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세계적인 명 설교가인 헷셀포드 목사님의 설교집에 보면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 중의 상당수가 중공에서 선교를 하다 잡혀 어떤 강제 수용소에서 여러 달 동안 강제 노동을 하였습니다. 미국에 있는 친구들과 성도들이 그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오랜 기간이 지난 후 하나님의 은혜로 마침내 해방되어 그립스홀름호라는 배를 타고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던 친구들이 부두에서 그들을 반갑게 만났습니다. 그 때 선교사들은 '여러분이 우리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고국에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분이 다시 기도로써 우리를 중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한 친구들이 '왜 그런 부탁을 합니까?'라고 선교사들에게 묻자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자리에 있을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선교의 열정을 가진 선교사들이 이렇게 생명을 걸고 선교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선교사인 바울도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여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면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 놓겠다는 분명한 결의를 고백하였습니다.
중국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큰 공로를 세운 허드슨 테일러가 당시에 매우 위험한 곳으로 알려져 있던 중국의 어느 지방으로 떠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도중에 살해될 위험이 있으니 현 위치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충고하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주저하지 않고 즉시 대답하기를. '우리는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아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선교사들을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교에 함께 참여하는 교회와 성도들은 더욱 선교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가지고 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의 당시 상황이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보면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분명 성령이 시키시는 일을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2000년 전에 안디옥 교회에 시키셨던 일을 오늘에는 우리에게 시키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토록 원하셔서 우리로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일을 깨닫고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중심하여 성령이 시키시는 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에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초기 교회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함께 힘을 모아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말씀 중에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worshiping and fasting)"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예배하기를 힘쓰며 바른 신앙으로 살려는 헌신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열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바른 신앙으로 살려는 힘씀이 있는 역동적인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교회들, 이런 성도들을 들어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를 섬긴다는 표현을 다른 번역에서는 예배하기를 힘썼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힘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기에 힘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주일을 거룩하게 잘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깨닫는 대로 순종하며 늘 기도하기를 힘쓰는 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렇게 예배하며 주님을 섬기는 일에 힘썼습니다.
금식했다는 표현도 따라 나와 그들의 신앙의 열정이 뜨거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기도하기를 힘씁니다. 그러다가 더 깊이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기도하며 금식하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가 금식했다는 말은 그들의 신앙과 열정, 그리고 사모함이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뜨겁게 신앙하며 기도하며 헌신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인 선교를 위하여 적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계속해서 보면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사람들을 선택하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그들에게 맡기기로 정해놓은 일이 있다"라고 하여 성령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 맡겨 그들로 하여금 감당하기를 원하시는 일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준비된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기쁨으로 헌신할 교회와 성도들을 불러 성령께서 시키시는 일이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분명 하시고자 하는 일을 위하여 사람을 택하여 그의 일에 헌신하게 부르시고 감당케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원하시는 일, 특히 사람들을 택하여 시키기를 원하시는 일, 성령이 하시기를 원하시는 아주 특별한 일, 그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기를 원하는 교회와 성도는 그러므로 선교를 결코 등한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저서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라는 책에서 '여기에서 교회는 선교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리스도의 선교가 그 자체의 교회를 창조한다는 것을 우리는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로부터 선교가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선교로부터 교회가 이해되어야 한다'라고 하여 선교 없이는 교회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존재 이유가 바로 선교요 선교를 위하여 교회가 출발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그 후에 목적을 세우다 보니 선교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로 선교를 위하여 교회가 세워졌고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를 하지 않고 선교를 외면하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최우선의 과제에 선교를 두어야 합니다.
[현대 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에서 죤 스타트도 말하기를 '기독교 선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를 모델로 삼아야 한다면 그가 행했던 것같이 우리도 다른 민족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할 것이다. 복음전파는 그들이 현재 있는 장소에서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그들의 사고체계와 그들의 비극적이고 버려진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여 구체적으로 선교현장으로 뛰어 들어 선교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 교회의 마땅한 사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도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를 떠나 낮고 천한 인가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시사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제물이 되게 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선교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 찾아가서 생명을 헌신해서라도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선교에 힘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아직 우리나라가 복음화 되려면 요원한데 꼭 외국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느냐라는 반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복음화된 후에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국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과 아울러 다른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결코 뒤로 미루어서는 안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이 시키시는 일을 위하여 오늘도 외국 땅에 선교사를 보내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영어 번역 리빙 바이블(The Living Bible)에서는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내가 그들을 위하여 준비한 특별한 사명, a special job을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택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교의 사명은 분명 교회의 사명이지만 그것을 감당하는 사람은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감당할 수 있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누구나 다 가는 것은 아닙니다. 갈 수 있는 사람은 가고 갈 수 없는 사람은 보내고 지원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안디옥 교회로 하여금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시게 하였습니다. 바울이 구별되는 일이 세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출생시 하나님께서 구별하셨습니다. 갈라디아 1장 15절에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라고 하여 하나님이 이미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부르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두 번째의 부르심은 그가 회심할 때 복음을 위하여 구별되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장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 보면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선교를 위하여 바울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특별한 선택에 의하여 선정된 사람들입니다.
