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막 4:1-9)
평양은 50년만의 추위와 함께 큰 눈이 내렸습니다. 영하28도. 여기서는 영하18도 때문에 춥다고 난리였는데 거기는 영하28도였습니다. 그리고 적설량은 많이 온 곳은 1m30㎝정도 왔고, 일반적으로 50-60㎝ 내렸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어디든지 하얀 눈으로 덮인 북한 전역을 보며 북한에 내렸습니다. 도무지 난방이 되지 않는 봉수교회의 예배당에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제게는 추위가 이렇게 무섭다는 걸 처음 느끼게 된 예배였습니다. 주체사상 탑에 갔다가 대동문을 보기 위해 꽁꽁 언 대동강 위를 걸어서 대동문까지 갔습니다. 이래봬도 제가 대동강 물을 건넌 사람입니다. 비록 얼음이 받쳐 주었지만요. 아이들과 만나 스케이트도 타고 팽이를 돌리면서도 적대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부감과 이질감으로 인해서 서먹한 만남이었습니다. 네 살 다섯 살 된 아이들의 성장이 두 살 정도의 아이들과 비슷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이가 다섯 살이 되니까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긴 했지만 그 작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통일을 주셔서 원없이 그들을 만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그 유아원에 전에 있던 아이들 이름이 첫째는 김총, 둘째는 김포, 그리고 세째는 김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거기에 세쌍둥이 셋이 있는데 모두 아홉명이란 말이에요. 세 쌍둥이가 셋이니까 세명이 아니라 아홉 명입니다. 세쌍둥이를 낳았다고 대단히 자랑합디다. 인구가 늘어가기를 원하는 북한으로서는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그 쌍둥이들 중 한 쌍둥이의 이름이 강국이, 성국이, 대국이에요. 그리고 또 다른 쌍둥이는는 강성이 대성이 국성이 그래서 강성대국으로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구호 같은 인생을 살까봐 참 겁이 났습니다. 이번 방북,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곱시에 식사했습니다. 일하는 네 사람이 저희들을 위해서 아침부터 식사준비를 해 주었는데 여러 재미있는 얘기들을 나누었습니다. 그 중에 서른 살 된 노처녀 아가씨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올해엔 눈이 많이- 그땐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와서 풍년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 부모님 말씀이, 1950년에 꼭 이렇게 추웠고 큰 눈이 내렸는데 그 땐 전쟁 중이었지만 그 큰 눈이 와서 3년 동안 배고픔을 모른 채 전쟁 난리통을 겪었답니다. 꼭 풍년이 와야되는데... ." 라고 염원하는 한 처녀의 소망을 보면서 북에만 풍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수확기에도 풍년이 필요한데 내 인생의 풍년을 내가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주께서 축복하셔서 어떤 인생은 풍성한 생애를 주님 앞에 드리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라리 나지 않는 것이 좋을 뻔했도다 하는 인생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인생의 풍년을 준비할 것을 당부하시면서 수많은 비유를 드셨는데 첫 번째 비유가 바로 이 씨뿌리기의 비유입니다. 이 씨뿌리기의 비유는 이렇습니다.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 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막 4:3-8)
사람의 기질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인생을 사는 마음에 네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마음은 길가와 같은 마음입니다. 단단해서 마음속에 말씀이 들어갈 수 없는 마음입니다. 그러자 새들이 와서 그 흩날리는 씨들을 집어 삼켜 버립니다. 그런가 하면 씨를 뿌렸습니다. 흙 속에 묻혀 싹이 났는데 태양이 작열하는 한낮이 되자 자라나던 싹은 더위에 습기가 없어 말라비틀어지고 맙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을 때 잘 자라다가 꽃이 피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결국은 영양부족으로 그 가시에 막혀서 쓰러집니다. 그런가 하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결실 하는 인생이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네 가지 마음밭은 확정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습니다. 단단해진 길가의 땅은 트랙터와 불도저로 밀어내고, 큰 쟁기로 갈아서 흙을 엎어놓으면 옥토로 바뀝니다. 그리고 돌밭. 우리 어렸을 적의 일입니다. 제주도에서만 감귤이 났습니다. 감귤 하나가 대학생 하나를 키운다고 해서 대학나무라고도 했습니다. 제주도에 몇 그루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제주도에 있는 그 수많은 돌들을 옆으로 치워내고 옥토로 가꿨습니다. 그 위에 귤나무를 심어서 귤들이 자랐고 밭에서 뽑아낸 그 많은 돌들로 담을 만들었는데 무섭게 비바람이 치는 날에 방풍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들어 놓고도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은 귤들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가시 잡풀 속의 땅들은 갈아엎어 잘 준비만 하면 오히려 가시 넝쿨들이 영양소가 되어서 씨가 더 잘 자라는 축복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길가에 떨어진 복음이 마음속에서 다시 싹을 낼 수 있는가 생각해 보며 은혜를 누리고자 합니다. 마가복음 4장 15절입니다.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막 4:15) 말씀이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사단이 즉시 와서 그 말씀을 뽑아내 버린다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마태복음은,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마 13:19)라고 말했습니다. 