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막 4:14-20)
사과는 천년을 두고 사과를 엽니다. 배는 만년을 두고 배를 엽니다. 그래서 사과나무이고 배나무입니다. 이 자연의 법칙을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 적용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자신에게 가장 많이 속습니다. '내가 좋은 생각하니까 좋은 사람이다. 내가 좋은 소망을 가졌으니까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속으며 삽니다. 주께서는 지금 맺고 있는 열매가 무엇이냐고 물으시며 그것이 바로 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그 과정이 어땠는지가 아닌, 삶의 궁극의 결론이 무엇인지 묻고 계십니다. 열매로 우리를 아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밭의 종류에 다섯 가지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길가와 같은 밭, 돌밭, 가시 밭,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묵은 밭, 마지막으로 옥토입니다. 옥토에 뿌려진 씨는 반드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결실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주께서는 생애를 통해 간신히 그 열매를 맺었냐고 묻는 대신,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풍성한 생애를 살았냐고 물으십니다. 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린 유목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병든 나무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가 있다면 죽은 나무입니다. 죽은 나무에게는 봄이 없습니다. 한 열흘 후만 되어도 대모산의 온 나무가 이파리를 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도 이파리가 나오지 못하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바로 죽은 나무들입니다.
그러므로 열매맺기 위해서는 첫째, 자신이 정말 거듭났는가, 주님과 생명 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먼저 확인하셔야 됩니다. 생명이신 그분과 내가 연결되어 새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을 성경은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먼저, 생명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하십시오. 교회 다닌다고 생명의 관계가 성립될 수도 있지만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안다고 주님과 생명의 관계에 있을 수 있지만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정말 거듭났는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두 번째로 그분과 나의 삶에 단절된 부분이 없는가를 살피십시오. 나뭇가지가 병들면 열매맺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열매가 맺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악이라는 단열재가 그 분과 나를 차단시키면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는 불변일지라도 그 교제는 깨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 예수 믿을 때 우리들은 구원받았습니다. 이 구원의 축복은 영원히 빼앗기지 않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28-29) 하나님께서 영생을 준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내 자녀라고 하셨습니다. 자녀의 관계는 불변이며, 영생은 빼앗기지 않습니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이 합의 하에 호적을 파도 아버지는 아버지고 아들은 아들입니다. 이 사실은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성도들도 그 관계는 깨지지 않았지만 교제는 깨질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부부도 그 관계는 깨지지 않았지만 교제가 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교제의 깨짐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남의 죄를 지셨는데도 불구하고 외면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외치셨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소리를 하나님은 외면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자녀 삼으신 것은 박탈시키지 않습니다. 그 관계는 불변입니다. 그러나 교제가 깨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의 생명선에서 오는 능력과 은혜가, 긍휼과 자비가 단절됩니다. 내 마음속에 역사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면 그분은 아버지십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잘못이 터져 나오기만 하면 뛰어나와서 안아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재판관은 우리가 자백할 때, 그 형량을 정확하게 매겨 언도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과거보다 더 큰사랑으로 다시 우리를 안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 마음 속에 내가 잘못하고 있는 일은 없는가?'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인 성경을 읽어가면서 하나님 앞에 잘못된 죄들을 자백할 때에 주께서 은혜 베푸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열매맺기 위해서 처음 살펴보아야 할 것은 ' 내가 정말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거듭난 생애인가?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가졌는가?'이고 두 번째는 온전한 교제를 누리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 충만함을 누려야 합니다. 주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마라'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아니하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 속에 충만히 임하실 때에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함은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고 누구에게든지 거하십니다. 고린도전서를 보겠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내 마음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가르쳐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예수님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가 성령의 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거하심을 믿으십니까? 그분이 내 안에 계시면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집에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아이들 마음대로 떠들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성령님이 우리 인생에 손님처럼 계신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감정아. 그렇게 까불지 말아라. 귀한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네 옆에 계시지 않느냐. 지성아. 넌 지금 모르는 것이 많아. 모든 것을 아시는 성령님이 네 곁에 계신다. 의지야 고집부리지 말아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과 교제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입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아는 구절일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고전 13:13)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는 사랑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에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죄를 용서받았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았으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 은혜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이 풍성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무엇입니까? '교통(communication)'. 