2001년 1월 현재 우리 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는 80개국에 396가정 714명으로 훌륭하게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우리가 파송한 이규대, 김동렬, 박은호 선교사 가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혐력 선교사로 선교에 힘쓰는 서성민 선교사를 비롯하여 몽골에 오효강 선교사, 맥시코의 장덕인 선교사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지역은 나라 이름을 밝힐 수 없어 애매하게 불려저야 하는 곳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중동지역 선교사라 부르는 것이나 동북아 선교사라 불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가 선교사를 보내는 것이 밝혀지면 그런 것만을 전담하여 밝히는 곳이 있어 선교의 길이 막히거나 아니면 선교사들에게 큰 불이익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라 이름을 밝히지 못합니다.
우리가 파송한 로이스 선교사나 오장수 선교사는 본명을 쓰지 않고 가명을 사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그래서 숨기면서 선교를 해야 하는 지역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크게 노하는 나라가 있고 선교사의 이름이 밝혀지면 당장 추방을 하거나 더한 박해를 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못하고 파송한 나라가 총회적으로도 16개 나라나 되고 선교사의 수도 100여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령에 의하여 특별하게 선정된 선교사들이 생명을 걸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고 하여 교회는 선교를 위하여 함께 헌신하였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번역에 보면 '더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교라는 특별한 사역, 여기서 특별하다는 것은 아무나 해서는 안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고 힘써야 하지만 선교 현장에 나가 헌신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택하여 세우신다는 뜻에서 특별한 사역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내는 교회는 선교를 위하여 함께 헌신하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선교는 성령이 시키시는 일이기에 성령이 함께 하시도록 기도로 도와야 할 것입니다. 기도 없는 선교,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선교는 이미 실패를 전제한 잘못된 선교가 됩니다. 기도의 정의 가운데 하나는 선한 싸움의 무기라는 정의가 있습니다. 기도하면 영적인 선한 싸움에 언제나 승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선교지는 바로 심한 영적 싸움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곳보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가다가 아말렉 족속이 사는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아말렉 왕에게 그곳을 그냥 지나가려는 것이니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평화적인 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말렉 왕은 군사를 이끌고 이스라엘의 행진을 막았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아말렉과 싸우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놀라운 전과였습니다. 그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이긴 승리의 원동력이 바로 기도에 있었습니다. 모세가 높은 산에 올라가 아말렉과 싸우는 이스라엘 군대를 위하여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함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는 영적 싸움에 승리를 얻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무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선교를 위하여 기도로 지원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또한 선교는 물질적인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선교지로 택한 곳들이 우리보다는 생활형편도 어렵고 또한 민도가 낮아 그들의 힘으로 복음을 받아 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힘껏 일할 수 있도록 선교를 지원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직은 하나님도 모르고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선은 베풀어 사랑을 깨닫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기 위하여 많은 것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재정적인 지원이 절대 필요합니다. 지금도 선교 현장에서는 우리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초기 한국 교회는 좋은 교회가 좋은 선교사들을 많이 파송하였습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건전한 성장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졌던 미국 북 장로교회, 미국 남 장로교회 [지금은 이 둘이 연합하여 미국장로교회PC(USA)가 됨], 미국 연합감리교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 캐나다 장로교회, 성공회, 구세군 등은 다 건전하고 선교에 열정을 가진 교회들이었습니다. 1884년에 알렌(Horace Allen)이 의사 선교사로 한국 땅에 발을 디딘 이후, 1885년 부활절에 미국 장로교회의 언더우드(Horace Underwood)와 미국 감리교회의 아펜젤러(Henry Apenzeller), 그리고 1885년 11월에는 성공회의 울프(Archdeacon Wolfe), 1889년 10월에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의 헨리 데이비스(Henry Davis), 1890년 12월에는 침례교의 독립선교사 펜위크(Malcolm Fenwick), 1891년 10월에는 미국 남 장로교회의 레이놀즈(William Reynolds)를 비롯한 네 명의 선교사들이, 1893년 10월에는 캐나다 장로교회의 메켄지(William Mckenzie), 그 후 10월에는 호가드(Robert Hoggard) 정령을 비롯한 여러 명의 구세군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에 열을 솟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선교 지역을 구분하여 효과적인 선교정책을 수립함과 동시에 병원을 통한 의료전도, 학교설립을 통한 교육전도 등 선교사업에 주력하여 한국 사회의 계몽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들의 이런 헌신과 보낸 국가들의 재정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 교회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선교의 많은 빚을 진 나라들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힘써 선교하는 일에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시키시는 이 선교의 일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는 귀한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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