들이 있습니다. 저와 우리 부목사님들, 풀타임 사역자들로 부른 자들은 교회에 와서 살아야 해요. 왜요? 그것이 직업이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맡기신 일이 있는 겁니다. 그 일을 하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사업하는 자들은 열심히 사업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사업해서 성공해야 돼요. 제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죄송한 말씀이지만 왜 사업을 하면서 돈을 못 버는지 모르겠어요. 사업하는 사람은 돈을 벌어야 돼요. 아멘! 직장 생활하는 사람은 충실하게 그 직장을 살려야 돼요. 그리고 교회에 나와서 봉사하는 겁니다. 직장과 사업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일이에요. 하나님의 사역이에요.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에요. 자칫 신앙이 잘못된 사람들은 다 그만두고 기도원에 가요. 날마다 교회에 와서 살아요. 그런 집안은 안 가봐도 뻔해요. 설거지를 제대로 하겠으며, 밥을 제대로 해 주겠어요? 그러니 까 날마다 가족들 간에 불화가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경제적으로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책임있는 삶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12절에 두 가지 결과를 얘기합니다.
조금 전에는 '종용하여'라는 말씀이 나왔는데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단정히 행하고'. 우리가 직장 생활도 엉터리로 하고, 사업도 제대로 못하고 부도내면서, 교회에 나와서 "주여!" 라고 하면서 금식 기도하고 살면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첫 번째 결과입니다. 단정히 행한다는 소리를 듣고, 두 번째는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교회 안에 궁핍함이 없어져요.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 질 필요가 없어요.
IMF가 터지고 나서, 우리 교회에 라면을 얻으러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는지 몰라요. 네 박스, 다섯 박스 사 놓아도 금방 다 나가요. 그런데 그 가운데 몸이 멀쩡한 사람들이 와요. 내가 너무 답답해서 어느 날 불러서 이렇게 얘기했어요. "당신, 왜 일 안하고 동냥하러 다닙니까?" "일거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제가 일거리를 드리죠. 내일 아침 9시에 우리 교회에 나오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할 일은 여기를 깨끗이 청소하는 겁니다. 제가 일당 3만원을 드릴게요" 몇 명을 붙잡고 얘기했는데, 그 다음날 아침에 나타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이것은 잘못된 생활태도라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 손으로 일해야 되는데, 경제적으로 가정을 부양해야 되는데, 안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기도만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주님은 얘기하는 겁니다. "내가 너희들이 그렇게 살 때 기뻐하지 않는다!"
여러분, 제가 양복 입고 이렇게 서 있으니까 아무 것도 안 해 본 사람 같습니까? 저는 정말 험한 일을 해 봤습니다. 미국 가서 가장 말단에서, 청소 일을 몇 년 동안 했는지 아세요? 그것도 밤청소를요. 사무실에 다 퇴근하고 나면, 쓰레기를 비우고 청소를 하루에 4시간씩 했어요. 제가 요청하면 도움 받을 수 있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저는 공부했어요. 가족을 먹여 살리며. 그것이 저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헬라어와 히브리어 단어를 외울 때, 먼저 카드에 단어를 30개 ,40개를 적어서 청소할 빌딩에 들어가서, 책상 위에, 벽에 다 붙여 놓습니다. 그리고는 여기서 저기까지 청소하면서 그 헬라어 단어들을 외웠습니다. 히브리어 단어를 외웠어요. 그렇게 4시간을 청소했어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다른 건 몰라도 헬라어, 히브리어는 A를 받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A 받았어요. 집에서 놀면서 공부한 사람보다 더 잘했어요. 정신 통일을 하니까!
여러분! 멀쩡한 사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못 먹고 사는 사람 보면 저는 정말 이해를 못하겠어요. 여러분, 왜 일을 안 하는 거예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데. 자기가 이전에 사장했으면 무엇합니까? 부도 맞았으면 택시 운전사라도 하고, 파출부라도 해야죠. 오늘 경제적으로 책임을 지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직업에는 부끄러움이 없는 거예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해 왔는지 몰라요. 오늘 하나님은 이 데살로니가전서를 통해 구체적인 말씀을 저와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성적(性的)으로 깨끗하게 사십시다. 이웃을 더욱 더 사랑하십시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직장 일을 감당하십시다. 사업을 키우십시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 영안 성도들에게 축복이 되어서, 다음 한 주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는 귀한 말씀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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