말씀이 떨어졌는데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 말씀을 내 영혼 속에 어떻게 접근하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말씀을 받을 때 그 때 붙잡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단이 와서 즉시 말씀을 빼앗아 버립니다. 이렇게 말씀을 빼앗을 때 어떤 결과가 옵니까? 누가복음 8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눅 8:12) 그냥 단순히 말씀 빼앗아 버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말씀이 들어가지 않을 때에는 그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구원을 경험치 못하기 때문에 사탄이 그것을 알고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우리 인생에서 말씀을 빼앗아 버린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 인들은 말씀을 붙잡을 때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도록 하기 위해서 수고해야합니다.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이 떨어졌을 때 강퍅했던 사람들과 같아지지 않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3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히 3:15) 너희 마음, 하나님께서 멸망케 하시기 직전의 마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강퍅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노아의 시대입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아직 보지 못한 일의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함으로 그 집을 구원하였습니다. 믿음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가정이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소중하게 붙잡아 방주를 예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 경고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실은 300년 전 에녹 때부터 경건치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계속 경고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 보면 그들이 했던 것은 집을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눅 17:27) 노아가 내일을 위해 거대한 방주를 짓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아니, 이 영감쟁이가 나이가 들더니 그래, 내륙에다가 배를 지어?' 노아는 배를 지으면서 배를 짓는 것은 큰 홍수가 나 온 세상을 멸망시킬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을 뿐 아니라, 방주를 짓는 그 자체가 경고였는데도 누구도 듣질 않았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땅위에 세우는 건물도 균형이 깨어지면 옆으로 무너집니다. 그 중의 하나가 와우아파트입니다. 중국에서는 높은 빌딩의 기초가 잘못되고 균형이 맞질 않아서 한쪽으로 기울어져 사람들이 몇 개월간 대피하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균형이 안 잡힌 큰 구조물을 바다 위에 띄우면 그대로 뒤집어집니다. 창조 과학회와 한동대학교에서 노아의 방주를 계산하고 그 크기를 측정했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를 미니어처로 제작했습니다. 한 선박회사에서 미니어처로 만든 배를 검사실에 두고 며칠동안 강풍도 불어보고 물결도 만들어 봤는데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탱크였답니다.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세세하게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고 기껏 사고 파는 것 같은 일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말씀 듣는 중에도 사고 파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조그마한 버튼을 누르면 주식시세가 나오는 기계가 있어요. 예배드리다가도 한번 탁 열어봅니다. 한번 열어볼 때마다 주가가 떨어지라고 기도를 할 수도 없고... 주님 앞에 온전히 예배드리고 하나님 말씀 들으면서까지 시세표를 보고 있으면 그 말씀이 들어갈 수가 없지요. 그리고 제가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말 중에 믿지 못하는 말이 있습니다. 뭘 못 믿는가? 사람들이 제게 결혼중매를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래서 '조건이 뭡니까?' 하고 물으면 믿음만 좋으면 한대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믿음만 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다른데 가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이런 마음은 길가의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은 멸망할 적에 특징적으로 드러난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천사까지 보내어 말씀하셨지만 저들은 농담으로 알았습니다. 그러자 무서운 유황불이 저들머리에 쏟아졌습니다. 모세 앞에 선 바로를 성경에서는 마음이 강퍅해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경고하시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지만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을 열 차례 경고가 끝난 후 풀어 줘놓고 그 사람들을 다시 붙잡기 위해서 군대를 몰고 갔다가 홍해에 수장된 사건을 우리는 모두 압니다. 