교제라는 말입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실 뿐 아니라 우리와 교제하십니다. 그래서 기도가 막힐 때에는 '성령님, 제게 기도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께 기도하면서 또한 성령님과 함께 기도합니다. 우리가 간구 해야 할 것을 간구 하지 않을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기도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그분께 물어야 하고 친밀한 교제 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교제로만 끝나면 안됩니다. 순종해야 하고 그분의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 땅에 성령 충만과 가장 비슷한 모습이 있다면 술 취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말씀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술 취한 것과 성령의 충만을 대비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술 취한 것과 성령 충만한 것은 그렇게 비슷합니다. 술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의 중추 신경계를 지배해버립니다. 술은 의지와 상관없이 나로 말하게 합니다. 그리고 술이 깨면 얼마나 후회합니까? 술이 주는 용기로 객기를 부려보지만 엄청난 손해가 날 뿐입니다. 술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처럼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충만히 예루살렘교회에 임하셔서 저희들이 나올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저들을 보면서 말하길 저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행 2:13) 저들이 취한 것은 사실이나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술이라고 외쳐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령님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 2:13) 우리 안에서 마음의 소원을 두시고 생애를 자극하시며 권고하시는 그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성령님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속에 계신 하나님. 그러므로 그 분이 우리에게 기도할 소욕을 주시면 모든 일을 제쳐놓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서 내 주머니를 털으라고 하면 그 말씀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조사를 보면 이웃돕기 프로그램의 ARS에 전화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니랍니다.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 전화합니다. 부자들은 언제 한 번 크게 돕는다는 마음에 하지 못합니다. 텔레비전 보다가 이웃돕기 ARS가 나오면 누르십시오. 어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갈급해지면 텔레비전을 끄고, 지금까지 여러분이 보고 있던 책을 옆으로 밀어 놓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말씀 앞에 서십시오. 놀라운 은혜로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말씀하실 때에 거절하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면 안됩니다. 어떤 때 형제와의 가슴아픈 일이 생각나면, 조용히 무릎꿇고 그분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할 수 있으면 전화를 걸어서 그분에게 사과하십시오. 성령님께서는 당신이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기를 원하기도 하십니다.
성령께서 충만히 우리 속에 임하시면 우리 생애가 놀랍게 달라집니다.
성령 충만하면 우리 마음에 열매를 맺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3)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기쁨이 평화가 인내가 다른 사람을 향한 자비와 착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 아홉 가지의 열매가 반드시 맺어집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아홉 가지의 열매가 구면체의 보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아홉 가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금지할 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마음속에 맺기 때문에 누구도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이 기쁨을 감옥 안의 사도 바울에게 주셨습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바울은 몹시 억울하게 갇혔음에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큰 모욕을 당해도 성령께서 그 마음속에 함께 하시면 이 아홉 가지의 열매를 통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평화가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그 평화가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일도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참아집니다. 심령에 주시는 아홉가지의 빛나는 보석이 우리 마음속에 형성되어 갑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성품에 열매를 맺습니다. 베드로 후서 1장입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그리고,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여덟가지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5-7)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향해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어떤 장로님이 하도 화를 많이 내길래 '장로님, 그렇게 화내시는 것 좋지 않잖아요? 성령님이 싫어하십니다.'했더니 '성령도 내 성질 못 고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이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시며 전능자십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 1:8)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성품에 나타난 목표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심령에도 열매가 있고 성품에도 열매가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삶의 모든 관계에 열매를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18-20)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으로 노래하며 찬송하고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삶,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졌습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을 향해서 찬양과 감사함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성령 충만할 때에 우리 입에서 찬양이 끝나질 않습니다. 그 분이 얼마나 고마운지, 손양원 목사님은 심지어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인간관계가 바뀌어 집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우리는 높아지고 군림하길 원합니다. 아담처럼 높아지고자 하는 것, 그것이 부패한 인간의 특성입니다. 남을 섬기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성령 충만할 적에 피차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그 복종의 제 1의 현장이 부부관계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엡 5:22-24)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복종하라고 했습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이 말씀을 읽으면 기독교는 남자의 종교처럼 읽혀집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아내만 복종하라고 하지 않고 피차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남편에게는 어떤 복종을 말씀하셨는지 보겠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5-27) 남편들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시면서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누가 어렵겠습니까? 아내입니까, 남편입니까? 피차 복종해야 합니다. 나는 안 된다고 해도 성령 충만할 때 가능해 집니다.
