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일어나라. 3월 18일 2001-12-10 18:33:51 read : 870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깨어 일어나라
<...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 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
종하라> <에베소서 5장 10절-21절>
1.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신의 잠을 주었습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하나님은 낮과 밤을 만들어, 낮에는 활동하며 일하게 하시고, 밤에는 잠을 자게 함으로 건강을 유지하도록 하였습니다.
아무리 피곤했던 몸도 잠을 푹 자면 피로가 회복됩니다.
육신의 잠은 우리에게 건강을 회복시킵니다.
잠을 자지 못하게 되면, 그것이 병이 생긴 증거입니다.
병 중에서 제일 딱한 병이 잠을 못자는 병입니다. <불면증>에 걸린 사람들 보면, 온 밤을 하얗게 보내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제가 아는 권사님 한 분은 불면증에 걸려서 한동안 고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 잠 자는 것도 복입니다.
얼마나 편안하면 잠이 오겠습니까? 불안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서운 생각이 들어 교회에 못 들어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잠도 적당히 자야지 지나치게 오래 자면 이것도 문제입니다.
회복실의 환자가 깨어날 때에 깨어나지 못하면 큰 일입니다.
잠도 필요하지만 깨어날 때 깨어나는 것은 더욱 더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잠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잠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잠입니다.
육체의 피곤은 잠에서 풀지만, 영적 잠은 잘수록 더 해롭습니다.
영적 잠에 깊이 잠들어 있다는 것은 영혼이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영적으로 무디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말씀>에 무감각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씀>은 찌르는 검이라고 하였는데, 찔러도 감각이 없습니다.
<말씀>은 양날 선 검과 같아서 골수를 쪼갠다고 했는데 아픔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영적 잠에 취해있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서 졸다가 이층 창가에서 떨어져 죽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유두고라는 사람입니다.
너무 졸면 떨어지는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잠 자는 자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영적 잠 자는 자를 {죽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의 목숨이 있어 숨 쉰다고, 영이 살아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육체는 살아 있으나, 영이 죽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영적 잠에서 깨어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은 사람과 잠 자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잠은 아직 깨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마치 연탄가스를 먹어 몽롱한 상태와 같은 경우입니다.
그러한 잠에서 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2. 깨어난 사람은 자연히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깨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자기를 살피게 됩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세수도하고, 화장도하고, 옷도 갈아입고, 그리고 집을 나서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우리는 매일 반복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일상생활(日常生活)이라고 합니다.
잠에서 깨라는 것은 활동을 의미합니다.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영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의 세대는 어둠의 세대입니다.
어두운 밤에 행해지는 일들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들이 요즘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도시들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성경은 어둔 밤의 행해지는 것은 모두 부끄러운 것들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술 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술 취하면 자연히 정신이 몽롱해져 본의아니게 어두운 일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시 에베소 지역은 포도의 주산지였습니다.
주신(酒神)인 <박카스> 신을 섬겼습니다.
술 취한 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부끄러운 일들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다가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먹어버립니다.
그래서 술독에 빠지게 됩니다.
술독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제정신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술만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그 생활이 말이 아닙니다. 질서가 없어집니다.
점점 절망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이런 자리에서 깨어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으면 정신이 깨어나 새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니 육신의 생활도 달라집니다.
가난하게 살다가 도리어 알뜰하게 삶을 영위해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생활이 안정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지력으로 되는 것이라면 왜 사람들이 그렇게 살겠습니까? "정신을 차려야지..." 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못하기에 문제입니다.
연탄가스를 마신 사람이 속으로는 '깨어나야지...' 하면서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 그에게 새 바람이 들어가야 합니다.
3.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일어나게 되고 활동하게 됩니다.
① 먼저 성령의 바람이 그에게 들어가면 지혜와 명철을 얻게 됩니다.
창세기 41장에 보면 요셉이 바로 앞에서 그가 꾼 꿈을 해석하게 되는데, 7년간 풍년이 드는 동안에 곡식을 비축하였다가 다음에 7년 동안을 위하여 예비하라고 하였을 때, 창41:38절에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라고 하고, 요셉에게 그 모든 권한을 맡겨 애굽의 총리를 삼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신이 감동하면 지혜를 얻게됩니다.
그래서 생활의 지혜를 얻게됩니다.
장사도 잘하게 됩니다.
돈 벌 수 있는 지혜도 얻게됩니다.
경제력을 향상시킬 수 있게됩니다.
② 성령이 임하면 자기의 할 일(使命)을 알게 됩니다.
삼상16:13절에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다윗은 나라를 통치하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뿔뿔이 분열된 국민의 민심을 수습하는 일에 성공하였습니다.
결국 통일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시편57:7-8절에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의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즉 어두운 사회에서 비전을 바라보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나라의 안과 밖에서 우리는 혼돈과 어두운 우울함에 처해 있습니다.
앞을 선명하게 내다 볼 수 없는 어두움이 우리를 뒤덮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우리는 지금 어둠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때,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그런 사명자들이 있어야 할 때입니다.
③ 성령이 임하면 영적 권위자가 됩니다.
사도행전 4:36절에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도 우리와 같이 그렇게 밝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어둠이 짙게 깔려있던 때입니다.
초대교인들은 로마의 황제숭배와, 유대인들의 밀고 등으로 어려움이 심하던 때입니다. 그런데 구브로에서 태어난 섬 사람인 요셉이 자기의 소유를 팔아 그것을 사도들 발 앞에 바쳤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보통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섬사람이 육지에 와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며 사 놓았던 땅을 팔아서 교회 앞에 내어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를 바나바(권위자)라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의 권위는 주님께 봉사할 때 얻어집니다.
교회에서의 권위는 세상 직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다 해도, 그것으로 교회에서 권위가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의 권위는 진심으로 자신을 드려 헌신하는 데서 있게 됩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참으로 몸 바쳐 헌신 봉사하는 사람이 될 때, 그에게 권위를 인정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 앞에 우리 모두 자신들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목사 또는 장로라는 그 직(職)만 가지고 교회에서 권위를 세우려고 했던 적이 없지 않은지? 깊이 깊이 반성해 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직분 맡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이 권위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권위는 남이 엄두도 못내는 것을 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섬사람이 육지에 와서 고생하면서 벌었던 땅을 내놓을 때 사도들이 그를 바나바(권위자)라고 하였다는 것처럼, 오늘도 이런 마음으로 교회를 봉사하는 사람들이라야 교회에서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마 속으로 "그래 나는 권위자가 못되어도 좋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분은 있지 아니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믿음도, 생활도, 활동도,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펼쳐 갈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겨우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허덕거리지 말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졸장부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동참할 수 있는 성령의 감동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청년들이 많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110:3절에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새벽 이슬은 모든 대지 위에 생명운동을 촉진시킵니다. 나라와 민족을 살릴 수 있는 젊은 주의 일꾼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 생겨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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