신앙의 위기가 언제인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을 때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던 믿음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예는 니느웨성 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의 죄의 과념함을 보시고 심판하겠다 작정하시고 요나를 통해 니느웨성에 선포하셨습니다.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니느웨 백성들을 깨우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타러 가는데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첫째, '니느웨 사람들은 악한데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나를 죽이지 않을까?' 둘째, '그 사람들은 몹시 악하니까 망해도 싸.' 그렇게 고민을 하며 도착해보니 니느웨로 가는 배는 없고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어서 '에라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바다에는 안 계시겠지.'하면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요나는 배 안에서 무서운 광풍에 시달리다가 바다에 떨어지고, 고기 뱃속에서 삽니다. 그리고 다시 육지로 나왔습니다. 요나는 그 기적을 체험한 다음 니느웨로 가서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너희의 머리 위에 부어졌다!' 이 소리를 들은 니느웨 사람들은 왕부터 하인까지, 심지어 가축까지 금식하며 죄를 무릅쓰고 옷을 찢으면서 자복하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땅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랬더니 화가 난 사람이 요나입니다. 자기가 선포했는데 망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요나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욘 4:1-2) '하나님, 내 체면 안 세워줬으니까 나 죽여주시오.'라고 했습니다. 요나를 볼 때면 조그마한 체면 구겨졌다고 항의하는 저를 보게됩니다. 얼마나 나 같은지요. 하나님말씀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넬료의 경우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2절을 보면 베드로를 데려오기 위해 욥바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고넬료는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행 10:33)라고 합니다. 베드로를 청해놓고 주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말씀을 듣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당신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 제 앞에 여러분이 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성가대 앞에서 여러분이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씨뿌리는 기회를 통해 나를 향한 주님 말씀을 온전히 붙잡고 깨닫기 위해서 있는 심령들도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런 마음을 가졌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을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살전 2:13)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이 말씀이 믿는 내 속에서 역사 한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통해 생명을 우리에게 다시 주셨습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에 강퍅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 때 구원이 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만 말씀 듣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내 신앙의 성장을 계속하기 위해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으면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데 열심이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신다면 수요 기도회를 소중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찬양예배에 열심히 나와야 합니다. 말씀이 내게 떨어진 채 신앙이 자란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혼자 공부한다고요? 가르쳐줘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혼자 공부합니까? 말씀은 계속 임해야 합니다. 인생을 통해 부끄러운 수확을 얻으려고 작정하지 않았다면 목장모임에 열심히 참석하십시오. 주께서는 주의 사랑의 음성을, 영혼의 양식을, 말씀 속에 날마다 풍성하게 공급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삼십 배, 육십 배 결실 하는 풍년의 생애로 살게 하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현재 소아시아지방의 터키는 기독교의 요람입니다. 거기에 안디옥 교회가 있고 에베소 교회가 있고 골로새 교회가 있고 안타키아 교회가 있고, 밤빌리아와 드로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속에서 익숙한 도시들이 바로 터키 땅에 있습니다. 그런데 터키에는 선교사가 700명인데, 왜 교회 나오는 사람이 700명밖에 안 될까요? 그 700명의 그리스도인 가운데에도 터키 본토인 보다 터키 안에 살고있는 다른 민족들이 태반입니다. 이것은 터키가 동방정교회의 의식은 가졌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성경을 손에 들려주었는데도 저들은 성경을 놓고 살았습니다. 결국 미신화 되어가다가 외부의 강경한 세력이 들어오자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비해 중국교회는 처음부터 허드슨 테일러나 워치만 니, 그리고 좐 성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Little Flock Movement 즉, 작은 무리 모임을 만들었고 교회는 성경공부 중심으로 세워졌습니다. 