그 다음 복종의 제 2의 현장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문제가 참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녀의 생애가 어떠할 것인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는 세상입니다. 이 때 무엇으로 자녀들과 부모 사이가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성령 충만한 부모와 자식은 이런 관계로 바뀝니다. 자녀들의 경우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성령 충만한 자식들은 부모를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공경합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 충만한 부모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부모의 이상과 야심에 따라 양육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부모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식을 가르치고 인도합니다.
셋째로 직장에서의 관계입니다. 직장 생활에서의 성령 충만은 놀라운 위력을 발휘합니다. 남을 섬기고 있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엡 6:5-8) 성령 충만할 때 그 모든 섬김을 주께 하듯 하라는 말입니다. 단 마음으로 그 사람이 날 어떻게 대해 주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상전이 나쁘기 때문에 마음대로 한 것을 봐주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성실히 주께 하듯 하면 축복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주십니다.
실제로 함께 일해보면 쓸만한 사람이 드뭅니다. 이것은 회사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해본 사람들의 공통적인 의견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인력난의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실제로 '사람'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좋은 사람이라면 윗사람이 놓치려 하질 않습니다. 한 기업체 부사장으로 계신 장로님의 일입니다. 구조조정으로 인해 장로님이 일대 일로 성경공부를 가르쳤던 사람에게 퇴사를 통보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자신이 양육했던 사람에게 퇴사를 통보해야 하니 참 힘들었을 것입니다. 금식기도를 한 후 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충격을 받지 않고 오히려 장로님께 그 말씀하시기가 얼마나 힘드셨냐고 했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해고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열심히 일했고 미국에서 온 사장이 그 모습에 감탄하며 그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하더니 새로운 회사의 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상전에게 말씀하십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줄 너희가 앎이니라"(엡 6:9) 진짜 상전이신 하나님은 부하직원의 상전이요, 상전의 상전이십니다. 모두를 평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고로 성령 충만은 직장생활에서 상전과 부하직원을 가장 좋은 관계로 만듭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 충만은 우리를 우는 사자처럼 삼킬 사탄을 향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게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2-13)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사탄이 공격할 모든 부분을 공격당하지 않도록 준비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충만한 사람은 그리스도 없이 멸망당하는 세상을 향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6:18-20) 그는 지금 쇠사슬에 매인 죄수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유를 위해서, 편안함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더욱 담대히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선포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리스도 없는 심령을 참으로 긍휼히 여기면서 저들을 위해서 복음을 증거 하는 능력을 얻습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의 실제입니다. 이런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 충만은 기분 한 번 좋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열광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심령 속에는 세상이 금지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과 기쁨, 화평과 오래참음,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 아름다운 아홉면의 보석이 늘 반짝거리고 있고, 그 성품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말미암은 여덟 단계의 계단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향해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아름다운 관계를 맺게 하시는 놀라운 능력과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주시는 권세가 함께 합니다. 이러한 열매가 사랑하는 성도들의 삶 속에 충만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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