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믿는가? 3월 11일 2001-12-10 18:33:06 read : 797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무엇을 믿는가?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0장 30-31절>
오늘은 교회에 처음 나와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분들에게 흔히 제기되는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또 사실 보면, 교회에 오랫동안 나왔어도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고 믿는 분들도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이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크리스천들에게 제일 많이 사용되는 말이 <믿음>이란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흔히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또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 확실하겠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확실치 못하니까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심쟁이들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도 잘 살고, 죽은 후에도 천당 간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하니깐 어떤 때는 감정적으로 우리를 대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1. 믿음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 성경책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기록한 것을 복음서라고 합니다.
<복음>이란 복된 소식이란 뜻입니다.
복된 소식은 누구에게나 복된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라면 복음일 수는 없습니다.
복음은 누구에나 해당되는 것입니다. 죄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나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복된 소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사망으로 끝나는 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 가장 복된 소식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라면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죽으면 그만이라면 우리에게 양심도, 도덕도, 종교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저 내 마음 편한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양심을 지키며 살려고 하겠습니까? 요즘 청소년들이 인터넷 사이트에서 엽기적 살인에 몰두하다가 동생을 죽여보고 싶어서 죽였다는 충격적 보도를 읽었습니다.
사람의 양심이 그렇게 되면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 아닌 존재들입니다.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심판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심판하는 주인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심판주가 있어, 멸망으로 또는 영생으로 판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을 보여준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지만, 그 속에 나타난 것은 사람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이것을 위하여 요한복음을 기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다른 것은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기록하였고, [마가복음]은 인류를 섬기는 종으로 오신 예수를 기록하였고, [누가복음]은 참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기록하였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라"(요20:31)고 하였습니다.
2. 그러면 요한이 증거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믿음의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것을 사도 요한은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생명>을 얻으려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초지일관 예수는 우리의 생명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를 말할 때도 그를 믿어 <생명>을 얻게하려고 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으로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임을,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기적으로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생명이심을,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으로 자신이 영원한 생명의 부활이심을 나타내려고 하였습니다. 다시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요 <생명>이심을 나타내는 것들입니다.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도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이라고 하면, 이 혈육의 목숨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목숨이 있는 동안만 생명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두가지 종류의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모의 혈육(血肉)으로 나는 생명(Bios)이요, 다른 하나는 성령(聖靈)으로 나는 생명(Jo-e)입니다.
비오스의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성령으로 나는 조에의 생명은 영원합니다.
이것을 혼돈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고 하였는데, 그후에 아담과 하와는 그대로 목숨을 유지하였습니다. 또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지만 나사로는 다시 죽었습니다. 이때 아담과 하와의 죽음이란 영적 생명을 의미하였고, 나사로를 살리신 것도 육체적 생명이 아니라 영적 생명의 부활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비오스로서의 생명은 한계가 있습니다. 즉 생물학적 생명은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에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란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혈육의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1서5:11-12)고 하였습니다.
3. 이 생명이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1: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생명>이신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을 깊이 유념해야 합니다.
이 말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항상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 함께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 계셔서 우리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동참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삶의 한 가운데 <영원한 생명>으로 함께 거하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요한은 당시 헬라 사람이 이해하고 있는 <로고스>란 말로 이 생명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이 말씀(로고스)이 있었다고... 태초란 헬라어로 알케라는 말인데, 근본, 또는 근원, 본질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우주의 근본이 바로 로고스(말씀)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이 곧 육신을 입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함께 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곧 모든 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여기서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이 증거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신앙이 거의 물질만능주의로 흘러가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믿음의 내용도 그렇게 변해가는 것을 봅니다.
또 이렇게 변질된 신앙내용을 전파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믿으라! 믿는대로 된다!" 그렇게만 가르치는데, 그런 믿음은 자기본위의 요구일 뿐입니다.
우리가 피조물이기에 그런 요구를 하는 자체가 나쁠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 신앙의 내용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죄로부터의 해방이요, 사망으로부터의 영생을 얻기 위함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참 신앙의 사람들에게는 결코 절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절망이란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의미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절망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의 삶 속에 함께 하시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함을 믿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것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라고 찬송을 부르며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삶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제자들이 풍랑 중에 모두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물에 의지하여 잠들어 있었습니다.
점점 바람은 더 거세어 갔고,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배는 전복직전에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주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마8:25-26)
제자들은 예수님이 한 배에 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형편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내 삶의 현장에 주님이 함께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것 같아서 야단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통찰하시고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왜 죽겠다고 하는지....
그렇다면, 주님을 깨워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깨우지도 않으면서 죽겠다고 하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와 울부짖는 기도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 삶에서 만난 파도를 잠재우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우리 가정에 바람을 잠재울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니 잔잔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고통 중에 있는 것을 원치 아니합니다.
스바냐 3:17절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를 구원시키는 전능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단지 관계개선을 하면 그가 우리를 인하여 기뻐하십니다.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우리를 그저 보고만 있어도 좋아서 잠잠히 사랑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관계가 성립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을 깨달았으면 그것이 제일 올바른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을 가지고 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런 신앙을 가지고 살 때 나의 모든 것을 드리며 살게 됩니다.
이런 믿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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