1950년, 모든 선교사를 추방하고 문화 대혁명 때는 목사와 장로들을 전부 감옥에 가뒀음에도 불구하고 문화대혁명 기간동안에 85만이 1000만으로 바뀌더니 지금은 1억2000만 명이 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으로 자랐습니다. 저는 그 중의 한 지하교회 그룹과 늘 만납니다. 그 그룹 안에 속한 교인수가 3000만 명입니다. 그분들에게 신학은 없지만 그분들은 말씀을 붙잡고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해보면, 두시간을 찬송합니다. 세시간 설교합니다. 제가 처음에 잘 모르고 설교를 30분만에 끝냈더니 한 개만 더해 달라고 해서 두 번 설교했는데 그래보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꼭 어린애가 할아버지한테 얘기 한 개만, 한 개만 하듯이 졸랐습니다. 그들은 정말 말씀을 사랑합니다. 중국사람들의 만만디는 무섭습니다. 기도하라고 하면 하루종일 기도해요. 찬송도 세시간 네시간하고, 농한기 때 보면 성경 읽는 것으로 하루를 지냅니다. 지금도 말씀이 얼마나 흥왕한지요. 한국교회의 쇠락과 중국교회의 부흥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말씀을 붙잡고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은 구원을 위해서 말씀을 붙잡아야 할 뿐 아니라 신앙의 성장과 유지를 위해서 말씀을 계속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또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 가르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성경에서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딤전 5 : 17) 라고 했습니다. 장로와 목사가 모두 장로입니다. 장로님 존경을 더 하란 말은 더 시간을 내서 기도하란 말과 같습니다. 특별히 어린 목사가 나와서 설교하면 더 기도하십시오. 기도하고 그 설교 들어보세요. 제가 없으면 교인이 조금 덜 모인다고 합니다. 그건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 중요한 증거중의 하나입니다. 저를 위해서만 기도하지 마시고 우리 목사님들, 특별히 어린 목사를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주세요. 기도하면 은혜가 생깁니다. 설교자를 여러분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설교는 노력하고 애쓰고 수고해서 설교자 스스로가 키워나가는 부분도 있겠지만 청중이 그 설교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스펄전에게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설교를 잘 합니까?" 라고 물으니 그가 한 지하실 방으로 데리고 가 눈물자국을 보이면서 "내가 기도하는 시간에 한시도 빠지지 않고 눈물로 기도하는 수백 명의 성도가 있기 때문에 내가 설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주일 새벽기도가 끝난 다음에 설교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그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제가 참 감사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해주셔야 합니다.
말씀의 풍요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 여러분의 영혼도 풍요해집니다. 심지 않고 어떻게 거둡니까? 그리고 설교할 때에 여러분 명상하지 마십시오. 눈감고 듣지 마시고 명상할 때나 눈감으십시오. 설교할 때 설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신경 쓰입니다. 안 들으면 안 듣는 게 느껴져요. "나보고 하는가 보다." 하시는 분들 들으라고 말하는 겁니다. 어떤 분은 제가 설교를 끝내고나니 "목사님, 오늘 설교 저 들으라고 하셨죠?." 그래서 제가 "성경 말씀 잘 못 해석했습니까?" 했더니 그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을 맞게 전했으면 당신 마음하고 성경이 틀리는데 성경을 바꿔야겠소? 당신 마음보를 바꿔야겠소?" 뭘 바꿔야합니까? 설교자에게 집중해주셔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목사님들이 목사설교 제일 집중 안해 줍니다. 다 설교하시는 분이라고. 전도사가 설교해도 먼저 집중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왜 목사님들을 말하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으로 다가서는데 내가 익숙해졌다해서 집중하지 않고 거절하면 길가의 마음으로 전락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깨닫지 않으면 즉시 사탄이 와서 그 마음을 빼앗아 구원 없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받지 못하게 만들고,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구원의 감격과 구원의 삶을 못 누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말씀 없이는 생명을 느낄 수 없습니다. 생명이 살지 못하고 생명의 약동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잘 듣는 비결은,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그 말씀에 즉시 순종하는 겁니다. 목소리 좋은 분들 성가대에 빨리 올라가세요. 가르치는 은사가 있으신 분들, 교회엔 여러분들의 섬김이 필요한 부서가 너무나 많습니다. 아만나 목장, 밀알 목장, 할 것 없이 여러분의 사랑과 수고가 필요한 곳이 많습니다. 일주일동안 성경도보지 않고 먼지 낀 성경을 한번 후 불고 탁 때리고 아무 생각 없이 교회에 나와 가지고는 하나님의 말씀이 접근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땀흘리며 헌신하며 찬미하며 듣는 말씀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결실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첫 번째 비유의 말씀입니다. 다음에는 어떻게 돌쩍밭 마음 같은 마음이 옥토로 바뀌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께서 주시는 말씀이 풍성히 심겨져서 그 인생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결실 하는 풍년의 생애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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